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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고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6.10.28|조회수153 목록 댓글 0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고

 

<깨달음과 역사>1990년 처음 출판된 이래 올해 84번째 개정증보판으로 출판이 되었다. 하나의 책을 26년동안 계속 개정하여 출판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며 저자가 이 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불교란 무엇인가를 문제 삼지 말고 삶이란 무엇인가를 문제 삼으라고 말한다. 교리해석에 몰두하거나 명상에 심취할 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 불교는 절름발이 불교요, 가난한 불교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른바 이해하는 깨달음이요 선정과 삼매를 닦아 실현하는 이루는 깨달음은 불교 본연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해하는 깨달음은 오비구가 대화와 토론으로 짧은 시간안에 깨달음을 얻고서는 눈 있는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서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는 고백에서 보이듯이 선정을 거치지 않는 돈오(頓悟)였다고 본다. ‘이해하는 깨달음독서와 사유와 토론이 깨달음의 효과적인 방법이며 오비구를 비롯한 천이백명의 제자들도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고있다. <깨달음과 역사>를 읽는 독자가 이러한 이해하는 깨달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매우 읽어나가기가 어려운 책이 될 것이며, 기존의 깨달음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는 불편하고 무례한 책으로 인식될 것이다. 저자는 이해하는 깨달음이 결코 수준이 낮은 해오(解悟)도 아니며 마하왁가와 조계선풍 그리고 반야경에서 파악한 깨달음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정을 닦아서 이루는 깨달음은 이해하는 깨달음이 어느때 부터인가 잘못 전해진 것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일부분 동의하는 면도 있지만 경전상에서 특정한 사건과 교리들을 인정하지 않거나 용어를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는 사띠를 알아차림이나 마음챙김이 아닌 기억이라고 보고, 44과라는 성인의 종류와 깨달음의 단계를 인정하지 않고, 10가지 족쇄와 선정삼매와 신통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연기의 내용과 깨달음의 내용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고 보며, 사실판단의 깨달음은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것을 깨달음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대승보살의 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무상,무아,연기로 관찰하는 초기경전과 반야심경은 기본불교이고, ‘구제한다는 생각없이 구제하라는 실천을 강조하는 금강경과 화엄경등은 대승불교라 정의한다. 깨달음에만 머무는 사람을 소승아라한이라고 판단하고 방편바라밀을 갖춘 대승의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자전거 타는 비유를 들어 힘의 균형점을 습득하여 운전 할 수 있게 되는 일은 기본불교이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부산이나 서울로 자전거를 운전해가는 것은 대승불교라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처음 부딪치는 어려움은 깨달음역사를 나누고 합치는 일이다. ‘이해하는 깨달음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보살을 보디(깨달음)+사뜨와(역사)로 나누어 설명하고 결국에는 깨달음 +역사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뜨와는 중생이라고 번역되었고 우리말로 뭇삶이라고 풀 었는데 현응스님은 이 뭇삶역사로 대체한다. 그는 대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뭇삶은 그것의 객관성과 생동성 그리고 포괄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구체성을 결여된 느낌이 들어 그 뜻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역사라는 말로 대체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뭇삶역사로 대체하는 순간 보살의 의미는 깨달음을 구하는 역사처럼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뭇삶이라는 단어에 호랑이,여우, 토끼라는 말을 대입하면 깨달음을 구하는 호랑이가 되어 적절치 않듯이 사뜨와사람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예를들어 깨달음(bodhi)과 나무(rukkha)를 합성한 보리수라는 단어를 깨달음나무로 나누어 놓고, 이 둘은 각기 다른 차원이지만 희다는 것과 딱딱하다는 것이 하나의 바둑알로 통일되듯이 깨달음나무도 하나로 통일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꼴이다. 또한 나무를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안에서 역사라고 대체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뜨와는 역사, 세상, 가치판단으로 대체 되어서는 안된다. 일차적으로는 보디사뜨와를 나누는 시도가 잘못 되었고, 이차적으로는 사뜨와를 역사, 세상, 가치판단등으로 대체 시킨 논리전개가 억지스럽다고 본다.

 

보살이라는 용어가 니까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이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때를 지칭하며 내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전 보살이었을 때라고 나타난다. 이곳에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보살의 개념이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구제의 자비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대승경전에서 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장엄해 주는 청중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보살의 지위가 부처님과 동등하거나 부처님 위에 상정하지는 않는다. 마치 사리뿟다와 목갈라나가 부처님과 같은 아라한이라 불리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하기도 했지만 한 번도 그들이 부처님이라든가 여래등으로 불려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승에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지점부터 깨달은 사람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지만 깨달음의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니까야에서 나타난 보살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며 대승불교에서 재가자와 출가자를 일컬어 재가보살, 출가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소승아라한을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다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과연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아라한들은 자비가 없었는가? 불교가 처음 태동하는 시기, 즉 오비구를 찾아가 설법하고, 전도선언을 하고, 천이백아라한이 생기고, 마가다왕과 꼬살라왕이 귀의하고, 비구니승단이 생기는 부처님 재세시에는 불교가 자비와 봉사를 강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깨달을 것인가에 수행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탁발을 하고, 숲에서 명상하고 길이나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고통을 상담해주는 것을 일상적으로 하는 스님들에게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시간이 더 지나 부파불교시대에 오면서 스님들이 승단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대중과 만남을 게을리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아라한은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는 아무런 증거가 되어주지 못한다. 세상으로부터 떠남을 칭송하는 초기승단의 소박한 특징을 두고 초기승단의 스님들은 자비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상적인 판단이다.

 

저자는 지혜와 자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깨달음에 머물지 말고 자비심을 내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도대체 그 자비심이라는 것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무상무아로 세상을 보고 연기를 이해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가? 내가 부처님법을 이해한 바로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 비추어 보아 다른 이를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는 법구경 게송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자비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에서 비롯하고, 세상의 고통을 느끼는데서 시작하고, 지혜가 계발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지혜를 얻은 사람이 지혜를 얻기전보다 더 인색하고 자비스럽지 못하다는 사례를 접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세상의 연기성을 보는 사람은 실재성과 독단성을 떠나기에 더 인색하고 자비롭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자비일진데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는 그런 지혜는 어디에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수행을 오래 한 사람인데 가까이 지켜보니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괴팍하고 자비스럽지 않다면 그 사람은 수행을 잘못한 것이고 지혜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니며 그런 사람을 두고 지혜와 자비가 양분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현응스님은 번뇌와 욕망을 끊어 제거하는 것은 소승, 번뇌와 욕망의 공성을 알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대승이라고 구분한다. 그러고서는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는 태도는 번뇌를 실재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응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부처님이 탐진치가 본래 공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탐진치를 소멸하라고 가르친 것은 부처님도 탐진치를 실재시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탐진치를 제거한다는 것이나 탐진치가 본래 공성임을 안다는 것은 다른 내용이 아니다. 心是菩提樹(심시보리수)로 시작되는 신수의 게송에 혜능이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로 답한 것을 보면서도 신수의 점수는 낮은 수준이고 혜능의 돈오는 높은 수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말이나 탐진치가 본래 없으며 번뇌와 보리가 不二라는 말이나 모두 같은 달을 가르키고 있다. 신수의 게송이 차원이 낮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일생동안 사용한 언어가 신수쪽에 더 가깝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라는 돈오에 치우쳐서 단계별로 수행하는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고 깨달음의 단계와 단계별로 없어지는 번뇌의 특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표현과 강조점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 내용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닐진데 저자가 이렇게 보는 것은 이해하는 깨달음(돈오)를 인정하고 점수를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이루는 깨달음의 폐해를 지적하기 위하여 이해하는 깨달음이라는 칼날을 빼어들었지만 아직까지 넘어야할 산이 남아있다. 초기경전에는 점수의 가르침이 중심을 이룬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바다와 같이 점점 깊어진다라는 표현이나 10가지 족쇄를 기준으로 44과를 나누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승의 입장에서 소승아라한을 폄하하고 보살이라는 용어를 무리하게 나누고, 소수학자의 의견에 따라 경전을 필요한 부분만 인정하는 등 불완전한 이론과 주장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양쪽에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루는 깨달음이라는 병에 걸린 약이자 2700년전의 부처님의 원음을 발굴하여 드러내놓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할만하다.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비판을 적극 환영하고 26년간이나 지루하게 비판해 줄 누군가를 기다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현재 이루는 깨달음을 믿고 평생 의존해서 살아가면서 지치고 멍이든 자들에게 벼락같은 울림이 될 수도 있으며, 깨달음의 과정에 있는 자들은 입을 바위처럼 닫고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감옥에 갖혀 있는 이들을 오해의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는 햇살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이 부처님의 원음을 되새기게 하고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각게하여 불교계에 활력을 주고, 수행자들을 토론으로 마당으로 이끌고 있다는 측면에서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새롭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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