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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과 효

[스크랩] 문익점(文益漸): 충성과 효행(孝行)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19.09.17|조회수219 목록 댓글 1

문익점(文益漸): 충성과 효행(孝行)

 

문익점은 1360(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우리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남긴 김택영(金澤榮 : 1850~1927)고려계세충신일사전(高麗季世忠臣逸事傳)'문익점(文益漸)'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旣而遭母喪 廬塚三年 時日本人侵掠沿海州郡 至晉州 見人皆奔鼠 而獨益漸守墓奠哭 心感之 乃斫一木 書之曰 毋犯孝子 以約其衆 引而去

 

이윽고 어머니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때 왜구(倭寇)들이 해안 근처의 여러 마을들을 침입하고 약탈하여 진주(晉州)까지 이르렀다. 왜구(倭寇)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쥐새끼처럼 도망쳤지만, 유독 문익점(文益漸)만은 어머니의 묘를 지키면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곡을 했다. 이에 왜구(倭寇)들이 감동하여 나무 하나를 벤 후 그 곳에 '효자를 범하지 말라.(毋犯孝子,무범효자)'라고 썼다. 왜구(倭寇)들은 그것으로 맹세를 한 후 무리를 이끌고 가버렸다.

 

- 고려계세충신일사전'문익점'

 

 왜략개분 점수묘곡 (倭掠皆奔 漸守墓哭) : 왜구의 침략에 모두 도망쳤으나 문익점은 묘를 지키며 곡했다.

 

문익점은 공민왕 9(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민왕(恭愍王 : 31)의 배원정책(排元政策) 때문에, 고려와 원()나라는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최유(崔濡)라는 간신배가 원나라에 거주하면서 충선왕(忠宣王)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공민왕(恭愍王) 대신 고려의 왕으로 떠받들며 모든 고려인들에게 섬기도록 했습니다. 원나라의 황제 역시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문익점만은 최유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최유가 그를 덕흥군의 별실에 연금해 놓고 "문익점이 이미 새 임금을 섬기기로 했다."는 허위 사실을 퍼뜨렸습니다.

 

이에 문익점이 그곳을 빠져나와 원나라의 간원(諫院)으로 가서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죄를 낱낱이 고발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나라 황제는 크게 분노해 문익점을 교지(交趾 : 안남)로 유배 보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문익점은 고려로 돌아왔는데, 그때 공민왕은 그의 충성심을 매우 어여삐 여겨 중용했습니다. 고려의 대유학자 목은(木隱) 이색(李穡)은 시()를 지어서, 그의 드높은 절의(節義)와 행실(行實)을 높이 찬미했습니다.

 

그 후 우왕(禑王 : 32) 이인임(李仁任) 등 소인배들이 정사(政事)를 농단하자, 문익점은 스스로를 '사은(思隱 : 은둔을 생각하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집현산(集賢山) 오리동(悟理洞)에 삼우당(三憂堂)이라는 집을 하나 짓고 살았습니다.

 

문익점은 '삼우(三憂 : 세 가지 근심)'란 나라를 부흥시키지 못한 것, 성학(聖學)을 밝히지 못한 것, 자신의 도리를 닦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려가 이성계 세력에 의해 멸망하자 문익점은 두문불출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후 이성계가 사신을 보내 아무리 불러도 병을 핑계 삼아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문익점의 굳은 의지를 높이 사, 결국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이라며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한 문익점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 2(1400),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배지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얻은 목화씨

 

문익점은 학자나 정치가 혹은 충신이나 효자로 알려지기보다는, 목화씨를 최초로 우리나라에 전파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목화씨를 얻은 곳은 유배지인 교지(交趾 : 안남)를 떠나 고려로 돌아오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조선 세종시대에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에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이 덕흥군을 섬기다가, 그가 패배하자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얻어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계세충신일사전(高麗季世忠臣逸事傳)에서 밝히고 있듯이, 만약 그가 덕흥군을 섬겼다면 고려로 돌아와 역적의 죄를 뒤집어썼을 것이고 또한 충신이 아닌 역신(逆臣)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남겼을 것입니다.

 

여하튼 문익점은 길에서 목면(木棉)꽃을 보고 시종을 시켜 목화씨를 따오도록 한 후 붓 대롱에 숨겨 고려로 가져 왔습니다. 그는 가져온 목화씨를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각각 5개씩 나누어 심어 재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 모두 말라 죽어버리고 오직 정천익이 심은 목화씨 하나에서만 싹이 자라났습니다. 그 후 정천익은 우연히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된 원나라 승려 홍원(弘願)을 통해 직조법을 익히게 되었고 마침내 목화 직조의 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고려사열전(列傳)'문익점'에도,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은 문익점이지만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는 모두 정천익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후 목화 재배와 의복 제조 방법이 크게 보급되면서, 온 나라 백성들이 큰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익점의 '목화씨'와 정천익의 '물레'는 고려와 조선에 거대한 '의복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문익점은 사후, 목화씨를 보급한 공로가 크게 인정되어 태종(太宗) 시대에 들어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고, 세종(世宗) 때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는 한편 부민후(富民侯)에 봉해졌습니다.

 

 출처 : 사랑 마당(곡우) 역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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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19.09.17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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