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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와 경제생활

[스크랩] <제14강> 송양지인(宋襄之仁)

작성자靜尙(정상)|작성시간11.11.04|조회수120 목록 댓글 0

“송양지인(宋襄之仁)”

-전쟁의 예의


기원전 648년 11월 어느 초겨울. 손자가 활동하기 거의 1세기 전.

송(宋) 나라 제후 양공(襄公)은 강을 건너오는 초(楚) 나라 군사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까맣게 강을 건너 몰려오는 초나라 군사의 숫자에 벌써부터 송나라 병사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강을 건너오는 초나라 군사는 언뜻 보아도 자신의 군대보다 훨씬 숫자가 많아 보였다. 양공은 초나라 왕에게 군례(軍禮)에 따라 홍수(泓水)라 불리는 이 강옆에서 싸우기로 정식 선전 포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쟁 관례상 미리 통보하지 않는 전쟁은 다른 제후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고 기습적인 공격이나 습격은 아웃 나라 제후(諸侯)들의 비난과 사관(史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정말 우아하고 명분있게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도 다른 제후들이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이 전쟁의 불문율이었다.

걱정스런 얼굴로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양공을 지켜보던 그의 아들 목이(目夷)가 참다못해 이렇게 간언 하였다.

“아버님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 초나라 군사는 우리보다 숫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그들이 강을 건너 이곳 들판에서 싸운다면 우리가 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지금 적이 강을 건너느라 혼란스러울 때 공격을 하셔야 우리 군대가 적은 병력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공격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양공은 심한 소리로 그의 아들을 꾸짖었다.

 

“군자가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 때 그 어려움을 틈타 공격을 한다면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초나라 군대는 추운 초겨울에 강을 건너고 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틈타 공격을 한다면 다른 제후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아무리 싸움에 이긴다 한들 누가 그 승리를 인정해 줄 것이냐 !”

목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군례(軍禮)에 의하면 강을 건너고 있는 적을 기습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예(禮)는 군자들의 정중한 약속(gentleman"s agreement)이었다. 이 약속은 강력한 명분과 힘을 가지고 있는 ‘천자(天子)’가 만드는 것이며, 무례한 ‘제후(諸侯)’를 처벌하기 위한 결정과 군대를 동원하여 그 나라를 정벌하는것 모두 천자가 결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아무리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이라 하더라도 이 ‘약속’을 깨고 명분 없고 품위 없는 전쟁을 하면 그것은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하려다가도 상대방 국가의 국왕이나 중요 지도자가 갑자기 상을 당하면 하던 전쟁도 멈춰야 했다.(不加喪) 또한 상대방 나라에 재난이 발생하면 하던 공격도 멈추는(不因凶) 정말 요즘 생각하면 이해 못할 우아한 전쟁 미학이 있었다. 전쟁할 장소나 시간을 정하고, 북이 울리면 전쟁을 시작하고, 기습 공격은 할수 없으며 정면 공격만 가능하고(偏戰), 나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전쟁이라도 포로로 잡으면 안 되고(不擒二毛), 부상당한 적의 병사에게 두 번 상처를 주면 안 되는(不重傷)는 것이 춘추시대의 군대 예절이었다. 아무리 전쟁에 이겨도 그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면 안 된다. 문제가 된 지도자만 몰아내고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다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오는 것이 군자의 명분 있는 전쟁이었다.

 

정벌(征伐)의 정(征)자는 가서 바르게 하고(正) 돌아온다는 뜻이 담겨있다. 무(武)라는 한자 역시 ‘그치다’라는 뜻의 지(止)와 창이란 뜻의 과(戈)가 결합하여 무력을 사용하여 명분 없는 행동을 그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결국은 명분상으로는 국토를 빼앗는 침략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손자 이전의 전쟁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종의 룰이 있는 게임이었다. 이런 전쟁 미학에 찬물을 끼 얻은 것이 바로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천자(天子)의 나라인 주(周)나라의 세력약화였다. 춘추 말기에 들어서면서 천자의 지위는 약화되었고 예악의 제정과 정벌의 결정을 천자가 결정한다는 것은 강력한 힘이 있었던 옛날 천자 시절에나 가능한 일로 되버렸다. 각 제후국들의 패권 전쟁이 심화되면서 점차 예의로운 전쟁의 미학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필살의 전쟁 정신이 점차 꿈틀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송나라 양공의 아들인 목이는 아버지에게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기 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간언을 드린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요구가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변해 가는 시대 상황을 재빨리 인식하고 있는 신세대의 한마디 충고였다. 명분은 이미 천자의 권위와 함께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내가 이기지 않으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굶어 죽으리라는 절박한 시대에 명분 찾고 예의 찾는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면 누구 책임져줄 것인가? 옛날 같으면 전쟁에서 졌다고 완전히 나라를 잃지는 않았겠지만 이제는 시대가 완전히 변하였다. 누구도 우리와 우리 병사를 책임져주지 않을 것이다. 옛날처럼 늙었다고 봐주고, 다쳤다고 봐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의 예의’가 없다고 해서 꾸짖을 사람도 없다.

옛날 같으면 천자가 나서서 꾸짖었겠지만 이제는 천자는 조그만 나라 제후보다도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양공의 아들 목이는 어찌보면 당시의 신세대였고 그의 아버지 송나라 양공은 구세대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명분 찾고, 군대 예절 찾아가며 적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논설을 늘어놓는 아버지를 보고 목이는 정말 시대환경에 적응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도 죽고 병사들도 죽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그래서 초나라 군사가 물을 건널 때 그 혼란을 틈타 공격을 하자고 했건만 양공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송나라의 예고된 패배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 홍수(泓水)의 전쟁에서 송나라 제후 부자(父子)간에 가치관의 갈등이 있었으며 이 갈등은 그 부자뿐만 아니라 그 당시 새로운 시대 환경 속에서 겪는 신구간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송나라 양공은 계속해서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진열을 정비하고 전쟁을 하기를 기다렸다. 이제 초나라 군대는 강을 다 건너고 일전을 벌일 대형을 짜고 있었다. 드디어 초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 진영을 모두 갖추고 들판에서의 신사적인 전쟁을 요청하였다. 북이 울리고 병사들은 한 걸음 씩 전진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그 위를 지나가고, 전차는 평지를 달려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 상대 전차와 교전하였다. 다친 병사는 다시 창으로 찌르거나 칼로 베지 않았다. 이런 귀족적이고 예의바른 전쟁은 서양의 경우 거의 18세기까지 시행하였다. 귀족들은 뒤에 서고 병사들은 일렬로 앞에 서서 적의 총에 맞으면 쓰러지고, 그 뒤를 다시 후방의 병력이 채우고, 결국은 군대의 숫자와 병졸의 용기와 담력만이 승리를 장담하는 유일한 척도인 그런 전쟁이다. 여기에는 전략, 전술, 유인, 기습, 화공, 정보라는 객관적인 전쟁 승패의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당연한 결론이지만 송나라 군대는 완전히 패배하였다. 양공은 이 무모하지만 예의 바른 전쟁에서 크게 부상당하였고 결국은 오래 못가 그 부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전투에 참가한 대부분의 송나라 병졸들은 모두 죽거나 부상당했다.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지도자를 만나 완전히 병사들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고 만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양공을 칭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병사들을 몰살시킨 지도자로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송(宋)나라 양(襄)공은 정말 폼 나고 휴머니즘(仁)있는 지도자야!”라고 빈정댔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는 결코 휴머니즘도(仁), 사랑도, 명분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을 몰살시킨 춘추 말기 마지막 명분전쟁이었다.


2004년 대한민국. 어느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

지나간 시대의 가치관을 부여잡고 자신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모는 장군들 가득한 세상. 자신의 이익과 우아함을 위하여 기업을 망하게 하고 직원들을 사지로 내모는 ‘잘못된 휴머니즘(仁)’ 가득한 리더들.

조직은 살아남아야 한다. 조직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最) 위대한 선(善)이다. 조직은 리더의 전유물이 아니다. 리더란 직책은 조직을 살리라고 준 일시적인 대표성이지 조직을 망하게 하여 자신의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결하더라도 조직은 살려놓고 자결해야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제 앞에 무슨 고집과 이유가 필요할 것인가?

 

어떠한 리더도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조직을 몰살시킬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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