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석탑이다.
석탑(石塔)은 예로부터 묘지에서 세운 표지석을 말하는 데
죽은 자를 기념하고 덕을 표하기 위하여 세웠다.
불교에서는 탑을 범어로는 stupa라 하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돌을 쌓아서 만든 탑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의 석탑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 하여 정처(淨處)라고도 한다.
석탑은 세월이 지나면서 묘갈(墓碣) 또는 묘탑(墓塔)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묘갈(墓碣)이란 무덤 앞에 세우는 위가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을 말한다.
『법화경의소(法華經義疏)』 11에 의하면 사리가 있어야 타파(塔婆)라 하고
사리가 없으면 지제(支提)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분류는
부처님과 승속(僧俗)을 구별하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석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탑의 재료도
나무와 벽돌, 동, 금 등으로 다양해졌고, 탑의 층수도 다양해졌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조성된 것이 3층의 석탑이다.
그런데 3층 석탑에는 드물지만,
무영탑(無影塔)이란 특별한 이름이 붙여진 탑이 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3곳인데
하나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이고,
둘은 파주 보광사의 무영탑이고, 셋은 울진 불영사의 3층 석탑이다.
3층 석탑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탑인데 왜 이 3곳은
무영탑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의미를 살펴보자.
1)경주 불국사의 무영탑(일명 석가탑 국보 제21호)
불국사를 경주 토함산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에 석굴사(석굴암)가 있고
서쪽에 불국사가 위치한다. 동쪽의 석굴암은 동방 정토를,
서쪽의 불국사는 서방정토를 상징한다.
또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불국사의 본당이라는 대웅전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에 있는 탑이 다보탑(국보 제20호)이고
서쪽에 있는 삼층 석탑이 석가탑(국보 제21호)이며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린다.
1)석가탑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관련되어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라 불린다.
외형이 전혀 다른 2기의 석탑이 속칭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불리지만,
이는 근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에 따르면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무구정광탑>으로,
경주 불국사 삼층 석탑은 <서 석탑>으로 명기되어 있을 뿐 다보탑,
석가탑이라는 명칭은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불국사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하고
또 두 탑을 완성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불국사의 창건 연대나
탑의 완성 시기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5년(528) 법흥왕의 모후 영제(迎帝) 부인이
528년 사찰 짓기를 소원하여 불국사를 처음 창건했고,
왕비 기축(己丑) 부인이 출가한 후 법명을 법류(法流)라고 하여,
절의 이름을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라 했다'라고 한다.
이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크게 새로 세웠는데,
이때 아미타여래 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고,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다.
<불국사고금창기>는 <불국사고금역대기>라고도 불린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조에 따르면,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6년 경주 불국사 삼층 석탑 해체 보수공사 중
탑신 2층 사리공에서 석탑을 보수한 기록물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함께 발견되었다.
『묵서지편(墨書紙片)』으로 알려진 이 두루마리 기록물은 한데 뭉쳐 있어
그동안 판독하지 못하다가 복원 및 보존 처리를 거쳐
약 40년 만에 공개되었다. 이 묵서지편(墨書紙片)은 1024년(현종 15)에 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와
1038년(정종 4)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
「불국사탑중보시명공중승소명기(佛國寺塔重布施名公衆僧小名記)」로
이루어진 석탑 중수기로, 고려 전기 두 탑의 중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은 문서였다. 1038년의 문서 2건은
<서 석탑> 중수를 다룬 동일한 문서가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따라 원래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무구정광탑’으로,
경주 불국사 삼 층 석탑은 ‘서 석탑’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해체 시 발견된
이 <묵서지편>에 따르면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김대성이 중시(中侍)가 되기 이전에
불국사의 동서(東西) 양(兩) 탑 건축을 시작하여
혜공왕 대에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보다 먼저 쓰인 이들 문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불국사는 742년에 처음 건설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름도 달랐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불국사고금창기>와 대비해 본다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것도, 또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하였다는 것은 기록의 오류라 볼 수 있다.
김대성은 불국사를 창건한 것이 아니라 중창한 것이며,
또한 창건 목적이 중시 김대성의 부모가 아니라 신
라 경덕왕의 부모 성덕왕과 소덕왕후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탑 역시 김대성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
혜공왕 때 국가가 이어받아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보탑과 석가탑은 어떤 목적으로 건립되었는가를 살펴보자.
탑을 건립한다는 것은 부처를 기리고,
그 공덕으로 부처의 가피를 바라는 원(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탑이나 다보탑 역시 이러한 목적에서 건립된 것이다.
이는 석가탑을 해체할 때 석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이를 거증(擧證) 하는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도화라국(都貨邏國)의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법장(法藏)과 함께
당나라 무주(武周) 말년인 장안 연간(長安年間, 701∼704)에 한역한 것으로
이 경에서는 망자(亡者)에 대한 추복(追福)과 정토왕생,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르는 것, 병의 치료, 장수 등 다양한 공덕을 설하고,
공덕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오래된 탑을 중수, 다라니의 서사와 소탑 제작과 같은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대웅전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것이 다보탑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삼층 석탑인 석가탑이다. 이 탑을 무영탑이라고 부른다.
석가탑이 언제부터 무영탑이라고 불렸는지는 문헌상 드러난 것이 없고
아사달과 아사녀를 주인공으로 한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과 관련짓는 이도 있지만
이는 후대의 허구일 뿐 무영탑(無影塔)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 항저우 영은사 다보천왕
다보탑의 다보는 다보여래(多寶如來)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보여래(多寶如來)를 중국불교에서는 다보천왕으로 불린다.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東方寶淨世界)의 교주로, 보살로 있을 때
내가 성불하여 멸도(滅度)한 뒤에 시방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서는
나의 보탑(寶塔)이 솟아 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고 서원한 부처님이다.
과연 석존이 영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땅속에서 다보탑이 솟아나고
그 탑 가운데에서 소리를 지르며 석존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였다고 한다.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무영탑(無影塔)의 그 의미를 고찰해 보자.
우리가 빈 병(甁)이라고 할 경우 병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병이 비어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무영탑이란 탑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림자가 없다는 의미다.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말인가?
무영(無影)이란 말은
“나타나지 않은 것”. 또는 외관(外觀)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나타나지 않은 것, 외관(外觀)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모습 즉 상(相)이 없다는 의미다. 상(相)이 없으니,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 없다는 경계를 무영(無影)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마치 <금강경>을 보면
“여래의 32상(相)이 상(相)이 아니기 때문에 32상이라 한다.”
“제일 바라밀이 제일 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제일 바라밀이라고 한다.”
등의 표현과 같이 <무영탑>이란 말도 그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유위법(有爲法)의 세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지만
무위(無爲)의 세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무상(無相), 부동(不動), 적멸 등
이런 말은 진리를 상징하는 말이다. 부처가 깨달았다는 제일 바라밀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한다.
석가탑은 곧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탑이라는 의미이며,
다보탑을 대비시켜 깨달은 진리의 위대성과 진실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무영탑이라는 불리는 석가탑은 이름 그대로
석가모니불을 상징한다는 의미다.
또한 여기에 탑을 쌓은 공덕으로 왕생극락을 바라는 원(願)이 있는 것이다.
정토교를 보면 수행을 위한 염불 삼행(三行)이 있다.
입으로 염불(念佛)을 부르는 것을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하고,
정좌(靜坐) 하여 불(佛)의 상호와 공덕을 관념(觀念)하는 것을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하며, 불(佛)의 법신(法身)이 유(有)도 공(空)도 아닌
중도실상임을 관하는 것을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하는데
이를 수행의 삼행(三行)이라 한다.
불국사 석가탑을 무영탑으로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염불(念佛) 삼행(三行) 의 한 방편으로 조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곧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발원이라는 의미다.
망자(亡者)에 대한 추복(追福)과 정토왕생,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르는 것 등을 서술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석가탑에서 나왔다는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파주 보광사 무영탑
2)파주 보광사 무영탑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인 파주 보광사는
영조가 낳은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영원(昭寧園)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보광사의 지장전 앞에 한 기의 탑이 서 있는데
<무영탑>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불국사의 무영탑과 울진 불영사의 무영탑은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는데
보광사의 이 무영탑은 지장전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무영탑에 대한 기록이 없어 조성 시가와 탑을 쌓은 연유를 알 수 없지만
형태를 보면 탑이라기는보다 부도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탑을 보면 옥개(屋蓋)는 삼 층인데 옥신(屋身)의 형태가
일반 삼층 석탑과 달리 둥근 돌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형식을 라마탑의 형식이라 부르는 데
대표적인 것은 공주 마곡사 오층 석탑이다. 이 탑을 라마 석탑이라고 부른다.
또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도 옥개(屋蓋)는 탑의 형식이나
옥신은 둥근 형상이다. 이는 오로지 신심(信心)으로 부처님의 가피로
왕생극락을 바라는 마음에서 탑을 쌓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곡사 5층석탑 상륜부
라마교는 어떤 종교인가를 잠시 살펴보자.
라마교는 티베트의 불교로 본교(토착 종교) 와
인도에서 들어 온 밀교와 융합하여 만들어진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문적인 수행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을 말하는 이관(理觀)을 중시하는 현교(顯敎)는
일반 중생으로서는 수행도 힘들고 깨닫기도 어렵기 때문에
오로지 다라니(陀羅尼)를 암송하듯, 윤장대(輪藏臺)를 돌리는 것과 같은,
신심(信心) 하나로 왕생극락을 바라는 사관(事觀)을 중시하는
밀교적 종교라 할 수 있다.
충주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이런 말이 있다.
「만약 중생이 있어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3가지 마음을 일으키면 곧 왕생한다.
하나는 지성심(至誠心), 둘은 심심(深心), 셋은 회향발원심(廻向發願心)이다.
이 3가지 마음을 갖추는 자는 반드시 저 국토에 태어난다.」라고 했다.
이 삼심을 요약하면 지성심은 진실한 마음이고,
왕생을 위해 거짓이 없는 마음이며, 심심은 자기의 근기와
부처님의 원력을 믿는 마음이고, 회향발원심은 닦은 수행을 회향해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다. 이 삼심은 거짓된 마음,
의심하는 마음, 회향하지 않는 마음을 퇴치하는 것이다.
탑을 짓는 마음은 바로 이러한 삼심에 따르는 것이다.
보광사의 무영탑은 추측건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울진 불영사 3층석탑(무영탑)
3)울진 불영사의 무영탑(삼층 석탑)
불영사(佛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현지 안내서>에 따르면
「울진 천축산에 자리한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서쪽 산등성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침으로 불영사라 하였다」라고 했다.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 에 의하면.
「신라 옛 비석에 의하면, 당나라 영휘 2년(651)에 의상 법사가
동경[현 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단하동[현재 불영사가 있는 곳] 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산을, 바다를 건너 만들어 놓은 듯하며, 또한 산골짜기의 물 위에는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비치니 더욱 기이하구나.’라고 하였다.
하류로 내려와 금탑봉에 올라서 보니 그 아래에 독룡이 있는 못이 있는데
의상 법사가 용에게 설법하여 사찰 지을 땅 베풀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의상 법사가 신통력 있는 주술을 강하게 부리자,
용이 갑자기 분을 발하여 산에 구멍을 내고 돌을 깨뜨리며 사라졌다.
의상 법사는 즉시 사찰 건립을 위해 못을 메우고,
동편에 청련전 3칸과 무영탑 하나를 건립하였으며,
땅을 비보하는 뜻으로 ‘천축산 불영사(天竺山 佛影寺)’라 편익하였다.」라고 했다.
그 청련전이 지금의 대웅보전이고, 대웅보전 앞에 조성된 삼층 석탑이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무영탑이다.
이 탑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조성되어 있고 기단부는 우주와 탱주가 있다.
탱주가 있는 탑은 신라양식의 탑으로 간주하는데
안내서는 고려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신라의 탑 양식이 고려로 옮겨가는
초기 양식인 것 같다. 탑신부인 옥개석은 경사가 있고
끝은 위로 향하고 있으며 층급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둥근 돌로 보주를 올려놓았다.
의상대사는 왜 무영탑이라고 명명했을까?
독룡(毒龍)이 살던 연못을 메웠다는 것은 불교적 견지에서 보면
중생의 분별 망상을 멸했다는 의미가 되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는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상근기를 위한 것이라기는 보다는
하근기의 중생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일본 정토교의 개조라 불리는 법연(法然1133~1212)) 선사의 설에 따르면
<근기에 상응하지 않은 교는 그것이 아무리 깊고, 방대하고, 높고
심오한 교리라도 중생 구제에는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다만 현실 인간 범부가 중요시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구제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의상대사(범어사 소장분)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는
해동 화엄의 초조(初祖)로 일찍이 고구려 보덕 화상으로부터
<열반경>을 배우기도 하였던 분이다.
중국 화엄종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완성한 제3조(祖)로 불리는
법장(法藏) 선사와 달리 중생 구제를 위한 실천적 수행을 강조한 분이다.
법장(法藏)의 중국 화엄종은 제3조로 초조 두순(杜順)으로 시작하여
제2조(祖)인 지엄(智儼)으로 이어진다.
의상대사는 지엄선사와 법장 선사로부터 수학한 분이다. 그러한 의상대사가
탑을 세우면서 이를 무영탑이라고 명명한 것은
후대를 위한 일종의 부촉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위대한 진리와 공덕을 염원하여 일심으로 믿고 기리면
왕생극락할 수 있다는 것을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탑 명을 무영탑이라고 한 것이다.
이 3곳의 무영탑이 갖는 2가지 공통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위대한 진리를 깨친 부처님를 기린다는 것이고
둘째 탑을 쌓은 공덕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왕생극락을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