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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照心學-고영섭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4.01.18|조회수79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경허의; 조심학-고영섭.pdf

 

 

<차 례 >
Ⅰ. 문제와 구상
Ⅱ. 鮮末 韓初의 살림살이
1. 危局과 國亡
2. 逆行과 弄世
Ⅲ. 照心學의 지형도
1. 照心 개념과 구조
2. 照了와 專精의 논리와 방식
3. 戴角과 被毛와 曳尾의 가풍
Ⅳ. 尋牛行의 확장과 심화
1. 머리의 단계
2. 가슴의 단계
3. 온몸의 단계
Ⅴ. 정리와 맺음
경허의 照心學*124)
- 중세선의 落照와 근대선의 開眼 -
고영섭(동국대학교)
<국문요약>
이 글은 조선불교사의 결론이자 대한불교사의 서론으로 평가되는 경허 성우
(鏡虛惺牛, 1846~1912) 사상의 구조를 분석한 논문이다. 대개 유수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학문적 혹은 사상적 화두를 지니고 있다. 그 화두는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두 측면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이미 오랜 불교사상사가
보여주었듯이 한국의 원효와 지눌 및 휴정의 화두처럼 경허 역시 이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경허는 자신의 화두가 지니고 있는 몸체[體]와 몸짓[用]의 측면을 비추어 깨닫는
‘조료(照了)’ 또는 정밀히 관찰하는 ‘전정(專精)’의 매개항을 통해 회통시켜 가고
* 이 논문은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가 주관한 「제1회 조계종
근현대 불교인물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168 선문화연구 제4집
있다. 그는 자신의 화두를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닫는 ‘조료심원(照了心源)’ 혹
은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는 ‘반조심원(返照心源)’으로 삼았다. 이 화두에서
논자는 ‘조심(照心)’이라는 기호를 적출하여 경허의 사상적 키워드로 삼고 그의
지형도를 그려가고자 했다. 경허 사상의 핵어는 조심(照心)이며, 그의 논리 혹은
논법은 ‘조료’와 ‘전정’이며, 그의 가풍은 미도선(尾塗禪) 또는 예미선(曳尾禪)으로
드러났다.
원효의 일심(一心), 지눌의 진심(眞心), 휴정의 선심(禪心)에 상응하는 경허의
조심(照心)은 ‘비추는 마음’ 혹은 ‘마음을 비추는’ 것으로 그의 사상의 핵어가 된다.
그리고 ‘돌이켜 비추어’[返照] ‘깨달아 사무치는’[了達] 것에서 뽑아낸 ‘조료’ 내지
‘정밀히 관찰하는’ 것에서 적출해낸 ‘전정’[專精]은 조심의 두 측면을 아우르는 매
개항이라고 할 수 있다. 미도선 혹은 예미선은 뿔을 인 머리와 털옷을 입은 가슴
을 넘어 진흙 속에서 중생구제를 위해 꼬리를 끄는 온몸의 선법을 말한다.
그가 20여년 가까이 호서지역에서 보여준 역행(逆行)과 농세(弄世)의 만행은
자신의 깨달음인 ‘조심’에 대한 확인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
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시 현실에 대한 고독의 한 표현이었다. 한편으로는 주체할
수 없는 정신적 지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자 비판이었다.
나아가 당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과 불교계 지도자들을 향한 각성의 촉
구였다. 경허는 1899년부터 약 5년 가까이 지속된 해인사와 범어사 등지에서 이루
어졌던 각종 불사와 결사를 통해 불교의 외연과 성불의 폭을 넓혔으며, 그리고
자신의 본마음을 비추어 보는 ‘조심’의 기호를 통해 이 땅의 불교를 복원시키려
했고 이 땅의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경허의 사상적 벼리인 조심(照心)은 조료(照了)와 전정(專精)의 논리와 방식에
의해 ‘소가 되고 말이 되어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피모대각(被毛戴角)의 보살행
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본성의 소를 찾는 그의 심우행(尋牛行)
은 머리의 단계에서 가슴의 단계를 거쳐 온몸의 단계로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결국 경허는 조료와 전정의 기호를 통해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닫거나’ 또는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소와 말과 같이 남을 이롭
게 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경허는 조심(照心)을
통해 조선 중기 이래 낙조하는 중세선을 대한 초기의 새로운 근대선으로 개안시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69
킬 수 있었다.
주제어: 조심, 조료, 전정, 피모대각, 이류중행, 역행, 농세, 만행, 일심, 무심, 선
심, 미도선, 예미선

 

 

 


Ⅰ. 문제와 구상
麗末 鮮初 이래 이 땅의 불교는 조선 유학의 배타적 흐름 속에서도 가
냘프게나마 그 실존을 유지해 왔다. 정암 조광조에 이어 퇴계 이황과 그
의 학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조선 명종 조 이전까지 조선조 불교는
고려 말기에 등장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陽儒陰佛’ 혹은 ‘外儒內佛’의
사상적 지형을 형성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주목할 것은 ‘退栗’로 대표되는 성리학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불교는 여
전히 고려 이래 지식인들의 보편적 사유였을 뿐만 아니라 일상사의 중심
적 담론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조선 중
기 이전까지는 성리학이 대외적인 통치이념이었지만 실상은 陽儒陰佛
내지 外儒內佛의 정책 속에 있었음이 여러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2)
그러나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타계 이후 퇴계와 율곡 등에 의해 성리
학의 체계가 심화 발전되면서 불교에 대한 유자들의 인식도 점점 더 배
타적이 되어갔다. 나아가 유교성리학 일변도의 분위기가 급속히 형성되
면서 불교와 노장학과 양명학을 異端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
용돌이 속에서도 불교는 성리학의 과도한 주도 속에서 온전히 계승되지
못한 노장학과 양명학과 달리 가냘프게나마 그 지혜의 맥을 이어왔다.
1)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度牒制의 확대와 축소의 과정, 유자들 집안의 불교
적 기원행사 등 여러 불교적 사건과 일상 및 그 사례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2) 졸저, 󰡔한국불학사󰡕 조선·대한시대편(서울: 연기사, 2005).
170 선문화연구 제4집
퇴계와 율곡 등에 의해 성리학의 심성론과 이기론의 논구가 심화 확
장되자 불교계에서도 黙庵最訥(1717~1790)의 󰡔心性論󰡕(消却)과 蓮潭有
一(1720~1799)의 󰡔심성론󰡕(1권, 序文 存) 및 雲峰大智의 󰡔심성론󰡕(1권,
存) 등을 지어냄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유 대론의 입
지를 나름대로 다질 수 있었다.
최눌과 유일은 제자들이 성리학의 심성론에 경사될 것을 염려하여 자
신들의 󰡔심성론󰡕을 스스로 불태워 버리기는 했지만 유교의 주요 담론에
대응하는 불교 담론을 창안함으로써 불교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었
다. 이 담론은 이내 수면 아래로 침잠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대
지의 󰡔심성론󰡕(현존)이 지어졌을 정도로 불유 대론의 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던 사실을 엿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겉과 밖으로 불교를 드러내지 못한 ‘양유음불’ 혹은 ‘외유내불’
의 현실은 결과적으로 불교 교학과 선학의 연찬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
시대 주요 논거가 되는 불교 저술의 경우도 대표적 고승이었던 己和
(1376~1433)와 雪岑(1435~1493)과 普雨(1515~1565) 등 몇몇 승려들의 연
찬이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저술은 질과 양적인 면에서
앞 시대였던 고려대와 신라대에 견주어 매우 미비하였다.
그나마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선맥은 불분명하기는 해도
교학과 달리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 즉 太古普愚‑幻庵混修‑龜谷覺雲의
선맥을 이은 碧溪淨心-碧松智嚴(1464~1534)‑芙蓉靈觀(1485~1571)과 그의
法統과 宗統을 이은 淸虛休靜(1520~1604)과 그 문도들에 의해 새로운 종
통(西山宗)3)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휴정과 그의 문도들로
3) 서산 휴정이나 그의 문도들이 직접적으로 ‘西山宗’이라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당대의 불교 상황을 더듬어 볼 때, 서산의 선맥은 새로운 종통의 확립 이상의
의미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煐泰, 󰡔한국불교사󰡕(서울: 경서원, 1997),
281면. 여기에서 저자는 “휴정은 산승불교의 종통을 굳건히 다져서 慧命을 길
이 계승하게 하였으며 碧松을 初祖로 하고 大慧·高峰을 遠祖로 하는 한 宗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71
부터 파급된 선법은 제법 넓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헌종-철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통 선맥의 연속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한 암흑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러한 분
위기 속에서도 조선 중후기 이래의 선의 가풍을 총섭한 이는 鞭羊彦機
계통을 이은 龍岩慧彦과 그의 계통을 이은 萬化普善의 선맥과 강맥을
이은 鏡虛惺牛(18464)~1912)였다. 경허는 특히 龍岩慧彦을 그의 禪的 源
流라고 밝히면서 그 선맥을 잇는 살림살이를 보여주고 있다.5)
경허의 문하였던 漢巖(1876~1951)이 지은 「선사경허화상행장」에서 “화
상은 청허(淸虛休靜)로부터 11세손이 되며, 환성(喚性志安)으로부터는 7
세손이 된다.”고 했다. 이와 달리 덕숭문중과 耕耘炯埈의 󰡔佛祖源流󰡕(我
編 鏡虛 惺牛 조, 불기 2520년 간)에서는 용암 혜언‑‘영월 봉률‑만화 보
선’‑경허 성우로 이어져 청허로부터 13세손이고 환성으로부터 9세손이라
고 밝히고 있다.
이는 종래의 청허 아래 11세손 설에다 ‘永月奉律과 萬化普善’의 2대를
추가하여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영태 교수는 한암이 지은 “「行狀」
에서의 11세 7세설은 鏡虛自說에 근거하여 道統 곧 法統의 淵源을 정리
한 代數이므로 이를 옳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행장」에서의 11
세 7세설은 嗣法師의 禪脈 중심 법통이며, 덕숭문중의 13세 9세설은 受
業師의 講脈까지 포함한 法系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6)고 언
派(西山宗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山僧佛敎)의 開宗 완성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경허 스스로 밝힌 글들 사이의 정합성을 따져본 결과 그의 생년은 1846년이
분명하다. 졸론, 「경허의 尾塗禪: 法化와 行履의 마찰과 윤활」, 󰡔불교학보󰡕
제40집(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3), 주 4; 졸론, 「경허의 살림살이와 사
고방식: 간경불사와 수선결사의 역사적 의의」,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
허·만공의 선풍과 법맥󰡕(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2008), 25-29면.
5) 漢巖 重遠, 「先師鏡虛和尙行狀」(󰡔韓佛全󰡕 제11책, 654 하면).
6) 金煐泰, 「鏡虛의 韓國佛敎史的 위치」, 󰡔德崇禪學󰡕 제1집(한국불교선학연구원,
172 선문화연구 제4집

 

 

 


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은 득도사와 사법사의 불분명에서 비롯된 것이기보다
는 경허 당시 이 땅의 선맥이 불투명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위의 11세 7세설과 13세 9세설 등이 뒷날 그 계보를 맞추고 이으며 기워
가면서 비로소 확인된 것이듯이 이 시대 선맥은 인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한 측면이 있다. 이는 청허 휴정 이래의 4대 문파와 부휴 선수-벽암
각성을 잇는 7대 문파로 대표되는 중세선의 흐름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불교사의 결론이자 대한불교사의 서론7)이라 할 수 있는 경허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중세선의 낙조를 근대선으로 새롭게 개안시키는 결
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경허 가풍의 키워드인
‘조심(照心)’의 지형도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시들어가
던 중세선이 어떻게 근대선으로 새롭게 눈 떠가는지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급변했던 한말 선초의 전환 속에서 불교의 사상사적 의미
를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선행 연구들8)에서 나타난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 속에 있지
2000), 156-160면.
7) 졸론, 「경허의 尾塗禪」, 󰡔불교학보󰡕 제40집(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3),
127면.
8) 李能和, 󰡔朝鮮佛敎通史󰡕下(서울: 신문관, 1918); 退耕 權相老, 「韓國禪宗略史」, 󰡔백성욱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동국대학교, 1959); 閔泳珪, 「鏡虛堂의
北歸辭」, 󰡔민족과 문화󰡕 제12집(한양대 민족학연구소, 2003); 서경수, 「경허연
구」, 󰡔석림󰡕 제3집, 1969; 서경수, 󰡔불교철학의 한국적 전개󰡕(서울: 불광출판
부, 1990); 晦明, 󰡔회명문집󰡕, 권태영 편역(양산 통도사: 四溟庵, 1991); 「龍城
法語」, 󰡔龍城大宗師全集󰡕 제1책(서울: 용성대종사전집간행위, 1992); 李興雨, 󰡔경허선사: 공성의 피안길󰡕(서울: 민족사, 1996); 金知見, 「鏡虛禪師散考」, 󰡔禪
武學術論集󰡕 제5집, 1995; 高翊晋, 「경허당 惺牛의 兜率易生論과 그 시대적
의의」, 󰡔한국미륵사상연구󰡕(서울: 동국대 출판부, 1987); 이성타, 「경허의 선
사상」, 󰡔숭산 박길진박사화갑기념󰡕(한국불교사상사, 1975); 崔炳憲, 「近代 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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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 극단에는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그 지점이 경허를 새롭게
발견하는 대목이 될 것이라고 논자는 생각한다.
Ⅱ. 鮮末 韓初의 살림살이
1. 危局과 國亡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 마지막 승차를 마친 일본은 에도(江戶) 막부
말기의 분립을 무혈전쟁으로 마무리지었다. 이즈음 미국의 교역 제안을
(1846) 불허했던 일본은 다시 화친조약(1854.3)을 맺음으로써 재빠르게
미국 제국주의의 노하우를 습득해 갔다. 뒤이어 메이지 유신(1868)을 성
공시킨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서 구라파로 들어서는’(脫亞入歐) 정책
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德崇禪學󰡕 제1집(한국불교선학연구원,
2000); 허우성, 「佛祖慧命의 계승과 萬行: 경허 불교 이해에 대한 한 시론」, 경
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편, 󰡔인문학연구󰡕 3, 1999; 김경집, 「경허의 정혜결사
와 그 사상적 의의」, 󰡔한국불교학󰡕 제21집, 1996; 김경집, 「경허의 선교관 연
구」, 󰡔한국사상사학󰡕 9, 한국사상사학회, 1997; 一指,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
처󰡕(서울: 민족사, 2001); 韓重光, 「경허의 선사상: 頓漸觀을 중심으로」, 󰡔백련
불교논집󰡕 5·6집, 1996; 한중광, 󰡔경허: 부처의 거울 중생의 허공󰡕(서울: 한길
사, 2001); 이덕진, 「경허의 법화와 행리: 그 빛과 어둠의 이중주」, 󰡔불교평론󰡕
10, 2002; 졸론, 「경허의 尾塗禪: 法化와 行履의 마찰과 윤활」, 󰡔불교학보󰡕 제
40집(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3); 졸론, 「경허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
간경불사와 수선결사의 역사적 의의」,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허·만공
의 선풍과 법맥󰡕(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2008); 박재현, 「구한말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에 대한 이해: 송경허의 선사상을 중심으로」, 󰡔철학󰡕 제
89호(한국철학회, 2006); 박재현, 「방한암의 禪的 지향점과 역할의식에 관한
연구」, 󰡔철학사상󰡕 제23호(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6); 졸론, 「한암의 一鉢
禪」, 󰡔한암사상󰡕 제2집(한암사상연구회, 2007); 졸고, 「漢巖과 呑虛의 불교관:
해탈관과 생사관의 동처와 부동처」, 󰡔종교교육학연구󰡕 제26권, 2008.
174 선문화연구 제4집
을 펴나갔다.
나아가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해 가면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응
하여 아시아의 창구를 단일화하고 독점해갔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반
도를 필두로 하여 청나라와 로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을 향해 무한
제국으로 확장해 나갔다. 특히 그들은 임진왜란 때 실패했던 조선반도
및 만주지역을 재정벌하기 위해 당시 막부 치하에서 위기에 몰려있던
불교계의 정토종과 일련종 및 조동종 등 몇몇 종파를 대륙정벌의 첨병
으로 삼았다.
메이지 정부의 조선 침략정책은 강화도 앞바다의 수심을 재며 접근하
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여전히 소중화의
‘의리론’에 매달려 있었다. 뒤이어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금수로 돌변
한 일본의 노회한 전략에 대책없이 말려들어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었
다. 나라는 위급한 시국과 국면에 접어들었고 점차 國亡의 기운이 드리
워져 갔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의 공방전에서 밀리며 평등하지 않은 강
화도 조약(1876)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경허는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바로 이 시기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게 전환되고 있을 때 그는
동학사 조사당(현재의 만일선원)에서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潙山靈祐의
제자였던 福州의 靈雲志勤선사가 어떤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말했을
때 답했던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驢事未去] 말의 일이 생겼구나[馬
事到來]”라는 화두를 들고 3개월 동안 선정에 들어있다가 마음 속에 얽혔
던 의단을 한꺼번에 풀어내고 있었다.
學明道一 선사와 이진사(李進士, 아마 李枕山 居士인 듯)의 대화 속에
서 나온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한 마디에 경허는 활연
대오하였다. 그는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라는 이 의단을 타파함으로
써(1879년 11월 보름께) ‘천하대지가 송두리째 빠지고, 物我가 함께 空하
여 百千法門과 無量妙義가 이 한 생각에 문득 재가 되어 버렸다.’9) 그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75
뒤 몰아쳐오는 조선의 위기를 바라보며 逆行과 弄世의 만행을 펼치기
시작한다.
교단이 부재한 현실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처럼 국왕이 부여한
도총섭의 직함을 가지고 승병을 일으킬 수 없었던 현실이 경허에게 어
떻게 다가왔을까. 八賤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승려로
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경허는 역행과 농세의 만
행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아마도 이것은 주체를 깨달은 이가
느끼는 고독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비교적 한말에 두드러지는 그의 역행은 아마도 나라가 망해가는 위국
의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몸부림으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어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립하
며 세월을 소모만 해 가고 있는 당시의 위정자들과 불교계의 지도자들
에게 보내는 각성의 촉구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허의 역행과 농세가 위국의 현실에 대한 절망의 몸부림과 위정자들
과 불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각성의 촉구였지만 그는 깨어 있었다. 어느
날 맨발로 떡과 과자가 든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馬亭嶺을 넘어올 때
였다. 마침 주위의 아이들을 불러 자신을 때리기만 하면 수고한 댓가로
자루에 든 과자와 돈을 준다고 했다.
아이들은 주장자를 받아 그를 때렸다. 그러자 경허는 “너희들은 나를
때리지 못하였느니라. 만일 때렸다면 부처도 때리고 또한 조사도 때리
고, 또한 삼세 제불과 역대 조사 내지 천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때려
갈길 것이니라.”10)고 포효했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넘어가며 경허는 “온 세상 혼탁하니 나만 홀로 깨
었어라[擧世渾然我獨醒] 수풀 아래 남은 세월 내 멋대로 보내리라[不如
林下度殘年]”11)고 한 곡조를 뽑아냈다. 온 세상[擧世]의 흐름이 危局과
9) 鏡虛, 󰡔鏡虛法語: 진흙소의 울음󰡕, 眞性 圓潭(서울: 홍법원, 1990), 81면.
10) 鏡虛, 「於摩亭嶺與樵童問答」, 󰡔鏡虛集󰡕(󰡔韓佛全󰡕 제11책, 596 중면).
176 선문화연구 제4집
國亡으로 나아가 혼탁하였지만[渾然] 그는 ‘잠’들지 않고 깨어있었다. 그
의 걸림없는 역행과 농세는 일상인들의 역행과 농세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소리 없는 하늘에 호소하느니
오색 구름 이은 용헌을 치는구나
가련타 내 신세여, 정월 초하룻날 타향 나그네
다행히도 이 산에는 예의를 숭상하는 곳이로구나
연두에 맑은 복이 퍼져 건강한 몸 즐거운 마음
역병 고치려 약소주 마시니 술은 벌써 흔적도 없네
소치는 아이들은 조국 흥망을 모르는 듯
피리 불고 북 치며 노래하는 소리 온 마을 문전마다 들리네12)
어느 날 갑자기 불교 집안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경허는 수년 뒤 삼수
갑산 일대를 떠돌며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 朴蘭州가 되었다. 외세의
침입으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조국의 흥망’[邦家恨]을 알 리 없는 작
은 마을에는 천진무구한 목동들이 피리 불고 북치며 노래하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경허는 이 시에서 ‘방가한’이란 표현으로 조국 흥망
의 안타까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곳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 둥지를 틀고 고향을 떠난 소
회를 읊고 있다. 머나먼 타향에서나마 예의를 숭상하는 착한 백성들을
보며 회한에 들고 있다. 이 시에서 경허가 만년에 이곳에서 머물며 교유
했던 김담여(金談如) 등과 대작하면서 남긴 7언 율시 중의 세 편에는 ‘도
의 이상향’인 ‘무하향’(無何鄕)의 경지가 진하게 배어나오고 있다.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를 타파한 경
11) 鏡虛, 같은 글.
12) 鏡虛, 「초하룻날」, 앞의 책, 358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77
허에게는 고향이니 타향이니 하는 구분은 물론 차안이다 피안이다 하는
구분도 없었다.13) 몸체[體]의 입장에서 보여지는 경허의 가풍은 이와 같
이 여실하였다. 하지만 몸짓[用] 입장에서 드러나는 그의 가풍은 구분이
있었다. 아래 시에는 위국과 국망을 고통스러워하는 마음과 나라를 팔
아먹으려는 이들에 대한 경허의 분노가 표현되어 있다.
둥둥둥 북을 치며 모두 모여 봄을 노래하고
제비가 날아오니 한 경치 깊어지는구나
진흙을 물어다 집질 줄 아니 사람들은 저마다 기뻐 아끼고
경쾌한 몸 놀려 온 세상 돌아쳐도 걸림이 없구나
가는 비 처마 끝에 내려 여름 나무 무성히 뻗어 있고
마을 골목 거리엔 맑은 바람 가을 기운 도는구나
은혜를 저버리고 의를 등지는 용렬한 인간들이여
미물 짐승들도 주인 찾는 마음에 부끄럽지 않은가14)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선초 한말의 대한시대에도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은
혜를 배반하고[辜恩] 의리를 등지는[負義] 기회주의적 인간들’[塵間客]이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작은 짐승들[微虫]도 주인을 찾
는 마음이 있거늘[訪主心]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지[慙愧]를 되묻고
있다.
눈 뜬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불교계의 현실을 바라
보며 경허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은 이 대목에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러한 소회들은 모두 선정의 몸체[定]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몸짓[慧]에서 나오는 것들로 보인다. 경허는 나라의
13) 鏡虛, 「타향살이 곧 내 집 살림」, 앞의 책, 88면.
14) 鏡虛, 「제비」, 앞의 책, 359면.
178 선문화연구 제4집
운명이 위급해져 가는 한말의 어둠 속에서도 그렇게 깨어 있었다. 하지
만 임란과 호란 때처럼 국왕이 팔도선교도총섭을 제수하여 국난을 헤쳐
나가게 해 주었던 사실과 달리 오늘 자신의 ‘깸’이 국망으로 치달아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절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조선 정세는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 때처럼 외적을 방어할 정
치적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동시에 불교계 역시 지난 몇 백여
년간 교단을 해체당하여 이미 구심이 없었다. 때문에 불교계 안팎의 현
실은 이미 ‘깸’이 사회화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동
시에 교단 밖의 위정척사운동과 동학농민봉기(1894)의 현실과 달리 억
눌려 왔던 불교계는 나라의 위급에 공동대처할 주체가 공식적으로 부재
하였다.
그리하여 경허는 ‘눈 뜬 자’로서의 고독을 저 밑바닥에서 경험하면서
‘내 멋대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때문에 셀 수 없이 드러난 역행과 농
세는 국망을 앞둔 눈 뜬 자로서의 고독의 한 표현으로 읽을 수밖에 없
다. 이러한 가풍은 훗날 ‘진실로 깨친 이가 자기 학대를 하고 분노를 일
으킬 수 있는가’라는 반문 등 많은 오해와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겨 보지 못한 이들이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역사의식과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깨침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나라를 잃은 시대에 살아보지 않고서 주체를 괄호 친 채로
살아가는 이들의 대상화된 물음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얼마만큼 이바지
할 수 있겠는가.
2. 逆行과 弄世
경허의 역행과 농세는 이십여 년 간 이루어졌지만 만년의 많은 부분
은 애제자 만공과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79
물론 그 밖의 것도 있겠지만 현존하는 일화나 기록들이 대부분 만공에
의해 구술되거나 기록된 것들뿐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경허의 역
행과 농세의 만행은 위국과 국망을 맞이한 눈뜬 자의 고독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만행 뒤에 만공에게 자주 반복해 말하는 “내 (재주)가
어지간하지.”15)라는 말은 기지나 재치를 단순히 성공시킨 뒤의 순진무
구한 자화자찬이라고만 넘길 수 있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오랫동안 만행을 다니다 다리가 아파 한 발짝도 옮겨 놓기 힘들어하
는 만공을 위해 그 스스로 우물에서 길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가는 처
녀의 양귀를 잡고 입을 맞춤으로써 동네 청년들에게 쫓겨 다리 아픈 줄
도 모르고 빨리 걷게 한 일화16)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무애행이자
역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단지 이성을 가까이 한 파계행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서산 개심사의 조실로 있을 때 시자인 사미승 경환을 시켜 東隱 주지
의 방에 저장된 쌀을 가져오라 하면서 “너무 정직하기만 한 것도 못 쓰는
것이니라. 정직한 체, 청정한 체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무서운 도구가
되어지느니라. 알겠느냐?”라고 말하거나, 또 주지에게 실토하여 쌀을 가
져오자 “그 쌀을 가지고 아래 동네에 내려가 어서 막걸리를 사 오너라.”
고 분부를 내리는 일화17)는 그가 벌인 대표적인 농세의 예들이다.
을사늑약(1905, 광무9년) 이후 일본 경찰이 우리나라 치안을 담당해
갈 때였다. 비로관을 크게 만들어 쓰고 검은 장삼을 걸친 경허가 맨발로
한 손에는 담뱃대를 들고 한 손에는 시뻘건 고기를 주장자에 매달고 거
리를 누비고 있었다. 마침 순찰하던 헌병보조원 두 명이 정체불명의 행
15) 鏡虛, 「주막집 주인에게 호령을 하다」, 앞의 책, 58면; 鏡虛, 「길을 빨리 걷게
한 弄世」, 앞의 책, 62면; 鏡虛, 「쌀자루」, 앞의 책, 75면; 鏡虛, 「관헌에 잡혀
서」, 앞의 책, 36면.
16) 鏡虛, 「길을 빨리 걷게 한 弄世」, 앞의 책, 61-62면.
17) 鏡虛, 「쌀을 몰래 퍼다 술을 사 오너라」, 앞의 책, 67면.
180 선문화연구 제4집
색을 한 경허를 큰 산적 괴수쯤으로 여기고 다짜고짜로 결박하여 경찰
서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경허는 “너희들이 이렇게 메고 가야지 내 발로 걸어갈 수 있겠느냐”며
넙죽 주저앉아 한 바탕 웃어댔다. 화가 난 헌병 보조원들이 그를 내려 놓
고 손발을 동여 맨 밧줄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경허는 “내가 내 발로 걸
어가야지 너희들에게 메어가서야 어디 되겠느냐?”고 비웃었다. 독립군의
괴수나 산적 두목으로 알고 있었던 일본 헌병대장이 직접 취조하였다.
아무 표정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던 경허가 마침내 지필묵을 청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의 휘호를 써 갈겼다. 경허의 글씨에는 문자향과 서
권기가 깊이 배어 있었다. 글 쓰는 자세만을 보던 대장이 깜짝 놀라 자
세를 정중히 하였다. 다시 글을 읽어보아도 깊은 뜻은 알 수 없으나 큰
도인임을 짐작하고 큰 절을 하며 알아 모셨다.
또 공주 경찰서에 잡혀 가 야마모도(松山) 순경에게 직사하게 얻어 맞
은 뒤 붓과 종이를 청하여 먹을 갈게 한 뒤 일필휘지로 갈겨 쓴 적이 있
었다.
그 뜻을 얻었다면
거리의 한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하는 주인을 알지 못하면
용궁에 간직된 보배로운 경전도 한갓 잠꼬대일 뿐18)
서장은 이 글의 깊은 뜻을 알아본 뒤 그를 모시고 자기 집 내실로 가
자기 부인에게 잘 시봉해 드리게 했다. 극진히 시봉을 받았던 경허는 이
집에 보관되어 있던 엽전 그릇을 끄집어내어 주머니에 가득 넣어가지고
거리에 나가 곡차를 받아 마시거나 배고픈 걸인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18) 鏡虛, 「관헌에 잡혀서」, 앞의 책, 37-38면. “得其志也, 街中閑談, 常軫法輪; 失
於言也, 龍宮寶藏, 一場寐語.”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81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처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逆行에도 불구하고 서장은 일체 참견을 않고 그가 하는
대로 하게 하는 것이 도인에 대한 대접이라고 부인에게 누누이 당부하
였다고 한다. 며칠 뒤 경허가 말 없이 그 집을 나가자 그 서장은 자기가
잘못하여 그런 큰 도인을 계속하여 모시지 못했음을 못내 애석하게 생
각했다고 전한다.
그의 이러한 막행 막식 등에 대해 제자인 寒巖은 “후대의 학인들이 화
상의 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
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19)라고 갈파했다. 하지
만 나라의 위급한 시국과 망국의 국면에 직면했던 한 선사의 고독을 생
각할 때 국망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오늘 여기 우리들의 思量으로만
그의 역행과 농세를 분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Ⅲ. 照心學의 지형도
1. 照心의 개념과 구조
불교사상사를 한 마디로 요약해 말하면 ‘心’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즉
번뇌가 있는 유루의 의식을 전환시켜 번뇌가 없는 무루의 지혜를 얻는
것[轉識得智]이다. 다시 말해서 미혹한 마음을 돌이키어 깨끗한 마음을
여는 것[轉迷開悟]이 전 불교사상사를 一統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심(제8식)-의(제7식)-식(제6식)과 전5식의 관계를 智(心)와 識의 구도로
파악하여 전환의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이들 두 축 사이의 轉依를 모색
하는 불교(유식)의 수행론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9) 寒巖, 󰡔先師鏡虛和尙行狀󰡕(󰡔韓佛全󰡕 제11책, 656 상면).
182 선문화연구 제4집
이러한 심의 역사는 원효의 一心, 지눌의 眞心, 태고의 自心, 나옹의
無心, 휴정의 禪心, 만해의 惟心, 성철의 頓心 등과 같이 변주되면서 심
의 내포를 심화시켰고 외연을 확장시켰다. 이들 사상가들의 心은 불교
經敎의 개념들을 원용하면서도 그 나름대로 촘촘하게 그 의미를 확장해
감으로써 온전히 자기 철학 개념의 지형도를 그려나갔다. 그리하여 그
개념 기호를 자기 사상의 벼리로 자리매김 시켰다.
경허 역시 이들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의 개념을 입론했
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안다.’[照了心源] 혹은 ‘마
음의 근원을 돌이키어 비춘다.’[返照心源]에서 도출할 수 있는 그의 사상
적 키워드는 ‘조심’(照心)이라 할 수 있다. 조심(照心)은 ‘비추는 마음’이
기도 하고, ‘마음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을 비춘다’ 함은 마음의 실상을 비춘다는 것이고, ‘비추는 마음’이
란 실상을 비추어 보는 마음이다. 마음은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이
름도 없는 것이기에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조심은 이
러한 마음을 비춘다 해도 되고, 비추는 마음이라 해도 된다. ‘조심’은 밖
이 아닌 안과 너가 아닌 나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향해 비추어 보
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남이 아닌 나, 밖이 아닌 안,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비추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
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경허 스스로 이 마음을 조심이라 명명하지
는 않았으나 그가 시종일관 역설하는 ‘조료심원’ 혹은 ‘반조심원’에서 우
리는 ‘조심’이라는 개념을 적출해 내어 그의 조료의 논리와 전정의 방식
으로 이(류중)행 해 가는 구도를 읽어낼 수 있다.
2. 照了와 專精의 논리와 방식
이미 원효와 지눌과 휴정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和會와 返照와 會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83
通) 논리는 이들 사상가들의 화두를 돌파해 나가는 매개항이라 할 수 있
다. 매개항은 화두의 두 측면을 통섭하는 기제가 된다. 본디 화두는 하
나이지만 그것을 몸체와 몸짓의 측면으로 나누어 파악해 볼 수 있다. 우
리가 돌파해갈 화두를 몸체와 몸짓의 구도로 이해할 때 이들 두 축 사이
에는 반드시 이들 둘을 일원화시키는 매개항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매개항은 방법론이기도 하고 논리(논법)이기도 하다. 즉 그
매개항은 몸체와 몸짓으로 해명된 화두의 두 측면을 아우르고 있다. 종
래 이땅의 유수한 불교사상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관계를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시대 인물 화두(體) 매개항 화두(用)
신라 元曉歸一心源和諍會通饒益衆生
고려 知訥二門眞心廻光返照禪敎一元
조선 休靜一物禪心三敎會通捨敎入禪
대한 鏡虛返照心源照了專精異類中行
흔히 上求菩提와 下化衆生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의 두 기치를 선후
또는 경중의 문제로 보아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求菩提’와 ‘化衆生’을
‘좌우’ 혹은 ‘내외’로도 볼 때 참다운 실현을 보게 된다. 이들 두 축을 輕
重 혹은 先後의 구도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중생을 교화하는’ 과정 자체
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일 수 있고, ‘구보리’하는 과정이 ‘화중생’일 수 있
다는 것이 열려진 시각이다. 때문에 ‘구보리’와 ‘화중생’을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몸체와 몸짓의 논리를 원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수한 불교사상가들은 적어도 이러한 학문적 화두 내지 사상적 의단
을 확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의단)의 설정은 그들의 존재
이유이자 실존적 문제의식이었으며, 나아가 목숨을 걸고 돌파해야만 할
과녁이었다. 그리고 이들 매개항은 두 항의 길항을 유기적으로 해소하
184 선문화연구 제4집
는 물꼬였다. 때문에 이들 매개항은 결국 붓다의 中道를 일깨우기 위해
설정된 논리 혹은 논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의 귀일심원과 요익중생을 이어주는 매개항은 화(和)쟁회(會)통
의 논법이 될 것이며, 지눌의 이문진심과 선교일원을 이어주는 매개항
은 (회광)返照의 논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휴정의 일물선심과 사교입선
을 이어주는 매개항은 삼교 會通의 논리가 될 것이다. 경허 역시 원효의
‘和會’, 지눌의 ‘返照’, 휴정의 ‘會通’에 상응하는 ‘照了’의 논리를 세우고
있다.
해인사에 머물던 경허는 禪家 종요인 󰡔정법안장󰡕을 간행하면서 다음
과 같은 서문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에는 경허의 논리와 방식이 잘 드러
나 있다.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마음의) 功用을 오롯이 정밀히 하면 비
록 일대 장교(四藏)를 지나쳐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대 장교가 여기에
있다.20)
경허는 선승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지만 젊은 시절 동학사 강사를 했
을 정도로 교학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리고 교학의 정점인 화엄에 대
한 이해도 남달랐다. 특히 경허는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교법을 결코 선
법 아래에 두지는 않았다. 위의 서문은 그같은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
다. 선과 교를 균형적으로 보려고 했음을 알려주는 이 서문의 기록은 경
허의 선교관을 엿볼 수 있는 주요 근거가 된다.
선과 교를 대립으로 보거나 교를 선의 아래로 보지 않는 시각은 이미
‘禪敎一元’의 기치를 내걸은 지눌이 보여주었다. 휴정 역시 지눌과 같은
맥락 위에서 선과 교의 관계 설정에 집중했으나 결국 휴정은 ‘捨敎入禪’
20) 鏡虛, 「正法眼藏序」,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00 하면). “返照於心源, 用
功專精, 雖不用看過藏敎, 藏敎在焉.”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85
을 통해 선을 주로 하고 교를 종으로 하는[主禪從敎] 입장을 지니고 있었
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 볼 때 경허의 화두는 휴정보다는 오히려 지눌
에게서 그 접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지눌의 선교일원의 기치를 수용하고 있는 경허 역시 앞 시대의 사상
가들처럼 자신의 논법을 세우고 있다. 그것은 ‘返照心源’과 異類中行을
돌이켜 보게 하는 ‘照了’의 논리이다. ‘조료’는 ‘돌이켜 비추어 깨달아 사
무침’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조료’는 마음의 근원을 ‘返照’하고 ‘了達’하
는 것을 일컫는다.
그가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마음의) 공용을 오롯이 정밀히
하면, 비록 일대장교를 훑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장경이 여기에 있
다”고 한 말에서 주목되는 두 기호는 ‘返照’와 ‘專精’이다. 경허는 일대장
교의 ‘看過’와 변별되는 선법 수행의 길을 ‘返照’와 ‘專精’이라는 기호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기호는 경허의 글 「示法界堂」에서 “빛을 돌이켜 되비추고 마음
의 근원을 비추어 깨달아라.”[廻光返照, 照了心源]21)고 하면서 ‘日日照
顧’22), ‘照了自性’23), ‘照了妄想’24)에서처럼 ‘照了’ 혹은 ‘照顧’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與藤菴和尙」에서는 ‘返照不昧爲正’25)처럼 ‘返照’ 라는 표
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허는 여느 선사들처럼 위로 향하지 않고 아래로, 밖으로 향하지 않
고 안으로,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서 구하기 위해 ‘照了’하
고 ‘返照’하는 논리 방식을 통해 정진했다. 교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매개
21) 鏡虛, 「示法界堂」, 󰡔鏡虛集󰡕(󰡔韓佛全󰡕 제11책, 595 상면); 鏡虛, 「與藤菴和尙」, 󰡔鏡虛集󰡕(󰡔韓佛典󰡕 제11책, 593 중면).
22) 鏡虛, 같은 글.
23) 鏡虛, 같은 글.
24) 鏡虛, 같은 글.
25) 鏡虛, 「與藤菴和尙」, 󰡔鏡虛集󰡕(󰡔韓佛全󰡕 제11책, 593 중면).
186 선문화연구 제4집
논리를 원용하지만 선사들은 ‘觀照’ 혹은 ‘照了’ 내지 ‘返照’의 논리 방식
을 통해 붓다의 핵심교설인 중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26)
경허 역시 ‘返照’와 ‘了達’을 ‘照了’의 기호로 보여주고 있다. 선종사에
서 ‘돌이켜 비춘다’[返照]는 것은 모든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모든 물
길을 아우르는 바다처럼 무차별의 시선으로 마음의 근원을 관조하는 것
이다. 즉 眞心의 몸체인 자기 본성과 진심의 몸짓인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돌이켜 비춘다’에 상응하는 ‘또렷이 이른다’[了達]는 것은 마음의 근원
을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고요[寂寂]하게 돌이켜 비추어[返照] 깨달아
사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료[照了]는 “스스로 ‘마음의 근원’[心源]을
비추어 보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게 하고 오늘의 성취를 있게 해준 모
든 인연들에게 자신의 성취를 다 나눠주는 것[中行]이 존재 이유임을 사
무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원(心源)의 몸체를 비추어 깨닫게 하는 ‘照了’와 ‘心源’의
몸짓을 보다 구체화하는 ‘專精’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설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홀로 한 고요한 곳에서 오롯
이 정밀히 사유하는’[獨一靜處 專精思惟] 것을 주요 수행법으로 내세우
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초기 경전에서 반복되는 ‘專精’은 위빠사나
(洞察禪)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즉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담마[法]의 현상에다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
을, 나아가 사물에 즉한 언어와 사유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대응시켜 또
렷하고 정치하게 살피고 있다. 따라서 경허에게 있어 專精의 방식은 照
了를 통해 心源을 보다 정밀하게 관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7)
그러면 경허가 ‘조료’ 혹은 ‘전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궁극적 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가 말하는
26) 졸론, 앞의 글(2003), 134면.
27) 졸론, 앞의 글(2003), 135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87
깨달음은 ‘영원히 사는 나라’이자 ‘불생불멸의 나라’인 ‘축복받은 곳’[壽域]
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곳을 미타정토로 시설하지 않고 도솔천 내
원궁에 상생하여 미륵존불을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허가 제시하는 不生不滅의 나라와 도솔천은 여기서부터 저
만치 떨어져 있는 ‘거기’가 아니라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자리한 조
선말 대한 초기의 이 땅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그가 주도했던 1899년
해인사 수선결사로부터 1904년 종적을 감추기까지 온몸을 던져 보여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戴角과 被毛와 曳尾의 가풍
경허의 살림살이는 지눌로부터 태고와 휴정으로 이어지는 가풍을 그
대로 잇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뛰어넘는 부분이 없지 않
았다. 종래 선사들의 가풍이 비교적 ‘구보리’에 치중해 왔을 뿐 ‘화중생’
의 측면은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눌(牧牛知訥, 1158~
1201)의 정혜결사나 太古普愚(1301~1382)의 교단 통합 그리고 淸虛休靜
(1520~1604)의 義僧 救國에는 ‘화중생’의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보여준 가풍을 자세히 살펴볼 때 대사회적 시선
과 시대정신이 미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을 불교가 지
닌 출세간적 경향성 때문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淸寒
雪岑이나 震黙一玉(1562~1633)에게서도 ‘화중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허는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화중생’의 측면을 강
화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결과적
으로는 대중들 속으로 온몸을 던지며 불교의 외연을 넓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준 역행과 농세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경책이었
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자 자기 비판이었다. 소극
188 선문화연구 제4집
적으로 보면 이러한 비판과 반성은 눈을 뜬 사람으로서의 무기력에 대
한 성찰이자 참회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이것을 적극적으로 보면
이후 그가 보인 강계 도문 등지로 은둔해 보여준 ‘화중생’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역사 속으로의 복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허는 斥邪衛正과 같은 주체회복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또 의
병운동에 참여하여 온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경허는 주체할 수 없
는 고독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조선의 침몰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과 고독은 주체를 지닌 인간의 몸부림이자 절
망인 무애행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아마도 자유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몸체의 측면에서 경허는 이미 자유인이었지만 몸짓의 측면에서는 아
직 ‘부자유’했던 한 고독한 선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경허는
자유와 부자유의 경계를 넘어 선종사에서 드러난 無相(684~762)의 ‘被毛
戴角’, 馬祖(709~788)의 ‘平常心是道’ ‘卽心是佛’, 南泉(748~834)의 ‘異類中
行, 雪峰(822~908)의 ‘服勞爲人 등의 살림살이처럼 자신의 가풍을 ‘화중생’
의 살림살이로 재현해 내었던 것이다.
경허의 살림살이는 종래 조선 후기 이래의 가풍과는 변별된다고 할 수
있다. 무상으로부터 비롯된 피모대각행의 가풍은 신라의 道詵(827~ 898),
고려의 一然(1206~1289)28), 조선의 雪岑(1435~1493)으로 가냘프게나마 이
28) 閔泳珪, 「一然重編曺洞五位重印序」, 󰡔學林󰡕 제6집, 延大史學硏究會; 「一然의
重編曺洞五位二卷과 그 日本重刊本」, 󰡔사천강단󰡕(서울: 우반, 1994); 金知見, 「一然의 重編曺洞五位重印序 譯註」, 󰡔구산선문: 수미산문과 조동종󰡕(서울:
불교영상, 1996), 336-337면. 閔泳珪는 雪岑(金時習)의 󰡔重編曺洞五位󰡕 「序」
의 ‘莖草禪’의 구절에 주목하여 一然의 가풍을 마소가 먹는 꼴인 莖草로 표
현되는 ‘莖草禪’이며 이는 南泉의 被毛戴角의 異類中行사상을 더욱 발전시
킨 것이라 했다. 이와 달리 金知見은 󰡔寶鏡三昧歌󰡕에 근거하여 ‘莖草’는 ‘荎
草’(치초)의 잘못이며 이는 一草五味의 五味子로서 바로 曺洞五位를 비유한
것이라 했다.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89
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설잠 이후 그 가풍은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피모대각행, 즉 이류중행의 가풍은 다시 몇 백 년 뒤의 경허를 기다려야
만 했다.29)
경허 스스로가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않았든 간에 그의 살림살이는 설
잠 이래 단절된 이류중행 가풍과 연속되고 있다. 그의 가풍은 바로 무상
이래 남전과 설봉 등의 被毛戴角의 가풍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허의 가풍은 이들의 被毛와 戴角을 넘어 다시 曳引의 가풍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뿔을 인’ 머리와 ‘털옷을 입은’ 가슴을 넘어
‘꼬리를 끄는’ 온몸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Ⅳ. 尋牛行의 확장과 심화
경허는 송나라 廓庵師遠의 十牛圖30)를 통해 자신의 살림살이를 확산
하고 있으며 심화하고 있다. 경허는 󰡔경허집󰡕에서 오언절구로 된 8개의
「심우송」과 산문으로 된 10개의 「심우송」 두 갈래의 글을 남기고 있다.
8송으로 된 절구의 경우는 尋牛-見跡-露顯全軆-調伏保任-任運歸家-忘
29) 졸론, 앞의 글(2003), 16면.
30) 大悟를 목표로 하는 선 수행의 단계와 의미를 소와 목동의 관계에 비유하여
열 가지 그림과 송으로 圖像化시킨 선 문헌으로 크게 세 종류가 있다. 1) 송
나라 淸居 皓昇이 지은 1권 본, 그 원형은 알 수 없으나 󰡔從容錄󰡕 32칙, 󰡔請
益錄󰡕 60칙에서는 송을 인용하여 黑牛가 白雨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수행
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청거 호승의 법계는 洞山 良价-靑林 師虔-石門 獻
蘊-慧徹-蘇遠-호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2) 송나라 大白山 普明이 지은 총서
와 10장의 송의 1권으로 구성된 것이다. 송의 제목은 ① 未收, ② 初調, ③
手制 ④ 廻首, ⑤ 馴伏, ⑥ 無碍, ⑦ 任運, ⑧ 相忘, ⑨ 獨照, ⑩ 雙泯의 10圖
로 되어 있다. 3) 임제종 楊岐派 五祖 法演의 문하인 大隨 元靜을 嗣法한 선
승인 송나라 곽암 사원의 1권본. 慈遠의 序와 10章의 그림과 頌으로 구성되
었다. 󰡔禪宗四部錄󰡕에 실려 널리 유통되었다.
190 선문화연구 제4집
牛存人-人牛俱忘-異類中事 등이다. 이는 ‘견우’와 ‘득우’를 ‘노현전체’ 하
나로 아우르고, ‘반본환원’과 ‘입전수수’를 ‘이류중사’ 하나로 아울렀기
때문이다. 산문의 경우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그대로 심우-견적-견우-
득우-목우-기우귀가-망우존인-인우구망-반본환원-수수입전의 10게송으
로 되어 있다.
십우도는 머리와 가슴과 온몸의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가장 일반적
인 형태로 볼 때 머리의 단계는 심우-견적-견우-득우-목우-기우귀가의 과
정이 된다. 가슴의 단계는 망우존인-인우구망의 과정이 되고, 온몸의 단
계는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의 과정이 된다. 그러면 이 단계로 펼쳐진 경
허의 심우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머리의 단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
와 달리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말도 있
다. 그렇다면 머리와 가슴을 아우르는 방법은 없겠는가. 머리와 가슴을
아울러 전체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온몸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온몸
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머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머리로 이루어
지는 모든 所緣境이 곧 지식인들의 사량 분별이기 때문이다.
경허의 산문 「심우송」의 첫 글인 「소를 찾아나서다(尋牛)」는 송나라
선사인 곽암 사원의 운문과 매우 유사하다.
본디 잃지 않았거니 어찌 다시 찾을손가. 다만 찾으려 하는 이것이 비
로자나불의 스승일세. 산은 파랗고 물은 푸르며, 꾀꼬리 울고 제비 지저
귀는 곳곳에 온갖 소식 보이누나 쯧!31)
31) 鏡虛, 「尋牛頌: 尋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29 중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91
머리에 뿔을 인 소를 찾아나서는 경허의 가풍은 자유롭다. 소를 찾는
눈 안에는 청산이 가득하고 마음속은 넉넉하다. 경허는 소를 찾기 위해
照了의 방식을 원용한다. 조료는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 기
제가 된다. 그리고 專精의 방식으로 마음의 공용을 구체화한다. 여기에
서도 그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본디 잃은 적이 없는 소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가 찾으
려는 비로자나불의 스승은 밖과 남에게 있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소 안이 아닌 밖에서 또는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비로자나불의 스승은 찾으려는 바로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은 파
란 산을 보고 푸른 물을 보며 꾀꼬리 울고 제비 지저귀는 곳곳에다 모든
소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를 타고서도 다시 소를
찾는 것이다. 소를 찾아나선 경허가 발견한 소의 발자국은 「견적」에서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밝고 미묘한 빛은 만발한 꽃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잘 익은 노란 유
자에도 덜 익은 귤에도 있나니 좋고 좋구나. 발자국이 있으니 미루어 소
가 있음이로세. 무심하면 진리에 가까워질지니 좋고 좋구나. 법당 안 향
로에도 맑은 가을 들 가의 물에도 좋고 좋구나.32)
‘밝고 미묘한 빛’은 언제나 가득 차 있다. 그 빛은 소의 발자국에도, 법
당 안의 향로에도, 가을 들가의 물에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무심해야
만 진리에 가까워지는데 우리는 자꾸만 유심하여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눈앞에 진리의 발자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로 인해 발자국
을 보지를 못한다. 때문에 경허는 분별이 사라진 무심의 상태로 복귀하
기를 촉구하고 있다.
소의 발자국에 대해 무심으로 다가간 경허는 산문 「견우」에서 고함부
32) 鏡虛, 「尋牛頌: 見跡」,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29 중하면).
192 선문화연구 제4집
터 지르며 노래한다. “악! 신령스런 빛이 홀로 빛나 하늘과 땅을 덮는다.
턱없는 중생은 정혼과 손발을 쓸데없이 놀리나니 도깨비 아닌가. 그런
데 또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본 것인가. 악! 또 한 번 악!”33) 그런데 턱없
는 중생은 정혼과 손발을 쓸데없이 놀려 소를 지어낸다. 때문에 경허는
소를 보았다는 집착을 깨어주기 위해 ‘할’(喝)을 토해내고 있다. 마음의
소는 볼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허는 마음의 소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
니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산문 「득우」에서 소를 잡기 어려움을 들면서
정말로 소를 제대로 얻은 것인지 반문한다.
소를 얻기는 얻었는데 얻은 것이 없으니 다음은 어찌 할 것인가. 얻지
못했으면 얻도록 해야 하고. 이미 얻은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깨달아
얻는 이는 깨달아 얻는 것이고. 놓치는 이는 길이 놓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말로 제대로 얻은 것인가 그렇지 아니한 것인가. 주장자로 탁자
를 한번 치며 말하니 한줌 버들가지를 거머쥐지 못하나니 부드러운 바람
은 간들간들 옥난간을 건드리네.34)
아직 소를 얻지 못한 이는 소를 얻기 위해 더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소를 얻은 이는 다시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소를 얻기는
얻었는데 얻은 것이 없는지를 제대로 점검해야 한다. 부드러운 바람이
간들간들 흔들리는 한줌 버들가지를 거머쥐기 어렵듯이 마음의 소는 얻
기도 어렵지만 잃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놓친 소는 멀리 달아
나 버려서 다시 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경허는 소의 고삐를 더욱
더 꼭 잡아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경허는 「소의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露現全體)는 제목의 오언시로서
33) 鏡虛, 「尋牛頌: 見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29 하면).
34) 鏡虛, 「尋牛頌: 得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29 하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93
「견우」와 「득우」 단계를 아울러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소를 본 뒤에
‘소를 얻기는 얻었으나 얻은 것이 없으니 다음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반
문하고 있다. 먼저 소를 보고 얻었지만 제대로 얻은 것인지를 확실히 파
악해야 한다. 그것이 얻기는 얻었는데 얻은 것이 진실로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뒤에 경허는 이것을 雪山 동자의 향
기로운 소식에 대비시킨다.
드넓고 끝없는 세상의 땅에서
달리고 달려 한 구역을 지났네
일찍이 들었노니 저 설산 속에는
영원한 젖향기가 있다는 것을.35)
경허는 소를 ‘보고 얻은’ 두 단계를 설산의 영원한 젖향기인 󰡔열반경󰡕
의 ‘諸行無常偈’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여기서 영원한 젖향기는 “인연
에 의해 형성된 것은 항상함이 없다는 이것은 생하고 멸하는 법이네. 생
하고 멸하는 것조차 멸하고 나면 열반이 즐거움이 되네”라는 게송을 일
컫는 것이다. 즉 「견우」와 「득우」를 진리의 반 게송을 더 듣기 위해 목
숨을 던진[爲法忘軀] 석존의 전신인 설산(善慧, 護明)동자의 수행에 견주
고 있다.
다시 경허는 산문 「목우」에서 마음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본디 마음에는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의 분별이 없으니 마음으로
써 마음을 끊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한다.
착한 마음 악한 마음이 모두 마음이니 닦느니 끊느니 할 것이 없다.
마음이란 독기 있는 땅을 지나는 것과 같아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을
수가 없네. 탐욕에 빠지는 마음 끊지 않으며 예까지 왔으니 이제 마치
35) 鏡虛, 「尋牛頌: 露現全體」,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중면).
194 선문화연구 제4집
죽은 이의 눈 같아 모두가 험로이니 가지도 말고 갈 길도 아니네. 어떻
게 해야 할 것인가. 구구는 팔십 일이네. 밑빠진 그릇은 용천 마흔 해를
달려가고, 향림은 마흔 해를 달려 한 경지를 이루었네. 아, 얻기는 쉬워
도 지키기는 어려우니, 또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해선 아니 되네. 반드시
좋은 스승에게 배우고, 도가니와 풀무에 단련을 거듭해야만 비로소 얻을
것이네.36)
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다. 수행자는 스승에게서 건네받은 화두를 자기 마음속에서 혼침과 도
거를 넘어 또렷또렷하고[惺惺] 고요고요하게[寂寂] 들고 그 핵심을 향해
정면돌파를 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다시 스승
과 거량하여 인가를 받아야만 비로소 장부의 일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조금 얻은 것에 결코 만족해서는 아니되며 끊임없이 단련을 거
듭해야만 한다.
그래서 소를 얻은 경허는 다시 얻은 소를 보호 임지하는 「調伏保任」
의 경지를 오언 절구로 노래한다.
몇 번이나 풀 나무가 우거졌는가
코 꿸 고삐 던져 잡기가 실로 어려웠네
다행히 오늘의 일은 이루어졌으니
강산은 다 내 손안에 들어있네.37)
소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보낸 뒤 오늘의 일을 이루었다. 이
제 강산은 모두 내 손안에 들어있다. 소를 온전히 길들인 그는 이제 자
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소를 부리고 탈 수 있다.
소를 모두 길들인 경허는 이제 「심우송」에서 「任運歸家」라는 오언시
36) 鏡虛, 「尋牛頌: 牧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29 하면).
37) 鏡虛, 「尋牛頌: 調伏保任」,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중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95
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된 소를 타고 피
리를 불지만 아직 마음대로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동과 서에 안팎이 있지 않으니
맡겨지는 대로 본고향을 향해 가네
구멍 없는 한 자루 피리가
소리 소리 마음대로 내기 어렵네.38)
여기서 경허는 본고향을 향해 가지만 아직 무언가 미진함을 느끼고
있다. 아직 온전한 소리를 얻지는 못한 것이다. 온전한 소리를 얻기 위
해서는 내가 소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마치 소를 찾
는다는 생각을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이 단계는 소
리를 얻는다는 생각과 소를 찾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 가슴의 단계
머리의 단계를 넘어 이제 가슴의 단계로 들어가면 심우행은 좀 더 깊
어지고 넓어진다. 그래서 경허는 師遠의 십우도의 일곱 번째 단계인 「忘
牛存人」을 자신의 가풍 속에서 육화하여 산문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 역시 아직 자신이 찾으려는 대상으로서의 소는 잊어버렸지만 아직
소를 찾는 나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붙들려 있다.
잠을 깰지어다. 어찌 이리 어지러운가. 우뚝 일없이 앉아 있으니, 봄
이 와 풀은 절로 푸르네. 이것은 등창에 쑥뜸질 하는 것 같으니, 곧바로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면, 또한 반드시 몽둥이로 얻어맞으리. 어찌 이
와 같단 말인가. 비가 와야 할 때에 비가 안 오고, 개야 할 때는 개이지
않네. 이와 같게 된다면, 이는 어떤 마음의 소행인가. 아, 오랫동안 문 밖
38) 鏡虛, 「尋牛頌: 任運歸家」,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중면).
196 선문화연구 제4집
을 나서지 않으니, 이는 어떤 경계인가. 저 뒷간도 안 보고 가려는 경계
는 무엇인가. 덧없는 인생의 아둥 바둥을 상관하지 않으니, 이는 어떤 경
계인가. 두 줄기 눈썹을 아끼지 않고, 그대 위해 드러내리니, 머리를 보
이거나 얼굴을 들어봐도 감출 길 없으니,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네.39)
이 단계는 아직 비가 와야 할 때에 비가 안 오고, 개야 할 때는 개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단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이룰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지혜를 닦는 길밖에
없다. 지혜를 얻게 되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 단계가 바로 피모 즉 털옷을 입은 가슴의 단계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망우존인」이다. 경허는 소도 나도 모
두 없는 이 단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람
앞의 등불과 물거품처럼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실체성 속에
서 다시 무엇을 구하며 무엇을 얻을 것인가 라고 되묻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이며 물거품인데
무슨 진리를 다시 구할 것인가
장안 거리에 기대서서 말하노니
(물거품 같은) 소리 앞에 발을 멈출 것 없네.40)
찾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소도 찾는 주체로서의 나도 모두 사라진 이
단계에서 아라한의 경계는 완성된다. 경허는 더 이상 구해야 할 진리가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미 모든 것이 내 안에 하나로 자리 잡았고 온
갖 경계가 내 안에 거두어 간직되었다.
그런 뒤 수행의 최후 목표가 되는 여덟 번째 단계인 「人牛俱忘」에서
39) 鏡虛, 「尋牛頌: 忘牛存人」,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상면).
40) 鏡虛, 「尋牛頌: 忘牛存人」,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중하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97
師遠은 동그라미 하나[一圓相]만을 그렸고 경허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
래는 아래와 같다.
적광토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쭉방울만 하나 더 얻었네
이 도리가 별스런 데 있지 않아서
산은 높고 물은 저절로 흐르네.41)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 오직 일원상만 남게 된다. 하나의 원 속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오직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원이 남을 뿐이다.
경허는 그의 산문에서 이 「인우구망」의 단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시리
소로 못다야 지다야 사바하. 버들꽃을 따고, 버들꽃을 따고, 오랫동안
수행해 여기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어둡고 아득하여 오락가락하니,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일이네. 알겠는가. 변방에는 장군의 명령이요. 나라
안은 천자의 칙령이로다. 악! 또 한 번 악!”42)
이 진언을 굳이 풀이하면 “좋구나! 세존이 설법할 때의 나뭇잎 지는
소리, 기쁘고 어질고 경사스러운 마음 다 이뤄지이다”를 뜻한다. 그러면
경허는 이러한 진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의 수행단계조차도 이미 다 잊어버리게 된다. 소를 찾는
나도, 나에 의해 찾아지는 소도 다 없어져 버렸다. 여기에 이르러 잘못
된 길에 떨어진다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격외의 도
리요 초탈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수행의 마지막이기는 해도 여기까지 온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 불교의 궁극은 ‘가슴’에 털옷을 입고 짐을 나르는 것으로
만 끝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아직 가슴의 단계이자 함의 단계일 뿐이
41) 鏡虛, 「尋牛頌: 人牛俱忘」,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1 하면).
42) 鏡虛, 「尋牛頌: 人牛俱忘」,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상면).
198 선문화연구 제4집
다. 이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꼬리까지 끄는 ‘온몸’의 가풍이 다
이루어져야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체
화되어야 해야 할 일이 끝나는 것이다.
3. 온몸의 단계
수행의 마지막인 온몸의 단계에서는 머리의 단계와 가슴의 단계를 아
우르고 있다. 이 단계는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형인 보살적 인간의 모
습으로 나타난다. 불자의 역할 모델(role model)은 발심하는 존재에서 서
원하는 존재로 살았던 유마거사(無垢稱)와 소성거사(元曉) 또는 승만부
인(슈리말라)과 덕만부인(善德女王)이 대표적이다.
특히 우리가 모범으로 삼는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유마거사는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43)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중
생들의 아픔이 낫지 않는 한 보살의 아픔도 나을 리가 없으며 중생들의
아픔이 나을 때 보살의 아픔도 낫게 되는 것”이라 말하며 “보살의 아픔
은 바로 대자비가 그 원인”이라고 역설하였다.
곽암 사원이나 경허 성우의 十牛圖 역시 삶의 단계인 아홉 번째와 열
번째 단계를 위해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여덟 번째 단계의 길이 존재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거사의 보살행처럼 경허 역시 아홉 번째의 「반
본환원」과 「수수입전」을 통해 자신의 ‘曳尾禪’ 혹은 ‘尾塗禪’의 살림살이
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뿔을 인 머리’와 ‘털옷을 입은 가슴’을 넘어선
‘꼬리를 끄는 온몸’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십우도’에서 경허는 산문의 「반본환원」과 「입전수수」 운문의
「異類中事」 하나로 통섭하여 노래 부르고 있다. 이러한 통섭은 경허의
43) 󰡔維摩詰所說經󰡕 卷中, 「文殊師利問疾品」(󰡔高麗藏󰡕 제9책, 987 하면; 󰡔大正藏󰡕
제14책, 544 중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199
심우행의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털을 입고도 뿔을 이었으니
등 앞에 말이 쓸쓸하다
조사는 이제 몸 밖으로
이긴 세월은 시장거리로 달려가네.44)
털옷을 입고 뿔을 인 소가 이제 꼬리를 온몸으로 끌며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장거리에서 살아간다. 이미 개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해 마친 조사이지만 이제 그는 보살의 몸으로 저자거리 한복판
에서 살고 있다.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질 보살의 길은 험난하고 고독하
다. 그래서 보살은 소가 되고 말이 되어 밭을 갈고 짐을 나른다. 이 시에
고독과 자성의 길을 걸어가는 경허의 모습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산문에서는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을 구분하여 새롭게 쓰
고 있다. 「반본환원」의 메시지는 아래와 같다. 경허가 󰡔장자󰡕를 천 독
했다고 하듯이 그의 글 속에는 󰡔장자󰡕의 文勢와 내용이 자주 원용되고
있다.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려 하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는 짧
지만 이으려 하면 걱정이 된다. 발우는 자루가 필요가 없고 조리는 새는
것이 마땅하다. 면주에는 부자요 병주에는 쇠로다. 만물은 저마다 본고
장 것이 좋도다. 양식은 풍부하고 땔감 또한 많아서 네 이웃이 풍족하구
나. 이것이 호남성 밑에 불을 부는 입술은 뾰쪽하고, 글을 읽는 혀는 날
름댐이니 이것이 대우의 가풍이로다. 다시 한 구절 있으니 내일로 미루
노라.45)
44) 鏡虛, 「尋牛頌: 異類中事」,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하면).
45) 鏡虛, 「尋牛頌: 返本還源」,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상면).
200 선문화연구 제4집
학의 다리가 길면 긴 채로 오리 다리가 짧으면 짧은 채로 그냥 두면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된다. 주발이나 사발에는 자루가 필요 없고 조리는
새는 것이 본성이다. 면주의 특산물은 附子가 최고이고, 병주의 특산물
은 쇠가 최고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
며, 사람은 본분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모두가 있어야 할
본고장에 다 있어야 비로소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이 지향하는 세계처럼 “본래 자리로 되돌아 온다”는 것은 말 그대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大信心과 大憤心과 大疑心을 일으키며 출가
했던 初心의 상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여덟 번째 단계
인 「인우구망」의 일원상이 가만히 있는 상태인 ‘全體卽眞’이라고 일컬음
과 달리 「반본환원」의 아홉 번째 단계는 ‘진리의 본체가 작용하는 ‘全體
卽用’의 경계라고 일컫는 것이다.
체는 용으로 환원될 때 온전한 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용은
체로 수렵될 때 온전한 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몸의 단계는 몸체와
몸짓의 경계가 사라져 하나가 된 상태를 일컫는다. 그래서 심우도의 마
지막인 열 번째 단계인 「수수입전」에 대해 경허는 자신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목녀의 꿈과 석인의 노래도 한갓 감각작용의 그림자와 같네. 상이 없
는 부처도 용납하지 못하는데 비로자나불의 정수리가 무에 그리 귀하리.
방초 언덕에 놀다가 갈대꽃 숲에서 잠을 자고, 포대를 메고 시장에서 교
화하며, 요령을 흔들며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진실로 일을 마친 사람의
경계로다. 전날에 풀 속을 헤치고 소를 찾던 시절과 같은가 다른가. 모름
지기 살가죽 밑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
리니.46)
46) 鏡虛, 「尋牛頌: 垂手入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0 중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201
이미 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은 방초 언덕에 놀다가 갈대꽃 숲에서 잠
을 자고, 포대를 메고 시장에서 교화하며, 요령을 흔들며 마을에 들어가
고 있다. 「수수입전」의 경계는 진리의 능동적인 묘한 작용을 일컫는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저자거리에 나아가 손을 드리우고 사람들을 교화하
는 것을 일상으로 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가죽 밑에 피
가 흐르는 것을 본 다음’에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말
하는 「수수입전」의 경계는 바로 「인우구망」과 「반본환원」을 체득한 뒤
에 비로소 중생을 교화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경허가 14세에 출가하여 34세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67세까지 보여준
생평은 「심우」로부터 시작해서 「견적」, 「견우」, 「득우」, 「목우」를 거쳐
「기우귀가」에 이르는 앎의 단계, 「망우존인」과 「인우구망」의 함의 단계,
그리고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의 삶의 단계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삼수갑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기르고[長髮] 儒冠을 쓰고 학동들을 가르친
것 역시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을 온몸으로 체인하는 역사적 삶의 길
이었다고 할 수 있다.47)
몰록 깨달음이 비록 부처님과 같으나
숱한 세월동안 익힌 기운은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하나 파도는 오히려 솟구치듯
이치는 드러나도 생각은 오히려 그대로이네.48)
경허는 이미 할 일을 다 마친 ‘頓悟의 고지’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
47) 졸저, 앞의 책, 190면.
48) 鏡虛, 「震應講伯答頌」,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39 중면). “頓悟雖同佛,
多生濕氣生.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 이 시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당대의
대강사 陳震應 강백이 경허선사에게 훌륭한 안주와 곡차를 올리면서 “스님
께선 왜 이런 것을 좋아하십니까?”하고 묻자 즉석에서 행한 답송이라 전해
진다. 진성 원담 역, 󰡔경허법어󰡕(서울: 인물연구소, 1981), 328면.
202 선문화연구 제4집
려 아직 할 일이 남은 ‘漸修의 벌판’에 머물기를 좋아했다. 붓다와 같은
돈오의 고지는 단박에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숙세로부터 익혀온 범
부의 습기는 파도처럼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때문에 경허는 부처의 돈
오에 이르렀지만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범부의 점수에서 자맥
질하려고 했다.
경허는 돈오를 일을 마친 단계가 아니라 점수의 시작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허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담아 혼자의 ‘일을 마친 사람’은 ‘방초
언덕에 놀다가 갈대꽃 숲에서 잠을 자고’, ‘포대를 메고 시장에서 교화하
며’, ‘요령을 흔들며 마을에 들어가는’ 삶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곧
머리로 아는 앎의 단계와 가슴으로 하는 함의 단계를 넘어서서 온몸으
로 사는 삶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경허의 삶의 궤적은 이 점과 잘 어우러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술을 마실 때도 방광하고 색을 구할 때도 그러한데
탐내고 성내는 번뇌를 나귀 해[年]에 실려 보내니49)
부처와 중생은 내 알 바 아니니
평생을 취한 채 하는 미친 승[狂僧]이네”50)
깨침 이후 경허는 자신의 경계에 대해 시험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酒
色과 放光을 둘로 보지 않고, 부처와 중생에도 매이지 않는 살림살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주체적인 선사’이자 ‘눈 뜬 자’였다. 하
지만 주체를 잃어가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한 채 ‘국망의 아픔’[邦家恨]을 가슴 속으로 삭히는
한 고독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의 경허에 대해 제자가 된 한
49) 鏡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17 하면).
50) 鏡虛,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18 하면).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203
암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몸을 하열한 곳에 감추어서 낮추어 길들이며 도로써 스스로 즐거움
을 삼은 것이 아닌가? 홍곡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능히 소절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51)
한암은 몸소 지은 「선사경허화상행장」에서의 이러한 평가는 스승을
법화와 행리의 분리를 통해 살려내고 있다. 한암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화’와 ‘행리’가 마찰되고 윤활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이들도 적
지 않다. 하지만 경허가 보여준 치열한 깨침의 과정과 넘치는 나눔의 과
정을 함께 보지 못한다면 불교가 제시하고 있는 아라한상과 보살상은
여전히 마찰만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경허가 보여준 법화와 행리의 마찰과 윤활은 鮮末 韓初 불교
계의 한 독특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구도열과 따뜻
한 보살행이 아울러 요구되는 오늘 우리 사회는 경허와 같은 살림살이
와 사고방식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다. 이러한 살림살이와 사고방
식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 그리고 당대의 시대적 요
구가 함께 어우러져야 가능한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문제는
소든 뱀이든 들이마신 물을 자신의 온몸으로 체화시켜 낸 ‘젖’이고 ‘독’일
때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경허는 과연 젖을 생산해낸 인물인가, 아니면 독을 만들어낸 인물인가.
경허에 대한 평가는 한 마디로 속단하기 어렵다. 물론 깨침의 분상에서
보면 경허의 막행과 막식은 자유인의 몸짓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허를 바라보는 이들은 미혹의 분상에 있기 때문에 온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계율을 지키며 사는 출가수행자와 세
51) 漢巖 重遠, 「先師鏡虛和尙行狀」, 󰡔鏡虛集󰡕(󰡔韓佛全󰡕 제11책, 655 하면).
204 선문화연구 제4집
간에 살면서 신행하는 재가인들에게 경허의 행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명체인 소와 뱀 역시 실체가 아니며 소의
젖과 뱀의 독 역시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경허의 법화와 행리를 犯戒
와 持戒 이분법으로만 속단해서는 아니되지 않겠는가. 심우행에서 보여
주는 그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은 이미 젖과 독이라는 잣대를 훨씬 넘
어서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이 바로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허의 십우도에 나타난 것처럼 그가 60여년 가까이 모색한 것은 바
로 이 照了心源과 異類中行이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었다. 이것은 곧 당
대의 가장 주체적인 선사로서 나라의 危局과 國亡의 아우라를 돌파해가
는 경허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보여
준 역행과 농세의 만행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
성과 몰주체적인 당시 사람들과 불교계 책임자들에 대한 각성의 촉구로
읽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경성의 불교계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회광 등의 친일의
작태는 경허 자신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했다. 해인사에서 수선결
사를 주도하며 성불의 폭을 넓혔고, 간경불사를 주도하며 불교의 외연
을 넓혔던 그는 오래지 않아 종적을 감추게 된다. 해인사에 머물던 경허
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잠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화엄법회와 함
경도 석왕사 개분불사를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그는 친일로 얼룩지는 몰주체의 무대를 벗어던지고 주체의 무대
를 찾아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 정착하였다. 과연 이것을 ‘출세간
의 역사를 지향했던 한 사문 佛子의 도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입세간의
역사로 복귀했던 한 거사 선생(儒者)의 탄생’으로 볼 것인가. 바로 이 지
점은 경허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평가하는 주요한 관건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논자는 이것을 출세간 역사로의 지속이 아니라 입세간 역사로
의 환귀이자 심우행의 확장과 심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205
Ⅴ. 정리와 맺음
대개 유수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학문적 혹은 사상적 화두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고 하나의 두 측면으로 드
러날 수도 있다. 이미 오랜 불교사상사가 보여주었듯이 한국의 원효와
지눌 및 휴정의 화두처럼 경허 역시 이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
다. 경허는 자신의 화두가 지니고 있는 몸체와 몸짓의 측면을 照了 또는
專精의 매개항을 통해 회통시켜 갔다.
그는 자신의 화두를 ‘照了心源’ 혹은 ‘返照心源’으로 삼았다. 이 화두에
서 논자는 ‘照心’이라는 기호를 적출하여 경허의 사상적 키워드로 삼고
그의 지형도를 그려가고자 했다. 경허 사상의 핵어는 照心이며, 그의 논
리 혹은 논법은 ‘조료’와 ‘전정’이며, 그의 가풍은 尾塗禪 또는 예미선曳
尾禪으로 드러났다.
원효의 一心, 지눌의 眞心, 휴정의 禪心에 상응하는 照心은 ‘비추는 마
음’ 혹은 ‘마음을 비추는’ 것으로 경허 사상의 핵어가 된다. 그리고 ‘돌이
켜 비추어’[返照] ‘깨달아 사무치는’[了達] 것에서 뽑아낸 ‘조료’ 내지 ‘정밀
히 관찰하는’ 것에서 적출해낸 ‘전정’[專精]은 조심의 두 측면을 아우르는
매개항이라고 할 수 있다. 미도선 혹은 예미선은 뿔을 인 머리와 털옷을
입은 가슴을 넘어 진흙 속에서 중생구제를 위해 꼬리를 끄는 온몸의 선
법을 말한다.
그가 20여년 가까이 호서지역에서 보여준 逆行과 弄世의 만행은 자신
의 깨달음인 ‘조심’에 대한 확인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고독의 한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는 주체할 수 없는 정신적 지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나아가 당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과 불교계 지도자들을 향한
각성의 촉구였다. 1899년부터 약 5년 가까이 지속된 해인사와 범어사 등
206 선문화연구 제4집
지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불사와 결사를 통해, 그리고 자신의 본마음을
비추어 보라는 ‘조심’의 기호를 통해 경허는 이 땅의 불교를 온전히 복원
시키려 했고 이 땅의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경허의 사상적 벼리인 照心은 照了와 專精의 논리와 방식에
의해 ‘소가 되고 말이 되어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被毛戴角의 보살행으
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本性의 소를 찾는 그의 尋牛行
은 머리의 단계에서 가슴의 단계를 너머 온몸의 단계로 확장되고 심화
되고 있다.
결국 경허는 조료와 전정의 기호를 통해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닫
거나’ 또는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소와
말과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異類中行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경
허는 照心을 통해 조선 중기 이래 낙조하는 중세선을 대한 초기의 새로
운 근대선으로 개안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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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209
<Abstract>
Gyung-heo’s Frameworks of Reflecting-Mind*52)
- Falling of Middle Ages Seon and Inovation of Modern Seon -
Ko, Young-seop
This treatise is the conclusion of the history of Buddhism of the Joseon Dynasty,
and, at the same time, it is the treatise which is valued as an introduction that analyzes
the structure of the philosophy of Gyung-heo Sung-woo(鏡虛惺牛, 1846~1912). Most
of the prominent philosophers have their own academic or philosophical topic. There
can be only one topic or two, or one can be revealed as two sides. As the old
Buddhist philosopher had already showed us, Gyung-heo, like the topic of Won-hyo,
Ji-nul, and Hue-jung showed, showed us this kind of image.
Gyung-heo integrated through the middle clause,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照了) the side of body[體] and body movements[用] that his topic has,
or Reflecting-Mind ‘which is closely observing’(專精). He considered his topic as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 the origin of mind’(照了心源) or ‘which
is recovering the origin of mind and lighting it up’(返照心源). In this topic, a disputant
has extracted the sign, taken it as Gyung-heo’s philosophical keyword, and attempted
to draw his topographical map. The Keywords of Gyung-heo’s philosophy is
Reflecting-Mind and his logic or reasoning is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 and ‘which is closely observing’ and his family tradition turned out to be
Mido-Seon(尾塗禪) or Yemi-Seon(曳尾禪).
Gyung-heo’s Reflecting-Mind which corresponds to Won-hyo’s wholeheartedness
mind(一心), Ji-nul’s sincerity mind(眞心), and Hue-jung’s generosity mind(禪心) is the
* This treatise is the one edited and supplemented after being presented at the 1st
Buddhist Jogye Order's Modern Seminar held by Research Institute of 2005
Korean Buddhist Jogye Order Education Center.
210 선문화연구 제4집
‘mind that reflects’ or ‘reflecting the mind’. And it becomes the keywords of his
philosophy. In addition,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 extracted from
realizing and ‘touching the heart’[了達] by ‘recovering and reflecting’[返照] and ‘which
is closely observing’[專精] extracted from ‘closely observing’ are the middle clause that
joins the two sides together. Mido-Seon or Yemi-Seon refers to the whole body’s way
of zen that beyond the head with a horn and chest in fur clothes hauls its tale to
save human beings.
On the one hand, his Buddhist disciplines of retrogression(逆行) and mock at the
world(弄世) that he showed in hoseo(湖西) region for almost twenty years was the
process of confirm‎ing his realization ‘Reflecting-Mind’ and simultaneously, it was an
expression‎ of his solitude in the contemporary reality in which nobody recognized
his realization. On the other hand, it was the severe self-reflection and self-criticism
of himself who could not do anything even though he reached the overwhelming
mental standing.
Furthermore, it was the demand for people responsible for the country and
Buddhist leaders to awaken. Gyung-heo widened the extension of Buddhism and
attainment of Buddhahood through a variety of Buddhist services and associations
done at Hae-in Sa and Bum-a Sa for almost 5 years since the year 1899, and, he
tried to restore Buddhism and awaken people on this land by using the sign
‘Reflecting-Mind’ which is reflecting the original mind of oneself.
Gyung-heo’s philosophical index, Reflecting-Mind(照心) is continued to an action
of bodhisattvas of Pimodaegak(被毛戴角) which is ‘becoming a cow and horse and
plowing the field and carrying burdens based on the logic and method of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照了) and which is closely observing(專精). In
that process, his Simwoohaeng(尋牛行) of finding the cow of the original nature is
extending and deepening.
Therefore, Gyung-heo made efforts to ultimately realize Iryujoonghaeng(異類中行)
of doing for the sake of other people by ‘realizing by reflecting the origin of mind’
or ‘recovering and reflecting the origin of mind’ by using the signs of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 and which is closely observing. Consequently,
경허의 照心學 / 고영섭 211
through Reflecting-Mind(照心), Gyung-heo could innovate middle ages seon falling
since the middle years of the Joseon Dynasty into the modern seon of the early
Dae-han.
Key Words: Reflecting-Mind, which is achieving realization by lighting up,
which is closely observing, Pimodaegak, Iryujoonghaeng, retrogression,
mock at the world, Buddhist disciplines, wholeheartedness, no-mind,
generosity, Mido-Seon, Yemi-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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