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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鏡虛 惺牛 禪師의 생애와 사상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5.28|조회수63 목록 댓글 0

鏡虛 惺牛 禪師의 생애와 사상

 

  李 興 雨 ( 조선일보 조사부장 ) 년 월 (39)  







  1961년 12월 말께 나는 충남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瑞山郡 高北面 長要里) 연암산(燕岩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 鏡虛의 유적)을 찾았다. 아침 열시쯤 덕산(德山·온천)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30분쯤 서쪽으로 가다가 대곡리(大谷里)라는 고개 마루에서 내려 눈을 뚫고 산길을 헤치고 올라가 다시 고개를 넘어 한참을 내려가 한낮쯤 천장암에 닿았다. 절 주변에는 솔밭이 우거졌고 아 및 가지에 눈이 쌓여 딱 딱 부러지는 소리가 들였다.
  천장암에서 2백~3백 미터쯤 서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삐죽하게 앞으로 나간 바위가 있었다. 산 이름의 유래가 된 「제비바위」(燕岩)였다.
  제비바위 위에 올라서면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 가구리(加口里) 일대의 야산과 논밭들이 두루 바라보인다. 그곳에서 고북면 소재지까지 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는데 북쪽으로 가면 해미(海美)이고 남쪽 길은 홍성(洪城)으로 통한다.
  내가 갔던 날은 바로 고북 장날이었다. 가다가 장 길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가끔 만났다. 야산 사이에 밭에는 눈 사이로 파란 보리 잎이 보였지만 일을 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천장암에서 내려가 고북 장터까지 가며 내가 만난 몇 사람인가의 낮 모를 사람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들 대개 영영 다시 만날 길이 없는 사람들 그들과 나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나에게 그때 만난 그 사람들을 모두 착한 사람들로만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와 같은 사람들로서 회상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눈앞의 집착이나 이해에 매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관계 그런 본래적인 인간관계에서 인간은 서로 부처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
  어느 때 백거이(白居易· 樂天)가 조과 도림(鳥窠 道林)에게 물었다.
『불교의 큰 뜻이 무엇이오(佛法大意如何)』
  도림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며 여러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그것은 세 살 난 아이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니오.』
『세 살 난 아이도 비록 말할 수 있지만 팔십 오니도 행하지 못하는 일이지요.』
  나쁜 일을 안 하고 착한 일을 받들어 하는 일만 철저히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눈앞의 이해관계만 벗어나서 본래적인 순수한 마음으로 자주 돌아갈 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상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1880년대 초, 6월 어느 날 경허(鏡虛)가 천장암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경허 자신의 오도가(悟道歌)를 생각하면서 연암산 아래 길을 걸으며 나는 그이 「오도송(悟道頌·悟道歌 끝에 붙인 七言絶句」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忽聞人語無鼻孔)
  활짝 온 우주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幀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제비바위) 산 아래 길에 (六月燕岩山下路)
  시골사람들이 무사히 태평가를 부른다(野人無事太平歌).」 


  그것이 경허가 31세 때에 석 달의 참구(參究)끝에 깨달은 상태를 읊은 것이다. 깨달은 그의 눈에는 연암산 아래에서 오고 가며 또한 밭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그냥 부처로 마냥 착한 사람들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마음의 상태로 보면 사람뿐이 아니라 연암산 근처의 야산도 그 어느 한구석을 흐르는 물소리도 눈이 쌓여 부러지는 소나무가지 소리도 문수의 눈이며 관음의 귀처럼(山色文殊眼 水聲觀音耳) 생각된다. 경허의 오도가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다시 「목동이나 나무꾼이 보현보살이고 장아무개 이아무개 모두 본래의 비로자나부처(呼牛喚馬是普賢三李四本毘盧名佛)」라고 읊고 있다.



  경허 성우(鏡虛 惺牛)선사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지동리(全州 子東里)라는 곳에서 여산(廬山) 송씨 송두옥(宋斗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였다. 아이는 낳은 지 사흘이 되도록 울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얼마 후에 죽었다. 가난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자라다가 9세 때인 1857년 어머니를 따라 광주(廣州· 현재는 始興郡으로 행정구역 변경) 청계사로 가서 그곳 주지 계허(桂虛)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때의 이름은 동욱(東旭)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를 절에 갖다 맡겨 중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 경허의 친형도 이미 출가해 있었으며 1880년 경허가 천장암에 가서 머무를 무렵에는 태허(太虛)라는 법명으로 그곳 주지로 있었다. 그때 경허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함게 지냈다고 한다.
  일단 출가는 했지만 어린 동욱은 글공부는 하나 못하고 나무를 하면 물을 긷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열네 살이 되었다. 덩치는 남달리 컸다. 그해(1862년) 여름 박처사라는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머물면서 우연히 소년승 동욱의 글재주를 발견했다. 그러나 계허는 곧 환속하게 되어 동욱을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강백(講佰)에게 천거하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의 장래성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만화 화상 밑에서 동욱은 본격적인 글공부를 하며 일취월장했다. 「남이 하나를 할 때 열을, 열을 할 때 백을 배워 익힘으로써 안팎을 널리 찾아 배워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이름이 팔방에 떨쳤다.」고 「경허집」약보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71년 23세 때는 만화 강백을 대신해 중망을 동학사 강원에서 강사가 되어 경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물처럼 모여들었다. 그토록 이미 이름이나 나 있었고 만인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젊은 불교이론가로서의 실력이 다져졌던 것이다. 그러나 31세 때 한 결정적인 전기가 온다.
  1879년 여름 그는 문득 은사 계허에 대한 옛날의 은혜를 생각하고 서울로 찾아가 뵙기로 했다. 동학사를 떠나 별안간 폭풍우를 만났다. 날로 저물었다. 급히 근처마을로 가서 잠자리를 청하고자 했으나 한마을 수십 호가 음산하도록 조용했고, 도무지 그에게 하루 밤의 잠자리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마침 콜레라가 온 마을에 퍼져 사람이 연속 죽어나가는 형편이었다. 동욱은 할 수 없이 마을 밖으로 나가 큰 나무 밑에 앉아 밤을 새우며 생과 사(死)라는 큰 문제를 밤새도록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그의 도도한 불교 이론은 너무나 무력했다. 날이 새고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서울 행을 중지하고 동학사로 돌아오며 영운 지근(靈雲 志勤)의 「노사미거 마사도래(䮽事未去 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생각했다.
  절로 돌아온 동욱은 조실(祖室)문을 걸어 잠그고 「송곳으로 가랑이를 찌르며 오로지 정신을 가다듬어 만년의 은산철벽(萬年銀山鐵壁)처럼」앉아 참구를 했다. 석 달이 그렇게 지났다.
  원규(元奎)라는 사미승이 그 속세의 아버지인 이진사와 학명(學明)이라는 승려(萬化의 제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와 조실 문밖에서 아이들과 농담을 했다.
『네들 중노릇 잘못하면 소되는 이치를 아니?』
『소되는 이치가 뭔데?』
『야, 소가 돼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단 말야.』
  일심불란 뼈를 깍듯이 참구 중이던 동욱은 그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 말 한마디에 「대지가 그냥 내려앉으며, 만물과 나를 함께 잊고 온갖 법문(法門)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는데, 때는 기묘년(己卯.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鏡虛集略譜)
  그것은 동욱의 깨달음(頓悟)이었다. 그 깨달음을 계기로 동욱은 법명을 성우(惺牛)로 고치고 경허(鏡虛)라는 법호를 쓰게 되었다.
  이듬해(32세·1880년) 경허는 그 속세의 형이기도 한 태허(太虛)가 주지인 천장암(당시는 洪城郡 소속)으로 가서 돈오(頓悟) 후의 점수(漸修)를 하고 천장암을 비롯해 서산의 개심사·부석사 등으로 돌아다니며 20년간 선풍을 드날린다.
  그 무렵 수월, 혜월, 침운, 만공(水月, 慧月, 枕雲, 滿空) 등의 제자를 거느리며, 술도 마시고 문둥이 여인과 동서생활도 하며 유부녀와 사통도 하다가 뭇매를 맞아 반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일종의 무애행(無碍行)과도 같은 것이다.
  경허의 사상은 많은 그이 글과 시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데 오도가에 의해서 살펴보면 「본래 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本無生)」 「삼신과 사지(三身 四智=모든 불교적인 지혜나 부처 자체)가 공(空)에 이른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공성(空性)을 개달은 상태에서 보면 눈에 닿는 모든 것이 「그대로 천진불(天眞佛)이 되는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꾼도 목동도 보현보살 이 아무개 장 아무개들도 비로자나 부처로 보이는 것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상태와도 비교된다. 눈앞의 이해관계를 하나하나 제거하듯, 우리들이 만나며 겪고 보는 현상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고 본래 무상(無常)한 공성(空性) 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투철히 깨닫고 몸에 익히면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경허의 오도가는 그런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아울러 보조(普照), 서산(西山)으로 이어지는 선교일치(禪敎一致)를 말했다.
  1899년부터 경허는 해인사. 범어서. 청암사(方漢岩을 만나 가르침) 금강산 등을 돌며 갖가지 일화를 남기고 1904년 석왕사의 오백나한 개분(改粉) 불사의 증사(證師)를 한 후 훌훌히 북쪽으로 떠났다.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스스로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을 내걸고 삼수, 갑산, 강계(三水, 甲山, 江界) 등, 산과 물을 따라 다니며 선비를 사귀고 시를 읊었다. 그리고 경허집 약보에 의하면 1912년 4월 52일 갑산 웅이방(甲山熊耳坊道下洞)에서 죽었다.
  만공은 그 스승의 죽음을 듣고

 

「선은 부처보다, 악은 호랑이보다 더한 것이 경허 선사였다.

돌아가 어디로 가셨는지. 술에 취해 꽃 속에 누워 계신지

(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 還化向甚(?)處去 酒醉花面臥).」

 

라는 시를 지었다.
  만공은 또한 경허의 영정(修德寺 金仙臺에 있음) 제찬에도 스승의 기이하고 특성 있는 생애를 짧게 노래했다.

 

「거울이 비었나니, 본래 거울이 없다.

소가 깨달았나니 일찍이 소가 아니라 없고 없는

곳곳의 길머리에 깨달은 눈과 술과 다못 색이라

(鏡虛本無鏡 惺牛曾非牛 非無處處路 活眼酒與色).」


  경허 자신은 죽음에 임해서

 

「둥근 일원상(一圓相)과 함께 마음의 달이 오직 둥금에 그 빛이 모든 것을 삼키다.

빛도 없고 비치 이는 것도 없으니 다시 또 무엇이 있을까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腹是何物)」

 

라는 글(이상 漢文· 번역 필자)을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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