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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주 남성당 한약방 김장하 어른의 아름다운 삶

작성자향상일로1|작성시간23.07.26|조회수383 목록 댓글 4
김장하 선생님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인 1973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다. 남성당한약방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큰돈을 벌었다.

 

남성당 한약방이 잘 된 이유는 단순했다. 좋은 약재로 한약을 지어 싸게 팔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날은 하루에 800명이 넘었다. 당시 한 달에 1억 원을 벌 만큼 호황을 누렸다. 한약방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고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운영한 남성당한약방은 50년간 운영되다가 2022년 5월 말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나눔을 실천해온 인물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 년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해왔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재단 해산(2021년)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

 

김장하 선생님이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식 때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둘째,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었기에 그것을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 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돈은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흩어 뿌리면 거름이 된다.”

 

이는 돈에 대한 김장하 어른의 지론인데, 여기에는 선생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선생의 키즈(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중에는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거나 반제동맹 사건으로 수배를 받은 사람도 있지만, 선생은 끝까지 그들을 도왔다. 수배 중에 찾아와서 ‘죄송하다’라고 말하는 학생에게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은 둘 다 똑같다’라고 응원하였다. 성공한 사람들이 감사 인사를 하러 오면 “나는 사회에 있는 걸 준 것이니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에 갚아라.”라고 했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 죄송하다는 이에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라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준 선생의 삶은 ‘돈은 거름과 같다’라는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출처 : MBC 방송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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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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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클레오파트라 | 작성시간 23.07.26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kkgo행석 | 작성시간 23.07.26 정말이지 사회의 좋은 귀감이 되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기를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3.07.26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 작성자정해도 | 작성시간 24.03.29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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