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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허의 삼수갑산과 償債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4.01.18|조회수7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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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삼수갑산과 償債

 

홍현지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禪家의 償債思想
  1. 상채의 의미
  2. 업보사상과 상채사상
  3. 선가의 상채
Ⅲ. 경허의 償債, 삼수갑산행
  1. 숙업의 인연
  2. 살인 혐의
  3. 상채의 대장정, 三水甲山行
Ⅳ. 나가는 말

 

 

한글요약

 

鏡虛禪師(1846∼1912), 그는 누구인가?

경허는 구한말 풍운의 조선 땅에 신화처럼 홀연히 나타나 투철한 깨달음으로 꺼져 가는 한국선의 등불을 밝힌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평가한다. 경허가 근대 한국선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며 一大事에 확철대오 했던 진정한 수행자였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경허의 행리에 있어서는 ‘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할 수 있겠는가…’의 강한 긍정과 간간히 세간에서 비쳐드는 빛바랜 어둠의 강한 부정의 양극단이 극명하게 갈리어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마치 경허의 운명처럼 암울하게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허의 償債이다.

 

경허는 1903년 초가을 해인사를 떠나 1904년에는 서산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마치고 滿空에게 傳法偈를 내린 후 1905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3개월 동안 화엄경 법문을 한다. 이어 금강산을 유람하고 1906년
(61세)에는 안변 석왕사 나한전 개금불사 증명을 끝으로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경허는 홀연히 떠나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 한다. 이후 甲山·江界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다. 심지어는 朴蘭州로 개명하여 그 곳에서 훈장 선생으로 살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마침내 전설처럼 입적한다.

 

왜 하필 삼수갑산인가? 왜 박난주인가? 비승비속도 선승인가?

하지만 그것이 경허의 상채이다. 그는 그 곳에서 ‘상채’ 즉 ‘還債’를 마친다. 필자는 경허의 삶과 사상, 그리고 문학세계 등을 재조명하여 그동안 왜곡되었던 선사의 정당한 가치를 특히 그의 행리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특히 필자는 경허의 말년 三水甲山에서의 활동을 償債行, 償債思想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경허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

 

주제어
경허, 삼수갑산, 숙업, 상채, 환채, 보원행

 

Ⅰ. 들어가는 말

 

경허는 조선 왕조의 해체와 함께 식민지 통치의 운명을 맞이한 구한말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뒤로 한 채 삼수갑산행을 감행하였다. 최근 경허의 행적을 파격적인 관점으로 논문을 집필한1) 윤창화는 경허 삼수갑산행의 眞意가 계율에 대한 世人들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하면서 그를 염세, 은둔 등 도피적인 성격으로 단정했다.2)그러면서 경허는 功도 크지만 계율의 측면에서 過도 크다고 지적하면서, 경허의 행위에서 최근 승가의 계율의식 부재의 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3)

 

하지만 일제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점함과 동시에 종교까지도 일본화하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면서 계율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인 독신과 채식 위주의 생활을 은연중 파괴시키면서 帶妻와 肉食을 장려하였다.4)
한국 불교는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을 전통과 특성으로 인식해왔다. 특히, 처첩을 거느리거나 淫戒를 범하면 사찰에서 퇴출했는데, 일반 세간에서는 그러한 승려는 승려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시대상을 고려하여도 경허의 기행은 물론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경허는 처첩을 거느린 바는 결코 없었다. 단지 凡人을 벗어난 파격적 기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빌미삼아 그 당시 어떠한 승려도 경허를 승려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간주하여 경허를 山門出送을 시키지 않았다. 또한 경허의 행위가 僧伽的으로는 물론이고, 사회규범이나 도덕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를 가졌다고 절대 단언할 수도 없다. 최근 한국불교의 주색과 도박 문제에 경허의 영향이 있다고 윤창화는 지적했지만 그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허의 경지에서는 酒色은 그 성격상에 있어서 사소한 걸림 없는 수행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승려들은 감히 경허를 흉내를 낼 수 없었고, 일반 중생들이 행하는 酒色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현전하는 문헌 기록으로 볼 때에 경허는 그 어떤 사회적인 문제도 야기시키지 않았다.

 

1) ?조선일보? 2012.8.24, 肉食과 酒色파격의 삶 … 경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허정, 특별기고 ; 다시 경허를 생각 한다 , ?불교포커스? 2012.9.10.
옹산, 특별기고 ; 깨달은 선사 경허, 파계승 평가 안돼 ?법보신문? 2012.10.8.
2) 윤창화, 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행 ?불교평론? 52, 만해사상실천 선양회, 2012, p.198.
3) 위의 윤창화 글, p.198.
4) 김광식, 용성의 건백서와 대처식육의 재인식 ?한국현대선의 지성사탐구?도피안사, 2010, pp.521-530.

 

 

따라서 경허가 주색을 즐겼던 것을 사회규범이나 도덕적인 문제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다. 그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경허의 강건하고 도교적인 기질,호탕하고 대범한 성격, 시와 풍류를 즐기는 유교적 習氣등이 복합된 체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경허의 삼수갑산행에 대해 윤창화는 은둔의 성격으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경허의 삼수갑산행의 眞意가 世人들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차원의 도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 대한 毁讚등 是非를 피하여 面人이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추고자 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경허는 자유의지로 삼수갑산을 선택하였고, 걸림 없는 경허는 그 곳에서도 자신을 숨기기는커녕 더욱 더 기이한 모습으로 갑산거리를 당당히 활보하였음을 볼 때에 도피라는 시각은 수용하기 힘들다.

참회의 의미로서 도피라기보다는 그의 형상은 凡人을 뛰어넘는 경외감과 범인들을 압도하는 대자유인의 모습이었다. 경허가 일본 헌병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으며,5) 자신의 이름까지도 당당히 朴蘭州로 바꾸고, 유생
차림의 대자유인으로 거침없이 수행하다가 입적한 점 등은 은둔 및 도피의 관점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5) 윤청광, ?착한일 많이 하게 그대가 부처일세?, 우리출판사, 2005, p.266.

 

이렇듯이 필자는 윤창화의 입론을 비판하면서 경허의 삼수갑산행을 償債思想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는 경허의 행보를 대도를 성취한 인간 경허 개인의 삶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경허는 원래 방랑자이면서 대자유인이었다. 『경허집』의 개당설법의 오도가 속에 나오는 ‘내 일찍이 방랑자가 되었기에 나 또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노라’ 문장에는 구구절절한 애절함이 배어난다. 또한 ‘슬프다 어이 하리 무릇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까’ 하는 문장에서도 진한 슬픔이 배어있다. 어쩐지 경허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경허는 깨치는 순간부터 이처럼 고독과 슬픔으로부터 출발하는 ‘鏡虛禪’의 독자성이 있었다. 고독을 동반하는 경허선의 핵심이 경허의 상채이었다. 수행자는 혹독한 고난이 운명이다. 허나 고난은 수행의 일부다. 인간의 삶은 모든 일이 우연인 듯 보이지만 그 우연속에는 필연이 있다. 이것은 흔히 ‘운명’ 혹은 ‘숙업’이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경허에게도 그 운명 같은 숙업이 경허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경허에게도 생애 전체를 뒤흔드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뿐이다. 경허는 늦은 나이 56세에 滿空에게 충청도 천장암에서 傳法偈를 전한 후 유랑의 삶을 스스로 자초하고 끝내는 아득한 오지인 함경도 갑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필자는 그 과정을 추적하여 경허의 지탄받고 이해할 수 없다는 파격적인 행동을 償債思想을 통하여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경허의 삼수갑수행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려는 것이 이 논문의 초점이다.

 

필자는 우선 경허가 행했던 종횡무진 및 예측불허, 특히 석왕사 개분 불사를 끝으로 자취를 감춘 사건을 경허 스스로 그의 마지막 삶을 회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삼수갑산으로 떠난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償債行'으로 구분한다. 경허의 ‘상채’는 남아있는 기록이 희소하여 주로 그가 남긴 禪詩와 유학들과 주고받은 答書등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으로 그 범위를 한정한다.

 

 

Ⅱ. 禪家의 償債思想

 

1. 償債의 의미

 

償債라는 말은 과거에 지은 業이라는 빚을 갚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상채는 ‘환채’라고도 표현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피할 수 ‘還債’의 삶이 있다. 환채란 글자 그대로 ‘돌아온 빚’을 뜻한다. 그것의 의미는 아득한 과거 生이 문득 迷하여 아득히 꺼꾸러진 상태로부터 본래의 자리로 바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것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여기 이생에서의 각자의 삶이 오직 본인만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무게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전생의 빚’으로 다가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나를 허물고 허문 경지인 頓悟후에도 宿業의 잔재인 환채의 삶은 때로는 아주 커다랗고 강렬하게 몰아 부친다. 그래서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숙업을 해결하는 일을 禪家에서는 償債思想또는 還債思想이라고도 했다. 백장야호의 ‘不落因果’와 ‘不昧因果’를 잘 이해해 보면 우리는 경허처럼 불락인과가 아닌 불매인과의 수행으로 문득 야호의 몸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깨친 자의 昧하지 않은 삶이 바로 경허의 삶 전체이었다. 물론 경허의 삼수갑산행 역시 昧하지 않은 경허 그 만의 선택으로 이는 분명 경허의 상채의 삶일 뿐이다.

 

그를 부연해서 말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뇌가 모두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고 믿고, 결코 원망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이다. 즉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業報思想을 말한다. 물론 불교는 업보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업보는 피할 수 없음을 알지만, 중생들은 불행한 일을 당하면 과거의 업보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해서 또 다른 업을 짓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禪家에서는 더 더욱 깨친 자의 입장에서는 이 숙업의 문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빚을 갚고자 하는 상채사상으로 자신의 삶을 맞이하였다. 일찍이 혜가가 묵은 빚을 갚으러 업도로 떠난 이야기도가 이를 예증한다. 역시 깨친 자는 그의 업보에 어둡지 않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빚을 갚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렸을 뿐 거기에 어떤 의미도 곁들이지 않는다. 상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설명하면, 상채는 묵은 빚을 갚는다는 의미이기에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은 범인으로서는 쉽게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그에 앞서 자신의 업보라고 인정하는 일은 상채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기에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경허 일대기를 펴낸 일지는 경허 삶과 還債와의 관련을 간략하게 지적했다.6)

필자 또한 경허의 행리를 ‘상채’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경허의 삼수갑산행은 그간 경허의 선학 논고에서 지적된 ‘異類中行’도 ‘和光同塵’도 아니다. 경허가 이류중행과 화광동진을 행했다고 보기에는 삼수갑산에서의 경허의 행리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가식이 없었다.

경허는 자신이 갈구한 대자유인의 모습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경허 삶 자체를 인간 경허의 상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경허의 삼수갑산행에서 도피적인 성격은 찾을 수 없다. 위대한 선승 경허는 장부 일대사를 마치고, 수순에 따라 상채를 행하다 갔다. 만약 경허가 그가 이룬 금생의 업적 즉 大道를 이룬 대사건의 결과로 인해서 주어지는 조건들을 고스란히 받은 大禪師라는 지위와 대우 속에서 편안하게 한 생을 마치려 했다면 그것 또한 경허가 새롭게 짓는 금생의 業이다.

하지만 경허는 금생의 업으로 주어진 좋은 조건들을 헌신짝 버리듯 모든 것을 한순간에 과감히 버리고 ‘隨緣消舊業’의 삶인 자신의 묵은 빚을 갚고자 과감히 상채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6) 일지, 『경허』, 민족사, 2012, p.257, “경허는 인간의 명암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궁극의 지점을 이미 보고 스스로 환채(還債)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선가에서는 숙업의 여파를 다스리는 것을 환채라고 한다. 환채란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선불교 특유의 업 사상을 보여 준다. 이미 깨달았지만 남아 있는 숙업의 여파는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2. 業報思想과 償債思想

 

업보사상과 상채사상은 같은 맥락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업보가 없다면 갚아야할 빚 즉 상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業說은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 업설은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惡因惡果’ 인과법칙을 나타낸다.

 

초기 경전인 『현우경』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했다.
여기에서 업보와 상채와의 관련을 찾고자 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신분과 계급으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지적한다. 업에 따라 사는 삶은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 이것은 불타가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

『법구경』에는 다음과 같은 불타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 『分別業報略經』7)에는 업에 관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7) 5세기 중엽 인도 출신의 학승 승가발마가 번역하였다. 1권으로 된 이 경은 사람의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시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승열반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의 佛法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들고있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로 풀이된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내용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업의 過去性뿐만 아니라 現在性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상채사상은 ‘묵은 빚’을 갚는 의미가 있고 또한 환채도 ‘돌아온 빚’으로 과거생의 빚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허가 행한 삼수갑산은 현재성이 아닌 과거성의 상채행이기 때문이다.
비단 경허 뿐 아니라 禪家에서 행한 覺者의 悟後修行은 모두 상채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상채의 행은 과거의 업보가 없으면 행해질 수 없는 업보 선행의 주종관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업보사상과 상채사상은 따로 분리 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성립한다. 즉 업을 갚는 긍정적 행위가 곧 상채라 본다. 그리고 이 상채행은 깨달은 자의 경지에서 행해지는 覺者悟後修行의 순차적 단계이므로 달마의 ‘보원행’이나 황벽의 ‘隨緣消舊業’그리고 임제의 ‘無事人’의 경지처럼 ‘다만 인연 닿는 대로 구업(舊業)을 받아들일 뿐, 다시 새로운 허물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즉 ‘但隨緣消舊業’함을 ‘환채’로 보고 있다.

 

이상에서 살핀 업보사상을 정리해보면 이러한 불교의 업 설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내가 한 행위는 틀림없이 결과를 초래한다는 因果應報즉 業報의 필연성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은 것은 반드시 내가 받는다는 自業自得의 원칙이다.

이러한 절대불변의 법칙 하에 있는 업보사상과 관련하여 상채는 禪家에서 행해지는 覺者의 悟後修行으로서 자신의 묵은 빚을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견지에서 스스로 찾아 행동하는 대보살행의 구현된 참모습이다.
다시 말해 상채행은 禪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깨달음의 견지에서만 드러나는 독특한 悟後수행법으로 다만 인연 닿는 대로 舊業을 녹일 뿐, 다시 새로운 허물이 지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3. 禪家의 償債

 

기록에 보이는 禪僧의 業報思想즉 상채는 중국의 魏晋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최초의 불교도였던 道安8)의 친구 王嘉가 그 하나의 예이다. 먼저 왕가의 상채에 대해 살펴보겠다.9)

 

高僧傳에 의하면, 도안이 입적할 때 洛陽출신의 친구인 왕가에게 “함께 입적하지 않겠는가?”하고 권하니 그는 “부디 먼저 가게. 나는 전생의 빚이 조금 남아 있으므로 마저 다 갚고 나서 자네를 따르겠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왕가는 그의 상채대로 당시 天子요장을 만나서 행한 문답의 도중에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수순대로 피살된다. 왕가는 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당연히 그의 상채를 행하고 갔다. 이것이 바로 범인은 행하기 어려운 禪家의 상채인 것이다.

禪家상채사상에 대해서는 달마의 二入四行論10)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달마는 道에 다가서는 것에는 두 가지 길 즉, 理入과 行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중 行入의 네 가지 내용 중에서 첫 번째인 報怨行이 바로 상채사상이다.

 

二入四行論에 나오는 行入이란 네가지 실천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報怨行11)으로 前世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요,

둘째는 隨緣行으로 인연을 따르는 실천이요,

셋째는 無所求行으로 구하는 바가 없는 실천이요,

넷째는 稱法行으로 법대로 살아가는 실천이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로 나온 보원행이 바로 상채사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보원행이 상채사상임은 『달마대사의 소실육문 』내용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12)

달마의 보원행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알고 보면 모두 자기가 지은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이니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원망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즉 다생 누겁으로 이어온 자신의 죄업을 달게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還債, 즉 상채를 의미한다. 인과응보 사상의 기본바탕 위에서 불교사상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상채의 의미 또한 크다고 본다.

 

8) 중국 東晉때의 승려로 般若學을 대표하는 인물. 그는 승려는 속가의 성을 없애고 ‘釋’을 姓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9) 성철, 『영원한 자유』, 장경각, 1988, pp.202-203.
10) 志安역주 : 仁海, 『달마대사의 소실육문』, 민족사, 2008, p.122.

11) 위의 책, p.123.

12) 위와 같음.

 

선종의 제2조 혜가 역시 환채의 길을 걸었다.13)

승찬에게 법을 전한 혜가는 부지런히 상채의 길을 떠났다. ?都14)에 가서 묵은 빚을 갚고자 함이었다. 이것이 ‘혜가상채’의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혜가의 이야기이다. 승찬에게 법을 전한 혜가는 업도에 가서 전생 빚을 갚기위해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형편에 따라 법을 설하니 따르는 무리가 참으로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법하기를 34년간 하던 어느 날, 혜가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그는 겉모습을 바꾸어 고깃간에도 가고, 술집도 찾고, 품팔이도 하고, 시정 사람들과 잡담도 하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도인이 왜 이런 일은 하느냐’고 묻자 ‘나는 내 마음을 길들이는데 그대가 왜 관여 하는가’라는 대답만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선종의 제2조 혜가 역시 환채의 빚을 잘 갚고 107세의 한 노승 혜가는 찬연히 입적 한다. 여기서 ‘혜가상채’의 고사성어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혜가의 법은 문둥병이라는 상채 즉, 전생 빚이 있는 승찬을 만나 선의 법등이 꺼지지 않고 등불을 이어간다. 승찬의 상채는『조당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5)

 

13) 일지, 『경허』 pp.257-258.
14) 중국 허베이성 임장현 현성 서쪽 60km의 업진에 있었던 도성지명을 의미한다.

15) 김월운, 『조당집』 제2권, 동국역경원, 2008, pp.162-163.

 

다음은 황벽의 상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지는 그의 저서 『경허』에서 황벽의 환채를 거론하였다.16) 황벽이 언급한 ‘다만 인연 닿는대로 구업(舊業)을 받아들일 뿐, 다시 새로운 허물을 짓지 않는다.’ 것을 즉 ‘但隨緣消舊業’함을 환채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혜가가 말한 묵은 빚을 갚는 것, 구업을 갚는 것인데, 이런 내용을 상채사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이입사행론의?보원행과도 일맥상통한다.17)

 

임제의현의 법어에 실려 있는 ‘다만 인연을 따라 옛 업을 녹일 뿐(但能隨緣消舊業)’을 환채의 실상으로 볼 수 있다.18) 여기에서 나온 隨緣消舊業에 관한 내용은 『임제록』1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20)

이처럼 임제 또한 다만 인연 따라 과거의 業을 소멸할 뿐 한 생각도 형상만을 좇아 佛果를 구하는 마음이 없다고 했다. 상채의 모습이다. 보원행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영명연수 선사의 <수보살계법서>21)에서도 환채를 찾을 수 있다.22)
수행자가 도를 이루지 못하고 시주의 공양만 받아서 시주의 집에 버섯으로 태어나서 신도의 빚을 갚고 소가 되어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도를 이루지 못한 수행자 뿐 아니라 도를 이룬 수행자일지라도 전생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상채로 부각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국 근대 선가상채의 실례를 보자.

한암과 만공은 경허의 법제자로서 절친한 도반이다. 한암이 마침내 豁然大悟하여 묘향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만공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서신을 받은 한암은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낸다.

그 중에서 ‘가난뱅이가 묵은 빚을 생각합니다(貧兒思舊債)’라는 내용이 나온다.23)

豁然大悟하고 보니 황벽이 그러했듯 ‘다만 인연 닿는 대로 舊業을 받아들일 뿐…’이고, 임제가 그러했듯 ‘인연 따라 과거의 業을 소멸할 뿐…’ 이고 한암 역시 ‘가난뱅이가 묵은 빚을 생각할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아온 빚 환채이고 갚아야할 빚 상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禪家의 상채사상을 의미한다. 경허 또한 자신이 갚아야할 상채 빚을 향해 삼수갑산으로 갔다고 본다.

 

16) 일지, 『경허』, p.258.
17) 일지, 『전심법요』, 세계사, 1993, pp.159-160.
18) 일지, 『경허』, p.257.
19) 야나기다세이잔/일지 옮김, 『임제록』, 고려원, 1980, p.101.
20) 위와 같음.
21) 영명연수/여천 무비, 『보살계를 받는 길』, 염화실, 2008, p.147.
22) 위의 책, pp.147-148.

23) 최인호,『길 없는 길』권4, 샘터사, 1993, p.92.

 

 

Ⅲ. 경허의 償債, 삼수갑산행

 

불교계에서 경허의 삼수갑산행을 神秘化시키고, 美化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경허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고 貶下된 부분도 적지않다. 필자는 경허의 긍정적 평가는 경허를 흠모한 나머지 경허를 미화하려는 후학의 영향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렇게 신비화된 부분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필자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는 보지 않는다. 더욱이 그 경지에 도달해 보지 않고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는 긍정적인 시각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편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허라는 인물의 법화와 행리는 그 접근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格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윤창화는 경허의 삼수갑산행을 厭世的, 은둔적인 도피적 성격이 짙다고 말한다.24) 그러나 필자는 경허의 성품은 염세, 은둔, 도피와는 거리가 먼 호방하고, 대범하고, 솔직해서 그런 오해를 자초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경허의 법화의 측면 즉, 그가 확철대오하여 대도를 성취한 위대한 선승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경허가 한국 전통선을 부활시킨 인물이라는 점과 만공, 혜월, 수월, 한암 등 기라성 같은 그의 제자들이 한국 선종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경허의 말년 삼수갑산행에 대해서는 그의 마지막 생애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것은 그의 행리를 온전한 의미의 入廛垂手行으로, 和光同塵으로, 無碍行으로 규정짓기에는 그의 행적에 납득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경허 자료를 편찬한 한용운은 경허 말년의 삼수갑산행을 ‘萬行頭陀’로 보았다. 한용운이 쓴 『경허집』 略譜에는 경허의 出出世間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그 뒤로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강계 등지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관을 쓰고 바라문으로 변신하여 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 따라 교화하였다.”25)고 적었다.

그러면서 『화엄경』의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경허의 행동을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의 모습인 無碍行이라고 묘사하였다. 그후 경허 연구에 지평을연 閔泳珪는 그의 논문 北歸辭에서 경허의 삼수갑산에서의 활동을 이류중행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경허당의 행적에 관하여 우리는 너무도 아는 바가 적다. 적지 않은 일화가 활자화되어 전하나 장삼이사(張三李四)에서 그렇게 벗어나지 못한다. 58세 때 경허당이 북으로 잠적한 까닭을, 시봉 하나가 동학사(東鶴寺) 가던 길에 피살되고 그 살인자로 몰렸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확신하는 납자(衲子)가 있는가 하면,《조선불교통사 朝鮮佛敎通史》(李能和, 1917)에서 저자는 경허당의 경계(境界)를 가리켜 음주식육(飮酒食肉)하고 행음투도(行淫偸盜)를 꺼리지 않는 마설(魔說)로 배척하던 당시 총림(叢林)의 여론을 사뭇 동조하는 기세로 서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직 경허당 자신이 남긴 문자뿐이다."26)

 

24) 위의 윤창화 글, p.216.

25) 한용운, 약보 , 『경허집』『한불전』권11, 1991, p.588.

26) 민영규, 鏡虛堂의 北歸辭, 『민족과 문화 』 12, 2003, p.9.

 

민영규는 경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허당 자신이 남긴 문자’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민영규의 견해는 김지견도 동의한다. 김지견은 경허가 걸어간 길을 자기실험의 고행이요 이류중행으로 확정하였다.27) 그리고 한중광은 그의 저서 『경허』에서 “신라의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대안(大安), 원효가 그러했듯, 화광동진의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28)라고 서술하였다. 즉 경허의 삼수갑산 시절을 ‘화광동진’으로 해석하였다. 이상실도 그의 논문에서 “그의 심우관의 구체적 표상인 ‘이류중행’이 그의 삶을 결정지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로써 ‘나를 구하고 나를 허물고 세상에 스며드는’ 경허 심우사상의 경지가 정확히 구현됨을 알 수 있다.”29)라고 즉 이류중행으로 서술했다.

고영섭은 경허의 ‘사문 비구 경허’에서 ‘거사선생 박난주’로 전환되었다고 보았다.30) 그는 이를 출세간의 지평에서 입세간의 지평으로 복귀하는 한 역사적 인간의 새로운 탄생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경허의 북녘 살림살이를 원효, 설잠, 만해와 같은 계보로 보려고 했다.

 

27) 김지견, 鏡虛堂散考?화엄사상과 선?, 민족사, 2002, p.256.
28) 한중광, ?경허?, 한길사, 1999, p.240.
29) 이상실, 경허 입전수수행 연구 , 동국대 석사논문, 2005, p.32.
30) 고영섭, 경허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 , ?경허?만공의 선풍과 법맥? 조계종출판사, 2009, pp.83-86.

 

한편 이와 같은 이해와는 달리 최병헌은 그의 논문에서 “경허의 1904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불교계나 학계에서는 ‘和光同塵’이니 ‘異類中行이니 하여 불교적인 無碍行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실제 그의 행적에서는 불교적인 모습은 전연 발견할 수 없다. 행장 이나 약보에서의 서술대로 불교계를 완전히 떠나 俗人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31)라고 기술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허의 삼수갑산행은 무애행이라는 전제 아래 두타만행, 이류중행, 화광동진, 보살행 등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에서는 경허의 마지막 삶을 ‘상채’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경허의 삼수갑산 시절을 ‘상채’라는 관점으로 ‘경허의 삼수갑산행’의 비밀에 접근하고자 한다. 미흡하긴 하지만 기왕의 경허 글에서 경허의 ‘상채’와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경허의 일대기를 쓴 일지는 경허의 지독한 고독과 유랑의 삶을 ‘상채’ 즉 ‘환채’로 보았다.

 

"이 모든 경허의 우울에 대해 우리는 경허 그 개인과 암울한 시대의 공기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고통에 대한 환멸 또는 환채(還債)해야 할 어떤 숙업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될 비장하고도 불행한 그 무엇이, 경허 그 자신을 유랑과 고독의 파국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32)"

 

그리고 이상실도 그의 논문에서 경허의 삶을 ‘환채’로 언급하였다.

 

"참다운 선(禪)의 경지는 산은 높고 물은 흐르는 ‘공성’(空性)의 상태다. 한 줄의 진언으로 시작, ‘할’로 끝맺는 그 가운데 ‘환채(還債)의 삶이 있다. 환채란 글자 그대로 ‘돌아온 빚’을 뜻하는 말로 ‘문득 미하여 아득히 꺼꾸러지는’ 상태다. 그것은 분명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삶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무게를 일컫는다. 나를 허물고 허문 경지 돈오 후에도 숙업의 잔재인 ‘환채의 삶’, ‘빚의 빛’은 때로 커다랗고 강렬하게 비쳐든다."33)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삼수갑산행을 설명하였다.

 

"그 스스로가 환채의 길을 용납했듯 그의 생래적 성정상 어찌할 수 없는 정조일 수도 있으며, 일찍이 심취했던 노장적 사유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이상실도 경허는 立廛垂手, 和光同塵의 삶을 오래 강구했지만 尋牛의 귀결처로서, 삼수갑산행의 의미를 환채와 노장적 사유가 개입된 것에서 찾았다. 이는 경허의 상채를 인정한 서술이다.

 

31) 최병헌, 근대선종의 부흥과 경허의 수선결사 , ?덕숭선학? 2000, pp.95-96.
32) 일지, ?경허?, 민족사, p.320.

33) 이상실, 경허 입전수수행 연구 , 동국대 석사논문, 2005, p.29.

 

필자가 경허의 삶을 상채로 보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깨친 자의 모습 속에서 인간 경허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천하의 문장가, 시인의 성격도 지닌 경허가 남긴 詩를 통해서 그를 판단하였다. 필자는 경허가 말년에 행한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하는 그의 삶에서 티끌세상에 들어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을 느낀다. 그래서 저자에 드리운 그의 손에서는 불보살이 아닌 중생의 모습으로 너무 진한 슬픔과 고독이 묻어난다. 끝없는 자비심으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티끌세상에 들어가,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 중생을 불법으로 인도하는 불보살이 고독 속에서 울고 있는 정황을 찾을 수 있다. 경허는 평소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슬퍼하고 고뇌하였다. 이별을 두려워하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노래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필자에게는 경허의 모습에서 대도를 성취한 대선사의 의지로 읽혀지기 보다는 차라리 애처로운 인간의 모습이 느껴진다. 경허는 백발의 늙음을 한탄하고 자신의 호구를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병든 몸으로 신음하기도 했다. 비록 大道를 성취한 鏡虛禪師라 할지라도 자신의 상채 즉 불보살의 상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즉 경허는 전생의 業도 원력보살인 경허답게 유마의 마음으로 중생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의 경지에서 상채를 이행했다.

 

경허의 환채는 현재 수덕사 방장인 설정이 경허를 설명한 발언에서도 나온다. 지난 2012년 7월12일 불교TV에서 특집으로 경허스님 열반 100주기 기념법회 ‘길 없는 길’34) 1회 분의 방송 대담에서 설정은 경허가 지리산 지역(함양군 마전리)에서 행한 두타행을 ‘환채’라고 설명하였다.

34) 2012년 7월 12일 불교텔레비전 특집, 경허스님 열반 100주기 기념법회<길 없는 길> 1회분.

 

설정의 법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허 선사는 逆境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자신을 끊임없이 시험하시고 그 역경계 속에서 ‘自性淸淨佛’을 찾는 수행을 행하셨던 분이다."

 

설정은 이와 같이 발언하면서,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부연 설명하였다.

 

"어느 날 실상사에서 벽송사로 넘어가는 도중 호열자를 앓고 있는 마을을 만나 거기서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생을 보고 남원에가서 동냥을 하고 탁발을 하여 약을 구해 중생이 아픈 곳에서 몇달 동안이나 떠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생존해 계신 노인 분들로부터 들었다."

 

즉 설정은 지리산에서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바로 경허의 환채다.”라고 경허 ‘환채’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경허의 이 모습은 저자거리로 나아가 35년간 중생 속에서 부지런히 상채를 행했던 혜가의 상채와 비슷하다. 이 상채의 내용은 불교TV 경허스님 열반 100주기 기념법회 ‘길 없는 길’의 방송에 출연한 축서사 선원장인 무여의 법문35)에서도 피력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경허의 말년 그것이 ‘경허 상채’다.

 

필자는 경허가 불보살이면서 중생의 삶을 살은 경허 상채를 평가한다. 경허의 삼수갑산행은 경허가 대선사의 모습으로 생을 마친 것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던져주었다. 부처님이 왕좌를 헌신짝처럼 버리셨듯이 경허 또한 대선사의 자리를 찰라 간에 집어 던지고 깨달은 소가 코뚜레 훌러덩 벗어던지듯 콧구멍 없는 성우[鏡虛惺牛]가 되어 홀연히 갔다. 경허가 삼수갑산을 향하는 대장정에 오르기 위한 전초전은 그의 나이 58세 때인 1903년 초가을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친 직후에 행하여 졌다.

경허가 湖西지방에 있다가 경남지방으로 1898년에 간 것은 범어사에 새롭게 선원을 개설하기 위함이었다. 경허는 그 다음 해인 1899년 동안거 때는 해인사에 선원을 개설한다. 이후 1903년까지 5~6년 동안 범어사와 해인사, 통도사, 화엄사 등 경남 및 지리산 일대에 머물면서 선을 중흥시키는데 이때 경허의 이름은 승속에서 더욱 알려진다. 하지만 이때에 경허에 대한 평가 또한 극과 극을 이루었다. 당시 경허는 1899년 동안거에 이어 두 번째로 해인사 조실에 추대된다.36)

36) ?근대선원 방함록?,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2006, pp.40-47.

 

하안거를 위해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의미심장한 시 한편을 읊는다. 바로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읊다(自梵魚寺向海印寺道中口號)’라는 제목의 시이다.

 

 

아는 것은 얕은데 이름만 높고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알 수 없네.
어촌과 주막 어찌 몸 숨길 곳 없으리오마는
다만 이름을 숨길수록 더욱 알려질까 두렵구나.

 

自梵魚寺向海印寺 道中口號

 

識淺名高

世危亂不知
何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名益新37)

 

 

이 시에서 경허는 처음으로 은둔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내비치고 있지만 왜 몸을 숨기려 하는지에 대해 보통사람으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예측 불허이다. 하지만 윤창화는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에 대한 훼찬(毁讚), 세속적인 시비(是非)와 단절하고, 아는 사람이 없는 오지로 가서 영영 종적을 감추고자 마음을 작정한 듯하다.”38)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경허의 글에서 도피적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허는 평소의 성품 그대로 겸손하여 아는 것이 얕은데 선사로서 자신의 이름만 높아짐을 겸양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경허에게서 일제 침투로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떠나야 할 때가 왔음
을 자신이 먼저 감지하고 어촌과 주막 친근하고 낮은 곳을 향한 자신의 행보가 이름을 숨길수록 미화되고 세상에 포장되어 알려질까 염려하는 진실한 선승의 모습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필자는 자신의 종적을 감추고자 마음을 작정한 비열한 졸장부의 의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는 그의 시 속에서 老선승의 짙은 고독이 우선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떠나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자신을 두고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는 바에 대해서도 대선사다운 염려를 하고 있었다.

 

37) 경허, 自梵魚寺向海印寺道中口號선학원(한용운), ?경허집? ; ?한불전?11권, 1991, p.617.
38) 위의 윤창화 글, p.200.

 

여기에서 필자는 그의 은둔하고자 하는 운명적 宿業을 엿볼 수있다. 이 시에서 경허는 처음으로 은둔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는데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감상이 아니라, 상당히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시비를 피하는 은둔으로 종적을 감추고자 마음을 작정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확철대오한 경허의 이런 결단은 그의 절대적인 무애의 삶의 일환으로서의 상채행을 흔적없이 행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로 봐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경허의 행리를 막을 수도 없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이는 마치 혜가의
상채행을 그의 법제자 승찬이 막을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또한 경허의 행위 즉 주색과 관련된 몇몇의 일화를 면면히 살펴보면 많은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널리 지칭되는 해인사의 문둥병 여인 이야기는 凡人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조차 없는 일이라서 서양의 非佛子들 조차도 경이로운 눈으로 경허에게 존경을 표시한다.39)

물동이 아낙네 입맞춤 사건은 만공을 깨우쳐 주기 위한 수행방편이었으며, 서산의 갯바위 사랑이야기는 남의 아낙네를 희롱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경허의 인간다운 순수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또한 송광사 점안식 술과 돼지고기 이야기는 경허의 심중이 어디에 가 있는지 심사숙고 해 볼만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점안식 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대선사가 거침없이 그 일을 행한 데에는 특별한 경허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음은 웬만한 수행자라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술과 돼지고기가 먹
고 싶다 하여도 그렇게 중요한 佛事에서 그러한 행위를 할 만큼 지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대도를 이룬 경허의 경지에서랴. 이는 오직 경허 자신의 의지일 뿐이다.

 

사실 운명에 이끌리듯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그의 행적을 ?는 일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쉽지 않다. 기록으로 전하는 그의 삼수갑산시절의 禪詩를 추적하여 살피기로 한다. 경허 상채의 갈래를 나누어 먼저 숙업의 인연에 따른 경허의 삼수갑산행 부분을 살피고, 이어서 경허의 삼수갑산행을 부추기는 살인 미수 사건40)을 그리고 본격적인 경허의 남은 상채부분의 마지막 정착지 삼수갑산행을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분석해보기로 한다.

 

39) 2012년 5월 10일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40) 이흥우, ?공성의 피안길, 경허선사 평전?, 동화문화사, 1980, pp.300-308.

 

 

1. 숙업의 인연

 

1) 罪福報應涇
경허는 인과응보에 대해서 투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죄복보응경’ 이라는 시에서 그를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과응보에 의해 반드시 죄와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허는 이 글의 후미에 ‘歸就自己’라고 써 놓았는데 이는 경허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罪福報應涇
물은 흘러가니 항상 차 있지 않고 불이 치열하게 타더라도 오래 타지 못하며
해가 솟으나 잠시 후에 지고 달이 둥글어도 다시 이지러지듯이
지체가 높아 영화스럽고 부귀를 누린다 해도
이들의 덧없음 역시 다시 이와 같이 지나 가니라.41)

 

41) 경허, ?마음 꽃?, 명정 역, 고요아침, 2002, p.206.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이 다생 누겁으로부터 이어온 환채 즉, 상채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들은 자신의 삶이 업보인 줄도 모른다. 설혹 조금은 이해한다 할지라도 상채를 행하려 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확철대오하여 도를 이룬 경허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의 법칙이다. 그렇지만 백장이 말했듯이 다만 깨친 자의 몫이란 ‘不落因果’가 아닌 ‘不昧因果’를 수용할 뿐이다. 학계에서는 경허는 유랑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이 비록 도를 깨쳤다 할지라도 전생의 習으로 끄달리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고 적고 있다.

화엄사의 강백인 진진응이 “대선지식이신 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술을 드십니까?”라고 물으니, 경허가 답하기를 “이 사람 진응, 자네는 명색이 강사이면서 그렇게도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하면서, 경허는 진응에게 시 한 수를 들려주었다고 기술하였다.

 

 

몰록 깨달음은 비록 부처와 같지만              頓悟雖同佛
수없는 생에 익힌 습기는 살아 있어             多生習氣生
바람은 잠잠하나 오히려 파도는 솟구치고     風靜波尙湧
이치는 분명하나 생각이 엄습하네               理顯念猶侵42)

 

42) ?진흙소의 울음?, p.242.

 

즉 경허는 자신이 비록 단박에 깨달아 성품은 부처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다생 누겁의 묵은 업장과 습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솔직한 고백을 하였다. 하지만 다른 안목으로 경허를 본다면 이러한 표현들 중 부적절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솔직한 고백’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허는 솔직한 고백을 한 게 아니라 참으로 경허답게 질문자 진응에게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솔직한 고백이란 허물이 있는 자가 그리고 보통 아랫사람이 웃어른께 사실을 고하고 용서를 바랄 때 하게 되거나 또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에서 허물없이 주고받는 법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경허는 진응보다 下者도 아닐뿐더러 허물없는 사이도 아니다.

다만 경허 스타일로 살인혐의를 묻고 있는 만공에게 “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43) 이렇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말하듯 “이 사람 진응, 자네는 명색이 강사이면서 그렇게도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서슴없이 당당히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 답은 솔직한 고백이라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 이 부분은 다만 깨친 자의 몫으로 ‘‘不落因果’가 아닌 ‘不昧因果’를 수용할 뿐인 것임을 증명하는 경허의 선지이다. 그리고 이 시는 사실 경허 자신이 직접 지은 自作詩가 아닌 보조의 『수심결』44)에 있는 내용의 인용일 뿐 경허자신의 수행상태를 직접 드러내었다는 오해는 없어야 한다. 이것은 경허의 숙업을 두둔하는 일지의 글에서도 그것을 재확인 할 수 있다.45)

일지는 또한 인간의 숙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고까지 단정했다. 이런 연고에서 필자는 경허의 행위는 다만 환채를 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윤창화는 또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43) ?현대불교?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 연재, “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 경허 스님 수행 일화(26).
44) ?수심결?은 고려 중기 선사인 지눌이 깨달음과 수행의 방법을 논한 저서이다.
45) <震應講伯答頌>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짧은 한 편의 시에는 頓悟와 윤리, 理와 事와 같은 선불교의 깨달음과 수행론에 관한 명제들이 담겨있다. 경허의 시는 단순히 자신의 음주에 대한 경허의 겸연쩍은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경허는 자신의 숙업이 남긴 여파에 긴장하고 있다. 인간은 아무리 드높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인간에게 완전함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더 깊
은 번뇌와 슬픔을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물론 깨달음은 인간에 관한 깊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인간의 숙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런데 경허는 그와 같은 사실을 구례 화엄사 강백(講伯)인 진진응(陳震應)과의 대화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역시 김태흡의 글 인간 경허 에 실려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한번 만나보고자 했던 차에 어느 날 경허가 화엄사 수도암에 가서 진진응과 선(禪), 화엄경 등의 이치에 대하여 법담을 했는데, 마음이 상통하여 경허는 수도암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경허화상은 이 수도암에서 며칠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역시 주색(酒色)에 빠져서 낮이 되면 술을 받아오라고 조르고 밤이 되면 주막(酒幕) 여자를 불러오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진응화상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해인사의 인파(印波)화상같은 이는 일평생에 색(色)을 멀리하면서 동지섣달 설한풍에도 학인들을 마루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화상은 이약대사(以若大師, 대사라고 하는 분)로 그만한 것을 제어치 못하니 어찌 후생의 사범(師範)이 되기를 기약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런즉 대사도 얼굴에 홍조(紅潮)를 띠우고 말하기를 “‘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지만 다생의 습기는 깊어서, 바람은 고요해도 파도는 용솟음치고, 이치는 분명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침노한다(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라는 글도 있지 않소. 나야말로 그와 같소.

내가 출가했던 광주 청계사는 당취승의 소혈(所穴)로서 뭇사람들이 주색에 빠진 것을 어려서부터 숙견숙문(熟見熟聞)하여, 이것이 습이성성(習而成性, 습관이 본성이 된 것)이 되어서 그칠 수가 없게 되었소.
그런 中이제는 항상 성공(性空, 성품이 공함)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 괘념(掛念)도 되지를 않는구려. 대승은 불구소절(不拘小節,대승은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음)이라 할까요. 그러나 식색(食色)은 인간의 본능이거니 이것을 어찌하겠소.”46)"

46) 윤창화의 위의 글, pp.195-196.

 

경허가 출가한 청계사는 당취승의 所穴이어서 뭇사람들이 주색에 빠진 것을 어려서부터 熟見熟聞하여, 이것이 習而成性이 되었다는 고백은 수긍키 어렵다. 그런 것을 본 습관이 본성이 된 것이라는 내용은 더욱 납득할 수 없다. 경허가 청계사로 출가한 것은 9세에 불과했고, 그후 14세에는 은사인 계허가 환속하여 은사가 써준 추천장을 가지고 동학사 강백인 만화에게 공부를 하기 위해 청계사를 떠났는데 어떻게 숙견숙문한 것이 習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원래 習이란 여러 번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몸에 붙는 현상을 일컫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린 경허가 그곳에서 여자를 취해서 그것이 習而成性해졌다는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뿐더러 생물학적 접근으로도 옳지 않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경허 본인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자신의 출가사찰인 청계사의 사미시절을 그렇게 비하해가며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것은 평소 경허의 성품과 맞지 않을 뿐더러 ‘食色은 인간의 본능이거니 이것을 어찌 하겠소’라는 말은 백번을 양보한다 해도 적어도 도를 깨친 대선사가 발언했다고 수긍하기는 어렵다. 이 문답을 전한 김태흡의 전언, 기술을 사료비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경허는 너무도 술을 사랑하고 좋아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윤창화가 새로운 자료로 찾아낸 김태흡의 글 人間鏡虛―鏡虛大師一代評傳<1> 에 나온 관련 내용을 적시하겠다.

 

 

"대사(大師)는 청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오계를 받고 중이 되었으나 상경(上京. 청계사에 온 지)한지 6년째 되던 14세였다.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청계사는 변두리 절이요. 승려라고 있는 것은 모두 무식한 사람들뿐이라. 그들의 행리(行履)라는 것은 당취(黨聚)로 몰려 다니면서 동령승(動鈴僧, 동량승)으로 기인취물(欺人取物)과 같은 권선(勸善)으로 탁발 벌이를 하여서 계집이나 보러 다니고 도박장이나 벌려서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허구헌날 술과 계집이 눈에 보이고 그들의 잡행(雜行)과 난행(亂行)이 이목(耳目)에 익혔을 뿐이다. 그중에도 계허(桂虛)라는 이는 가장 점잖고 나은 편이었으나 그다지 배울 것은 없었다. 대사는 이러한 암굴(庵窟) 속에서 2년 동안 글 한 자 배우지 못하고 사역(使役, 심부름) 시봉(侍奉)만 하고 경과(經過)하였었다.47)"

47) 김태흡, 人間鏡虛―鏡虛大師一代評傳<1> ?비판? 6호(1938.6). pp.102- 111.

 

 

여기에 나오는 청계사48)는 요즘 말로 하자면 마치 조폭이나 깡패들의 소굴, 혹은 동냥을 자처하며 금품이나 갈취하고 그래서 도박놀음을 일삼으며 여자나 취하는 땡초승들이 득시글거리는 형편없는 절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필자가 그 당시의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청계사에 조차도 그런 상황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청계사는 신라시대 지은 유서 깊은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선종의 총본산이다.49) 비록 과거의 자료를 쉽게 찾아 증명해 보일 수 없다 할지라도 근거 없이 청계사를 이토록 서술함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 청계사가 정말로 그런 사찰이었다면 자식을 두 명이나 한꺼번에 출가시킬 수 있는 불심이 깊은 경허 모친이 그 어린 아홉 살의 자식을 그런 환경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 있었겠는가?

 

48)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49) 청계사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종의 총본산으로도 불린 사찰이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 趙仁規가 사재를 들여 중창해 조인규 가문의 원찰되었다. 조선 연산군 때 도성 안의 사찰을 폐하자 불교 쪽에서 이 절을 선종의 본산으로 정하였다. 청계사가 정조에 의해 창건한(1790년) 사도세자의 원찰 용주사보다 1년 앞서 원찰로 지정되었음을 증명한 목판이 최근 발견됐다.

 

 

그리고 그 당시 계허대사는 신분이 낮은 목수 출신이기는 하나 용문사가 화재로 소실되어 ?坡大師 50)가 중건하였을 때 그 공사에 참여한 지중한 인연으로 계허의 성실성을 높이 인정하여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을 만큼 불량적인 승려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계허대사가 그렇게 형편없는 땡초였다면 환속한 스승이 목수 일을 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몸져 누웠다는 전갈을 받고 대강백 경허가 스승 만화의 허락을 받고 형편없는 스승을 만나러 한 걸음에 찾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훗날 경허가 대오하여 한국 불교의 선중흥조가 되었음은 계허의 역할이 작용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위의 내용은 재검토가 요청된다. 그리고 청계사에 기거했다는 당취승51)도 알려진 것처럼 부정적 인물들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50) 예천 용문사는 870년(경문왕 10년) 두운조사가 창건했다. 1835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역파대사가 상민, 부열 등과 함께 중건했다.
51) ‘땡초'는 ‘땡추'의 잘못된 표현이며, ‘땡추'는 계율을 어기는 승려답지 않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나, 사실은 스님을 얕잡아 부르는 일종의 鄙語이다. 조선시대에 抑佛정책을 실시한 결과 빚어진 말이라 할 수 있다. 간혹 스님들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스개로 ‘땡추승'으로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一說에 의하면, 조선시대 집권층의 排佛내지 불교 탄압에 맞서 일부 강경노선의 승려들이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고 하는데, 그들은 전국 사찰에 걸쳐 조직원을 심었으며, 자타가 이 단체를 ‘黨聚'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당취'에 가입한 스님들을 ‘黨聚僧'이라 하였으며, 이 당취승들은 당시 조정과 산사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던 일반 스님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다.

이 당취승들은 개혁의지를 품은 집단이면서도 국난을 당했을 경우에는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서 義兵僧이 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조선 말기의 의병 활동에도 깊숙이 개입을 했다. 이 ‘당취'가 음운 변화(된소리 되기)를 일으키며, 점차 고유어화하여 ‘땡추'가 되었다. ‘땡추승' 또는 ‘땡추중'을 줄인 말이 ‘땡중'인 바,이들의 ‘당취 운동'을 우스개로 ‘땡중 운동'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배경에서 출가한 경허의 또 다른 환채를 보면52) 경허가 삼수갑산으로 떠난 유랑이 상채임을 또 다른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허는 호서를 너무도 사랑했다. 특히 천장암53)은 하늘이 감춘절로 오직 경허에게만 허락했다. 결코 호서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호서는 그의 영원한 고향이다. 도를 이루고, 보임하고, 법을 펼치고, 선풍을 휘날리던 곳이다. 아래의 경허 시에서 경허가 호서지방을 어떻게 대하였나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허는 가야산54)을 끝내 떠났다.

 

52) 경허의 시 <진응강백답송>은 환채의 노래이다. 대승불교는 계율의 존립과 전개를 ‘인간은 번뇌의 오물에 더럽혀져 있지만 오물 자체는 아니다’ 라는 불교의 유심론적 기반과 妄見의 극복을 반야의 지혜에서 찾고 있다. 즉 번뇌망상을 극복한 것이 청정이며, 마음의 미혹을 초극한 것 청정이라고 설한다.
53) 천장암은 1988년 전통사찰 제42호로 지정되어 천장사로 불려진다. 연암산에 있는 천장사는 백제 무왕34년(633)에 담화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하며, 조선 말기 고종 순종 때 경허가 이 사찰에 기거하며 수도하였고 또한 그의 제자인 수월, 혜월, 만공의 수행처로 알려졌다.
54) 가야산은 충남 서산시와 예산군에 걸쳐 있는 금북정맥의 자락이다.

 

"지나간 영고들 모두가 괴롭구나. 가야산 속에 들어 깊은 이치 찾아볼까.

꽃 피는 곳 새의 노래 하염없는 이 마음 밝은 달 맑은 바람도의 벗 만족해라.

더구나 가비라성 보계 장엄 둘러 있고, 법황의 지극한 방편 미한 중생을 제도하니

지금부터 이 납승은 이곳을 보수하여 이 산을 지키다가 이 몸 늙어지기를."55)

55) ?진흙소의 울음? p.303.

 

경허는 호서를 사랑했다. 경허는 오도 이후 1898년 해인사에 주석하기 전까지 호서에 머무르며 선풍을 드날렸다. 서산 가야산은56) 경허가 도를 이루고 보림을 하던 천장암이 있고, 부석사와57) 개심사가58)가 있고, 또한 정혜사가 있는 중심이다.

경허가 ‘지금부터 이 납승은 이곳을 보수하여 이 산을 지키다가 이 몸 늙어지기를…’ 운운 하였던 것에서 보이듯 경허는 호서를 사랑했고, 심지어는 <海印寺修禪社芳啣引序文>에서도 자신을 ‘호서로 돌아가는 병든 중(湖西歸病禿)’이라 적었다. 하지만 경허는 자신이 이미 상채의 길로 나설 것을 예견했다. 그의 숙업은 바로 삼수갑산행이다. 이제 그는 환채인 빚을 갚으러 머나먼 상채의 길을 막 떠나려고 하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꺼이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기약 없는 여행을 가야만 했다.

1903년(光武7年) 가을, 경허는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를 들러 젊은 날의 수행처였던 영원한 고향인 천장암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 자신의 상채가 기다리는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이 경허 그만의 상채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채를 받을 뿐이다. 보원행이다. 그는 인과를 알았고, 인연을 소중히 하였다. 경허의 宿緣이었다. 경허는 소중한 인연을 찾아 북방행 인연처인 선비고을 삼수갑산을 결심하고 때가 되어 수순에 따라 결행하게 되었다고 본다.

 

56) 수덕사가 소재하는 뒷산이다.
57)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島飛山자락에 있으며 修德寺의 말사이다.
58)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 자락에 있다.

 

 

산중에서 나무꾼을 만나 잠시 이야기함도
또한 인연이거늘 요즈음은 선비 고을에 놀다가
석양 하늘에 내려가네.…59)

59) 경허, ?마음 꽃?, 명정 역, 고요아침, 2002, p.132.

 

경허는 ‘천성이 세간의 티끌 속에 섞이기를 좋아하고 여기에 더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를 평했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스스로가 떠나려 함을 암시한다. 경허는 자신을 비난하는 현실도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환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경허는 그해 겨울 안거를 한암 중원과 함께 보냈다.

《경허집》은 경허가 해인사에서 다시 만난 한암과 작별하면서 준 <법자 한암에게 준다(輿法子漢巖)>는 글을 싣고 있다.

그 글에서 경허는 “옛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遠開士(한암)가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知音이 되랴. 그래서 이제 시 한 수 지어서 뒷날까지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라고 하였다.60)

60) 윤창화, 鏡虛의 지음자(知音者) 漢岩?한암사상? 4, 2011 참조.

 

그러면서 아래의 시를 한암에게 주었다.

 

捲將窮髮垂天翼

?向?楡且幾時
分離尙矣非難事

所慮浮生杳後期

 

이 시에는 깨친 선승답지 않게 세속의 이별을 너무도 아쉬워하는 경허의 인간적인 끈끈함이 묻어있다. 이것이 한암과의 전생의 습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환채의 단서가 나온다. 경허는 유독 한암을 아꼈지만 그래도 끝내는 혼자서 자신의 길을 향해서 가야 했을 것이다.

 

 

2. 살인 혐의

 

경허의 상채를 부추기는 또 하나 결정적인 중요한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경허의 살인 혐의라고 본다. 살인혐의란 개인의 인간 삶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더구나 대선승인 경허에게 있어서는 가장 치명적인 사건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진의는 차치하고라도 경허 상채 중 가장 비중 있는 상채인 삼수갑산행을 부추기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61)

아무리 확철대오한 경허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고뇌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애행을 하였지만 주색을 탐하고, 막행막식하며, 거침없이 파계행을 한다고 몰아붙이는 세간의 비난도 변명하지 않았던 그의 성품에서 본다면 살인 누명은 마음속 비통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경허는 비애를 느끼고 고뇌를 삭혔을 것이다. 시비와 비난을 벗어나 속세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것은 경허의 가장 비중있는 상채 길이라고 본다. 아래의 시는<偶吟,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24번째 시인데, 언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호서 일대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61) 수덕사 판, 『경허법어』, p.636, 일화편.

 

인심은 사납기가 맹호(猛虎)와 같아서
악(惡)하고 독(毒)한 것이 하늘을 찌른다.
학은 짝과 함께 구름 밖에서 노니는데,
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꼬?62)

 

62) 경허, “人心如猛虎毒惡徹天飛伴鶴隨雲外此身孰與歸.” 『경허집』 (선학원판) ; 『한불전』11권, 1991, p.615, 하단.

 

여기에서 그의 고독이 짙게 느껴진다고 볼 수 있다. 함께 노닐 수 있는 지음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자신을 두고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는 혹평의 엄혹함에 대해서도 의식하고 있음도 보인다. 여기서도 그의 은둔하고자 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음이다. 도를 깨친 대선사에게 이젠 살인 누명까지 서슴없이 뒤집어씌우다니 인심 한번 참으로 고약하다고 느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게 경허가 갚아야할 상채라고 본다. 경허는 이를 소리 없이 받아 드리려한다.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고 떠났다고 볼 수 있다.63)

 

만공에게 있어서도 경허의 잠적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표면상 경허가 자신의 행적을 감추고 은둔할 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허의 생애 중 그가 남긴 행장 중에서 가장 비난 받고, 험담을 많이 받은 것이 살인누명이다. 만약 경허가 이 누명을 벗지 못하였더라면 오늘날에도 그의 위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세의 선승 경허는 살인범이자 떠돌이 객승으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비록 경허가 살인 혐의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수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대도를 성취한 그의 거침없는 성품에 구속된 마음의 상처는 이 세상의 한없는 회의를 느끼고 그의 유랑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정해진 수순이다. 전생의 상채다. 제법 비중이 있는 묵은 빚이다. 물론 그 후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진범이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경허의 악소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범인 김도영64)과 상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허는 묵묵히 보원행을 행할 뿐이다. 하물며 선승의 ‘살인혐의’에 있어서랴. 이것이 경허삼수 갑산을 재촉하게 되는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63) 정휴, ?슬플 때 마다 우리 곁에 오는 超人?, 불교시대사, 1992, p.9.
64) ?현대불교? 경허스님 열반 100주년, <경허스님 수행 일화, 26> (2012.6.1).

 

 

3. 상채의 대장정, 三水甲山行

 

경허에게서는 老子와 莊子의 영향이 드러난다.65) 그래도 자세히 관찰하면 자유로운 장자적 성격이 조금 더 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타고난 성품으로 생래적 본성이 장자와 더 잘 계합된다. 외모 또한 구척장신의 우람한 체구에 목소리 또한 우렁차서 많은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비록 대선승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자유로운 세간의 저잣거리를 꿈꾸는 시인의 감수성도 생래적이다. 경허는 상채를 이미 떠나기로 모든 결심을 굳히고 해인사를 떠난다. 그래서 법제자 한암과의 이별을 너무도 아쉬워한다.

이제 경허는 그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그의 마지막 종착지인 천장암에 들렀다. 이는 그가 상채의 길을 작정하고 그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비장한 행보다. 경허는 북쪽 먼 길의 행장인 상채의 길을 누더기 한 벌, 지팡이 하나, 나막신 한 켤레로 벗을 삼는다.

 

氷布長江雪滿臺公村二月客重來
白日將和春可詠紅顔更借老宣盃
故人情契千金在遼塞行裝一?開
天惜吾人無樂事也留烟月共徘徊66)

장강에 얼음 얼리고 누대에 백설이 가득한데 2월의 산 마을에 객이 다시 찾아왔네.

…(중략)…
북쪽 먼길 행장이란 나막신 하나뿐인데,
하늘도 우리의 끝없는 즐거움을 아는 긋
구름과 달 머물게 하여 서로 배회하는구나.

 

65) 이덕진, 경허의 법화와 행리 ?불교평론? 10, 2002, pp.306-307.

66) ?진흙소의 울음?, p.386.

 

경허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906년 61세 노령의 나이를 뒤로 하고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오지의 북방고원에 자신을 묻어 버린 것일까? 이는 상채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삼수갑산이란 곳은 어떤 장소인가. 우리 속담에 아주 최악의 상황으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을 때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하고나 보자는 말이 있다. 즉,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하고나 죽자는 이런 막다른 곳이 바로 그곳이다.

경허가 글방선생 하던 웅이면 소재지는 지도상에서는 까마득히 처박혀 있어서 찾기 어려운 곳이다. 그 곳이 경허가 승려의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유생의 모습으로 아이들 글공부나 가르치면서 말년을 마감했던 곳이다. 여기에서 경허다움이 나온다. 전생의 인연있는 상채다. 예로부터 악명 높은 유배지이다. 유배지로 악명이 높아서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했다. 귀양 갔던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얼어 죽거나 아니면 범에게 물려 죽는 등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지대 겨울에는 평균기
온 영하 20도 정도에 이른다. 이곳을 경허는 정착지로 택하고 또한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몸을 눕힌다. 경허는 이곳 삼수갑산에서 쓸쓸히 입적했다. 그는 자신의 묵은 빚을 다 갚고 갔다. 본연의 자성불로 돌아간 진정한 상채의 행위 그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자연스런 상채이다.

 

그래서 경허가 그의 마지막 행선지로 삼수갑산을 택하고 그 곳에 머물다 삶을 마감한 일은 하등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1,350리나 떨어진 변방의 오지인 이곳에 경허가 와서 열반에 든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분명 경허는 전생에 조선말 최고의 지식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곳곳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경허는 장자를 萬讀한 문장가이고 ?유교ㆍ도교 등의 방면에서도 해박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유학자인 많은 선비들과 교류하며 유관을 쓰고 살았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李彦迪67)은 1547년 강계로 유배 와서 삶을 마쳤으며, 시인 松江鄭徹68)등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중앙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에서 돌아갈 때를 기다리며 여한을 삭혔다. 또한 삼수갑산 시절의 경허가 남긴 시속에는 마치 정철의 관동별곡을 읽는 듯한 착각을 곳곳에서 만난다.
경허의 유랑의 삶 속에는 언제나 유생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전생부터 경허가 맺어온 지중한 인연들이었음에 틀림없다.

 

67) 이언적은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6년 후인 1553년 세상을 떠났다.
68) 56세인 선조 24년(1591년)에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다가 명천, 진주, 강계 등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새 문화나 구식 둘 다 싫으니 통음하여 단번에 시비를 모두 잊네.
마르던 속에 훈훈히 술기운 도니 야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을 것 같구나.
상한 마음병이 들어 어느덧 늙었건만 기쁘다. 영묘한 싹 비를 맞아 싱싱하구나.
누가 내 주머니 속에 寶藏의 비결 감추어진걸 알리오?
어떤 때에는 가사장삼 가볍게입어 보네.69)

69) ?진흙소의 울음? p.386.

 

경허는 자신이 상계의 진선인데 黃庭經일자를 잘못 읽어 인간에 내려온 정철인양 ‘야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을 것 같구나’라고 읊고 있다. 경허는 금생의 뛰어난 문장력과 문필로 보아 전생에 학문을 드날리던 대유학자이며 대 문장가였음에 틀림없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는 금생에는 출가하여 대도를 성취한 승려로 근세 한국 불교 최고의 선승으로 거듭 태어난다. 이 모두가 전생 숙업으로 이루어진 인연의 소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말년의 삶을 경허는 유생으로 살지만 승려의 본분 끄나풀은 놓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경허는 많은 유학자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나눈다. 주로 학식 있는 걸출한 자 들이었다. 이들은 전생의 숙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인연들이었을 것임이 짐작된다.
그래서 경허는 호서를 떠나 머나먼 이곳까지 흘러 왔을 것이다. 묵은 빚들이 있는 곳 갑산이기 때문이다. 경허는 삼수갑산 지역에 만난 대상자 26명에 달한다고 한다.70)

경허와 시를 주고받은 이들이 26명 뿐이겠는가? 그들은 대부분 지방의 선비, 상인, 지주, 學塾에서 학생들
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그들은 하늘 끝의 낭떠러지를 홀로 떠도는 경허에게 숙연이 남아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경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밥과 술, 잠잘 곳을 신세지며 방랑객으로 떠돌았다는 처연한 사실이 담겨 있지만 이는 상채이다. 또한 상채를 떠난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독한 고독과 극도의 궁핍뿐이었다. 대역죄를 지은 유배자들이 이곳 삼수갑산에서 만난 것은 지독한 고독과 극도의 궁핍뿐이었다. 경허 또한 예외 없이 자신의 상채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因果이었다. 경허는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슬퍼했다. 그는 그의 고향 호서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不歸를 슬퍼했다. 경허는 방랑자의 시름에 젖어 이렇게 노래한다. 나그네로 떠돌다가 이내 몸은 벌써 늙었다고 한탄했다.

70) 위의 일지 책, p.318.
71) 개인적인 업을 별업[別業] 이라고 하고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경허는 병들고 술 취해서 나라 걱정을 잊고자 하였으나 시국을 걱정한들 운수인 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운명으로 돌렸다. 전생의 우국지사이었을 것이다. 우국충정으로 살던 그가 언젠가 이곳에 귀양을 온 것일 것이다. 바로 자신이 상채를 갚듯 나라 또한 숙업의 묵은빚을 갚아야 하는 시절 운수임을 자포자기하듯 받아 들였다. 이 역시 共業71)의 보원행이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여러 편의 우국충정 시가 남아있다.72)

72) 한중광, ?경허?, p.260.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워도 편치 않구나.
지금 이 나라는 염천의 여름이니
원컨대 자비의 구름 곳곳에 펼쳐지이다.

병들고 술 취해서 나라 걱정 잊고자 했더니
시국을 걱정한들 운수인 걸 어찌하랴.

 

또한 경허는 곤궁하고 궁핍한 삶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갔다. 경허가 북방에서 쓴 詩에는 점점 약해져 가는 그의 모습이 포착된다. 백발이 되어 스러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초라해진 모습이 한층 애처롭기만 하다. 경허는 기존의 고승, 큰스님이라는 신분을 잃어버리고 긴 세월 거리로 유랑하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 하고 상채를 행하며 떠돌아다녔다.

길바닥에 쓰러진 경허를 일으키면서 인연이 되어준 김탁은 운명이었다고 본다.73)

73) 위의 책, pp.254-255.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던 경허와 김탁의 만남은 그 후 경허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경허를 돌보며 절친하게 지냈던 김탁은 在俗의 전법제자가 되어 그의 가족은 경허를 극진히 모신다. 김탁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는 인물로 경허의 비중 있는 상채이다. 어쩌면 경허가 김탁을 만나러 그 북방고원까지 흘러 들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김탁과 경허의 인연은 참으로 지중하다. 김탁을 만난 경허는 그와 주변 선비들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강계 용문동에 ‘용포서당’을 개설했다. 호구지책이었다. 그리하여 경허는 머나먼 땅 강계 김탁의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르며 인연 따라 서당을 개설하여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후 아득령을 넘고 장진을 거쳐 갑산에 도착한 경허는 그의 마지막 정착지인 熊耳坊道下洞에서 두번째 서당을 개설한다. 갑산 일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공부를 마치면 거리에서 장터에서 유생및 농민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하며 주체할 수 없는 시상으로 수많은 시를 썼다. 전생의 습기이었다. 경허는 대유학자이었고 대문장가의 체질을 넘치도록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자유를 갈구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버리기 위한 경허의 행보는 드디어 그의 姓과 이름을 과감히 내던지고 박난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신했다.

마침내 그는 진정한 大自由人이 되었다. 박난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김탁과의 첫 만남 이후로 기록되어 있다. 그 많은 성 중에서 朴씨를 택한 것은 그의 모친 密陽朴씨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朴씨 姓은 母親의 姓을 따라 빌어온 것이라 치더라도 하필이면 왜 계집의 냄새가 풍기는 난주란 말인가?

이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기에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지만 짐작컨대 蘭자는 경허가 전생에 儒生으로 살던 習으로 인하여 선비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四君子, 즉 梅蘭菊竹중에서 蘭자를 도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또한 박난주 마지막 글자인 주에 대해서는 더욱 혼미케 한다.74)

74) 그가 머물던 지역인 江州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이름 끝에 州를 작명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경허의 한문이 어찌 되었든 경허는 경허다. 박난주(朴蘭州)건 박난주(朴蘭柱)건 상관없이 이제 상채 대장정의 마지막 부분으로 경허의 여인과의 인과를 살펴보겠다.

상채여행 중에 경허는 기다리고 있는 인연을 만난다. 바로 기생 雲坡이다. 경허에게 있어 여인의 만남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必然일 것이다. 어쩌면 기생 雲坡또한 경허를 삼수갑산으로 강하게 끌어 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경허가 남긴 운파에 관한 시를 보면 짧은 만남이지만 필연적인 운명으로 이해된다.

 

 

운파의 별장을 찾아서(訪雲坡林莊)

우연히 한 번 만난 인연 또한 정해진 운명인 듯
향기로운 머리태에 아름다운 머리장식이여
양대에 구름과 비는 아침 저녁으로 뿌리고
볕든 잎 황폐한 숲에는 늦여름이 길구나.
낙포의 기러기는 용처럼 나네.
맑은 안개 흐르는 물은 옛 성을 들러 가는데

이별의 아쉬움 안타까워 남은 술 다 마시고
뜬 인생 이 자리에 남은 생을 한탄하네.

邂逅一緣定亦天

香髮隨后?冠前
陽臺雲雨燐朝暮

洛浦鴻龍沓婉翩
病葉荒林長夏?

淡煙逝水古城邊
惜別依依樽酒了

浮生此席感餘生75)

75) ?진흙소의 울음?, pp.376-377.

 

상채의 대장정에 올랐던 경허가 이제 9년여의 긴 여행의 나래를 접고 이제 본래의 면목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의 마지막 상채는 글방선생이었다. 경허는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입적하기 전날, 경허는 아이들이 서당 뜨락의 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아, 참 피곤하구나.”라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의 푸른 여명이 창호지에 스며들 때, 경허는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잡고 게송을 썼다.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心月孤圓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光呑萬像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光境俱忘
이는 다시 무엇인가                      復是何物76)

76) 이흥우의 책, p.323.

 

늙고 병든 鏡虛는 자신의 몸을 가누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천하의 대 문장가 경허는 자신의 涅槃頌을 스스로 남길만한 육신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가뿐 숨을 몰아쉬며 盤山寶積77)의 오도송을 간신히 기억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세의 위대한 대선사 대문장가 경허는 자신의 涅槃頌으로 自作을 남기지 못할 만큼 시간이 없었다. 안타까운 귀결이다. 하지만 이 또한 참으로 경허답다고 생각한다.

경허는 마지막까지 전혀 가식적이지 않은 천진불의 모습으로 오롯이 자신을 드러냈다. 앉은 채로 열반한 경허의 시신을 동네 사람들은 간소하게 유교식으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모두 다 경허와 상채를 나눈 인연들이었을 것이다. 확연하게 도를 깨친 대선승의 열반이 다비가 아니다. 장례식 또한 철저하게 유교식으로 치러졌다. 경허는 유교, 도교에도 지중한 전생의 상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탁과 마을 사람들은 유교식으로 장례를 지냈다. 갑산의 難德山에 경허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김탁은 경허의 유언에 의거하여 관 속에 담뱃대와 쌈지를 함께 넣어 매장했다.78)

담뱃대와 쌈지로 경허는 그의 법상좌를 기다리고 있었다.79) 이제 경허의 상채 여행은 막을 내렸고 경허는 묵은 빚을 다 갚고 보원행을 회향했다.80)

 

말년에 안변 석왕사 개금불사를 끝으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甲山· 江界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儒冠을 쓴 모습으로 박난주로 살았던 경허는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그의 상징처럼 붕새81)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났다. 경허상채의 대장정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77) 마조도일의 제자, 시호 凝寂(?전등록?권10, p.186).

78) 한중광의 ?경허?, p.286.
79) ?진흙소의 울음?, pp.85-86.
80) 일지의 ?경허?, p.336.
81) ?莊子? <소요유편>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붕새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존재를 의미한다.

 

 

Ⅳ. 결론

 

한국 근대 선불교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의 본래면목을 찾고, 재조명하려는 차원에서 필자는 ‘상채사상’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그 관점으로 삼수갑산행을 서술하였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경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경허는 주지하다시피 한국근대 불교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고승, 선지식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허는 술과 고기를 먹고, 어떤 사연에서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동침도 하고, 여인을 희롱하다가 몰매도 맞는 등 파격적인 면모를 거침없이 보였다. 심지어 말년에는 대자유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유관을 쓰고 박난주로 개명하여 서당훈장을 하다가 입적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채의 모습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가 주장한 경허의 삼수갑산행이 바로 경허의 상채임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껏 학계에서는 경허의 말년을 깨친 자로서의 걸림 없는 무애행의 표상으로 화광동진과 이류중행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경허는 깨친 이후에도 끊임없이 본인의 업장을 녹이기 위해 고뇌하고 분투하였다. 그것이 상채의 수행이었고 보원행의 수행의 연속이었음을 필자는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경허의 말년을 그런 자연스런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특히 삼수갑산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행적이라기보다는 상채의 행위를 통하여 구업을 녹이는 수행이다.

 

둘째, 필자는 그동안 경허의 무애행에 대한 편견 및 잘못된 이해가 적지 않았다고 보았다. 특히 경허 열반 100주년에 발표된 윤창화의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경허의 삼수갑산행에 대해서는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윤창화는 검증되지 않은 풍문으로 떠도는 말들을 적은 김태흡의82) 글83)에 의지하여 그것이 진실인양 논고를 집필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비판하고, 말년에 행해진 선사의 상채 부분을 통해 선사의 말년의 행적을 재인식하고자 하였다. 즉 경허를 왜곡되고 부정적 삶으로 보기보다는 긍정적이고 넓은 안목으로 이해하여 경허를 한국불교의 중흥조로서 위상이 정립되도록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특히 윤창화의 논문 속에서 경허를 심히 왜곡한 부분은84) 동의할 수 없다.

필자는 경허의 행적 및 사상이 객관적, 학문적인 차원에서 분석, 비평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선가의 상채사상을 갖고 경허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했다.

 

필자는 경허를 是非, 染淨, 生死, 僧俗이 다 끊어진 절대 無位眞人으로서 ‘隨處作主立處皆眞’의 그 당체로 본다. 경허의 행리는 범부의 견해로는 감히 그 깊은 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경허가 겉으로 드러낸 그 문구 속에는 경허의 심오한 메세지가 있다고 필자는 본다. 그렇지만 경허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 드러난 문구로 경허를 이해하고 폄하하는 오류를 필자는 납득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편협하고 근시안적 시각을 벗어나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경허에 대한 평가는 특히 그의 마지막 수행처인 삼수
갑산행은 경허가 선택하고, 경허가 기꺼이 꾸려간 당당한 경허 상채이었기에 감히 평가라는 말조차 조심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상채라는 관점에서 경허를 이해하자고 강조한다.

 

82) 김태흡에 대한 정보는 임혜봉의 ?친일불교론? (민족사, 1993) 관련 내용 참조.
83) 김태흡, 人間鏡虛― 鏡虛大師一代評傳<1> ?비판? 6호. 1938년 6월호.

84) 윤창화의 글, pp.2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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