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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과 효

[스크랩] 이순신 장군의 효행(孝行)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19.09.15|조회수222 목록 댓글 2

이순신 장군의 효행( 

 

15941115(己丑).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과 양()이 순서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오늘은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므로 나가지 않고 혼자 방안에 앉아 있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아들 울() 등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다행, 다행이다. 영의정의 편지가 왔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난중일기에 부모님에 대한 일기는 75회나 나옵니다. 전쟁 중에도 어머님을 곁에 모시고 생신을 챙기며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족들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는 이순신의 효()의 실천을 봅니다.

 

아버님의 임종도 못보고 백의종군 길에 어머님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건만 고향을 지키던 셋째 아들을 왜적의 칼날에 잃었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느라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가버리셨다." 고 절규합니다.

 

옛말에 "충신을 구하려거든 반드시 효자가문에서 구하라." 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의 어버이에게 효도 하는 모습에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구하는 참 실천의 효행을 볼 수 있습니다.

 

성웅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임진란이 일어났을 무렵 그의 어머니는 78세였고, 충무공은 50세를 넘었다. 충무공은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문안을 드렸으며, 어머니의 소식만 듣고도 반가와 하고 몇 날만 소식이 끊겨도 걱정하였다. 이런 그의 효심은 난중일기의 곳곳에 배어 있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노모께서는 '잘 가거라, 가서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어라' 하시며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시며 위로하셨다."라거나, "하루 종일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을 찾아뵈오니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 앉으시는데 기력이 흐려져 몇 날을 더 보존하시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그 마음을 즐겁게 풀어 드리기 위하여 장년의 시름을 잊고 소년의 모습으로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하여 어머니를 그리는 정을 토로하였다. 특히 "새벽꿈이 몹시도 뒤숭숭하다.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괴롭고 눈물이 흐른다." 라는 일기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아들 이었는가 잘 보여주고 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병신년 (선조 29: 서기 1596(52)/1596111011

 

전쟁 중에도 충무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 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출처] 이순신 장군의 효행.. |작성자 나의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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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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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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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청산 풍류 | 작성시간 19.09.15 훌륭한 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늘~~평안 하십시요...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19.09.15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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