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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명상음악

[스크랩]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3

작성자🌈화양연화|작성시간20.11.07|조회수135 목록 댓글 1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3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불교는 종교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그러나 당신이 무어라 부르건 상관이 없다. 불교는 당신이 어떤 딱지를 붙이던 간에 그대로이다. 라벨은 하찮은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부처의 가르침에 붙이는 '불교'라는 딱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이름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무슨 다른 이름이라도 향기로운 것을.

같은 이유로 진리에는 상표가 필요치 않다. 진리는 불교표도, 기독교표도, 힌두교표도, 회교표도 아니다. 진리는 누군가의 전매품이 아니다.

파벌적인 딱지는 진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며, 사람의 마음에 해로운 편견을 만들어낸다.

이는 정신적, 지적 관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에서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를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또는 유태인 같은 딱지를 붙이고, 우리 마음속에 딱지와 어우러진 갖가지 편견을 갖고서 그 사람을 대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갖다 붙이는 속성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다.

사람들은 구별하는 딱지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심지어는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적 성품과 감정에도 딱지를 갖다 붙이려고 기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상표'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 또는 기독교의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상표'의 것은 깔본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은 파벌적일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나 회교도나 간에 그러하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교도의 것이나
기독교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이다. 사랑, 박애, 자비, 포용, 인내, 우정, 욕망, 증오, 심술, 무지, 자만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와 감정에는 당파적인 딱지가 필요 없다. 그것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관념이 어디서 왔는가가 하찮다.

한 관념의 근원과 발전은 학술적인 문제이다. 사실, 진리를 이해키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부처에게서 나왔는지, 다른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아는 것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을 설명한 중요한 이야기가 《마지마-니까야Majjhima-nikaya》(中部: 경전번호140)에 있다.

부처가 한번은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 그 헛간에 젊은 사문이 먼저와 있었다.[각주1] 그들은 초면이었다. 부처는 사문을 살펴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젊은이에게 호감이 간다. 내가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처는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오! 비구여,

[각주2] 그대는 누구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소? 누가 그대의 스승이오? 그대는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하시오?'

[각주1] 인도에서 옹기장이의 헛간은 널찍하고 조용하다. 빨리경전에 보면 고행자와 사문들뿐만 아니라, 부처 자신도 방랑수행(遊行)하는
동안에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각주2] 여기에서 부처가 이 사문을 '비구'라 부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구라는 용어는 불교 승려에게 쓰인다. 그가 동아리(승가)의 일원인 비구가 아님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부처에게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마, 부처당시에 비구라는 용어는 자주, 다른 고행자들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그 용어의 사용에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는 "거지", 즉 '음식을 구걸하는 이'를 뜻하며, 여기서는 아마도 말 원래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구라는 용어가 불교 승려에게만 쓰인다.
특히,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같은 나라와 방글라데쉬의 치타공 지방의 상좌불교 승려를 가리킨다.





'오! 벗이여'라고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사꺄족의 후예, 고따마라는 사문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꺄족을 떠나서 사문이 되었답니다. 그분은
아라한, 즉 "완전히 깨달은 이"라는 드높은 칭송이 자자합니다.

그 세존의 이름으로 저는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그 세존이며,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어디에 계신답니까?'

'벗이여, 북쪽 나라에 사밧티Savatthi(舍衛城)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습니다. 세존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계신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그 세존을 본적이 있소? 그이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
소?'

'저는 그 세존을 뵈온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뵙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는 이 처음보는 젊은이가 집을 떠나 사문이 된 것이 자기 이름을 따라서 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말했다.

'오! 비구여,
그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소. 잘 듣고 새기도록 하시오. 내 말하리다.'

'예, 좋습니다. 벗이여'라고 젊은이는 동의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진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젊은이에게 베풀었다.(그 요점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설법이 끝나자마자, 뿍꾸사띠Pukkusati라는 이름의 그 젊은이는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부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부처 앞으로 다가가서 스승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는, 몰라보고 '벗'[각주3] 이라 부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처에게, 수계受戒[각주4]를 주시어 "동아리"에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각주3]  여기서 쓰인 용어는 친구를 뜻하는 아부소Avuso(友)이다.
그것은 같은 지위의 사람끼리 부르는 경어이다.

그러나 제자가 부처를 부를 때는 이 용어를 결코 쓰지 않는다. 대신에 제자들은 "선생님"이나 "님"과 비슷한 의미의 반떼Bhante라는 용어를 썼다.

부처 당시 승려 동아리 사람들은 상대방을 아부소, 즉 벗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처가 돌아가기 전에 후배 승려는 선배를 반떼(尊師), 즉 "선생님"이나 아야스마Ayasma(具壽), 즉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선배는 후배를 이름이나 아부소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까지 승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각주4] <역주> 수계受戒는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식으로 부처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물론 정해진 형식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것을 '수계식受戒式'이라고 한다. 출가한 승려가 되기 위해서 받는 계율을 구족계具足戒라 하며 그 의식을 득도식得度式이라고 한다.











부처는 그에게 발우〔동냥 그릇〕와 가사袈裟〔비구가 걸치는 간소한
옷〕가 준비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비구는 반드시 세벌로 된 가사(三衣)와 음식을 구걸키 위한 발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뿍꾸사띠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여래는 발우와 가사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수계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뿍꾸사띠는 발우와 가사를 구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그만 불행히도 소에 받혀 죽고 말았다.[각주5]

[각주5] 인도에서 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여기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은 오래된 것 같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 이 소들은 순하며, 사납거나 위험하지 않다.

나중에 부처에게 이 슬픈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처는 뿍꾸사띠가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미 진리를 보았으며, 열반의 실현과정에 있어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지위를 얻은 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아라한[각주6]이 되는 마당에 태어났으며 마지막 과정을 거쳐서, 이 세속에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각주6] 아라한阿羅漢(Arahant)은 욕망과 증오, 악의, 무지, 자만심, 거드름, 등등의 모든 오염과 더러움에서 떠난 사람이다.

아라한은 네 번째 경지, 그러니까 열반을 실현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지혜와 자비, 그리고 그런 순수하고 거룩한 성품으로 가득 차 있다.
뿍꾸사띠는 그때 전문적인 용어로 아나함阿那含(Anagami;不還)[欲界
의 번뇌를 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라 부르는 세 번째 경지에 도
달했을 따름이다.

두 번째 경지는 사다함其陀含(Sakadagami;一來)
[한번 욕계에 돌아오는 사람], 첫 번째 경지는 수다원須陀洹(Sotapa
nna;預流)[흐름에 든 사람]이라 부른다.

이 이야기에서 뿍꾸사띠가 부처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자기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것이 누구의 가르침인지를 몰랐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는 '진리'를 보았다.
약이 좋으면 병이 나으리라. 누가 그것을 준비했는지, 어디서 그것이 유래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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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0.11.17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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