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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불보살님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나도 이와 같이 믿는다

작성자반문문자성|작성시간20.01.28|조회수90 목록 댓글 4

정전스님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나도 이와 같이 믿는다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불께서 묻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설하신 경전입니다. 이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체 세간에서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토법문은 사바세계 나아가 전체 허공법계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법문이자 가장 설하기 어려운 경전이기도 합니다.

『아미타경』 중에 석가모니불께서 염불왕생의 법을 설하고 난 후에 육방제불이 모두 광장설상을 보이며 아미타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셨습니다. 왜 육방제불이 모두 찬탄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시방제불들이 모두 정토법문이 믿기 어려운 법문임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믿도록 하기 위해 육방제불들이 모두 각자의 국토에서 광장설을 내밀어 아미타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신 것입니다.

불법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정토법문은 지혜를 초월합니다. 정토법문은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있어도 들어올 수 있고 지혜가 없어도 들어올 수 있지만 진정으로 철저하게 들어오려면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를 초월해야 합니다.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을 믿어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역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여시아문) 우리도 이와 같이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무량수경』에서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주셨습니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다시 의혹을 일으켜서는 아니 되느니라.
無得以我滅度之後,復生疑惑。



이는 미륵보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믿었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선근복덕이 갈수록 적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의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부처님은 실제로 계실까? 극락세계가 정말로 있을까? 우리가 왕생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에게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미리 우리에게 “내가 열반에 든 후에 의혹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미륵보살은 등각보살이자 일생보처 보살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량수경』을 설하신 뒤에 미륵보살의 한 단락 표명이 있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간곡하신 가르침을 받들어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닦고 배워서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고 감히 의심치 않겠습니다.
受佛重誨,專精修學,
如教奉行,不敢有疑。

여기에 감히 의심치 않겠다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시고 난 후에 미륵보살이 “저는 감히 의심하지 않고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토법문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님과 시방제불·석가모니불의 공통적인 경계이므로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완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미륵보살은 공덕의 측면에서 말하면 아직 구경원만한 지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생보처의 지위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분이 나는 감히 의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감히 의심하지 못할까요?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이와 같이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실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해가 가지 않고 설사 모르더라도 믿어야 하고 감히 의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에겐 더욱 의심이 있습니다. 범부에게는 다섯 가지 근본번뇌, 즉 탐·진·치·만·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탐진치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지만 오만한 마음에 대해선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범부중생에겐 모두 오만한 마음이 있는데 이른바 ‘자존심’입니다. 본인스스로 아주 좋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이것이 바로 오만심입니다. ‘아만심’은 아집이 견고한 일종의 표현입니다.

범부에게는 또 하나의 의혹심이 있는데 무엇이든 의심부터 하는 겁니다. 불법에서 생사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고 지옥이 있고 천당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의심을 합니다. ‘정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의혹심입니다.

부처님께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을까? 정말로 극락세계가 있을까? 의혹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의혹심은 우리가 생사윤회를 하면서 형성된 하나의 관념입니다. 우리가 무지하여 모르는 게 많고 이해할 수 없는 이치들이 많기 때문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에게 법을 구하는 마음만 있으면 차츰차츰 이런 의심들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바로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불법을 이해하면 할수록 의심은 줄어들고 신심은 갈수록 증장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신 염불왕생의 이치에 대해 미륵보살조차도 “저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믿고 받아들였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감히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감히 의심하지 않겠다는 것은 의혹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의혹심이 있더라도 감히 의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에 대한 일종의 ‘앙신仰信’, 철저한 신앙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나는 완전히 믿는다는 것이고, 내 마음에 설사 의심이 있더라도 감히 의심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토법문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신앙의 법문입니다.

미륵보살조차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마땅히 철저하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심할만한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염불하면 왕생할 있을까? 우리로서는 의심은커녕 이해하는 것조차도 매우 어렵습니다. 이때는 철저하게 우러러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광대사님은 “일심으로 귀명하고 온몸으로 기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이와 같이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도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도 부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은 일종의 표면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향을 사르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귀의를 하고 독경을 하고 불법을 신앙하는 등등, 이러한 신앙은 일종의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정토법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신앙은 염불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염불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모든 신앙을 초월한 정토신앙의 핵심이자 근본입니다.

이 신앙에는 지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물론 지혜가 있으면 우리의 신심을 증장시킬 수 있고 천천히 이런 신심을 키울 수 있지만 맨 마지막에는 신심을 초월한 앙신仰信입니다. 부처님은 높은 경지에 계시고 우리는 아래에 있는 범부중생이므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이와 같이 신앙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귀명입니다. 일심으로 귀명하여 자신을 아미타부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사실상 아집을 타파하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심·범부의 아집·자신의 지견을 모두 다 내려놓고 아미타부처님께 완전히 귀명하고 석가모니불의 교법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토법문을 배울 때 어디에 장애가 있을까요? 의심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의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선의 근본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명호 들을 길 없고,
교만하고 악하고 게으른 이는 이 법을 믿기 어렵네.
若人無善本,不得聞佛名。
驕慢弊懈怠,難以信此法。

우리에게 선의 근본, 근본적인 선근복덕이 없다면 부처님의 명호를 듣기조차 어렵습니다. 특히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들을 수 있으려면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만심이 있는 사람은 정토법문을 믿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교만이라 부를까요? 본인 스스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으니 아미타부처님을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불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법문에서 자력수행에 의지하므로 반드시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다, 마음이 곧 부처다’고 믿어야 합니다. 선종에서는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육조대사님처럼 확실하게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이치를 깨달아서 법과 상응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탐진치가 구족하고 번뇌무명이 매우 치성하여 ‘자신이 부처임을 믿는’ 이런 신앙은 공허한 것이고 범부의 교만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 부처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심이 있는 사람은 자아에 집착하여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본인 스스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고 본인 스스로 번뇌를 끊을 수 있고 본인 스스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고 본인 스스로 불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에서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중시입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자신이 죄악생사범부로서 무량겁 이래 생사해탈을 못하고 항상 생사윤회 속에서 쉴 새 없이 침륜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불자들은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정토법문은 어느 각도에서 말하면 수많은 이론들을 초월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매우 이성적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생사를 마주하며 그 다음에 부처님을 마주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떤 근기일까요? 우리는 무량겁 이래 항상 불법을 배우고 있었고 항상 선근을 심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금생에 불법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전생에 틀림없이 선근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전생에 선근을 심을 수 있었다면 전전생에도 틀림없이 선근을 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세생생 윤회 속에 있습니다. 무량겁은 대단히 길고 기점이 없는 세월입니다. 무량겁의 공간 속에서 수많은 부처님들께서 세간에 출현하셨고, 우리도 윤회하는 동안 틀림없이 불법을 만났을 것이고 수많은 부처님들을 만나 수많은 복덕인연을 쌓았을 것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해탈을 못한 것은 정토법문을 믿은 적이 없고 왕생한 적이 없고 해탈한 적이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게 바로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침몰한다’는 것은 늘 육도윤회 속에 침몰되고 삼악도에 침몰되고 탐진치 번뇌에 침몰되고 고해에 침몰되었다는 것이고, ‘항상 유전한다’는 것은 육도에서 쉴 새 없이 윤회하며 출리의 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의 48원이라는 증상강연增上强緣을 만나 금생에 해탈할 희망이 생겼습니다. 무량겁 이래 우리는 강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법을 만났다면 당연히 부처님의 지견으로 부처님의 안목으로 정토법문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만일 마음속에 교만심이 있다면 일종의 장애·일종의 나태함이 있어서 우리가 정토법문을 듣는 것을 싫어하도록 장애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다른 법문을 닦으러 간다든가 세속에 미련을 갖게 되므로 그는 정토법문을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만하고 악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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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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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호암(好岩)대전관음사 | 작성시간 20.01.28 감사합니다
    감히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반문문자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1.28 스님께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진리 그대로 드러내신 희유한 법문입니다.
    석가세존께서 중생들이 가기 쉬운 극락은 갈 생각은 않고 오욕락에 빠져 중요하지않은 일에 매몰되어 있다고 한탄하시는 법문이 있습니다.
    전수나무아미타불 염불법은 근기가 하열한(대부분) 중생이더라도 반드시 극락왕생하여 성불하는 이행도로 해석하셨는데 이 세존의 본회를 그대로 드러내신 가르침으로 중생들이 진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희유한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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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0.01.29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 작성자장우중 | 작성시간 20.01.31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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