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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허정스님의 '붓다로 살자’ 비판에 대한 의견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2.24|조회수121 목록 댓글 1

허정스님의 붓다로 살자비판에 대한 의견

 

정웅기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이 글은 허정스님의 불교신문 기고문, 그리고 도법스님과 공개토론을 앞두고라는 제하로 쓰인 스님의 블로그 글에 대한 소감이다. 토론회를 위해 일부러 지역에서 올라오신 스님에게 그래도 글로 적어 의견을 전하는 정도의 성의라도 표해야겠다 싶어 급하게 작성된 것이다. 부족한 개인 의견임을 양해 바란다. 허정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법담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참 행복하고 기쁘다.

 

허정스님의 문제제기는 불교가 전승된 이래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물어져왔던 것들 - 나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붓다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붓다가 될 수 있는가 - 과 연관이 있는 중대한 물음들이다. 한국불교가 맞고 있는 상황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티벳불교, 남방불교, 명상을 필두로 한 서구불교까지 다양한 불교전통이 한국에 소개되어 있다. 백가쟁명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대승불교에 기반하면서 통합적 회통을 지향해 온 한국불교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던지는 허정스님의 물음을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세간과 출세간, 삶과 수행, 이론과 실천, 재가와 출가 등 불교 안에 또아리 틀고 있는 분리와 분절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출발한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도 이러한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있고 풍부해질 것이라 믿는다.

 

1.

허정스님은 착하게 살자, 양심적으로 살자, 혹은 붓다의 가르침대로 살자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붓다로 살자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부처의 의미와 경지를 물었다.

 

-. 붓다는 누구인가? 여래 10호에 뜻이 담겼다.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붓다는 실천적 측면에서 동체대비행자이다. 선정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붓다는 무색계 선정에서 나와 색계 4선정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선정주의를 지향하고 평온과 집중의 색계 4선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붓다는 탐진치라고 하는 부정적인 번뇌와 무지, 업이 모두 사라진 이이다. 삶의 측면에서 보면 붓다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자신의 온 삶을 이끌고, 타인의 삶을 이러한 길로 인도하는 이이다. 한 순간도 부정적인 것에 물듦 없이 깨어 신구의 삼업으로 온전한 동체대비행을 펼칠 수 있으면 그가 누구이든 붓다다.

 

-. 이 물음에는 붓다는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한 분뿐이고 그 외 중생이 성문아라한, 보살아라한 이상의 계위를 얻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담겨진 듯하다. 이러한 인식은 상좌부불교, 대승불교 전통 안에 모두 있다. 미래의 부처님으로 567천만년 후에 오실 미륵불 이전에 붓다의 탄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음을 던지고 싶다.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지구로부터 멀리 567천광년이 떨어진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면 미륵불은 지금 오셨을 것이다. 그들에게 붓다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인가? 미륵불도 오신 것인가?

 

2.

허정스님은 본래 부처를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원리와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임의적이고, 추측이어서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 본래 부처가 원리와 가능성일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앞 뒤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 원리는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원리(가능성)가 사실과 다르다면 그것은 거짓원리라는 것이니 배척해야 마땅하다.

 

-. 본래부처는 번뇌와 업에 묶인 중생 그대로가 붓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번뇌와 업에 묶인 중생에게도 부처될 성품, 부처될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중생 따로, 부처 따로인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부처될 성품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중생에게 부처될 성품이 없다면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전통을 막론하고 불교사상의 근간이다. 임의적인 추측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원론에 젖기 쉽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먼 미래의 일로 붓다되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장 붓다로 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3.

허정스님은 붓다로 살자가 대승경전에 보이는 일체중생 실유불성’ ‘본성성불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 대승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이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은 대승불교를 설명할 때 부파불교와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학자들의 대승은 믿음에 기초하였다는 표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지 않으며, 대승불교라 해서 다르지 않다. 대승불교 또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에 기초하고 있다. 붓다로 살자 또한 그러하다. 우리 주장에는 믿음이나 전제가 없다.

 

-. ‘붓다로 살자고 했지, ‘붓다로 살 수 있음을 믿자는 것이 이 운동의 중심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4.

허정스님은 붓다로살자가 붓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하여 붓다가 되는 것이 너무 쉬운 일처럼 설명하여 기존의 수행체계 수행계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부처의 경지를 묻는 질문과 같기에 여기서 함께 답하겠다.

 

-.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이 44, 510지와 같은 불교문화권마다 갖고있는 차제를 무시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붓다로 살자에서는 차제를 부정한 바 없다. 다만 차제에 묶인 비주체적이고 소극적이고 이분법적인 태도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붓다로 사는 것을 시간적으로 아득히 먼 미래의 일로, 공간적으로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떠난 뒤의 일로 여기는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각 문화권에서 차제를 정한 본 뜻과 달리 차제는 수행자 스스로 한계를 짓고 안주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비행기나 ktx, 고속도로로 빨리 갈수 있고, 갈지자로 늦게 걸어갈 수도 있다. 지금여기 각자의 삶에서 붓다의 행을 얼마나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는가? 이 본질을 잊어버리고서 차제에 매달리면 그 때 차제는 울타리와 장벽이 된다. 삶이 우선인가, 삶을 잘 살기 위한 차제가 우선인가? 본말전도 하지 말자는 것이다.

 

-. 붓다 되기 전 석가보살이 닦았던 행과, 무상정등각을 얻은 후 붓다의 행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붓다가 되기 전에는 붓다로 살수 없다는 생각은 붓다 되기 전과 붓다 된 후의 행이 다르다고 하는 인식에서 나온 듯 하다. 붓다 되기 전과 성도 후의 행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붓다는 원인 없이 탄생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붓다는 성도전이든 후든 8정도, 6바라밀 등 같은 붓다행을 닦은 것이다. 온전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관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것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하며,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 (우리 같은 범부가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고 난 이에게만 붓다의 삶이 허락되어야 한다면, 보살이 된 후에만 보살의 삶이 허락되고, 성문이 된 후에만 성문의 삶이 허락된다는 것과 같다. 현실은 그 반대다. 성문의 행을 닦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문이 되며, 보살의 행을 닦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살이 되며, 붓다의 행을 닦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붓다가 될 수 있는가?

 

-. 원인과 결과를 단절적으로 분리한다면, 그리하여 중생은 성문과 보살 붓다의 행()을 살 수 없다면, 결과적으로 중생은 성문도 보살도 붓다도 될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석가모니보살이었을 때 붓다의 삶을 부지런히 행하여 부처가 된 것처럼 범부 또한 보살의 삶, 붓다의 삶을 따라 배우기 위해 살면서 온전한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범부와 불보살의 차이는 온전한 행의 차이일 뿐이다. 범부는 늘 미망에 젖어 내가 본래 붓다임을 잊고 탐진치에 물들어 사는 것이고, 붓다는 미망에서 벗어났기에 늘 깨어 붓다행을 하는 차이일 뿐이다. 중생과 붓다의 종자는 다르지 않다.

5.

허정스님은 불설선설과 선설불설을 말하며 선설불설은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 라고 말하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 대승불교의 선설불설함석헌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가 아니라, “함석헌의 말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인 함석헌의 말이 불교경전이 될 수는 없다. 견강부회하면 안된다.

 

-. 또한 부처님은 스스로 진리의 발견자라 했지, 창조자라고 한 바가 없다. 부처님이 발견하신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인도사상계와 종교의 반성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사상의 핵심인 연기, 윤회 뿐만 아니라 포살, 자자, 갈마와 같은 공동체 윤리들이 다 그렇다. 한 예로 불교공동체를 뜻하는 상가는 붓다 당시 인도에서 도시 상인계급의 조합, 공화정의 정치공동체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붓다는 이 말을 가져다 썼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창조적인 수용과 변화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불교는 이러한 열린 진리관과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최근 과학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구사론>의 우주관이 잘못되었으며, 그대로 믿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불교가 가진 장점이다. 이 또한 선설불설의 열린 진리관에 기반하고 있다.

 

6.

허정스님은 열린 진리관의 오류가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A가 없으므로 B가 없다는 연기공식에 대입할 범위를 한정치 않고, AB에 모든 것을 집어넣어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 있다고 확대 해석한 결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허정스님이 말하는 것은 선형적 인과론이다. 그런 인과론은 동서양 어디에도 있는 것이다. 붓다의 연기관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의지해 있다고 확대해석한 것이다.

 

-. 이렇게 물어보자. 부처님이 입멸하심으로 지수화풍 4대가 흩어졌다. 4대는 사라졌는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부처님의 지대는 흩어져 지금 저 앞의 나무와 내 육신의 지대에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의 수대는 내 피에, 내가 마시는 물 한방울에 다 들어있다. 나의 4, 당신의 4대도 마찬가지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누군가의 피가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되고 호흡 한 자락이 된다. 이것이 온 세상을 중중무진의 인드라 그물로 본 붓다의 연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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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본원( 本 願) | 작성시간 15.02.24 관념의 불교가 사실의 불교로 제자리를 찾아가면^^
    불교는 관념의 희론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이 현실에서
    명쾌하고 명랑한 불교로
    우리의 삶에서 발견되고 실천되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무거운 관념의 짐을 벗고 도량에서 활짝웃는 모습들이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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