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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피와 영험록

법성스님 '마음 한 번 돌리니 극락이 예있구나' 2부

작성자식암(息庵)|작성시간06.03.25|조회수2,052 목록 댓글 26
제2부  서강에 가득한 물 한입에 마셔 볼까?

    수월도량에 핀 꽃

 

돈암동에다 집을 한 채 산 다음 풍기의 금계동으로부터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은 해방되던
해 9 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여기저기 어머니 스님이 가 계신 절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벌써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이 햇수로 3 년이나 흘렀다.
 

어머니 스님의 법명은 도정이며, 원각 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했고, 이하응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어머니가 방한암 스님이 계시는 오대산의 상원사 선방으로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로 들었기에 그곳에 계시리라 여겼는데,

상원사로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다.

어머니 스님의 소식을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에 윤덕인 스님이 나를 찾아왔다.
 

덕인 스님은 어머니와 같은 문중은 아니지만 출가 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가까운 사이였다.

덕인 스님은 어머니 스님보다 연하여서 어머니 스님에게 사형님이라고 불렀다.
두 분이 서로 가까우니 자연 나도 덕인 스님을 따랐다.

덕인 스님은 나를 조카님이라고 불렀고, 말을 놓지도 않았다.
 

내가 스님에게 말했다.
 

"어머니 스님이 이 절 저 저절로 떠돌아다니시니 그러다가 돌아가셔도 모르겠어요.

제가 절 하나를 사드릴 테니 스님도 거기서 우리 어머니랑 같이 사세요."
"사형님은 공부하느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이지 있을 절이 없어 떠돌아다니는게 아니에요."
"아무튼 서울에다가 우리 어머니가 계실 절을 하나 마련해 드려야지, 내가 걱정이 돼서 안 되겠어요."
"그 어른은 독살이를 싫어하는 분인데."
"그러지 마시고 저와 같이 그럴듯한 집이 있나 한번 알아보자구요."
 

나는 내켜하지 않는 덕인 스님을 설득했다.
우리 두 사람은 절로 쓸 수 있는 집을 보러 다녔다.

어머니는 산 밑에 바가지로 물을 떠먹을 수 있는 샘이 있는 집을 좋아했다.

복덕방마다 찾아다니며 산 밑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나는 샘이 있고, 전망이 트인 집을 물색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적당한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마음에 든다 싶으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가격이 헐하면 절 터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장소도 가격도 적당하여 계약을 하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로채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덕인 스님이 말했다.
 

"인연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더군다나 독살이을 하려니까 마가 까는 것인지도 모르지.

어머니가 좋아할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서둘 필요는 없어요. 나중에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고 다시 보러 다니는게 좋겠어요."
"........"
"나도 내일은 떠나야겠으니 일단 절자리 보러 다니는 문제는 여기서 단념해요, 조카님."
 

나는 낙심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말빚이나 지지 않았을걸.

어머니 스님은 무엇을 계획할 때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말은 꺼내 놓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천에 옮기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말빚을 진 것이라고 하는 분이었다.

어머니 스님은 다른 어떤 빚보다 가장 무서운 것이라며, 나에게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신 바 있었다.
 

나는 그날 밤, 관세음보살님께 내가 말빚을 지지 않게 해달라며 간절히 빌었다.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도 세번 반복했다.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그리고 나는 준제진언을 외었다. 어느새 경을 보지 않아도 진언이 내 입에서 술술술 흘러나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신통한 일이었다.

아금지송대준제
즉발보리광대원
원아정혜속원명
원아공덕개성취
원아승복편장엄
원공중생성불도
 

내가 이제 대준제를 지성으로 외우옵고
크고 넓은 보리심의 광대한 원 세우오니
정과 혜를 닦아 어서 어서 밝아지이다.
높은 복과 큰 장엄을 나는 두루 갖추오며
거룩한 모든 공덕 나는 모두 이루옵고
그지없는 중생들과 불도 함께 이뤄이다.

이때만 해도 내가 보살로 있었으니 진언을 독송하다가도 막히거나 급하면

그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찾고는 했다.

어쨌거나 나는 관세음보살을 실히 만독은 부르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는 날아갈 듯이 으리으리한 어떤 기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에는 짐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밤이라 잠을 자야겠는데 방안에는 모기장이 쳐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누워 있어서 내가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안방에도 건너방에도 사랑방에도 무수히 누워 있었다.

어디서 잠을 자야 하느냐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귀를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 잘 데가 없으면 여기 와서 나하고 같이 자자!"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눈은 사발만하고 코는 백주명처럼 크고,
입이 함지박만해서 반인반수 처럼 보이는 괴물이 광 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괴물은 마치 탱화로 그려진 사천왕 중의 한 명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그리고는 급히 바깥마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중문을 통과할 때
구름에 안겨 있던 달이 막 헤어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문득 나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떨어지고 너덜거리는 흩적삼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꿈에도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바깥마당은 마치 학교 운동장처럼 드넓었다. 그런데 그 마당의 한구석이 대낮처럼 밝은 것이었다.

거기엔 키가 후리후리한 중년 부인이 시중드는 동자를 거느리고 서 있었는데,
마당 한 구석이 대낮처럼 밝은 것은 그 부인이 쓰고 있는 면사포 때문이었다. 순백의면사포는 그만큼 눈부셨다.
나는 부인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 갈 곳이 없어요. 어디로 가시는지 저를 좀 데려가 주세요!"
 

부인은 나의 말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부인의 손을 잡았다. 부인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나는 부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 실개울가를 지나갔다.

그리고 산모퉁이를 돌아서니까 소나무 사이로 수천 개의 등불이 마치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왔다갔다하는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대 장관이었다. 나는 부인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등불이에요?"
"우리를 마중하고 있는 거란다."
 

부인은 반짝거리는 등불을 향해 층층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대문이 있었다.

그 대문을 열자 세 마리의 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나는 깜짝 놀라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층층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뒤돌아보니 부인은 세마리의 개 중에서 두 마리만을 치운 다음 혼자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부인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대문 쪽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남아 있는 사나운 개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짖어댔다. 개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인은 저 안쪽에 있는 양옥집의 현관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재주껏 안으로 들어와 보라는 듯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어느 틈에 모습을 감추었다.
 

결국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건물을 끼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건물의 뒤쪽은 산이었다.

산에서 기와집까지는 세단계의 층게를 이루며 금잔디가 쫙 깔려 있었고, 이름 모를 각종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곳은 마치 무릉도원의 선계와도 같았다.
 

나는 금잔디를 밟으며 산에서부터 기와집 쪽으로 걸어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옹달샘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물을 먹고 싶은데 떠먹을 바가지가 없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아래쪽에서 웬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샘 쪽으로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명옷에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장죽을 입에 물고 있는 할아버지의 허리에 표주박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말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 그러니 표주박 좀 빌려주세요."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안 돼. 그 물은 아무나 먹는 물이 아니야."
"목이 말라서 그래요."
"공짜로 마실 수 없는 물이라니까 그러네."
 

할아버지는 심술 사납다기보다 다분히 장난기 어려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할아버지에게 좋은 담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표주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표주박을 얻어들고 돌아보니 언제 몰려왔는지 샘 주변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웬 동자가 기다란 막대기 끝에 바가지를 달아 사람들에게 물을 떠주고 있었다.

나는 동자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나도 물을 좀."
 

동자는 내가 내민 표주바에다가 물을 떠주었다. 그 물 맛은 마치 감로수처럼 청량했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동자에게 물을 얻어 마신 다음 기와집 쪽으로 다시 걸어내려가는 대목에서였다.
눈을 뜬 나는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불을 밝히고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예사 꿈 같지가 않았다.

꿈에 만난 동자를 데리고 있던 부인이 관세음보살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옆방에서 잔 덕인 스님에게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덕인스님도 길몽이라고 했다.
이 무렵 나는 좋은 절집을 사게 되리라는 기대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소득 없이 몸만 고달프게 만들 꼴이었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알아보리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상서로운 꿈을 꾸고 나자 덕인 스님에게 한 번 더 말했다.
 

"스님, 헛걸음치는 셈치고 하루만 더 집을 보러 다니지요!"
"하여간 조카님 열의가 대단하니 관세음보살님이 현몽으로 도와주실 만도 해. 알았어요."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는 대로 돈암동 집을 나왔다.

우리가 지금의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던 복덕방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당시에는 그 근처가 모두 밭이었다.
 

나는 복덕방 주인에게 용건을 설명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복덕방 영감이 확인하듯 되풀이했다.
 

"산 밑에 있는 집으로서 맑은 물이 나오는 옹달샘이 딸려 있어야 한다. 살림집으로 쓸 거면 꼭 산 밑이 아니라도 되잖아요?"
"살림집이 아니라 절을 만들 거예요."
"아, 그래요?"
 

영감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말했다.
 

"얼마짜리를 원하는데요?"
"예산이 50 만 원이에요."
"그럼 안 되겠군. 절을 만들 만한 좋은 곳이 있는데 50 만 원으로는 어림없어요."
"장소는 좋아요?"
"산 밑이고, 그곳에 곱사등이가 먹고 병이 나았다는 기가 막힌 약수터가 있어요.

일정 때 명월관의 별장으로 쓰던 집이죠.

건평이 20 평이고 대지가 180 평이니까 절을 세워도 큰 절을 세울 수 있습니다.

두 분이 찾으시는 땅 중에서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인이 150 만 원은 꼭 받아야 한다는 데 있단 말씀이에요."
 

복덕방 영감의 말을 듣자 그곳을 사든 사지 못하든 구경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지난밤 꿈에 부인을 따라갔던 장소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말했다.
 

"한번 볼 수 없을까요?"
"예산보다 워낙 비싸서 못 살 텐데 헛수고시키는 것 아니어? 여기서 멀어요."
"보고 마음에 들면 살 수도 있으니까 안내를 부탁드리는 거죠."
 

망설이던 푼수와는 다르게 복덕방 영감은 시원스레 말했다.
 

"까짓, 그럽시다. 죽은 사람 원도 풀어준다는데 산 사람 부탁 못들어드리리까. 그럼 가시죠."
 

복덕방 영감이 앞장을 섰고, 덕인 스님과 내가 뒤를 따랐다.

영감은 보성 중학교 뒤쪽으로 올라가다가 성북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서자 실개울이 나왔다.

나는 그 개울을 보는 순간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기가 막힐 정도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개울은 나중에 복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여름이면 제법 많은 양의 급류가 내려닥칠 만큼 큰 것이었다.

명월관 별장으로 썼다는 집은 성북동으로 뻗쳐 내려오는 북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층계를 올라가자 대문이 나왔다. 그것도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너무나 비슷했다.
대문을 두드리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사납게 생긴 세퍼트였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스님, 개도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아요."
 

덕인 스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에는 집주인 대신 집을 맡아 돌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나타난 그가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벚꽃이 만발해 있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밖에도 이름모를 여러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약수터부터 가보았다. 그 위치와 생긴 모습이 꿈에서 보았던 곳과 역시 일치했다.
더 볼 것도 없이 관세음보살이 현몽하여 나를 데리고 왔던 그 장소였다.

여기다가 어머니 스님이 계실 도량을 세우면 신도들이 흥하게 모이고 크게 융성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별장지기가 말했다.
 

"집 관리하기도 힘들고, 너무 넓고 커서 나는 이곳에 사는 것이 무섭습니다. 빨리 임자가
나와 팔렸으면 좋겠어요."
 

명월관 별장을 꼭 사고 싶었으나 돈이 문제였다. 나는 복덕방 영감의 안내를 받아 집주인을 만나러 갔다. 그는 복덕방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혜화동의 한 골목집에 살고 있었다. 수인사가 끝나자 내가 말했다.
 

"팔려고 내놓으신 별장을 보고 왔습니다. 우리가 찾던 그런 곳이더군요. 그걸 꼭 사고 싶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이 지금 50 만 원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나는 아무리 못받아도 150 만 원은 받아야 팔 겁니다."
"그 말씀은 들었어요. 집 값을 깎아 달라고 찾아뵌 것은 아니고, 말씀드리기 미안합니다만 집 값은 한품도 깎지 않을테니 우선 50 만 원만 먼저 받으시고 나머지 백만 원은 1 년 후에 받는다는 조건으로 파시면 안 될까요?"
 

집주인은 50 대의 점잖은 남자였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집을 외상으로 파는 수도 있습니까?"
"완불을 치르기 전까지 집 문서를 넘겨주시지 않으면 되잖아요. 1 년 후에는 꼭 나머지 돈을 갚아 드릴 수가 있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백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 1 년 후에 실수가 없겠습니까?"
"못 갚을 땐 계약금으로 걸었던 50 만 원을 돌려주시지 않으면 손해보는 일은 없을 줄
압니다만."
 

그는 돈이 급해 별장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은 아니었다. 별장지기는 자꾸 그만두고 싶다고 하고,

자기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어 곤란해하는 참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어봤자 별 필요가 없어서 처분할 생각을 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던 그는 1 년 후에 돈을 받을 수 있는 보장만 있다면 내가 제시하는 조건으로 처분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요량이 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스님이 같이 오신 것을 보니 그곳에다 절을 지으실 생각인가 보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마침 집주인이 불자였다.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었다. 집주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윽고 고개를 끄덖였다.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은 일정 때 난다긴다하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명월관 별장입니다. 내가 해방 직후에 사들였던 건데 서울 중심에 그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찾기도 드물 겁니다. 절을 세우면 안성맞춤인 곳이죠. 절과 인연이 있는 땅인 것 같으니 제시하는 조건으로 팔겠습니다."
 

내가 그곳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관세음보살 덕분이었다.

관세음보살은 그곳을 점지하실 때 집주인이 전무후무한 외상매매방식에 동의하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꿈에 관세음보살을 따라 앞문으로 바로 들어왔다면 나는 그 길로 즉시 머리를 깎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뒤쪽으로 돌아가 산에서 내려오는 식으로 들어왔기에 내가 바로
출가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는지.
 

이렇게 해서 지금의 성북동 성라암 도량이 될 터를 장만했다.

그것은 물론 처음에 밝혔듯이 어머니 스님을 위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집을 마련한 직후에 서울에 왔다가 나를 찾아온 어머니 스님은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독살이는 안 한다."
"그러지 마시고 자식 입장도 좀 생각해 주세요. 어머니가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니 어느 절에 계신지도 알 수가 없고,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라도 나시면 누가 돌보아 주는 건지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도량에 침 한 번 뱉은 일이 없는 나다. 신장에게 미움 살일을 한 적도 없고 도반들과도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내가 왜 독살이를 해. 나 병들어도 다 돌봐줄 사람 있으니까 걱정 말아라."
"어머니!"

 "나를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사전에 나와 상의를 했어야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외상으로 이 넓을 집을 턱 사놓고 장차 어쩔 셈이냐? 난 모르는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아무리 간곡하게 권해도 어머니 스님은 동요 없이 며칠을 나와 같이 머물다가 상원사선방을 떠나가고 말았다.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덕인 스님도 예상했던 바라며 어머니 스님을 따라가 버렸다.

나는 스님들이 돼서 사람의 성의도 몰라보고 매정하기가 동지 섣달 된서리보다 더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뿐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을 그냥 비워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암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기로 결단을 내렸다. 앵두며 복숭아, 벚나무 들로 뒤덮여 있는 명월관 별장은 꽃이 피었을 때는 아름답지만 막상 살려고 하니 너무나 컸다. 나 혼자 살기에는 더욱 그랬다.
칡넝쿨이 엉기고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매일 보아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스름 달이 뜨는 밤, 의지가지없는 나 혼자 불을 밝히고 앉으면 한숨부터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밤이면 선남선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명월관의 별장 자리였으니, 얼마세월이 흐르지도 않은 왜정 시대에는 이곳에서 손님과 기녀들이 어울려 진탕하게 마시고 춤추며 놀았을 것이 아닌가. 그들의 분탕질 소리가 재현되는 환청을 들을 때면 나의
외로움은 뼈에 사무쳤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별장지기는 우리에게 집을 내주고 이사를 가면서 말했다.
 

"이제야 말하지만 밤중에 문에다가 모래를 확확 뿌리는 일도 있었고, 누군가 이곳저곳 저벅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 올때도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나 혼자만 들었다면 혹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고 넘기겠지만 우리 식구들이 다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터가 아주 센 곳입니다."
 

도깨비집이라는 소문이 이웃간에 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혼자 머물고 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늘 든든하고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무서웠다면 결코 이곳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터가 나와 특별히 인연이 있는 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석달을 혼자 살았다. 칠월 백중 때가 되어 하안거를 마친 어머니 스님은 아무리 매정하게 떠나갔어도 딸을 끝내 몰라라 할 수 없었음인지 덕인 스님과 함께 나를 찾아오셨다.
어머니 스님은 이곳저곳 지형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곳이 절터는 절터다."
"관세음보살이 점지해 주신 곳이라니까요."
 

어머니 스님은 특히 약수터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그 물을 바가지에 떠서 시원스레 잡수신 다음 말씀하셨다.
 

"얘, 너 들어 보아라. 무궁산하천, 보공산중려, 각지일표래, 총득전월거라고 했어."
"그게 무슨 뜻인데요?"
"네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할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새겨는 줄게.

무궁무진한 산 밑의 샘물이, 산에 사는 벗들에게 두루 공양하네.

각각 표주박 하나 들고 와서, 모두 보름달을 담아 돌아가노니. 어때, 이해할 수 있겠어?"
"글쎄요."
"아무려나 나는 독살이는 안 할 생각이었지만 네 성의를 매양 모른 척할 수만도 없고, 부처님을 모셔오기로 하자."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어요."
 

나는 비로서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어머니 스님이 계사이신 이화응 스님께서는 광나루 근처에 있는 절에 당신이 모시던 부처님을 임시로 맡겨 놓고 있었다.

화응 스님은 우리가 부처님을 모시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부처님을 우리가 모셔가도 좋다고 했다.
 

명월관 별장 중에서도 별당 자리는 가운데가 넓은 마루였다. 그리고 마루 양옆으로는미닫이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었다.

마루는 새로 구조 변경을 하지 않아도 불단을 만드니 그대로 법당을 설계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양옆의 방은 평소에는 지대방으로 쓰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땐 미닫이를 뜯어 내면 그대로 넓은 법당이 되었다.
십상 안성맞춤이었다.
 

광나루 근처의 절로 어머니 스님과 덕인 스님이 부처님을 모시러 갔던 날이다.

나는 두 분 스님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갔다.

예상은 과히 빗나가지 않아 개울가에 갔을 때 부처님을 모신 두 분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처님을 안고 있던 어머니 스님이 말했다.
 

"애야, 여기까지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 동안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네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무거워져서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가 없으니 이게 무슨 조화냐?"
 

나는 웃으면서 어머니 스님의 말을 받았다.
 

"엄살 좀 그만 하세요."
 

그리고는 어머니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을 옮겨 받았다. 부처님은 무겁지 않았다.

나는 잰걸음으로 부처님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단 위에 부처님을 안치시키자 법당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다. 어머니 스님이 말했다.

 

"도량을 만들었으면 목탁 소리가 끊이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만인이 동참하는 백일 기도를 드려야겠다."
 

나는 어머니 말씀이 옳다고 여겼다.

이튿날부터 나는 권선책을 들고 삼선교로 해서혜화동, 돈암동, 보문동 일대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백일 기도의 만인 동참을 권하고 다녔다.

이 무렵에 꾸었던 꿈도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꿈에서도 나는 권선문을 들고 백일 기도 동참을 권하며 다니고 있었다.

내가 막 어떤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 골목의 끝에서 한 남자가 나팔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만인 백일 기도에 동참하시오!"
 

나 이외에 또 백일 기도 동참을 부르짖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 명의 남자가 꽃가마를 메고 있었다.
백일 기도 동참을 부르짖은 사람은 가마 앞에 서 있는 비구 스님이었다.

나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가마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마 속에 권선책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때 비구 스님이 나를 돌아보는 바람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 만난 가마를 멘 사람들이나 비구 스님이 신장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신장들이 나를도와주고 있다고 여기자 더욱 힘이 솟았다. 나는 용기백배하여 매진했다.

백일 기도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어머니나 덕인 스님은 내가 열심으로 동참을 설득하고 다닌 결과라고 치하했지만 나는 관세음보살이 도왔다고 여겼다.

관세음보살이 만든 도량이니 불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재와 불공도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나는 돈암동 집을 팔고 화주 들어온 것을 합해 약속했던 일년이 되기 전, 꼭 10 개월만에 잔금을 치르고 집 문서를 완전히 넘겨받았다. 이곳이 오늘날의 '성라암'이다.

성라암은 관세음보살님이 점지해 준 곳이며, 호법선신들이 지켜주는 곳이고, 신도들이 함께
힘을 모아 키워가는 도량이다.
성라암에는 때마침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신도들은 물론 이려니와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와 꽃놀이를 즐겼다.

나는 꽃 사이에 어울려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밤이 되어 연못에 만월이 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면 바로 여기가 수월도량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수월에 관해 "수청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대원성인종정토래래실부래
심심범부왕정토거거실부거
피부래차차불거피이성범회우
양득교제자사야
미타광명여정만월보편십방
수청이정칙월헌전체
월비사수이거래
수탁이동칙월무정광
결비사주이거거

재수즉월정탁동정
재월측무취사거래
 

대원성인이 정토에서 사바로 온다 하지만 실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심이 깊은 범부가 정토로 간다 하지만 실제 가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 정토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범부가 정토로 가는 것도 아닌데
성인과 범부가 함께 만나 교제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미타불의 대광명은 청정한 만월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춘다
물이 청정하면 달이 전체로 나타나지만
달이 물을 취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물이 탁하고 흔들리면 달이 광채를 잃지만
달이 물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물에 있어서는 맑고 탁하고 동하고 고요함이 있지만
달에게는 취하고 버리고 가고 오는 것이 없다.

나는 수월도량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무엇보다 어머니 스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어서 기뻤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체험할 수가 있어서, 신도들에게 불성의 바람을 넣어 줄 수 있기에,

나 또한 늘 부처님 곁에서 살 수 있으므로 이보다 큰 축복은 없을 듯싶었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는 데 따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만인 동참 백일 기도를 권하고 다니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육마당집 보살이 웬 스님과 함께 와 있었다.

육마당집 보살이란 마당이 여섯 개가 있는 큰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여 붙인 별호였다.

말하자면 그 보살은 대갓집에 살고 있는 신도였다. 보살이 어떤 스님을 소개했다.
 

"**사 도총리 스님이세요."
 

나와 도총리가 서로 인사를 하자 육마당집 보살이 말했다.
 

"오늘 아침 이 스님께서 예불을 드리던 중에 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북쪽 상공에서 하강하는 모습을 친견하셨다지 뭐예요. 신기한 일이라며 혹 북쪽에 아는 절이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퍼뜩 성리암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이곳으로 모시고 온 거예요."
 

도총리 스님이 말을 받았다.
 

"와서 보니 만인 동참 백일 기도를 드리신다구요.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기도법사로서 백일 기도에 함께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크게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제자 두 명을 더 데리고 백일 기도 기간 동안 우리 절에 머물면서 신심껏 목탁을 두드리며 기도에 열과성을 다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도총리 스님의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여서 내가 물었다.
 

"요즈음 너무 수고를 해서 그런가 안색이 좋지 않으시네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구요?"
"네."
"간밤에 악몽을 꾼 탓인가?"
 

그는 한 부인이 자기를 무섭게 노려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기치창검을 든 군사들이 부인의 뒤에서 나타나 자기를 창검으로 찌르더라고 한다.
 

"어찌나 놀랐던지 비명을 다 질렀습니다. 가위에 눌려 버둥대다가 깨어 보니 온몸이 땀투성이더군요."
 

나는 나의 꿈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후일, 그 꿈이 의미심장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루는 도총리 스님이 어머니 스님에게 말했다.
 

"저는 조실부모했기에 지금까지 부모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는 노스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머니 스님은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시는 분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오자 별 생각없이 좋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어머니 스님을 스스럼없이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에게는 누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나는 그의 넉살이 웬지 썩 내키지가 않았지만 그 동안의 노고를 생각해서 매정하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백일 기도가 끝났을 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누님, 우리 교주 선사를 한번 같이 만나러 갑시다."
 

조계종에서는 문종의 어른을 조실이라고는 불러도 교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도총리는 사교를 신봉하는 스님이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도총리가 설명했다.
 

"우리 **종도 다 같은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댜.

교주께서는 부처님의 말씀에다가 일찌기 당신이 크게 깨달으신 바 있는 내용을 추가시켜 새로운 종파를 만드신 겁니다. 결코 사교가 아니니 한번 교주를 친견해 보십시오."
"글쎄."
"마침 10 월에 옥황상제께 큰 제를 올리게 됩니다. 그때 같이 찾아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우리 절의 여러 신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보살들 중에서 **종 교주를 친견하러 가겠다는 사람이 많은 데 나는 적이 놀랐다.

내 눈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 허와 실을 가려 보리라 작정했다. 두 명의 보살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는 우리를 전주에 있는 **종 포교당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대중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늘어서서 무릎을 꿇고 환영했다. 도총리 스님에 대한 대중들의 예우가 대단했다.

우리는 포교당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종 본사가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곳에서 옥황상제께 제를 올리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쿠리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즐비했다.

그중에는 각종 생선과 돼지 머리, 오징어, 동태,굴, 조개류 따위들까지 있었다.

절이라 이름 붙이고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눈치를 보더니 도총리 스님이 변명했다.
 

"부처님은 고기를 안 드시지만 장군들이야 먹잖아요."
 

절에서 장군들을 위한 제를 지낸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마침내 **종의 교주를 친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는 흰 수염을 무릎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우리들을 맞이했다.

스님이라는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잘 보아주면 도인이요, 정확히 말하면 사교 무리의 두목일 뿐인
그는 특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무릎을 탁쳤다.
 

"됐다! 나에게 보검이 하나 있어도 자루가 없어서 못썼는데 이제 자룻감을 찾았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에게 말했다.

"**종으로 개종을 하시오."
 

그리고는 30 년 동안 이 절을 다닌 사람에게도 베풀어 주지 않았던 파격적인 예우라며
나에게 **종식 불명을 지어준다고 자청했다.
 

"하루아침에 개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옳지, 옳지.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하는 것보다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더 믿음직해."
 

그는 나에게 필요 이상의 찬사를 보냈다. 그것도 꺼림칙한 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이 사교 집단의 무리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 올리는 것을 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서

그날로 서울로 돌아올 채비를 한 다음, 함께 간 보살들에게 말했다.
 

"난 돌아가려는데 같이 안 갈래요?'
 

그러나 보살들은 도총리에게 깊숙이 빠져 있었다.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나는 혼자 상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이들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허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얼마 후 **종 무리들이 우리 절에 나타났다.

일행은 교주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명이었다. 차마 문전박대할 수가 없어 받아들였다.

교주는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불로 자처하는 그의 출현에 일부 지각없는 신도들이 동요를 보였다.

 

남대문 로터리 부근에서 다방을 경영하고 있던 서 보살이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공양청정을 베풀었다. 서보살은 교주의 성씨가 자기와 같다며 특히 유난스럽게 교주를 위했다.
그로부터 음식 대접을 잘 받고 돌아온 교주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남대문 근처의 복덕방에 가서 오늘 우리가 찾아갔었던 보살 네 집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
 

마치 자기 집을 팔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머지않아 큰 난리가 날 겁니다. 난리가 나면 서울에서 살수가 없어져요.

재산을 팔아 전주의 우리 **종 본사가 있는 곳으로 옮겨야 살아 남을 수 있어요."
 

그들은 나에게도 말했다.
 

"난리가 나면 서울이 쑥대밭이 될 텐데,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절을 팔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쇼?"
 

나는 당치도 않은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난리가 나서 집이 없어질지는 모르지만 땅은 안 없어집니다. 내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그런 말씀 마세요!"
 

당시 어머니의 사제인 최덕준 스님은 자하문 밖의 암자에 살고 있었다. 덕준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래서 스님에게 승복을 지어 달라고 찾아오는 스님네가 많았다.

그럴 때 옷을 지어 주면 보시를 하기 마련이어서 그렇게 한푼 두푼 모아 둔 돈이 있었다.

덕준 스님이 어떻게 하다가 **종 패거리들의 말을 솔깃하게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님은 자신의 피 같은 돈을 모두 이들에게 바쳤다. 스님은 속지 말라고 당부드리는 나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자기가 믿지 않으면 그만이지 남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나쁜 일이야."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나로서도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종 사람들은 내 주위로 조금씩조금씩 파고 들어오며 나의 심기를 건드려 놓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신도들에게 불치나 난치병을 치료해 준다고 선전을 해댔다.

집안에 환자가 있는 신도들이 몰려들자 그들은 이상한 재료로 조제한 정체 불명의 환약을 주고 돈을 받았다.
그 약을 사다 먹은 사람들마다 부작용이 일어나 복통을 하고 설사병이 나고 부어오르기도 했다.

항의 전화로 전화통에서 불이 날 정도였다.
 

우리 절 성라암에는 내 키보다 더 큰 철쭉이 여기저기 소담스럽게 자라 있었다.

봄이 되어 그것들이 꽃을 피우면 장관이어서 온동네 사람들이 꽃구경을 오고는 했다.

나는 그 꽃들을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이들이 내가 애지중지하는 꽃들을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두 베어 버린 것이었다.
 

더 이상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재산을 가로챌 궁리나 하고 있는 이들을 당장 몰아내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는 그들이 묵고 있는 방문을 열어 제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경찰에 알려 혼이 나도록 하겠어요!"
 

도총리가 벌떡 일어났다.
 

"누님, 왜 이러십니까?"
"누님 좋아하시네. 내가 어째서 당신의 누님이야? 당장 이곳에서 나가!"
 

나는 도총리가 만인 동참 백일 기도의 기도법사로 우리 절에 머물 때 꾸었다는 꿈의 의미를 되뇌어 보았다. 그의 꿈에 나타났었다는 부인은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던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도총리가 성지를 탐하려는 것을 알자 관세음보살을 기치창검을 든 신장들을 데리고 꿈에 나타나 일차 경고를 주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관세음보살이 성라암을 지켜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 동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던 덕인 스님이 이천으로 옮겨 갔다.

덕인 스님에게는 출가 전에 낳은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 아들 역시 출가를 하여 스님이 되었다.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오자 스님이 어울려 조그마한 암자를 만들었다.
속가식으로 말하며 그들 모자는 살림을 난 것이었다.
   

 이야기 법문

당시 민간에는 난리가 날 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사회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했다는 반증이 될것이다.

그러나 우리 절에는 한동안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어머니 스님은 두 명의 상좌를 받아들였다. 우리 절에는 목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 스님은 이따끔 나에게 말했다.
 

"갑순아, 내 생각에는 너도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는 것이 좋겠다."
"왜요?"
"우리가 머물렀다 가는 이승의 삶이란 잠시 잠깐이다. 찰나적인 게야.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꼭 머리를 깎아야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예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출가를 하고 정진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좀더 생각을 해 보고요."
 

어머니 스님은 한가할 때면 나에게 법문도 해주고, 옛이야기 삼아 듣고 나며 뼈와 살이 될 수 있는 말씀을 구순하게 들려주시곤 했다.
 

"내가 방한암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해줄까?"
"네."
"옛날에 한 재상이 살았더란다."
 

어머니 스님이 천천히 말씀을 이어 갔다.

그 재상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벼슬도 높았고 살림은 풍족했으며,

더욱이 빼어난 모를 가지고 있는 아내를 두었다.
 

재상은 어여쁜 아내를 몹시 사랑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하인들이 저희들끼리 쑤근거리는 것이었다. 재상은 하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하인 중에서 한 명이 대답했다.
 

"마님이 아니 계십니다."
"마님이 아니 계시다니, 정녕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 계셨습니다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소인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재상은 아내가 쓰는 내당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과연 하인들의 말대로 그곳에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중을 드는 몸종 아이는 분명 간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잠자리에 든 아내가 밤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감히 어느 댁이라고, 누가 야밤에 월장을 하여 보쌈을 해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온데간데 자취가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가 행방불명이 된 변고를 당한 재상은 사람을 놓아 아내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종적이 묘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재상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내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사가 된 그의 친구가 찾아왔다. 어사 친구는 수인사가 끝나자 말했다.
 

"내가 재 너머 숯막을 지나 오다가."
"어서 계속하게."
"숯 굽는 영감의 아낙으로 보이는 여자를 보았는데 아무래도 자네 부인을 닮아 있더란 말일세."
"뭐라구?"
"내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지. 자네 부인이 숯장이의 아내가 되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얼굴 생김이 비슷한 여자가 있었던 게야."
 

어사 친구의 말을 들은 재상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아내가 숯 굽는 영감의 아내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지만 닮았다는 말만으로도

가서 확인을 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상은 기어이 재 너머 심산 유곡에 있는 숯막을 찾았다.

그가 숯막에 당도해 보니, 숯굽는 영감의 아낙은 허름한 웃을 입고 얼굴이 온통 숯검정으로 칠해져 있지만 자기 아내임에 틀림없었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마침 숯막에는 영감이 없었다. 재상은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아내는 그를 보자 깜짝 놀랐다.

재상이 말했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오. 보쌈이라도 당한 것이오?"

재상의 아내는 그 말을 부인했다.

"지금의 영감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오?"
 제 발로 영감을 따라온 것입니다. 죄를 묻는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재상은 더욱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숯 굽는 영감의 마누라가 지체 높은 선비의 꾐에 빠져 영감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했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던 반가의 아녀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도주하여 신분이 낮은 숯 굽는 영감과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부인도 자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납득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집을 나온던 날 밤, 저는 분명히 잠을 자기 위해 이부자리 속에 들었습니다.

그때 창문을 통해 숯 사시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숯 사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내가 언젠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 같았고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목소리 같았사옵니다.

나는 지남철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와 숯장수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이끌려 오게 되었는지 모르오나 이곳에 당도하자 마치 전에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험하게 일하며 구차하게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평온하며 행복했습니다. 죄 많은 여자이니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재상은 당시의 법도에 따라 자기를 배신한 아내에게 벌을 내려야 마땅하겠지만 차마 아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이곳에 살지 말고 백리 밖으로 거처를 옮기시오.

이곳에 계속 있다면 여론 때문에라도 나는 당신에게 벌을 줄 수밖에 없게 되니까."
 

말을 마친 재상은 돌아섰다. 그의 발은 천근 무쇠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는데, 여전히 아내도 자신의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산마루로 올라가서 양지바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아내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정녕 무엇 때문에 아내는 배신을 했던 것일까?
 

그는 점점 깊숙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정진에 빠져 있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을 잊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었다.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예와 이제가 없어지고, 만상과 내가 동일하게 된다는 것을, 일찍 부처님께서는
설파하신 적이 있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그 염력에 의해 탁 하고 일순간에 깨칠 수 있었다.
깨닫고 보니 아내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은 전생에 선객이었다.

당시 그는 탁발승이 되어 떠돌다가 바로 자기가 지금 앉아있는 산마루의 바위에 앉은 적이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자니 이 한 마리가 스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손으로 집어 내었다.

스님이어서 죽일 수는 없고,산에다가 내버리고 다시 길을 떠나갔다.

산중에 버려진 이는 마침 지나가던 산돼지에게 붙어 생명을 연장했다.
 

이는 참선을 한 스님의 살을 뜯어먹은 인연으로써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살을 뜯어먹은 세월만큼은 전생의 스님이었던 현생의 재상과 결혼하여 살았고,

그런 다음에는 산돼지가 환생한 숯 굽는 영감에게로 이끌려와 살게 된 것이었다.

산돼지도 선객을 뜯어먹던 이를 살린 공덕으로 사람으로 환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산돼지였기에 신분이 미천한 숯장수로밖에 태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 스님 말씀하셨다.
 

"어떠냐, 재미있지?"
"네."
"하찮은 이도 윤회한다."
"............"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또한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지만 흉내라도 열심히 내다 보면 그 공덕도 적은 것이 아니어서 복을 지을 수가 있어.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선방 건너편 산에 원숭이들이 있었지.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원숭이들은 참선하는 스님들 흉내를 내었어.

그 공덕으로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었지. 그것이 5 백 나한이야.
내가 5 백나한에 얽힌 얘기 한자락 또 해줄까?
이것은 경봉 스님 회상에서 동안거를 할 때 경봉 큰스님께 들은 이야기다."

한 우바이 존자가 가을 벌판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밭가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가 잘익은 조 이삭을 손으로 만지니 조 세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남의 곡식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리나 먹으나 마찬가지라 여겨 조를 먹었다.
우바이는 자가기 먹은 조 세알에 해당하는 보상을 하기 위해 소가 되어 밭 주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밭 주인은 소가 들어온 뒤부터 농사가 잘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큰 부자가 되었다.
소는 조 세 알에 3 년의 농사를 지어 주었다. 그 3 년째 되는 날이었다. 소가 주인이에게 말했다.
 

"주인장, 이틀 후 이 마을에 산적 떼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5 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산적 떼를 기다리십시오.

재난은 내가 면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주인은 소가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해서 시키는 대로 음식을 장만해 두었다.
소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정말로 창, 칼을 들고 활을 멘 산적 떼 5 백 명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산적들은 넓은 마당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산적 두목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지껏 여러 마을을 털고 다녔지만 이렇게 미리 자기들이 올 줄 알고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가

먹을 수 있도록 해준 경우는 처음이기때문이었다.

한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중인데 집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산적 두목이 말했다.
 

"당신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거요? 어떻게 우리가 올 줄을 미리 알았소이까?"
"나에게 그런 신통력이 어찌 있었겠소. 소가 알려 주어서 알았을 뿐입니다."
"소가 말을 했다구?"
 

이때였다. 외양간에 있던 소가 걸어 나오더니 산적 떼가 지켜보는 앞에서 껍질을 벗고
원래의 우바이 존자가 되어 일장설법을 했다.
 

"나는 산중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인데 이 집 밭 옆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익은 조를 만지게 되었다.

이때 조 세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기로 그것을 버릴 수 없어서 먹었다.

남의 곡식을 세 알 먹은 대가로 소가 되어 3 년 동안 이 집 농사를 지어 준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창과 칼로 남의 재물을 수없이 강탈했으니 소가 되어도 몇백 번이나 되겠는가?"
 

설법을 들은 도둑들은 발심하여 출가를 했고, 수행을 잘하여 나한과를 증득, 후일에 5 백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우바이 존자는 5 백의 도적 무리를 교화시킨 후에 그 소가죽을 동쪽 바다에 던졌더니

그 소가죽이 우무가사리가 되었다. 우뭇가사리는 오늘날 요리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

"악한 사람도 마음을 돌이키면 선량한 사람이 될 수가 있고,

마음 가운데 나쁜 생각을 없애면 득도할 수도 있다는 게야.

그 5 백 나한의 전신은 원숭이들이었어.

스님들이 수도하는 것을 흉내낸 공덕으로 인간이 되어 태어났지만 워낙 미물이라 화적떼가 되었다가
다시 크게 대오각성하여 나한이 된 것이야."
 

나는 어머니 스님에게 물었다.
 

"한암 스님이나 경봉 스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어머니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암 스님이

'차라리 천년의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백년 동안 교언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으리라.'

하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신 것은 1925년도였다고 한다.

그 이후 아직까지 산에서 한 번도 내려오시지 않은 분이야."

해방 전, 미나미'남차랑' 총독은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 된 한암 스님을 만나고자 총독부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대산 밖을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있어,

만나고 싶으면 총독이 오대산으로 찾아오라 했다고 한다.

서슬 시퍼런 일제하에서 총독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나미 쪽에서 오히려 입장이 난처해졌다.

강제로 잡아오라고 할 수도 없고 총독이 직접 오대산을 찾아간다는 것도 체면상 용납되는 일이 아니었다.

궁여지책으로 정무총감오오노를 보냈다.

이때 법문을 청한 오오노에게 한암 스님은 "심전개발'"이라는 네 글자만 백지 위에 다가 써주었다.
 

2 차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케다'층전청'라는 경무국장이 찾아와서

이번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기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일본군이 이긴다고 말을 하면 아첨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일본군이 진다고 하면 이케다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때 한암 스님은 태연히 말했다.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어머니 스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암 스님은 공양을 드린 대로 잡수시고 차다 덥다 질다 되다 짜다 싱겁다는 말씀이 없는 분이야.

절대로 몸에 명주 따위를 붙이지 않았고, 대중들과 함께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을 하시지.

허리를 구부리지도 않고 종일 눕지도 않으시며, 발도 뻗지 않고 몸을 벽에 기대지도 않으셔.

그러니 여간한 결심이 없으면 한암 스님 회상에서 한 철을 나기가 힘들어."

한암 스님의 오도송에 얽힌 일화다.

저화주중안홀명
종자고지수연청
약인문아서래의
암하샘멸불습성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눈이 밝으니
이로 좇아 옛길이 인연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

정운봉 스님이 이 오동송의 끝귀절이 어떻게 조사의 뜻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 왔다.
이에 한암 스님은 대답했다.

'불시여의고'이므로 시조사의니라.' 이것이 네 뜻이 아닌고로 조사의 뜻이라는 말이다.
 

스님이 수좌에게 말했다.
 

"참선 수좌도 어려울 때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도록 하라."
 

이 말을 들은 수좌가 물었다.
 

"스님이 삼매중에 들면 일체 재난이 침입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구태여 밖으로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님은 말씀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와 삼매에 든 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둘이 아니지만 힘은 두가지가 나타나리라. 관세음보살을 많이 부르다가 보면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오묘한 지력이 능히 세상의 괴로움에서 구한다고 했느니라."

어머니 스님은 말씀을 계속했다.
 

"'오대산' 하면 한암 스님을 연상하듯, '통도사' 하면  경봉 스님이야.

경봉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에서 크게 종풍을 떨쳤고, 두 분은 친교가 깊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어요.  한암 스님이 십여 년 이상 연상일 거야."
 

나는 후일 경봉 스님을 직접 뵈올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때만 해도 어머니 스님을 통해 듣는 큰스님들은 나와는 다른 먼 세계에 계시는 분들 같았다.
 

어머니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일일이 여기에 다 옮길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그 말씀들이 나의 종교적 세계를 구축하는 뼈와 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위해 절을 만들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부처님의 은덕 가운데 하나로

여기며,다시 한번 부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0 년 6 월 25 일, 새벽 예불이 끝날 무렵이었다.

쾅쾅 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여명에 쌓여 있는 성북동의 우리 절까지 들려왔다.

어머니 스님이 나에게 물었다.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지축을 흔드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풍문으로만 떠돌던 난리가 난 모양이라고 여겨져 나는 급히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유난히 떨리게 들려왔다.
 

그는 북괴군이 남침을 해왔다는 것을 알리고,

한국이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기 때문에 도발해 온 북괴군을 단호히 무찌를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수도 서울이 그렇게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대로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3.8 선 이북에 자리잡은 북한 공산 집단이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쏘며 남침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경악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전쟁이 오래 가지 않을 것라고 했다.

나는 대통령의 말을 믿었기에 난리가 났다고는 하지만 적들이 쉽게 서울까지 쳐내려올 수 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아무려면 군인들이 있는데 전선이 어이없이 함락되고, 수도방위 저지선이 쉽게 뚫리겠는가 싶었다.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이 나던 이날, 어머니 스님의 은사이신 원각 스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원각 스님이 제먼저 내 생각이 너무 안일 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 스님이 반색을 했다.
 

"이 난리 통에 어떻게 여기를 찾아오셨어요, 스님?"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서 가던 길인데 난리 때문에 갈 수 없게 되었어. 서울 올라온 김에 여기로 찾아온 거예요.

지금 거리에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 자네들은 피난 안 가는 거야?"
 

어머니 스님이 물었다.
 

"피난을 가야 할까요?"
"천하 태평이군. 인민군들이 쳐들어오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애? 사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이때 성라암에는 어머니 스님과 상좌 두 분, 보살 두 명, 그리고 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원각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냥 절에 남아 있어서만은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비로소 들었다.

서둘러 보따리를 싸고, 피난길에 먹을 밥을 만들어 자루에 가득 담았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챙겨서 피난을 가기 위해 뒷산으로 올라갔다.

삼선교나 혜화동쪽으로 가기보다 성 위로 올라가 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에,

거기서 갈피를 잡고 진로를 정할 요량이었다.
우리가 다섯 명의 국군 패잔병을 만난 것은 도성을 감싸고 있는 성곽 밑에서였다.
패잔병 중의 한 명이 우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내가 대답했다.

"남쪽으로 가야 살 길이 있을 것 같아서."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미 한강 다리가 끊겼어요."
 

우리는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수 있었다. 나는 불안감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 대통령의 말로는 서울을 반드시 사수할 것이라고 했는데요?"
"대통령은 벌써 오래 전에 서울을 떠났어요. 자기는 떠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남아있으라니,

남아 있다가 죽어도 좋다는 말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찢어지고 피 묻은 군복이,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어떤 말보다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굶주려 있었다. 우리는 기왕에 피난을 못갈 바에야 밥자루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군들은 우리가 주는 주먹밥을 소금에 찍어 단숨에 먹어 치웠다.
 

우리는 성북동의 절을 출발해서 겨우 뒷산 성곽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성라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절로 돌아와 법당에 모두 함께 모여 앉아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불도 못 켜고 어둠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외는데,

미아리 쪽에서 쏜 대포 두 개가 법당 뒷산에 와서 터지며 천지 개벽하는 굉음을 토해 놓았다.

유리창이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깨졌다. 우리는 혼비백산을 하여 엎드렸다.
 

나는 일순간 기절을 했다가 의식이 돌아오자 귀를 살그머니 당겨 보았다.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나만 살았는가 여겼다. 그런데 옆에서 아이구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도 아이구 소리를 했다. 우리 식구들 중에 죽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공포의 밤이 지나가자 서울은 완전히 인공 천지가 되었다. 관공서마다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민군들은 주민들을 불러 내어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노력 봉사에 동원시키기 시작했다.
 

서울이 인공 천지가 되고 보니 바로 이웃해 살던 사람 중에 빨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웃집에 어느 대학의 교수로 나가던 사람이 있었다. 그 부인은 아주 얌전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속마음을 내보인답시고 말했다.
 

"세상이 바뀌니까 사람을 오라가라 해대니 귀찮아서 못 살겠네."
 

교수 부인은 눈을 치뜨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다 인민을 위해 그러는 건데 그만한 고생도 못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학식 높게 생각했던 교수와 얌전하기로 소문이 나있던 사모님까지 부부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아마도 일본 유학 시절에 공산당에 가입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말을 받았다.
 

"허긴 그래요.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데 참아야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내 가슴은 두근반세근반 울렁거렸다.

나는 인공치하를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든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싶었다.
궁한즉 통한다고 했던가.

성라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웃집에 아들 딸 남매를 데리고 혼자 사는 여자가 세들어 있었다.

그 여자도 일본 유학까지 했다는 인텔리였다.
6.25발발 두 달 전인가, 밤중에 모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 부인과 아들을 잡아갔다.

딸은 너무 어려서 두고 갔는데 그 딸이 어찌나 울어대는지 동네가 떠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이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감금된 공산당원이라며 수근대고는 했다.

그래서 모자를 잡아다가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어린 딸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고 애처롭게 울어댔지만

이웃 사람들은 모르는 척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부모가 공산당을 했으면 했지 어린 자식이 무슨 죄가 있겠나 싶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찾아가서 나를 따라 절로 가면 내가 잘 돌보아 주겠다고 말했다.

아이는 낯이 설어서인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집주인에게 쌀을 갖다 주며 아이의 밥을 해주도록 하는 한편,

불공드릴 때 쓰던 과자며 떡, 과일 등도 듬뿍 싸다 주었다.
 

기관에 잡혀 갔던 그 부인은 갖은 고문을 다 당한 끝에 풀려 나왔다.

온몸은 구렁이기어가는 것 같은 고문의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남편 잘못 만나 모진 고초를 겪는 부인이 안돼 보여서 나는 그 뒤에도 그들을 도와주었다.

쌀을 갖다 주면 여자는 황송해하며 말했다.
 

"저 없는 사이에 우리 딸도 그렇게 잘 돌보아 주었다면서 이렇게 또.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라는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은혜 받자고 하는 일은 아니에요.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라고 했어요.

부처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뿐이니까 달리 부담은 느끼지 마시우.

애기 엄마, 그저 용기 잃지 말고 아이들이나 잘 기르세요."
 

그리고 얼마 후에 6.25 것이었다.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보니 그 여자의 남편이 동네 위원장이 되어 나타났다.

나는 위원장 부인을 통해서 출입증을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를 찾았갔다.
 

"애기 엄마, 우리 절에 쌀이 떨어졌어요. 난리 통이라 찾아오는 신도들도 없고.
이러다가는 모두 굶어 죽겠어요. 내가 남쪽에 가서 식량을 좀 구해 와야겠는데 출입증 좀 만들어 줄 수 없을까?"
 

그녀는 내가 베풀어 주었던 우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게 뭐 어려워요? 염려 마세요."
 

그녀는 나를 자기 남편이 있는 동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경위를 남편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남편은 나를 치하했다.
 

"여성 동무의 은혜가 컸구려. 출입증을 만들어 드리죠."
 

그는 손수 도장을 쿡쿡 눌러 찍어 인공치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입증을 만들어 주었다.

이 또한 부처님의 은공이 아니었겠는가.
어머니 스님을 두고 가는 것이 가장 걸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했다.
 

"내 걱정은 마라. 아무리 공산당이라고 해도 다 늙은 나야 어쩌겠느냐. 젊은 너는 난을
피해야 하니까 걱정 말고 떠나거라."
 

살아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못 만나게 되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난리가 평정되면 어머니와 상봉할 수 있게 되리라 굳게 믿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광나루 쪽으로 갔다.

출입증을 내보이자 인민군들은 제재 없이 나를 통과시켰다. 나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거기서부터 걸어가기 시작했다.
 십리도 채 가지 못해 내 발은 부르텄다.

만들어 온 인절미로 간신히 요기를 하며 이를 앙시물로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도로변의 어느 집이나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밤이 되면 그 속에 끼여들어 새우잠을 자거나 추녀 밑에서 이슬을 피하고는 했다.

서울을 떠난 지 열흘 만인가, 마침내 용인에 닿았다. 마침 그곳에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는 더 남쪽으로 내려갈 기력이 없었다. 발등이 소복하게 부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용인에도 인민군들이 진주해 있었다.

여기 가나 저기 서나 공산주의자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구태여 왜 피난을 떠났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피난민들 중엔 물론 공산당을 피해 떠난 사람도 있지만,

자기 신분을 잘 알고 있는 한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타지로 옮겨 다닌 것이었다.

마을에 있다가는 사정을 잘 아는 이웃에 의해 지주나 반동계급으로 몰려 숙청당하기 일수였다.
 

그렇다고 피난지가 꼭 안전한 것만도 아니었다. 나는 용인에서 위기를 맞은 일이 있었다.
믿었던 그 집의 아들이 내가 피난민이라고 고발한 것이었다.

나는 그곳 위원회로 연행되었다. 위원장이 나를 취조했다.
 

"서울에서 파난을 나왔다는데."
 

섣불리 거짓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정면 승부를
걸기로 작정했다.
 

"그렇습니다."
 "왜 피난을 나왔오, 동무?"
 "피난 나온 사람이 어디 나뿐입니까?"
 "동무는 반동계급이지요?"
 "나도 이북에서 당신네들이 나와야 잘 사는 세상이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믿은 사람을 반동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반동이군요."
 

위원장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태연히 계속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서울에 들어오자 먹고 살 식량이 떨어졌어요. 식량을 구하려고 나왔다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
"내가 반동인지아닌지를  모르지만 죄는 없어요. 당신네들은 인민없이 당신네들끼리만 살라우?
죄 없는 인민더러 오라가라 하니 이러고도 잘되겠어요?"
 

당당하게 따지는 내 말에 위원장은 주춤했다. 이때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들려왔다.

위원장은 취조를 중단하고 재빨리 책상 밑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가만히 있는 나를 보다가 말했다.
 

"동무도 이리 들어오시요. 거기 있다가 죽을지도 모르오."
 

폭격을 맞는다면 책상 밑이라고 해서 무사할 것인가. 위험하기는 그곳이나 밖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기 있기보다 용무가 끝났다면 돌아가고 싶어요."
 

위급한 상황에 밖으로 나가겠다니 어디 가려면 가 보라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태연히 걸어 밖으로 나왔다. 비행기는 폭격을 하지 않고 마을을 빙 돌아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때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심문을 받다가 무슨 꼬투리인가를 잡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대담하게 나가기로 완전히 작전을 바꾸었다.

우선, 부르주아로 보이지 않기 위해 장사를 하기로 했다.

금반지를 빼주고 채 익지 않은 감을 사다 침을 담가서 광주리에 넣어 머리에 이고 거리로 나섰다.
몽당치마를 빌려 입으니 영락없이 형색이 초라한 광주리 장사 아낙네가 되었다.

나는 ㄱ 길로 위원장을 찾아갔다.
 

"뭐요, 동무?"
"감을 침을 담갔더니 맛이 괜찮습니다. 좀 팔아주세요."
 

위원장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사요!"
"좀 도와주세요!"
"동무, 내가 지금 감 같은 걸 살 입장인 줄 아시오?"
 

나는 넉살 좋게 말했다.
 

"아따, 그럼 수고하시는데 거저라도 몇 개 입맛 좀 다시구려."
 

위원장은 내 말에 비실비실 웃음을 터뜨렸다.

피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들은 오히려 나에 대한 의심을 털어버렸다.
 

나는 용인에서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다가 서울 수복 직후에 상경했다.

부리나케 성라암으로 달려가 보니 절에는 어머니 스님이 혼자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우리 모녀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은사 스님은 국군이 입성하면서 당시의 암자가 있는 충청도 계룡산으로 돌아갔고,

두 명의 상좌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다 어디론가 갔다고 했다.

재회의 감격을 나누고 어머니 스님이 말했다.
 

"얘, 네가 떠나고 바로 인민군들이 절에 들어와서 부처님 탱화를 찢어 내고

여기다가 병원을 차린다고 하지 뭐겠니.

그런데 나에게 그런 말을 하던 인민군 장교가 갑자기 배탈이 난 듯 허리를 구부리더니 나뒹구는 거야.

급히 인민군들이 업어서 옮겨 가는데 겨우 도량을 벗어나 요 아래 폭포 옆을 지나갈 때 그가 죽었다는구나,

굴쎄. 신장님이노해서 벌을 내리신 거야."
 

기적은 그뿐이 아니었다.

대포가 우리 절 바로 앞마당에 두개나 떨어졌지만 하나도 터지지 않아서 도량은 폭격의 피해를 전혀 입지않았다.

그러니 탱화가 찢어진 정도의 패해가 전부였다. 어찌 부처님이 지켜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북쪽으로 밀려갔던 인민군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나는 일찌감치 이번에는 해방 전에 살았던 풍기의

금계동으로 트럭을 타고 피난을 가버렸다.

거기서 나는 종전이 될 때까지 살았다. 내가 풍기에 있을 때 나의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약대의 언니네 집에 가 계시다가 세상을 뜨신 것이었다.
부모상을 당했어도 장례 모시는 데 참여하지 못했으니, 어찌 불효를 저지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전쟁을 저주하며 피난지 풍기에서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하늘과 땅으로 헤어지면서 작별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부친의 명복을 빌 뿐이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올 때 풍기에서 쌀과 보리쌀, 조, 팥 따위들의 곡식을 많이 가지고 왔다.

전쟁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으리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과연 성리암에 도착해 보니 숟가락 몽당이 하나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몽땅 쓸어가 버렸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 스님이 무사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풍기에서 가져온 식량들은 곧 필요가 없어졌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신도의 가족들 중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도 많았고,

이웃에도 피해자는 많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재를 올리러 절을 찾아왔다.

불전이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우리 절 앞쪽에 있던 8 백여 평의 앵두밭이 매물로 나왔다.

나는 재를 올려 들어온 불전으로 그 땅을 사들였다. 역시 부처님이 허락해 주신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 땅이 오늘날과 같이 큰 규모의 성라암을 중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6.25 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이 참혹한 피해를 남겼다.

남북으로 가족이 이산되는 아픔을 낳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수효가 또 얼마이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우리 절에는 소소한 피해가 좀 있기는 했지만 거의 화를 입지 않았다.

거기다가 도량을 넓힐 수 있는 토지까지 허락해 주셨다. 부처님께 감읍할 따름이다.
 

이 무렵 성라암에 새 식구가 몇 명 늘었다.

우선 법경 스님이 우리 절에 부전'불당을 맡아 돌보는 스님'으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이었지만 행자 과정을 마쳐 부전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다음으로 두 명의 보살들이 함께 살며 공양과 절살림을 살아 주었다.

그중 광재행 보살이라는 분은 전쟁중에 가족을 모두 잃은 분이었다.

   

호법선신을 위하여

절에는 반드시 신장들이 있다. 신장들은 도량을 지켜준다.

그들을 홀대하면 꼭 심술을 한 번씩 부린다는 것을 나는 여러번 체험했다.

또한 그들은 지성껏 위하여 그만한 은덕을 입게 되는 것이다.

우리 절이 6.25 전란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점만 보아도 호법선신들이 절을 지킨다는 사실은 증명이 된다.
 

성라암에 와서 잠을 자 본 사람 중에는 간밤에 왜 그렇게 밖이 소란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산중의 절에 시끄러울 일이 무에 있었겠는가. 신장들이 돌아다니는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어떨 때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저벅저벅 도량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기에 불자들은 도량에 가면 침을 함부로 뱉어서도 안 되고,

좋은 생각으로 찾아왔으면 신장들의 보호를 받아서 심중 소구소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정성을 잘 드려야 한다.
 

대개의 불자들은 부처님 이 계시는 도량에 들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합장을 한다.
그러나 불자도 아닌 사람이 불자로 위장하여 도량에 들었을 때 그들에게는 경건한 마음도 경배심도 없다.

방약 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들도 있다. 도량을 함부로 유린하는 상식 없는 행동을 대할 때면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다.
 

6.25 직후의 일이다.

자기 남편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는 한 부인이 찾아와 정신 수양을 하고 싶으니 방 하나를 빌려 달라고 청해 왔다.

도량 내에서는 고기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단서를 붙여서 마침 비어 있던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고기를 넣은 요리를 해먹기 시작했다.

도량을 자기네 살림집과 다름없이 여긴 것이었다.

어머니 스님이 요리를 하고 있는 그 여자를 찾아가서 말했다.
 

"절에서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여자는 딱 잡아떼었다.
 

"고기는 안 먹었습니다."
 

냄비에서는 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코가 고장나지 않은 사람이면 그것이 고기찌개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스님은 냄비 뚜껑을 열어 보였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여자는 화를 벌컥 냈다.
 

"왜 마음대로 남의 찌개 그릇을 열어 보는 겁니까?"
 

여자의 서슬이 시퍼렇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만 목격했다면 어머니 스님이 마치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 여자는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것으로 오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 내가 끼여들었다.
 

"절에서는 고기를 못 먹는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잘못을 한 주제에 속인도 아닌 스님을 지금

어디서 눈을 치뜨고 몰아세우는 거예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요, 굴러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친다더니, 어디서 흘러들어와 얹혀 사는 주제에 안하무인 격이었다.

나는 그런 꼴을 더 볼 수가 없었다. 당장 방을 비우라고 하자 그 여자는 며칠 간의 말미를 달라고 사정했다.
 

우리 절에 강도가 든 것은 그 일이 있은 이튿날이었다.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떠보니 복면 강도가 내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강도는 나를 위협했다.
 

"돈 가져와!"
"절에 무슨 돈이 있어요?"
 

강도가 다락을 가리켰다.
 

"저기 돈이 있는 줄 다 알고 왔어."
 

사실 그 당시 재가 많이 들어와서 절에는 돈이 좀 있었다.

일일이 은행에 갔다올 시간이 없어서 돈을 다락의 궤짝에 넣어두었는데,

그런 내부 사정을 강도가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강도는 다락으로 올라가서 돈을 탈취해 유유히 사라졌다.
 

강도가 모습을 감춘 직후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문을 열어보니 산발한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머리칼이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려와 있고, 얼굴에는 새하얀 분칠을 했으며,

입술에 진한 핏빛 루주를 바르고 있는 여자는 사람이라기 보다 귀신을 연상시켰다.
 

나는 강도를 당한 뒤끝에 여자 귀신이 출몰하여 그야말로 혼비백산 자지러지게 놀랐다.
귀신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뒤로 물러나며 귀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귀신이 아니라
문제의 낙선 국회의원 사모님이었다.

기실 그녀의 남편이 말대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나는 여자를 알아보자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냐니오? 강도가 내가 자고 있던 방에도 들어왔었어요. 걱정이 돼서 달려왔죠!"
"일부러 귀신처럼 꾸미고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저의가 뭐예요?"
"어머. 내 모습이 귀신 같아요? 강도가 들어 얼머나 놀랐던지 귀신꼴인지도 모르고 찾아왔어요.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아직 안 했는데 신고하려던 중이에요."
 

그러자 여자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신고하지 마세요. 신고해 봤자 범인 잡기는 힘들고 오라가라 귀찬기만 할 거예요."
 

그 여자의 말을 듣자 강도가 바로 이 여자와 한 패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내부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정양을 가장하여 절 방을 빌려 머물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괴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 것도 의심이 가는 일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수사를 맡은 형사는 이것저것 물어 본 다음 여자의 방으로 가서 여자로부터도 강도가 든 경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와서 여자가 들어 있는 방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에 살고 있는 여자에게 당장 방을 비우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요?"
"이 넓은 집에 살면서, 더욱이 자비를 베풀라는 부처님 도량에서 그렇게 매정하게 사람을 내쫓으려 해도 되는 겁니까?"
 

이건 또 무슨 홍두깨 내미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형사에게 말했다.
 

"지금 강도 사건을 수사하러 온 겁니까, 여자 편을 들려고 온 겁니까?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남의 일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강도 잡는 게 당신이 할 일이니 당신 일이나 해요!"
 

그러자 형사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리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형사는 완전히 시비조로 나왔다. 그 여자는 어느새 형사까지 매수를 한 것 같았다.
미인계를 쓴 것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다 한통속이었느지도 모른다.

여자 하나가 절에 들어오더니 별요망한 일이 다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대명천지에 이런 횡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결과만 얘기하면,

나는 이때 이들을 모두 의법조처시켰다.
 

도량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고, 스님들의 수도정진처요,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함을 지향하는 요람이다.

스님들은 언제 어느때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지만 이재에 밝지 못한 편이다.

이 점을 악용하려 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하화중생의 길이 참으로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일부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신심 깊은 불자들은 도량에 들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며 신장들에 대해서도 심중 소구소원을 빌고 있는 줄 안다.
 

신장들이 절을 지켜준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전쟁중에 우리 절이 화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것은 입증이 될 것이다.

훨씬 뒤에 내가 출가를 했을 때의 일이지만, 꿈과 신장에 얽힌 이야기가 있기에 아주 이곳에서 소개를 하겠다.
 

우리 신도 중에 관음행 보살이라는 분이, 하루는 무명옷에 짚신을 신고 장죽을 입에 문
웬 할아버지를 꿈에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해도해도 너무하는군. 나를 이렇게 괄세할 수가 있는가!"
 

관음행 보살이 나를 찾아와서 그 꿈 이야기를 해주며, 꿈에 만나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무명옷에 짚신을 진고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면.

내가 성라암을 구입하기 전날 밤에 꿈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샘물을 지키던 분이니 용궁 할아버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용궁 할아버지로부터 표주박을 얻어 물을 마시는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도 도량을 세운 이래 그를 위해 한 번도 정성을 들인 일이 없으니, 신도의 꿈에 나타나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화를 낸 것이다.
 

"틀림없이 용궁 할아버지야. 우리 절에는 용궁 할아버지가 같이 살고 계시는데

그를 위해 한 번도 지성을 드리지 않으니까 참다참다가 화를 낸 것 같아."
"아이구, 그러면 제가 용궁 할아버지를 받들게요."
 

보살이 과일을 사 오겠다고 말했다. 세 개의 떡 시루를 앉혔다. 그중에서 두 개는 용궁 할아버지에게

바치고 하나는 산신각에 올리기로 했다.
떡이 만들어져서 옮길 때의 일이다.

두 시루는 무사히 약수터까지 운반을 했는데, 마지막 남은 하나를 산신각으로 옮기려고 들어올리자

시루 밑구멍이 푹 빠지며 떡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정성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긴 줄 알고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용궁 할아버지가 나머지 하나도 산신각으로
가져가지 말고 자기에게 갖다 바치라고 심술을 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태연히 말했다.
 

"떡을 쟁반에 옮겨 담아요. 그리고 그것도 용궁 할아버지에게 갖다 올리세요."
 

용궁 할아버지에게 지성을 드리고 나자 관음행 보살에게 당장에 보답이 뒤따랐다.
관음행 보살은 당시 집이 없었다. 그런데 관악구 어디엔가의 아파트에 살고 있던 사람이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서 집만 봐달라는 조건으로 그 아파트에 들어와 살 사람을 구했다.
그곳에 말이 되어 관음행 보살네는 관악의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에 나갔던 집주인들은 3 년 만에 귀국했다.

3 년 동안 돈을 모은 관음행 보살네는 아파트를 내줄 때쯤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용궁 할아버지가 보살펴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이 있고부터 우리 절 신도들 열 명이 용궁 클럽을 조직하여 매년 용궁 할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들여 주고 있다.

절 재산을 넘보거나 절을 지키는 신장들을 홀대하면 재난이 뒤따른다는 것을 나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반대로 보시를 하거나 지성을 드리면 반드시 은혜를 받게된다.
   

빈녀일등의 정성으로

내가 절 앞의 땅을 샀을 때 한 청부업자가 찾아와서 은행의 융자를 받아 집을 짓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요사채를 증설할 필요도 있었고, 집을 지었다가 팔아도 만은 이문이 남을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솔깃하게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 스님은 반대를 했다.
 

"집을 장만한다지만 뚝배기 장만하는 격이야."
 

잘못하가다는 깨지기 십상이어서 땅만 잃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어머니 스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집이 결코 뚝배기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택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다섯 채의 양옥을 짓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의 유일한 형제인 무순 언니는 그때까지도 처음에 시집을 갔던 약대에 살고 있었다.

언니는 성라암으로 어머니나 나를 만나기 위해 올때면 약대에서 성북동까지 걸어왔다.

여비로 쓸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백원이면 여비로 충분했다.

절에 왔다가 돌아갈 때 언니가 약대까지 또 걸어갈 것이 안스러워 내가 여비를 주려고 하면 어머니 스님은 펄쩍 뛰었다.
어머니 스님은 먼저 언니에게 말했다.
 

"절에 올 때는 불전을 한푼이라도 가져와야 하는 법이다. 가난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할 수 없지만 남들이 가져온 불전을 사사로이 쓰기 위해 얻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다음 나를 보았다.
 

"부처님 돈을 사사로이 쓰게 하는 것은 자손대대로 뼈가난이 들라고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어머니는 우리가 부처님 심부름을 하는 관리인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서 돈을 관리하는사람이 돈을 유용해서는 안 되듯, 부처님 관리인도 단 한푼이라도 유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천의 약대에서 서울의 성북동까지 올 여비가 없을 정도니 언니의 가난은 일일이 필설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돈은 그만두고라도 절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해 가져온 쌀이 많았기에 그것을 좀 나눠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그 역시 어머니 스님은 엄격히 통제했다.
 

"네가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사람들의 무수한 소원이 들어 있는 쌀을 얻어다가 먹으면

자손대대로 가나하게 살게 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장래를 아주 망쳐 놓는 길이니 행여 나 몰래

쌀을 퍼 주어서는 안 된다."
 

옆에서 그런 말을 듣고 있는 언니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고는 했다.

동기간이 많은 것도 아니요, 단 자매뿐인데, 혈육이라고 찾아왔다가 도움을 받기는 커녕

굴욕적인 말만 듣게 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언니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찾아왔다가 번번이 눈물만 쏟고 돌아가고는 했다.

돌아가는 언니에게 어머니 스님은 못을 박듯 한말씀 덧붙였다.
 

"부처님 돈은 양잿물보다도 더 독한 줄만 알아라.

너는 죽어도 좋으니 양잿물을 달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내 딸에게 양잿물을 먹일 수는 없다."
 

언니는 딸을 열한 명을 낳았다가 여섯 명을 살렸고, 아들은 두명 생산했다가 한 명밖에 건지지 못했다.

딸 여섯에 아들 하나, 모두 일곱 명의 자식을 길렀다.

딸들이야 언감생심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어 볼 수 없지만 외아들 하나만은 어떻게 하든 가르쳐야 하는데
그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 솔직한 언니의 형편이었다.

나에게 조카가 되는 언니의 외아들의 이름은 종원이었다.
 

종원은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6.25 전쟁 중에 부산으로 옮겨가 있던 고려대학교에 응시했다. 언니는 종원이 대학 시험을 치르던 무렵,
차라리 뚝 떨어졌으면 하고 빌었다고 한다. 합격을 하고 나면 뒷돈 댈 일이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가르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어지기를 바라야 했을 정도니 언니의 한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원은 고려대학교 입학 시험에 턱 합격을 했다. 역시 합격사실은 기쁨이 아니라 우환 같았다.

부산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는 형편이 도저히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을 끓이다가 2 차로 서울에 있던 중앙대학교에 응시했다.

역시 무사히 합격하여 중대를 다니게 되었다. 약대에서 등하교가 불가능하기에 절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 스님은 종원에게 외할머니가 되고 나는 이모가 되는 셈이다.

여느 속가 같으면 외할머니가 외손주를 무척 귀여워하리라.

어머니 스님도 외손주 종원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었겠지만 용돈 한번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모인 나에게도 돈을 주지 못하게 했다.

종원이 급한 용돈이 필요하여 손을 내밀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 스님은 말했다.
 

"이녀석, 부처님 돈 얻어다가 담배 사 피우려고 하지?"
 

종원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달려들었다.
 

"무슨 외할머니가 그래요?"
"녀석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줄이나 알아라."
 

어머니 스님의 절돈 관리는 이렇게 철저했다.

이때까지 나는 출가를 하지 않았기에 속가식 사고방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좀 지나치지 않는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막상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와 보니 어머니 스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며,

성직자는 모름지기 어머니 스님과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돈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 정진을 하기 위해 출가를 한 스님에게 무슨 돈이 필요 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이 모여 있는 절간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이 필요하고,
아프면 병원에 갈 돈이 필요하며, 출입을 위해서도 돈은 있어야 한다.

필요불가결한 데 불전을 사용하는 것은 응당하려니와 그렇지 않은 곳에 사용하는 예도 없지는 않은 것

같아 그것이 문제다.
 

더욱이 근자 몇 년 사이, 전국에 사찰을 중심으로 한 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고부터는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유명 사찰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막대한 돈을 불사와 포교에 사용하고 스님네들의 복지를 위해 지출한다면 이는 잘못이 아니겠지만

일부 절의 소임을 맡은 스님들의 주머니 속에서 녹아나는 예가 없지 않다는 풍문이니 이래가지고서는

불가의 기강이 서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몇몇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반불교적, 반성지작적인 행위를 부추기는 독약이 될 뿐이 아니겠는가.
 

조사들은 은덕에 먹고 살 수 있는 것만도 황감한 일인데 스님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행동을 하기 위해

불전으로 들어온 돈을 사용한다면 그 죄를 다 어떻게 갚으려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불전에 관한 한은 엄격하게 관리를 해왔다.

내 상좌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지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모르는 바 는 아니다. 그

러나 잠시라도 도에 어긋난 마음을 품고 흥청거리면 그것이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나는 어머니 스님에게서 배운 대로 실천에 옮기며 살 수밖에 없다.
 

각설하고, 종원은 이러다가 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할머니나 이모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을 법도 하다.

먹고 자는 것은 절에서 했지만 종원은 그 고모들 세 명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학교를 마쳤다.
 

문제는, 그렇게 공부를 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사회로 돌아온 다음 취직을 하려는데 될듯 될듯 하면서도

 취직이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언니의 살림 형편이 어려웠기에 돈을 빨리 벌어야 하는데 이 모양이니 본인도 안타까웠지만

주위 사람들도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언니가 사는 동네에 떠돌아다니며 점을 봐 주는 점바치가 들어왔다.
언니는 복채로 줄 돈은 없고 점은 보고 싶고 하여 점쟁이가 머무는 방에 들어가 옆에서 남들 점치는 것을

하루 종일 지켜보았다고 한다.

점은 보지 않고 온종일 옆에 붙어 앉아 있는 언니에게 점쟁이가 사람들이 없을 때 한마디 툭 던졌다.
 

"찢어질래야 찢어질 것도 없구나."
 

언니의 전신에 붙어 다니는 궁기를 점쟁이가 아니라고 해서 모를까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언니는 점쟁이가 용하게 느껴졌던가 보았다. 점쟁이는 아는 소리를 한마디 더 던졌다.
 

"당신은 불교가 센데."
 

언니가 반색을 했다.
 

"어머님이 스님이고 동생도 절에서 사는 집안이라우."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 왜 못 사는 줄 알아요? 바로 당신 어머니가 계시는 절의 신장들이

당신을 미워하기 때문이오. 가져오기는 밤톨만큼 가져오면서 바라기는 태산만큼바란다고

신장들이 당신에게 눈을 흘기고 있어."
 

언니는 절에 올 때 점바치의 말마따나 그냥 오기 뭣하다며 쌀 한 되를 가져오고는 했다.

쌀 한 되를 바치고 바라는 것은 컸을 테니 용하게 맞힌 셈이었다.
언니는 점쟁이에게 물었다.
 

"아들이 취직이 안 되고 있는데 언제쯤이면 취직이될 수 있는지나 좀 알려 주시구려."
"그 절에 흠뻑 갖다가 바쳐요. 그러면 취직이 될 거요."
 

언니가 찾아와서 점쟁이와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쥐뿔이나 뭐가 있어야지 흠뻑 갖다 바치며 빌지."
 

내 생각에도 점쟁이가 공연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비가 없어 걸어서 나를 찾아온

언니에게 불공을 한번 잘 드려 보라고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니는 한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다가 어디 잠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 후엔가, 언니는 지게꾼에게 쌀 한 가마를 지게 하고, 자기는 과일 봉지를 잔뜩 부여안고 절에 나타났다.
 

"언니, 어디서 돈이 나서 이런 것 다 사왔어요?"
"정희를 찾아갔었다."
 

정희는 종원의 여동생으로 당시 재봉틀로 수를 놓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정희를 공장 밖으로 불러냈다.
 

"정희야, 너 월급 가불 좀 할 수 없겠니?"
 

정희가 대답했다.
 

"엄마, 사장님이 얼마나 무서운데 가불을 해주겠어요. 그나저나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데요?"
 

불공을 드린다고 하면 정희가 공감해 줄 것 같지 않아 언니는 거짓말을 했단다.
 

"네 오빠가 취직을 해야 우리가 다 살 수 있을 것 아니냐? 취직을 하려면 뒷돔 좀 써야 하나봐."
"안 될 거야. 그래도 내가 말은 한번 해보고 올게요."
 

정희는 자기 어머니를 공장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나와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만원을 내놓았다.
 

"무슨 마음이 들었든지 사장님이 이 돈을 선불해 주시네요."
"아이구 고맙기도 해라."
 

언니는 피 같은 돈을 받아 뜰고 시장으로 가서 한푼도 안 남기고 모조리 투자하여 쌀을 사고

과일을 비롯한 진수거리를 장만해 가지고 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즉시 떡쌀을 담그고 음식을 차리는 순서가 끝나자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들렸다.
 

언니는 정희에게서 받은 돈을 한푼도 안 남기고 다 투자했지만 그래야 겨우 만원이었다.
더 크게 정성을 드리지 못해 가슴아파하는 그녀에게 어머니 스님은 '한우경 빈녀난타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어머니 스님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니 스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인도의 마가다라는 나라에 빔비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 점술가가 일러주기를 비부라 산에 있는 선인이 죽으면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선인을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선인을 죽여 빨리 아들을 얻으려고 했다.

어쨋거나 선인이 죽으니 왕비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어나는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점술가가 예언했다.

나기 전에 원한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은 한을 품고 태어나는 아들을 없애려고 높은 누각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손가락만 다쳤을 뿐 아이는 죽지 않았다.

장성한 태자는 새 교단을 조직하려는 야심을 가진 제파달다의 꾐에 넘어가서 부왕을 죽였다.

점술가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었다.
 

부왕을 죽이고 임금이 된 그의 이름은 아사세였다.

 아사세왕은 즉위 후에 작은 나라들을 합병하여 인도를 통일할 기틀을 세웠다.

그런데 그의 몸에 종기가 생기지 시작했다. 아무리 좋다는 약을 써도 종기는 점점 더 퍼질 뿐 낫지를

않았다. 그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과거의 죄를 참회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종기가 사라졌다.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교단의 보호자가 되었고, 불경을 첮번째로 결집할 때 이를 도와 대사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아사세 왕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그의 부처님에 대한 경배심은 대단했다.
아사세 왕은 부처님 재세시에 부처님을 궁으로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나서

부처님이 기원정사로 돌아가실 때는 왕궁 문에서 기원정사까지 마유고, 즉 삼씨 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왕궁에서 기원정사 사이에는 아사세 왕이 밝힌 수많은 등불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때 난타라는 노파가 이 등불들을 보게 되었다.

그 노파는 항상 부처님게 공양을 올리려는 마음이 지극했으나 가난하여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난타 노파는 아사세 왕이 그러한 공덕을 짓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구걸해서 번 돈을 가지고

기름집을 찾아갔다. 기름집 주인은 노파에게 물었다.
 

"어려운 처지에 음식이나 사먹지 기름은 무엇에 쓰려고 그러시오?"
 

노파가 대답했다.
 

"부처님 세상은 백겁에도 만나기 어려운데, 내가 다행히 만났으나 공양을 못 올려서 한이 되는구려.

오늘 왕이 짓는 큰 공덕을 보니 다시금 감격하여 비록 가난하지만 초라한 등 하나라도 밝히려고 합니다."
 

노파는 기름을 사서 등불을 밝히며 한숨을 쉬었다.
 

"이 적은 양으로는 반야도 못 가겠구나."
 

그녀는 서원했다.
 

"만약 내가 후세에 도를 얻게 된다면 이 불이 밤새 꺼지지 않으리!"
 

그녀는 절을 한 뒤 물러갔다.
아사세 왕이 밝힌 등불은 새벽녘이 되자 거의 다 꺼졌으나 이 노파가 밝힌 불은 그때까지도 유독 밝음이

더했다. 기름도 줄지를 않았다.

날이 밝아 목련 존자가 등을 끄는데 이 노파의 등은 세번이나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

가사 자락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켜 끄려고 해도 등불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밝아졌다.
 

목련은 신통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끄려고 했다. 그래도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불빛은 하늘까지 비쳤다. 부처님이 목련존자에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그것은 당래불의 광명공덕이다. 너의 위신력으로는 끌 수 없느니라.

이 노파는 30 겁 후에 부처가 되어 수미등광여래라고 하리라."

어머니 스님은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언니에게 말했다.

"너는 비록 가난하여 공덕을 적게 올렸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동량을 드나든 이래 처음으로 빈녀 난타와 같은 등불을 밝힌 거야.

네가 법당을 밝힌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종원이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테니 두고 보아라."
 

종원은 그때 제대 후 2 년째 취직을 못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까 '법무부에서 공무원을 공개 채용한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내가 종원에게 말했다.
 

"얘, 너 여기 원서 한번 내 봐라."
 

종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모, 뽑을 사람들을 이미 다 내정해 놓고 형식만 갖추자는 수작이야. 내가 그런 일에 왜 들러리를 서요?"
"그래도 누가 아니? 시험이나 봐 보자."
 

사실 당시엔 취직문이 좁았다. 문이 좁으니 줄을 대고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던 때였다.

분명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데도 종원은 돈이 없고 백이 없어 실직자로 놀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였으니 불신이 골수에 박혔을 수밖에.

나는 싫다는 종원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어쨌든 나의 강권에 의해 종원은 시험을 보았다.
   

열반적정에 드신 어머니

1960 년도 유월로 접어들면서 어머니 스님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이때 어머니 스님이 기르던 고양이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어머니 스님은 그 고양이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말씀하시고 덧붙였다.
 

"사람 죽은 방에 고양이가 있으면 안 되는 법이다."
 

마치 당신이 곧 세상을 뜬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말투였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악화되어

걱정하던 차에 그런 말씀을 하시니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 살아 있을 날이 멀지 않았어."
 

어머니 스님은 두번째로 당신의 방에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했다. 참선을 하시겠다는 거였다.

부득이 들어올 일이 있으면 잡소리는 일체 하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가라는 주문을 했다.
 

그 다음 어머니 스님은 당신이 데려왔던 공양주인 광재행과 만리동 보살 등 두 명에게 집에 다녀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느닷없이 휴가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두 보살에게 당신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 보살들에게 말했다.
 

"어머니 방 근처에만 가지 마시고 좀 같이 있어야겠어요. 아무래도 저 양반이 세상을
뜨시려나 봐요."
 

보살들은 내 말에 따라 그냥 절에 머물고 있으면서 어머니 눈에만 띄지 않도록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스님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을 일년 전부터였다. 기력이 떨어지고 특히 하초가 부실하여

늘 자릴를 보전하고 누워 계셨다. 어머니 스님은 이러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시골의 고향에는 잠자리가 많았다.

나는 그때 잠자리를 잡아 똥구멍에다 기름을 묻힌 짚순을 꽂아 불을 질러 날려 보내는 장난을 많이 했었다.
잠자리는 똥구멍이 뜨거워지니까 기를 쓰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죽고는 했어. 그게 왜 그리 재미있었던지.

장난을 해도 말 하는 짐승을 가지고 그렇게 잔인하게 했으니 인과를 받을 수밖에.

잠자리 똥구멍에 불을 질렀던 벌로 나는 엉덩이를 못쓰다가 죽게 될거야."
 

듣고 보니 그것도 인과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법문이었다.

어머니 스님은 그 무렵 삼척의 정암사로 데려다 달라는 말씀을 했다.
 

"아니, 몸도 불편하신데 왜 거기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죽으면 화장터로 가야 하잖아. 정암사에 다비장이 있어요. 다비장에서 가려고 그래."
"여기서 돌아가셔도 화장터로 모시고 가지는 않을게요."
 

이런 말씀을 했던 것을 보면 머지않아 당신이 열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아직은 좀더 사시겠거니 여겼다.
 

종원이가 취직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언니가 성리암으로 찾아온 것은 유월 열사흗날이었다.

약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던 취직 시험에 종원이 턱 합격을 한 것이었다.

언니는 숨이 턱에 넘어갈 정도로 뛰어들었다.
 

"종원이가 시험에 합격했어!"
 

나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잘됐네요, 언니. 이제 언니도 고생은 끝났어."

"한시름 놓게 되었다. 다 부처님 은공이다."
 

우리 자매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스님에게도 종원의 합격 사실을 말씀드렸다.

어머니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 봐라. 내가 좋은 일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니? 부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 분이다."
 

언니는 어머니 스님의 용태가 좋지 않을 것을 알자 그날 저녁 성라암에서 머물렀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였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윤 박사를 모셔왔다.

어머니 스님은 윤 박사를 바라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누구시냐?"
"의사 선생님이세요."
"아이구 얘, 나는 사람 백정에게 몸을 안 맡긴다."
 

윤 박사의 면전에서 의사를 백정이라니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본인이 극구 진료를 거부하니

윤 박사는 하릴없이 병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머니, 의사가 왜 백정이에요?"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니 백정이랄 수밖에."
"수술을 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는 미음을 넘기시지 못했다. 그래도 정신만은 또렷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 좀 업어라."
"왜 갑자기?"
"어릴 때 내가 많이 업어 길렀으니 이제는 네가 나 좀 업어라."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가 업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네가 업어라."
 

나는 왜 구태여 나에게 업히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등을 돌려댔다.
어머니가 내 등에 상체를 갔다 댄 순간이었다. 내가 막 일어서려는 데 갑자기 어머니 스님의 뱃속에서

구렁이 같은 것이 회를 틀면서 꾸불텅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머니를 내려놓았다.

장회를 틀었던 어머니는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의 입이 열렸다.
 

"나무아미타불."
 

처음 그 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어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어서 타불 타불 타불하고 외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핏기가 아랫배에서부터 차츰 위쪽으로 걷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핏기가 목을 지날 때까지 입술이 타불 하며 들썩거렸다.

얼굴을 지나 눈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어머니의 숨은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경자년 유월 열나흗날의 일이었다.
 

상사는 그것이 자기와 무관한 것이라도 보는 사람에게 얼마쯤의 슬픔과 인생에 대한허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피와 살을 나눠 주신 육친의 것이니 망극하기가 이를 데 없지 않으랴.

언니는 통곡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스님이 극락왕생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청정하게 회향을 마칠 수 있었음에

대한 경건한 애도의 뜻을 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오열을 참으며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비록 어머님은 눈을 감으셨지만 그 영혼은 아직도 멀리 떠나가시지 않고 지금
우리와 같이 있을 거예요. 너무 망령되이 울어서 영혼을 놀라게 해드리지는 맙시다."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장례 모실 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다.

어머니 스님이었기에 다비장을 치뤄야 마땅하겠지만 막상 세상을 뜨고 나니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든 당신은 화장터로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씀했었다.

나는 일단 산소를 썼다가 3 년상을 벗을 때 화장을 해드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언니와 나는 우선 어머니를 칠성판에 모시면서 아직 떠나가지 않고 우리 곁에 있을 어머니 스님의

영혼에게 중얼거렸다.
 

"망우리에다가 어머니를 임시로 모실까 해요. 그러니 어머니가 먼저 가서 있을 자리를 봐 두세요."
 

그런 다음 나는 종원을 불렀다.
 

"너 망우리에 가서 산소로 쓸 땅 백 평만 사놓고 오거라."
 

종원은 나의 말에 따라 다음날 아침 일찍 망우리로 갔다가 성라암으로 돌아왔다. 나는종원에게 물었다.
 

"산소 자리를 잘 보고 골라서 샀지?"
"아뇨."
"아니, 왜?"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그곳에 가니까 묘역 사무실 직원이 기다리고 있던데요, 뭐."
"무슨 소리야?"
"묘자리를 사러 왔다니까 그곳에 있는 직원이 묻더라구요. 돌아가신 분이 뭐하던 분이냐구요.

스님이라고 했더니 이 친구 무릎을 탁 치며 말하는 거예요. 자기가 간밤에 꿈을 꾸었노라고."
 

그는 꿈에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구름을 타고 공중에서 내려와 상상봉에 앉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부처님께서 여기 웬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그 말에 부처님이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나 여기로 이사를 왔네.'
 

종원이 말했다.
 

"부처님이 이사를 왔다며 내려앉았던 장소가 스님이 묻히실 곳이 아니겠냐며 그곳으로 안내를 해주더라니까요.

가서 보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주 기가 막히게 전망 좋은 장소더라구요. 그래서 더 고를 것도 없이 그곳을 사놓고 왔습니다."
 

영혼은 분명히 있다. 나는 어머니를 칠성판에 모시면서 당신이 먼저 가서 있을 자리를 봐 두시라고 중얼거렸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자기의 거처를 당신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리라.
 

이튿날은 이슬비가 하루 종일 질척거리며 뿌려댔다. 떡쌀을 담그고 장례 치를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데

비가 내리니 밖에다가 솥을 내걸 수가 없었다.

천상 어머니를 모셔 놓은 방의 솥에다가 불을 쳐땔 수밖에 없었다.
 

스님과 신도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가 방이 펄펄

끓으니, 어머 뜨거워라 하면서 나오고는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신이 있는 방에 너무 많은 불을 땠다고 혀를 찼다.

게다가 복중이었으니 이내 부패할 거라며 걱정들을 했다.
 

어머니의 염습은 나와 언니가 직접했다. 생시에 당신이 돌아가시면 죽을 몸이라도 남자에게 맡겨

염을 하지 말라고 해었다. 그러면서 염습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양반은 딸을 낳으면 염습하는 것도 가르쳐 출가를 시킨다는 것이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월해사 주지 스님이 염습을 도와주랴고 물었지만 나는 사양했다.
 

"스님은 시다림(죽은 이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설법)이나 해주세요."
 

어머니는 살아서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청정했다. 평생을 청정하게 사신 분이니 만큼 시신도

그렇게 청정할 수가 없었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살도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았다.
 

"돌아가시지도 않은 것을 염하는 것 아니니?"
 

운명하신 것은 분명한데 살이 굳지 않아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눗신눅신한 것뿐이었다.
차갑고 이질적인 감촉보다 훨씬 좋았다. 복중인데다, 시신을 모신 방에 불을 그리 지핀 까닭에

5 일 장인데도 웃는 듯 평화롭게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 스님의 모습을 대하니 내 마음까지 밝은 느낌이었다.
나와 언니는 염습을 진행했다. 나는 병풍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삭발이오!"
 

그러자 월해 주지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네들이 염불을 외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올 때엔 어디로 쫓아 왔으며 이 세상을 떠나 죽어 갈 때엔 어디로 향해 가는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이는 것과 같고, 사람이 죽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뜬구름 그 자체가 본래 실다운 근본이 없나니
인생이 오고 가고 나고 죽는 그 역시 이와 같나니라.

그러나 오로지 한 물건이 오뚝이 드러나서 맑고도 고요하여 나고 죽는 생사의 윤회를 따르지 않나니라.'후략'

다음으로 내가 소리를 질렀다.
 

"목욕이오!"
 

다시 스님들의 염불이 시작되었다.

 

'전략'
부처님의 위없는 법신은 둥근 보름달과 같고

밝기는 일천 개의 빛나는 햇빛과도 같나니라.
이제 이 목욕으로 허망하고 거짓된 번뇌의 때를 씨었으므로 금강석처럼 튼튼하 몸을 얻으리라.

청정한 법신 자체 안팎이 없으며, 나고 죽는 생사거래 똑같은 진면목이로다.
 

세수, 세족, 착군, 착의, 착관의 순으로 염습이 진행되었다. 반야심경이 낭낭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관자재보살이 크고 깊고 넓은 지혜로 바라밀을 행할 때에

오온이 다 공한 줄로 알아서일체 고액이 됨을 제도하느니라.
사리자야, 빛이 공과 다르지 않아 빛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빛이라.

받은 거와 생각하는 거와 변천하는 거와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한 상은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고,

더럽지도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더하지도 아니하고 덜하지도 아니하나니

이런고로 공한 가운데는 빛도 없고 받는 것, 생각하는 것, 변천하는 것, 아는 것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닿임과 법도 없으며,

또한 무명이 다해 없어짐도 없으며 내지 늙고 죽는 것도 없으며 또한 얻은 바가 없는 고로

보리살타가 지혜로 저 언덕에 건너갈 때 마음이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뀌어지는 꿈생각을 여의어서 필경 열반에 드시며

삼세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고로 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시나니

그러므로 알라.
반야로 저 언덕에 건너감이 이 크게 신통한 주문이며 이 크게 밝은 주문이며

이 위없는 주문이며 이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주문이라.

능히 일체고액을 제해 버리시어 진실하고 헛됨이 없나니 이런고로 저 언덕에 건너가느리라.

어머니 스님이 열반했을 때는 집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목수들은 불사를 하다가 상을 당한 것을 보게 되었으니 널이나 잘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스님들은 어머니의 매장을 모두 반대했다. 어머니 스님 자신도 매장되기를 원하시지는 않았다.

불교 예식에 따라 다비장으로 모셔야 마땅했지만 그 무렵 화장을 하려면 화장터로 갈 수밖에 없어서

부득이 일시 매장을 했다가 화장을 시켜 드리는 것으로 결정했었던 것이다.

 

그때의 생각으로는 3 년상만 지나면 화장을 하리라 했었는데 30 년이 지나도록 나는 화장 절차를 밟지 못했다.

일상에 매여 바쁜 탓이었다. 어쩌면 그것을 절실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은 내 불효 탓이 컸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미룰 것이 아니라 내 살아 생전에 어머니 스님을 화장시켜 드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무 때나 산소를 팔수가 없다 하여 윤달 드는 해 경오년 경오월의 경오일을 택하여 화장으로 모시리라 작정했다.
 

1990  에 윤달이 들었고, 오월이 경오월이었으며, 12 이 경오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1990 년 5월 12일, 어머니 스님이 세상을 뜨신 지 꼭 30 년 만에 어머니를 불교 예식에 따라

화장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다. 산소를 파보니 30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널은 썩지 않았다.

과연 목수들이 좋은 나무로 널을 잘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붉은색 가사도 색이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시신은 싹 탈골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다.
 

나 죽으면 누가 어머니 산소를 찾아갈까. 화장을 끝내고 나니 내 나이 팔순을 앞에 두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회향을 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내 손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분지통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망극한 슬픔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네 여인들은 옛날에 우물에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날랐다.

식수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여인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어머니나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물동이가 깨어진 아픔이라 하여 고분지통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보면

물동이도 그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 스님의 죽음에 따른 내 슬픔을 어찌 고분지통이라는 한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내 나이로 봐서는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자식을 거느리고 있어야 마땅했겠지만

일찍이 혼자되어 어머니 스님만을 의지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어머니가 아니 계셨다면 내 어찌 목숨인들 부지했을 것인가. 아니,
어머니가 없었다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나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내 전부였고 나의 기둥이며 나를 지켜주신 수호신과도 같았다.

그런 어머니를 여의었으니 고분지통이 아니라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 속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집 짓는 공사 또한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시행착오를 빚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악재까지 겹쳤던 것이다. 우선 공사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져 해를 넘겼다.
거기다 공사비가 한 채당 백만 원씩 모두 5 백만 원이 초과되었다.

공사 대금이 초과되면 일시로 돈을 변통해 주겠다는 보살이 있었는데

공사중에 4.19가 터지자 말을 바꾸었다.
 

"빌려 주었던 돈도 돌려받을 난리통에 어떻게 돈을 빌려 준단 말이에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인부들은 밀린 공사 대금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돈을 변통할 길이 없어지자

나는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낙망중에 처하게 되었다. 다섯 채의 집 중에서 두 채를 팔아 밀린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혼란중이라 팔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생전의 어머니 스님이 집 장만하려는 내게 깨질지 모르는 뚝배기 장만하는 격이라고 했던 말이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당시 불사에 네 명의 청부업자가 동업을 해서 참여했었다.

이중에 전씨 성을 가지고 있던 업자가 특히 심하게 나를 닥달했다.

시달리다가 못한 나는 복덕방마다 매매를 의뢰해 놓은 다음 거래가 이루어질 때까지 잠시 절을 떠나 있자는 생각을 했다.

은처에서 며칠 후에 절로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내가 도주한 것으로 판단한 인부들이 내 방을 검거하고
들어앉아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피해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전화를 끊은 즉시 나는 성라암으로 돌아왔다.
말대로 인부들은 내 방을 검거하고 들어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기네끼리 싸워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도 있었다. 집기들이 깨지고 피가 벽과 천장에 튀어 있는 방은

그 잔해들로 해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인부들은 나를 보자 말했다.
 

"아이구 이제야 돈을 가지고 오셨군요?"
 

나는 인부들을 상대로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명의 청부업자들을 부르고 그들을 시켜 우선 인부들을 해산하도록 했다.

그리고 청부업자들에게 말했다.
 

"일을 하다가 보니 차질이 생긴 거지 처음부터 여러분들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이런다고 돈이 금방 나오는 것도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집이 팔리는 대로 밀린 대금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제발 좀 이해를 해주세요!"
 

주씨가 나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면서 언성을 높였다.
 

"돈 떼먹고 도망갔던 주제에 웬 말이 많아. 당장 돈 내놔!"
"떼먹고 도망갔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돈 만들어 보려고 돌아다녔던 거예요."
 

주씨는 육두문자를 쓰면서 없는 돈을 당장 자기 앞에 갖다 놓으라고 나를 들볶았다.
집이 팔리는 대로 갚겠다고 하자 그는 기다릴 수 없다며 나를 대서방으로 끌고 갔다.

저당설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어르고 위협하고, 폭언까지 마구 퍼부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공짜 욕은 안 먹는 사람이에요. 당신 욕 한마디에 백만 원씩을 쳐서 깍고 나머지 돈을 주든지

당신이 나에게 욕을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 테니 그리 아시우."
 

말을 마친 나는 잘 알고 지내던 김창현 변호사를 불렀다. 그는 나와 둘도 없이 친한 김복업의 동생이었다.

복업과 나는 소학교 동창으로서, 어린 시절 우리는 의형제를 맺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창현은 나를 누나라고 부렀고, 나도 그를 동생으로 여겨온 터였다.
김 변호사는 나의 다급한 전화에 급히 차를 몰고 달려왔다. 대서소로 들어오면서 그가 물었다.
 

"누님이 왜 여기 와 있습니까?"
 

나는 변호사에게 그간의 경위를 들려주었다.

이들에게 끌려 오듯 여기까지 오게 된 전말을 듣고 난 변호사는 청부업자들에게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드는 청부업자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김 변호사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남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를 범했고, 기물을 파손했으며, 사람을 불법 연행했고,

폭언 폭행까지 자행했어요. 나는 당신들을 형사 고소하겠어요."
 

주씨가 볼멘소리로 항의를했다.
 

"공사 대금 떼먹은 것은 죄 아닙니까?"
"떼먹은 것이 아니라 잠시 연체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민사사항이니 민사소송을 걸어서 공사 대금을 받아 가시오."
 

그런 다음 그는 나에게 말했다.

"누님 제 차를 타십시오. 경찰서로 같이 가서 당장 고소를 합시다."
 

비록 내가 대금을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주거 지역을 무단 점거하여 난동을 부린 죄는 형사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금은 못 받고 외려 유치장에 가서 갇힐 판이었다.

형세가 다급해지자 그들은 나에게 애원을 했다.

김변호사는 나에게그런 얘기 듣고 있지 말고 어서 차를 타라고 독촉했다.

청부업자 이씨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보살님, 보살님이 하자는 대로 다 해드릴 테니 좀 참으십시오."
 

소행은 괘씸하지만 일단의 원인 제공이 나에게 있다고 여겨지니 매정하게 그들을 구속시킬 수만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집이 팔리는 대로 공사 대금을 지불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내 말에 동의했다. 욕 값은 받은 셈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집이 팔리면 대금을

지불하겠다는 각서를 써주었고, 그들은 나에게 집이 팔리기 전까지는 대금 독촉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김 변호사가 말했다.
 

"이러려면 무엇하러 저를 불렀습니까?"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문제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나를 도와준 셈이다.

나는 김 변호사가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결국 다섯 채 중에서 두 채를 팔아 공사대금을 지불해 주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집 두 채분의 땅을 날리게 되었다. 기어이 뚝배기가 깨진 것이다.

그때 그 땅을 잃지 않았다면 날로 규모가 커져서 넓은 주차장을 필요로 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

주차 공간으로 활용해도 좋고, 보다 멋있는 조경을 꾸밀 수도 있었는데,

너무 성급하게 불사를 하려다가 규모만 축소시킨 형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도 고분지통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 그 슬픔이 망극한 중에 이런 시달림까지 당하고 보니 나는 삶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웠다.

스스로 그 외로움을 극복하고 수렁에서 헤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 같은 넓은 품에 안기고 싶었다. 부처님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아졌다.
 

나는 지금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기 직전까지의 내 삶의 지나간 족적을,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아픔과 기쁨의 편린들을 여기에 옮겨 보았다.

내가 비록 성라암이라는 절을 창건하였고, 대강의 불법을 이해하며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고는 하나,

여기까지의 삶은 아직도 부처님이 계신 문 밖에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범어사에 가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도량에 이르는 제 3문이자 마지막 문인 불이문에 닿는다.
 

불이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진리를 나타낸다.

진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지만 사람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란 세상의 지식이나 알음알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이문 안으로 들어서야만 그 진리가 전개된다.

그러기에 불이문이란 문 안과 문 밖 세계의 한계를 분명하게 긋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겨우 일주문이나 천왕문을 통과한 정도였달까.

그러기에 그것은 불이문을 향한 간주곡 같은 것이었다고 돌아보게 된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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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초행자 | 작성시간 08.04.26 인생의 소중한 경험담과 교훈이 있는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푸른 산 | 작성시간 08.10.11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지극 정성은 신명과 통합니다.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관음묘지력 능구세간고 _()_
  • 작성자우리집 | 작성시간 09.06.09 관세음보살님 참회합니다...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토정비결 | 작성시간 10.07.10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 작성자인꽃 | 작성시간 14.03.04 감사합니다 밤새 다읽었습니다
    아침이네요 대단하고 소중한 글이옵니다
    감사합니다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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