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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과 효

[스크랩] 조선 명재상 이원익 효심(孝心)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0.10.22|조회수147 목록 댓글 2

조선 명재상 이원익 효심(孝心)


조선시대에 한 젊은 선비가 선을 보이러 어느 판서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사윗감을 본주인 영감은 키가 너무 작아 볼품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퇴짜를 놓고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마침 식사 때인지라 밥이나 먹고 가라면서 한 상 잘 차려 주었다.


처음 보는 좋은 음식에 가난한 선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선비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주섬주섬 보자기에 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인 영감이 물었다.

“왜 음식을 먹지 않고 보자기에 싸는고?”

선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희 집은 가난하여 이렇게 좋은 음식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집에는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데 음식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갖다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젊은 선비의 효성에 감동이 된 주인 영감은 즉석에서 마음을 바꾸어 사위로 맞을 결심을 하였다. 후에 이 젊은 선비가 정승이 되었는데 그이가 바로 조선 중기 명재상이었던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대감이다.


사람은 어딜 가나 어떤 순간이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자기 할 일을 할 줄 알 때 행운이 온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우주 법계가 미소 짓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출처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김재웅)

 

▲ 참고  :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 )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태종의 아들 익령군(益寧君)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함천(咸川) 부수(副守)를 지낸 이억재(李億載)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관원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두루 거치고 황해도 도사를 지내다 이이의 추천으로 내직인 정언으로 발탁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인해 승정원이 탄핵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1587년(선조 21)에는 이조 판서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 목사가 되었다. 안주 목사로 부임해 지방의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이원익은 그 후 중앙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이원익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 큰 뜻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였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평안도 순찰사가 된 이원익은 왕의 피란길을 호종하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조선군을 지휘해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의정, 4도의 도체찰사, 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조와 인조 조에도 영의정이 되어, 그는 세 왕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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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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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0.10.22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 작성자jeje 청산 가자 | 작성시간 20.10.22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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