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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논쟁 관전 포인트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6.02.06|조회수80 목록 댓글 0

깨달음 논쟁을 바라보며
  
작년(2015년 9월)에 현응스님이 발표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시작으로 깨달음 논쟁이 활발하게 지속되고 있다. 현응스님이 발제문이 발표된 뒤 한 달이 지나서 전국선원수좌회에서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고 석달이 지나서 수불스님이 장문의 반박문을 언론에 내는 동시에 전국사찰에 우편으로 보냈다.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의 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일반인들의 글이 연속적으로 올라오면서 2016년 새해부터 깨달음 논쟁이 뜨겁게 번지고 있다. 종단의 밖에서 아무리 비판의 소리를 질러도 스펀지처럼 쏙 빨아들여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탄식을 받아왔던 불교계에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모처럼 만에 벌어진 깨달음 논쟁에 많은 분들이 쉽게 참여하고 관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엇이 이번 논쟁의 핵심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현재 한반도에는 2600년 불교역사속에서 각 시기별로 나타났던 다양한 불교가 들어와 있다.  그 다양한 불교전통과 종파는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더라도 강조점과 표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의지하는 경전, 수행법, 스승의 차이에 따라 여러가지 불교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다양한 불교관은 자연스럽게 마찰과 갈등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하나가 현재 현응과 수불스님의 깨달음 논쟁이다. 몇 년전에 있었던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논쟁과 ‘붓다로살자’라는 논쟁도 불교관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쟁들은 각 전통이 지닌 권위와 세월의 무게 때문에 단번에 정리되거나 통합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 깨달음에 대한 논쟁도 설사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이 만나서 토론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쉽게 정리되기는 어렵다. 다행인 것은 과거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이 선어록과 선사들의 입장에 근거를 둔 논쟁이라면 이번 깨달음논쟁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인 니까야에 근거를 둔 논쟁이라는 점이다. 빠알리 니까야와 율장이 한글로 번역되었기에 비로서 가능한 논쟁인 것이다.

 

 1. 현응스님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여기서 잘 이해한다는 것은 대승의 ‘반야지’를 현대적 용어로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를 쉽게 다가서려고 하였고 그 이해가 반야지의 번역어라는 단서를 달아둠으로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그 이해를 다시 선불교가 잘 계승했다고 보고 선불교에서는 그 이해를 ‘돈오(頓悟)’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잘 이해한 근거를 마하박가에서 찾는다. 오비구와 야사와 야사친구 55인, 숲에서 만난 30명, 가섭 삼형제와 제자들 천명의 제자들, 부처님을 마중나온 빔비사라왕과 12만명의 신하들, 사리뿟다와 목갈라나의 제자들 이백오십명이 짧은 시간에 깨달은 것은 부처님이 설명을 잘했고 제자들이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에 수불스님은 ‘잘 이해한다’는 것을 너무 성급하게 알음알이로는 업장을 녹일 수가 없으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고 ‘이루는 깨달음’을 주장하며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을 낮은 차원으로 간주한다. 또 수불스님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짧은 시간에 깨달은 것은 부처님의 위신력과 제자들이 상근기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토론에서 근기론이 나오면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마치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생문제를 꺼내면 이야기가 선명해지지 않듯이 근기론은 각자 평행선을 달리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현응스님은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끌어가는 종지는 조계선풍이 가장 적합하다면서도 ‘○○종’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힐 때 한국불교를 특정한 종파불교의 굴레 속에 갇히게 하므로 종명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헌 제2조를 해석함에서도 ‘근본교리 봉체’와  ‘직지인심 견성성불’과 ‘전법도생’을 동등한 무게로 봄으로서 통불교라는 것을 지적하고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작다는 것을 강조한다. 수불스님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조하여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리고 간화선이야 말로 다른나라의 불교와는 차별되는 한국불교의 정통성이자 고준함이며, 시대를 뛰어넘어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본다. 부처님의 초기전통과 중국에서 전해진 선사들의 전통중에서 어느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발생한 차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현응스님은 미래지향적인 측면이라면 수불스님은 과거지향적인 측면에 서 있는데 이것은 종단의 수행자를 교육하는 교육원장과 간화선을 지도하는 선원장이라는 각자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3. 현응스님이 진단하는 2016년의 한국불교는 비관적이다. 한국불교는 은둔하는 불교,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불교, 기도(기복)만 하는 불교, 명상(참선)만 하는 불교인데다 “스스로의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도 없애버린 경우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현응스님은 이러한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불교에서 벗어나 연기적(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적 자비를 실천하는 한국불교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깨달음은 어려워서도 안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도 안된다. ‘반야지’를 ‘이해’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이루는 깨달음을 배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불스님도 “구미에서 이미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일본선불교를 능가하는 불법의 정수는 간화선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다. 현응스님은 오염되지 않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을 돌렸다면 수불스님은 중국과 한반도에 전해진 간화선 전통에서 희망을 찾으려한다. 두 분은 현실의 부족한 면을 진단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인데 결론은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4. 현응스님은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승계하되,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용어와 이론으로 변화시켰다. 예컨대 『반야심경』과 『금강경』에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및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을 거론하지만, 반야지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했다”라고 말하며 깨달음은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멋있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불스님은 불교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가야 하는 것은 지당하지만, 깨달음이 시대에 따라 진화해가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라고 반박한다.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내용과 수불스님이 주장하는 내용은 오늘날 불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두가지 불교관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주장이 각각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 있다.

 

5. 현응스님은 “간화선의 ‘간(看)’은 잘 살펴보다의 뜻이며, ‘화(話)’는 이야기, 또는 대화라는 뜻이다. 즉 간화선은 ‘이야기, 또는 대화를 잘 살펴보는 선’이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사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두었다가 수시로 떠올려서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현응스님은 대혜종고에 의해 간화선이 체계화하기 이전 달마와 혜능의 전거를 들어 설명하고 수불스님은 간화선이 체계화된 이후의 입장에서 간화선을 설명한다. 여기서도 근거로 드는 차이가 두 사람의 견해차이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유식학을 근거로, 어떤 사람은 중론이나 아비달마를 근거로 주장하게 되면 각각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6. 마하박가에서 오비구가 깨달을 때도 수다원을 얻는 장면이 나오고 10가지 족쇄의 유무에 따라 성인4과를 설명하는 내용이 니까야에 무수히 나오고 있는데 현응스님은  깨달음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로 설명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부파불교의 주장이라고 단언한다. 현응스님은 삼매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는 경들을 부파불교의 윤색이라는 학설을 추종하고 있는데 정확히 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가 누구이며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문제는 전문가들도 각자의 연구성과와 신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는 상황인데 현재로선 사향사과를 부처님이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많이 부족하다.

 

7. 현응스님은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한다는 영역이고,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여  행위 하는 것을 말한다.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비난했던 무리들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인다. 보디사트바를 깨달음과 역사로 나누는 것도 적절치 않으며 그렇게 나누어 놓고 다시 결합시키려는 노력도 무모해 보인다. 이것은 깨달은 여러사람 중에서 지혜를 강조하는 분도 있고 자비를 강조하는 분도 있을 것인데 한 몸에 지혜와 자비를 다 구현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이상성으로 보살을 규정하는 것과 같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완을 넘어 완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 논쟁과 더불어 어떠한 것이 보살인가를 다시 논의해 봐야할 때이다. 불교관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한 불교계에서 사상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 깨달음 논쟁이 이어지다가 차츰 희미해지더라도 그때그때 돌출하는 사안에 따라 사상논쟁은 계속 될 것이다. 예를들면 ‘종교평화선언’은 연기와 무아를 어떻게 현실에 맞게 사용하느냐는 논쟁이 될 것이고 ‘붓다로 살자’는 화엄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하는 논쟁이 될 것이며 ‘법인 관리법’은 승가의 의미와 승가 구성원의 자세를 되묻는 토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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