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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관련 논문 기사

천장사 중수기(天藏寺重修記)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4.11.08|조회수65 목록 댓글 0

 

 

이흥우 ,「공성의 피안길」,(동화문화사,1980), p139.“갑자년(1924) 10월 11일 날짜로 되어 있는 천장사 중수기(天藏寺重修記)에는 '이 암자가 창건된 것은 옹정(雍正) 7년(朝鮮王朝 英祖 5년·1729)인데 원래 신라 진평왕(眞平王) 31년 담화(曇和) 선사가 창조……’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갑자년보다 39년 전인‘광서(光緖) 12년 병술(丙戌·1886) 3월’에 쓴‘연암산 천장암 중수기(燕巖山 天藏庵 重修記)’에는‘홍양(洪陽·洪城)에서 서북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에 암자가 있는데, 옛 기록이 없으며 언제 창건되어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p139. “5백자 가량되는 병술년의 ‘연암산 천장암 중수기’는 옆으로 긴 송판에 빽빽하게 씌어져, 80여년의 풍상 속에 풍화된 옛 격조를 풍기고 있었다. 약간의 행서를 깃들인 해서가 상당한 달필이었다. ‘이희서(李羲書)로 되어 있는 중수기의 횡액을 정 동산 주지는 경허 스님이 대리로 글도 짓고 글씨도 쓰셨으며, 이름만 그렇게 빌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주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중수기의 글씨는 능숙한 선비의 필치를 연상시키는 경허의 글씨에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이 희는 전직 판서의 낙향선비라고 정 주지는 증언했다.”

 

 p140. “연암산 천장암 중수기’에는 ‘태허가 이 암자에 주지로 와서 경진(庚辰·1880)에서 병술에 이르기까지 시주를 모아 대문을 세우고 부엌간을 지었으며, 18정보의 산(林苑)을 마련하고 종도 장만했으며, 퇴락한 집을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까 태허가 천장암 주지로 간 시기와 경허가 그 곳에 간 시기는 거의 맞먹는다. 그리고 천장암 중수에는 만화(萬化)의 영향력도 있었던 것을 비구 만화당(比丘萬化堂·경허의 동학사 스승) 보선(普善)이라는 중수기의 내용이 말해 준다. ‘불량대단월(佛糧大檀越;양식 시주)’ 의 목사 김 도근(牧使 金度根) 다음에 비구 만화당 보선(比丘萬化堂普善)의 이름이 화주 태허당 성원(化主泰虛堂性圓)의 이름에 앞서 태허와 가지런히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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