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마치 배를 타고 먼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바다는 평화롭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태풍을 일으켜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살이란 것도
예기치 못한 액난(厄難)과 재난(災難)을 만나기도 하고,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기도 하는 것처럼 비명횡사하기도 한다.
다행히 운 좋게도 그러한 액난이나 재액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서 돌아보면 살아온 것도 그렇고,
세상살이 모두가 공허하고 허망하다는 무상(無常)의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이 사바세계를 사는 중생의 인생살이다.
그래서 중생들이 사는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 일체 액난과 재액도 없고
비명횡사도 없고 윤회도 없는 영원한 세계 저 피안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 피안의 세계가 극락정토이며, 그것이 신앙을 갖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지리산 법계사 내영도)
그러나 중생들은 피안의 세계 즉 정토를 바라면서도
그런 것이 있기나 하느냐고 의심하고
<도척일살불고(盜蹠日殺不辜)>라는 옛 고사(古事)까지 들먹이며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도척일살불고(盜蹠日殺不辜)의 고사란
중국의 옛 춘추시대 노국(魯國)의 현인으로 칭찬받았던
유하혜(柳下惠)의 아우인 도척(盜蹠)이 출생은 명문가이지만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국 역사에서 악명 높은
극악무도한 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의 간으로 회를 처먹으면서 포악 방종한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운이 좋았던지
액난이나 재난 없이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고 하는 고사(古事)에서 유래한다.
사실 근세에 이르러서도 그 하는 짓이 방종하고 교묘한 사기나
거짓말과 때로는 폭력으로 남에게 못 할 짓을 마음대로 하고서도
종신토록 호강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설상가상으로 그가 이룩한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고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천당이니 극락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유명무실한데
천당 극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왜 이런 소견을 가지게 되느냐를 생각해 보자.
중생이 이익을 따르면 욕심이 생기고,
상대방에 대한 성냄과 원망 등 갖가지 허물을 짓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마음이 생겨나고,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이만(我慢) 과 질투를 생기게 하고, 요사스럽고 허황한 소견을 내어
그것에 대한 애착(愛着)의 맛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토에 대한 신앙심도 희박해지고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이 추구하는 피안의 세계 즉 정토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정토는 본래 사바의 고통과 즐거움을 초월한 절대적인 즐거움이며
청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를 말한다.
사바세계의 즐거움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다는
고통과 즐거움의 상대적인 즐거움이다.
다시 말해서 즐거움은 고통을 동반하고, 고통은 즐거움을 동반하는
상대적인 즐거움이다. 그러나 정토의 즐거움은 고통과 즐거움을 넘어선
절대적인 즐거움으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은 부처님만의 경지이므로 범부의 언어와 생각이 끊어진 경계이다.
따라서 설하려고 해도 설할 수 없고 말하고자 해도 말할 수 없는 경계이다.
그러나 설하지 않으면 중생을 구제할 수 없으므로
모습이 아닌 것(非相)에 모습(相)을 나타내어 장엄하게 설해진 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정토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서 설하는 정토의 장엄은
절대의 경계 즉 부처님의 경계를 상징한 것으로,
그 상징은 사바세계에서 최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금, 은, 유리, 보석 등의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 상징은 첫째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선교 방편이고,
둘은 차별을 집착하는 범부의 세간에 대비하여
모습이 있는 즐거움을 설하여 보인 것이다.
이것이 정토의 장엄이고 안락국의 모습이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사리불이여, 저 국토를 왜 극락이라고 하는가?
그 나라 중생은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이 없고,
단지 여러 가지 즐거움만을 받기 때문에 극락이라 이름한다.>라고 했다.
극락은 고통이 없는 세계라 안양(安養), 또는 낙유세계(樂有世界)라고도 한다.
이렇게 정토의 안락을 사바세계의 고통의 과보와 상대하여
설하고 있는 것은 첫째로 미혹한 중생을 정토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마치 아름알이가 깊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의 저주는 두렵다.”라는 말처럼
허망한 전도된 사견(邪見)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선교방편이
정토의 세계를 그토록 장엄하게 설하게 된 것이다.
문경대승사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 제321호)
그런데 대승의 모든 경전은 「시방(十方)세계가 불국토이며 정토다.」라고 했는데
왜 서방(西方)을 지칭하여 서방극락 정토라 말하는가?
천친(天親)의 <왕생론> 권 1에 이르기를
「시방세계에 두루 한 것이고 어느 곳이나 모두 불국토이고 정토이다.
그런데 범부는 사물에 구애되기 쉽고 집착하기 쉬우므로
지금 임시로 방향과 지역이 없는 시방세계에서 선교 방편을 가지고
방향을 서방(西方)이라 가리켜 보여 인도하기 위해
임시로 방향을 서방이라 가리켜 범부가 돌아가야 할 진실한 국토다.」라고 했다.
곧 분별과 차별을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켜 인도하기 위해
임시로 방편을 세워 방향을 한정하여 서방(西方)이라고 한 것이라는 의미다.
또 그의 <안락집> 권 하(下)에서
「해가 뜨는 곳을 생(生)에 비유하여 동방이라면,
해가 지는 쪽을 死에 비유해서 서방이라 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미산 흥국사의 <극락구품도>나 정릉 경국사의 아미타여래설법상을 보면
극락을 9가지로 묘사하거나 9개의 연화대 위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극락 9품도> 또는 <구품연지(九品蓮池)>라 일컫는다.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정토에 오르는 자의 근기와 수행정도의 차이에 따라
정토에서 태어나서 받는 과보(果報)에도 아홉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상. 중·하의 삼생(三生)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삼품(三品)으로 분류한
극락왕생 정토의 아홉 가지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정토는 하나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면 평생 지은 업(業)의 깊고 얕음에 따라
아홉 가지의 차등이 있는 연대(蓮臺)에 앉게 된다는 것을 의미다.
연지(蓮池)는 연꽃을 키우는 연못으로
연꽃은 불교의 연화세계(蓮華世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연화장세계라고 칭한다.
따라서 극락세계의 상징인 구품연지를 사찰 내에 배치하는 것은
극락정토의 성중들이 연지에 둘러앉아 설법(說法)을 듣는
연화회(蓮華會)의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상주 남장사 관음암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922)
극락정토를 가장 부르짖는 종파는 정토교이다. 정토교는 염불을 중시한다.
정토교가 염불을 중요시하는 목적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고
가정의 안정과 재앙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현재의 이익을 위하여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의 이익이란 염불하면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한다.
염불을 한다는 것은 증명(證明)과 호념(護念)을 의미한다.
증명(證明)과 호념(護念)이란 염불하면 왕생한다는 가르침이 진실이고
거짓이 아님을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하시고,
더불어 염불하는 사람에게는 현재 모든 부처님이 호념 하는
이익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사바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먼 피안의 세계이지만
정토를 바라고 염불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마음으로 느끼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자비 광명을 입어 법의 즐거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상한 세계의 액란과 재액에 대하여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무상한 세상에 집착하지 않은 사람은 액난과 비명횡사와
무상(無常)을 두려워할 것이 못 되고 생각 생각에
부처님의 자비 광명을 입고 생각마다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념념왕생(念念往生)의 경지는 사바세계를 벗어난 경지이고,
세상의 常과 無常에 장애를 받지 않는 경지라는 의미다.
따라서 액난과 비명횡사의 두려움이 없는 세계는
부처님께서 함께하시어 호념 하시는 법열(法悅)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왕생의 기쁨이고,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경계이며,
왕생 호념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염불하면 호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익을 말하는 것이고,
염불하는 공덕에 의해 이 땅의 무상이 무상하지 않게 되고
재앙이 멸하고 수명이 연장되는 이익과 같은 공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는 자기 욕심을 채워
만족하는 것을 제일로 여기기 때문에 물욕 만족을 위해
모든 부처님, 신들을 모시지만 염불하는 수행자는
그것을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정릉 경국사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748호)
한미산 흥국사 극락9품도
말에게 물을 먹이려면 먼저 강 가까이 끌고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내세운 것이
서방 정토를 강조하는 정토 신앙인 것이다.
정토교의 개조라 일컫는 법연(法然)의 설에 따르면
『근기(根機)에 상응하지 않은 교는
그것이 아무리 심광고원(深廣高遠)한 교리라도
중생 구제에는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 속의 인간 범부가 어떻게 해서
구제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라는 것이다.
정토를 주장하는 정토 신앙은 관불(觀佛), 문법(聞法),
칭명(稱名) 등에 의해서 근본 무명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고
그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지금도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 참회하고,
이 참회가 환희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강진 남미륵사 아미타여래입상
신앙의 믿음이란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화려한 문학이나,
역사적 진위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첫 번째로 구해야 할 것은 중생의 구원이다.
나의 액난과 재난의 문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무상(無常)에 대한 번뇌의 문제는
중생의 삶에서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방 정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강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