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1. 序言 - 머리말
혜능(慧能)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도교인(道敎人)·속인 등, 일 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儒家)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大師)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法海)로 하여금 설법 내용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宗旨)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2. 尋師 - 스승을 찾아감
혜능대사는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대사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의 본관은 범양(范陽)인데 좌천되어 영남의 신주(嶺南新州) 백성으로 옮겨살았고 혜능은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난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혜능을 데리고 관숙사(官宿舍)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값을 받고서 문을 나서려 하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 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黃梅縣) 동빙무산에서 오조(五祖) 홍인(弘忍)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門人)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오조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自性)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業緣)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홍인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하였다.
오조대사께서는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하셨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얼굴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오조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시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 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3. 命偈 -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
오조 홍인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셨다. 문인들이 다 모이자 말씀하셨다.
"내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만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자성(自性)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六代)의 조사(祖師)가 되게 하리니, 어서 빨리 서둘도록 하라."
문인들이 처분을 받고 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서로 번갈아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써서 게송을 지어 큰스님께 모름지기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神秀)상좌는 우리의 교수사(敎授師)이므로 신수상좌가 법을 얻은 후에는 저절로 의지하게 될 터이니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하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바치지 않았다.
그 때 화공 노진이 홍인대사의 방 앞에 있는 삼칸의 복도에 <능가변상>과 오조대사가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전하여 기념하고자 벽을 살펴본 뒤 다음날 착수하려고 하였다.
4. 神秀 - 신수스님
상좌인 신수는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게송(心偈)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오조 스님께서 내 마음속의 견해가 얕고 깊음을 어찌 아시겠는가. 내가 마음의 게송을 오조스님께 올려 뜻을 밝혀서 법을 구함은 옳지만, 조사(祖師)의 지위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도리어 범인의 마음(凡心)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음과 같다. 그러나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法)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참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다. 밤이 삼경(三更)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마음의 게송을 지어서 써 놓고 법을 구해야겠다. 만약 오조스님께서 게송을 보시고 이 게송이 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시면 나의 전생 업장이 두꺼워서 합당이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은 알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리라."
신수상좌가 밤중에 촛불을 들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게송을 지어 써 놓았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게송은 이르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
신수상좌가 이 게송을 다 써 놓고 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노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에 '능가변상'을 그리게 하려 하시다가, 문득 이 게송을 보셨다. 다 읽고 나서 공봉에게 말씀하셨다.
"홍인이 공봉에게 돈 삼만 냥을 주어 멀리서 온 것을 깊이 위로하니, 변상을 그리지 않으리라.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 하셨으니,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게 하여, 이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법을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니라."
이윽고 홍인대사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여 게송을 앞에 향을 사루게 하시니,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므로 오조스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이 게송을 외라. 외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을 볼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리라."
문인들이 다들 외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오조스님이 신수상좌를 거처로 불러서 물으시되,
"내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만약 지은 것이라면 마땅히 나의 법을 얻으리라"하셨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부끄럽습니다. 실은 제가 지었습니다만 감히 조사의 자리를 구함이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보아주옵소서. 제자가 작은 지혜라도 있어서 큰 뜻을 알았겠습니까?"하였다.
오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없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와 보여라. 만약 문안에 들어와서 자성(自性)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너에게 부촉하리라"하셨다.
신수상좌는 돌아가 며칠을 지났으나 게송을 짓지 못하였다.
5. 呈偈 - 게송을 바침
한 동자가 방앗간 평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見性)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너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육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곧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남짓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에 가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어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 하였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에 예배하였고,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어느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강의 뜻을 알았다. 혜능은 또한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이었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아야만 곧 큰 뜻을 깨닫느니라.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明鏡亦無臺)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佛性常淸淨)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요.(何處有塵埃)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心是菩提樹)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明鏡本淸淨)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何處染塵埃)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 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시어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 하셨느니라.
6. 受法 - 법을 받음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었다. 혜능이 한 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言下便悟)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며, 떠날 때 문득 오조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陳)이요 이름은 혜명(惠明)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이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7. 定慧 - 정과 혜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서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坐不動)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던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거나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 無念 - 생각이 없음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르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9. 坐禪 - 좌선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忘無處所).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自作自成佛道)."
10. 三身 - 세 몸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自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 귀의합니다'하라.(이상을 세 번 한다)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선지식들은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法身)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慧)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밝아 사무쳐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空寂)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의 화신(化身)이라 하니라.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11. 四願 - 네 가지 원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三身佛)에 귀의하여 마쳤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發四弘大願).
선지식들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衆生無邊誓願度).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煩惱無邊誓願斷).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法門無邊誓願學).
위없는 불도 모두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無上佛道誓願成).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의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般若智)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 버리면 중생들 저마다 스스로 제도한 것이니라. 삿됨(邪)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하고 미혹함(迷)이 오면 깨침(悟)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愚)이 오면 지혜(智)로 제도하고 악함(惡)이 오면 착함(善)으로 제도하며 번뇌(煩惱)가 오면 보리(菩提)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眞度)라고 하느니라.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는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虛妄)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없는 바른 법(無上正法)을 배우는 것이다.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下心行)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라."
12. 懺悔 - 참회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어서 삼세(三世)의 죄장(罪障)을 없애게 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懺悔)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自性懺)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선지식들아, 무엇을 이름하여 참회(懺悔)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13. 三歸 - 세 가지 귀의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無相三歸依戒)'를 주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覺兩足尊)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正離欲尊)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淨衆中尊)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自性)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小欲知足) 재물(財)을 떠나고 색(色)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말한다면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14. 性空 - 성품이 빔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들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어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大智惠彼岸到)'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 외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摩訶)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一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자성이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摩訶行)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15. 般若 - 반야
"어떤 것을 반야(般若)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 '저 언덕에 이른다(彼岸到)'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억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卽煩惱是菩提),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五陰)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 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戒定惠)로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無念)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16. 根機 - 근기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法界)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말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閻浮提)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과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邪見)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正見)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塵勞)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17. 見性 - 견성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18. 頓悟 - 단박에 깨침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弘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頓見眞如本性).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頓悟)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因緣)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觀照)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다.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無念)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六賊)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六塵)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인 무념행(無念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19. 滅罪 - 죄를 없앰
"선지식들아, 뒷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나의 법신이 너희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선지식들아, 이 돈교(頓敎)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同見同行) 소원을 세워 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받아 지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에는 모름지기 예로부터 말없이 법을 부촉하여 큰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곧 모름지기 분부(分付)한 것이니라.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 만겁 천생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느니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三業)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요.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懺悔)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시니, 위사군(韋使君)과 관료와 스님들도 도교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기지 않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20. 功德 - 공덕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 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宗旨)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들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功德)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고 복밭(福田)에 있지 않으니라.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見性)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內見佛性 外行恭敬).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功)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21. 西方 - 서방극락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西方)에 가서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어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去此不遠)'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니라.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바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속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隨其心淨 則佛淨土)'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願生)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으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이 없는 돈법(無生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로 보게 하리니 사군은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色身)은 성(城)이요 눈·귀·코·혀·몸(眼耳鼻舌身)은 곧 성의 문(門)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佛是自性作),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자비(慈悲)는 곧 관음(觀音)이요 희사(喜捨)는 세지(勢至)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人我相)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용이며 진로(塵勞)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三毒)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十善)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자기 마음의 땅 위에 깨달은 성품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眼耳鼻舌身意)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欲界)의 모든 여섯 하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라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22. 修行 - 수행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道俗)을 위하여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어 가지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한 곳에 있음과 다름이 없느니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頓敎)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수는구나.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자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無餘)에 이르는 도다.
보리(菩提)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 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더라도
일체가 다 방해되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 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 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正行)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 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邪見)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正見)는 세간을 벗어남(出世間)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23. 行化 - 교화를 행하심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어 가지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천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지거라. 혜능은 조계산(曹溪山)으로 돌아가리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리라(同見佛性)."
함께 앉아 있던 관료·스님·속인들이 육조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치심이여! 옛적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오'한 다음 한꺼번에 다 흩어졌다.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韶州)·광주(廣州)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 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이 삼오천 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宗旨)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였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 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頓敎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24. 頓修 - 단박에 닦음
세상 사람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南能北秀)'라고 하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神秀)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玉泉寺)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시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딘즉 '점(漸)'이요, 견해가 빠른즉 '돈(頓)'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疾直指路)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志誠)스님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서 혜능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왔다 하지 말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스님과 나의 견해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첫째로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卽契本心).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결합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렷다!"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니옵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정·혜(戒定惠)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惡)을 짓지 않는 것을 계(戒)라고 하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惠)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고 합니다. 신수스님의 말씀은 그렇거니와, 큰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 다르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스님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無非)이 자성의 계(戒)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無亂)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癡)이 자성의 혜(惠)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 생각마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을 단박 닦으라(自性頓修).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은 예배하고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25. 佛行 - 부처님의 행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어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正法之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正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一佛乘)을 듣고서 이불승(二佛乘)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空寂)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리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開示悟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자리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一乘)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三乘)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心行) <법화경>을 굴리고(轉法華),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구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轉經)이니라."
법달은 한 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佛)."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26. 參請 - 예배하고 법을 물음
그 무렵 지상(智常)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원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四乘)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中乘)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大乘)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은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神會)라고 하였으며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앉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依法修行).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 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 머물렀다.
27. 對法 - 상대되는 법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法海), 지성(志誠), 법달(法達), 지상(智常), 지통(志通), 지철(志徹), 지도(志道), 법진(法珍), 법여(法如), 신회(神會) 등을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열 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 곳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삼과(三科)의 법문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性相)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 마저 없게 하라.
삼과법문(三科法門)이란 음(蔭). 계(界). 입(入)이다. 음(蔭)은 오음(五陰)이요, 계(界)는 십팔계(十八界)요, 입(入)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어떤 것을 오음(五陰)이라고 하는가?
색음(色陰)·수음(受蔭)·상음(相蔭)·행음(行蔭)·식음(識蔭)이니라.
어떤 것을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가?
육진(六塵)·육문(六門)·육식(六識)이니라.
어떤 것을 십이입(十二入)이라고 하는가?
바깥의 육진(六塵)과 안의 육문(六門)이니라.
어떤 것을 육진(六塵)이라고 하는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니라.
어떤 것을 육문(六門)이라고 하는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이니라.
법의 성품(法性)이 육식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과 육문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육은 십팔이니라(3*6=18).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 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對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相對)요,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라.
논란하는 말과 직언 하는 말의 대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 두 가지가 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 상대이며,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상대이며,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空)이 상대이며,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상대이며, 맑음(淸)과 흐림(濁)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老)과 젊음(少)이 상대이며, 큼(大)과 작음(少)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高)과 낮음(下)이 상대이니라.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 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邪) 바름(正)이 상대요, 어리석음(癡)과 지혜(惠)가 상대이며, 미련함(愚)과 슬기로움(智)이 상대요, 어지러움(亂)과 선정(定)이 상대이며, 계(戒)와 잘못됨(非)이 상대이며, 곧음(直)과 굽음(曲)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險)과 평탄함(平)이 상대이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상대이며, 사랑(慈)과 해침(害)이 상대이며, 기쁨(喜)과 성냄(嗔)이 상대이며, 버림(捨)과 아낌( )이 상대이며,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이 상대이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함(常)과 덧없음(無常)이 상대이며,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상대이며,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며, 본체(體)와 작용(用)이 상대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상대이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 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데 열 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 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相離相),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에서 공을 떠나나니(空離空) 공(空)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相)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은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을 말하나 바른 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열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니라.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으니라."
열 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마치고 <단경>을 베껴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28. 眞假 - 참됨과 거짓
대사께서는 선천(先天) 이년 팔월 삼일에 돌아가셨다. 칠월 팔 일에 문인들을 불러 고별하시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國恩寺)에 탑을 만들고 선천 이년 칠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리라."
법해(法海)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아니하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신회는 도리어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그렇다면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내가 모른다고 근심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들 마침내 너희에게 고별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니라.
너희들은 다 앉거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노니,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이다. 너희들이 다 외어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라."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假)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假)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유정(有情)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무정(無情)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不動行)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나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도다.
능히 모양(相)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씀(用)이니라.
모든 도를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用意)
대승(大乘)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존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도(道)의 뜻을 잃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29. 傳偈 - 게송을 전함
대중스님들은 다 듣고 대사의 뜻을 알았으며,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아니하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대중이 일시에 예배하니, 곧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무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상좌인 법해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큰스님이시여, 큰스님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게 부촉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전하여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내가 떠난 뒤 이십여 년에 삿된 법이 요란하여 나의 종지(宗旨)를 혼란케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종지를 세우리니, 이것이 곧 나의 바른 법이다.
그러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믿지 않을진대는 내가 선대의 다섯 분 조사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신 게송들을 외어 주리라.
만약 제일조 달마조사의 게송의 뜻에 의거하면 곧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외리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제일조 달마화상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노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제이조 혜가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삼조 승찬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사조 도신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도다.
제오조 홍인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유정(有情)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無情) 씨앗도 없나니(無種)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육조 혜능의 게송에 말한다.
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도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첫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心地)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五葉)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는도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육조스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밖으로 나온 문인들은 생각하였으니,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실 것임을 알았다.
30. 傳統 - 법을 전한 계통
그 뒤, 육조스님께서는 팔월 초삼일에 이르러 공양 끝에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차례를 따라 앉아라. 내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법해가 여쭈었다.
"이 돈교법(頓敎法)의 전수는 옛부터 지금까지 몇 대입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은 일곱 부처님으로부터 전수되었으니, 석가모니불은 그 일곱째이시다.
대가섭은 제팔, 아난은 제구,
말전지는 제십, 상나화수는 제십일
우바국다는 제십이, 제다가는 제십삼,
불타난제는 제십사, 불타밀다는 제십오,
협비구는 제십육, 부나사는 제십칠,
마명은 제십팔, 비라장자는 제십구,
용수는 제이십, 가나제바는 제이십일,
라후라는 제이십이, 승가나제는 제이십삼,
승가야사는 제이십사, 구마라타는 제이십오,
사야타는 제이십육, 바수반다는 제이십칠,
마나라는 제이십팔, 학륵나는 제이십구,
사자비구는 제삼십, 사나바사는 제삼십일,
우바굴은 제삼십이, 승가라는 제삼십삼,
수바밀다는 제삼십사,
남천축국 왕자 셋째 아들 보리달마는 제삼십오,
당나라 스님 혜가는 제삼십육, 승찬은 제삼십칠,
도신은 제삼십팔, 홍인은 제삼십구,
나 혜능이 지금 법을 받은 것은 제 사십대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서로서로 전수하여 모름지기 의지하고 믿어서 종지를 잃지 말라."
31. 眞佛 - 참 부처님
법해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뒷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들어라. 뒷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도 보지 못하리라.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게 하려고 다시 '참 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를 남기리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이는 곧 보느니라."
"법해는 듣기를 바라오며 대대로 유전하여 세세생생에 끊어지지 않게 하리이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들어라. 내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여 주리라.
만약 뒷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離衆生無佛心).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해탈송(自性眞佛解脫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으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 부처를 보리라. 너희에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게송을 말씀하셨다.
진여(眞如)의 깨끗한 성품(淨性)이 참 부처(眞佛)요
삿된 견해의 삼독(三毒)이 곧 참 마군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가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化身)과 보신(報身)과 정신(淨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쁹는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한 씨앗이니라.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頓敎)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32. 滅道 - 멸도
대사께서 게송을 말씀해 마치시고 드디어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며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살아 있던 날과 한가지로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탄연히 적정하면 이것이 큰 도이니라.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춘추는 일흔 여섯이었다.
33. 後記 - 후기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니 같이 배운 도제(道 )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悟眞) 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만약 이 법을 부촉할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음이로다.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워야만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덕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출처: www.bulsang.com
.....................................................................................................................................
고우큰스님의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신문(www.beopbo.com) 전재
강의 1회
행복하게 사는 방법 일러준 것이 곧 ‘단경’
기사등록일 [2006년 06월 07일 수요일]
법보신문은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이 조계종 중앙신도회 산하 인재개발원 초청으로 1년간 진행하는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강의 내용을 격주로 연재한다.
연재되는 내용은 매월 한차례씩 이어지는 강의를 녹취해 요약한 것이며,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했다.
「법보신문」은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한 ‘육조단경 대강좌’ 지상중계를 통해 보다 많은 독자 여러분이 『육조단경』의 정수를 만나기 바란다. 편집자
요즘 세상이 바쁘다고 하는데, 이렇게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의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실제 우리가 육조 혜능 스님의 단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기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 「단경」 강의는 대부분 불자들이 듣겠지만, 혹 불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금강경」에도 나와 있지만, “불교가 불교 아니기 때문에 불교다.” “부처님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라고 한다. 불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육조(638~713) 스님께서 존재 실상을 깨닫고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단경」이다. 여기에는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 민족도 초월하고, 다 초월한다. 그래서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육조 스님께서 이것을 몸으로 체험하시고 밝혀놓은 책이다. 또 우리 존재에 대해 체험한 내용이 우리를 무한히 행복하게 해준다. 여기에 「육조단경」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과학자들도 이 우주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우리 존재의 실상을 체험하고 알게 된 것이 굉장히 중요한 데, 그것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또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에게는 없고 그냥 어떤 평범한 사실을 규명한 것이라면 오늘날 불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선(禪) 특히 「육조단경」 같은 책들이 1,300년이나 전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육조 스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를 자유롭게하고 평화롭게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이 지구상에 전쟁은 없어진다. 누구하고 다툼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 갈등도 이 내용을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하루아침에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이 「육조단경」 강의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물론 세상 어느 나라에나 대립 갈등하고 싸우는 일이 다 있다. 또 어느 사회에도 있고, 어느 가정에도 있다. 더 축소해보면 개인도 자기와 자기가 싸운다.
그런데 나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심한 것 같다.
조선조 500년 동안 자기와 뜻이 맞지 않다고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일도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목을 쳤다고 한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일제 36년을 핍박받았다. 그만큼 했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해방 이후에 또, 남북이 갈렸다. 그리고 또, 남쪽에서는 어땠는가?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나면 오순도순 잘 살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갈등하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것을 만들어 갈등할 것인가!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불교에 있고, 이 「육조단경」에 있다.
공장을 몇 십 개, 몇 백 개 지어 생산하는 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노사 관계를 예로 들면, 1년에 노-사 대립으로 몇 조원 손해가 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육조단경」에 담겨 있는 핵심사상만 배운다면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그런 노-사가 서로 존중하고 위하는 인간다운 관계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면 파업과 같은 소모적인 갈등이 필요 없어진다. 손해 본 몇 조원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나는 이 선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시민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 우리 사회 전반의 갈등, 대립을 없애는데 앞장서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켜 보고 싶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선 센터’를 세웠으면 하는데 아직 인연이 안되고 있다. 어쨌든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국제적인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데 이 선이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다. 이 「단경」 강의를 통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마음을 낸 것이다.
이 「육조단경」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갠지스강 모래수로 비유한다.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많은 보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부처님 말씀 한 마디를 이해하고 남에게 전해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자기 몸을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나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한마디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한테 전해주는 그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듯이 이 「단경」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지금 우리 한국에는 12,000명의 스님들이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수행자들이 전문가가 못 되고 엉거주춤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뭐냐?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공부는 재가-출가가 없다. 나중에 나오지만, 육조 스님은 이 형상만 가지고 재가-출가를 나누지 않고 마음으로 나눴다. 부처님 법을 믿고 그 가치를 알고 생활하면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출가다. 하지만 형상은 머리를 깎고 가사도 입었지만 부처님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출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재가자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뜻도 있다.
그래서 이 「단경」 공부도 전문가가 하는 공부라 생각하지 말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1. 머리말(序言)
혜능(惠能) 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니 그때 그 법좌 아래에는 비구, 비구니, 도교인, 속인이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刺史)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생 등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할 때, 자사가 문인(門人) 법해(法海)로 하여금 기록을 모아 널리 유행케 하여 후대(後代)에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서로 전해주게 함이라. 의지하고 믿는 바가 있어 받들고 계승하기 위해서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
이 「단경」을 설한 대범사는 중국 광동성 소관시에 있는 절로, 현재는 ‘대감사(大鑑寺)’라 한다. 대범사를 대감사로 고친 것은 당나라 황제가 육조 스님이 입적하자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서언(序言)이란 머리말인데, 「단경」을 설한 이유를 밝혔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뭐냐?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했다.”
이 뜻을 알면, 「단경」을 다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자. 여기에 ‘승니(僧尼)’는 비구, 비구니이고, 도속(道俗)은 도교를 배우는 사람, 또 재가자 1만여 인이 있었고, 유교 선비와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기를 청했다.”
당시 중국에는 기독교가 없었고, 유교, 도교, 불교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뜻이 있다.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육조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왔다는 것이다. 이 「육조단경」을 듣게 되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하는 그 종지를 깨닫게 된다. 그 종지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선은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실제 신부, 수녀님들도 참선을 많이 한다.
「단경」을 설할 당시 소주 지방의 위거라는 관리가 법해 스님에게 내용을 기록해서 먼 후대 사람에게도 이것을 듣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자해서 기록하여 남겨 우리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좋은 뜻이 없었으면 우리도 이 「단경」 법문을 들을 수 없었다.
강의 2회
생활 속 ‘자타일여’ 실천이 곧 ‘상구보리’
육조 스님 시대나 지금이나 존재원리는 ‘마음’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듯 ‘내가 있다’고 집착
그런데 여기에 “종지宗旨를 계승한다” 하는 이 ‘종지’는 우리 존재원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말하는데, 이것이 갠지스강 모래수의 보물보다 더 가치가 있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끊이지 않게 전해지도록 위거라는 분이 법해 스님한테 기록하라 했듯이 육조 스님이 또한 「단경」을 설한 의도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종지(宗旨)’란 무엇이고, ‘마하반야바라밀법’은 무엇이냐?
이것이 우리 존재원리의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먼 얘기 같지만, 지금 내가 얘기하고 여러분들이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존재원리를 말한다.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천년, 만년이 가더라도 이 존재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육조 스님은 600년대 분이고, 지금이 2006년이니까, 1,400년 전에 육조 스님이 깨달은 그 존재원리와 현재 우리가 얘기하고 듣고 있는 그 존재원리가 다르냐? 절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이 존재원리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마음(心)’이라 하기도 하고 법성(法性), 자성(自性)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든 일을 만드는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도 만들고 과학도 만들고, 우리 일상생활에 마음이 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래서 이 존재를 알게 되면 모든 일에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는데, 그 역기능은 영원히 없어지고 순기능만이 지속된다.
중국의 운문 스님은 이것을 “매일 매일 좋은 날”이라 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정말 믿어도 좋다. 아까 갠지스강 모래 비유를 했지만, 그 표현도 부족하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믿지만 나는 부처님 말씀대로 안 하면 더 괴롭다. 좀 과장이 있더라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사회 갈등, 대립, 투쟁, 전쟁 이런 것을 다 해소할 수 있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고,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하게 되면, 거기에 무슨 대립 갈등이 있겠는가!
몇 달 전에 교계 신문에서 달라이라마가 ‘지혜로운 이기심’ 이라 표현한 것을 보았다. 이기심(利己心)이 있으면 괴로움(苦)이 따른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기심을 없애라 한다. 그 분은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되 앞에 ‘지혜로운’이란 말을 넣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지혜로운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는 데까지 ‘굉장히 고심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도 가끔 ‘지혜로운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가 존재원리를 알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원리가 옛날과 지금, 그리고 미래에 달라지는 게 아니다. 똑같다. 사회의 나쁜 현상 또한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립 갈등은 비슷하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공부를 나는 운동이라 하고 싶다.
이 공부를 확대해서 운동이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굉장히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 거창하게 나라까지 안 가더라도 자기 개인, 가정만이라도 그렇게 하다보면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견을 세우면 포교가 수행, 수행이 포교다.
이 종지를 배워서 생활화하는 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이다. 또 사회화 하는 것을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한다. 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거창한 말은 아니다. 이것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면 상구보리다. 이웃에 한 사람이라도 불교 얘기를 해주면 그것이 사회화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이나 육조 스님이 발견한 이 존재원리를 아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을 체험해서 아는 것을 ‘깨달았다(覺)’하고 그냥 이해하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이 「육조단경」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간다면 정말 그 이상 더 좋은 일은 없다. 깨닫지 못해도 정견을 갖춰 생활에 100%는 적용하기 어려워도 1%부터 시작해서 10%만이라도 적용해 보면 부처님 법대로 안 하면 오히려 더 괴롭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질문이 있는데 “사회가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하면 손해 보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 절대로 아니다. 조금만 노력해 보라.
노력하면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참 좋구나!”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런 느낌이 오면 보람과 행복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것을 이웃사람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한다. 또 얘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이 되고, 또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도 굉장하다.
그래서 포교가 수행이고, 수행이 포교다. 이 「육조단경」 공부하는 사람은 일당백이 되어 자기 수행도 열심히 하면서 이것을 사회화 하는 데에도 같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공부다.
다음에 스승을 찾아간다. 육조 스님이 「단경」을 설하는 목적이 종지를 전하여 후대까지 계승 발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 종지의 가치를 어떻게 얻었느냐? 스승을 찾아가서 공부해야 한다.
*************************************
2. 스승을 찾아감(尋師)
혜능 대사가 말했다.
“선지식善知識아, 마음을 깨끗이 해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하니까, ‘더럽다-깨끗하다’ 하는 깨끗한 것을 생각한다. 여기에 말하는 깨끗한 것은 ‘마하반야바라밀법’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기심(利己心) 일으킨 것이 무엇인가? ‘나’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다-너다’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 이 양변을 여읜 것이 깨끗한 마음이다.
**************************************
이제부터 법(法)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 전에 어느 젊은 스님이 다녀갔는데 미얀마에 가서 1년 가까이 공부하고 와서 그곳의 공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곳은 스님 열 분을 만나든지 백 분을 만나 ‘불교가 뭡니까?’ 하고 물으면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삼법인(三法印)’을 가지고 똑같이 대답한단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스님을 만나 “불교가 뭡니까?” 물으면 대답이 다 각각이다.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럽다. 또,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남방은 통일되어 불교를 얘기하니까, 1년 안되어 배운다. 배우고 나서 알려 하는 것보다 수행에 집중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많은 생각을 했다. 다양한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 하나를 놓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금강경」의 표현이 다르고, 「화엄경」, 「법화경」 표현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중국에는 엄청나게 종파가 많았다.
선(禪)에서는 또 다르다. 이 선이라는 것은 다른 종파와 분명 브랜드가 다르다. 이것은 차차 이야기 하자. 불교의 다양함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다양한 것을 이해하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다. 그런데 단점도 있다. 단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일생을 다 보낸다.
초기, 중관, 유식, 천태, 화엄, 정토, 선을 다 배우려면 평생을 해도 불가능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나부터 통일하자고 해서 ‘중도연기(中道緣起)’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중도연기(中道緣起)로 말하고 있다.
다양한 것을 한 꾸러미 꿰듯이 회통한 분이 원효 스님이다. 그래서 원효 스님을 ‘회통불교’라 한다. 그런데 거기까지 능력이 안되는 분은 이 불교, 저 불교 하니까 자꾸 대립하는 걸로 오해한다. 또 실제 갈등도 한다. 육조 스님도 그것이 안타까워 “다투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라고 하셨다.
여기에 ‘마하반야바라밀’의 ‘마하’는 ‘크다(大)’고, ‘반야’는 ‘지혜’다. ‘바라밀’은 ‘큰 지혜로 저 언덕을 건너간다’ 라는 말이다. 이 ‘마하’는 ‘깨끗한 마음이 허공과 같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이 뭐냐 하면, ‘너다-나다’가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무상(無常), 무아(無我)라 했는데 여기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라” 이것도 무아(無我)를 얘기한 것이다. “내가 없다.” 이게 핵심이다.
「반야심경」 맨 앞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있다. 오온은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행위(行)ㆍ의식(識)을 말한다. 물질(色)은 이 몸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형상 지어진 것이다. 그 오온 중에 느낌(受)ㆍ생각(想)ㆍ행위(行)ㆍ의식(識)이 정신이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난다(五蘊皆空 度一切苦厄).” 했듯이 괴로움의 원인은 “내가 있다”는 데 있다. 처음 듣는 분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중도연기를 간단히 설명하면, 어두운 곳을 가다가 새끼줄이 길게 있으면, 이기심 때문에 착각을 한다. 긴 것이 뱀이라는 경험에 의해서, 새끼줄로 보지 않고 뱀으로 본다. 뱀이라 보면 그때부터는 ‘저 뱀한테 물리면 죽는다.’는 공포심도 일어나고, ‘저 놈을 잡아야 한다’ 하고 망상을 계속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새끼줄이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뱀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괴로움과 재앙이 벌어진다. 그러면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고뇌하다가 밝은 불빛으로 새끼줄을 비춰보면 어떻게 되나? 정말 황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새끼줄을 뱀이라 착각하는 것이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면 우리 존재원리를 왜 무아(無我)라 하느냐? 이렇게 듣고 보고 하는데, 왔다 갔다 하는데 왜 무아냐?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무아다.
어쨌든 우리가 새끼줄을 뱀이라고 착각해서 공포심도 일어났고, 증오심도 일어나 여러 가지로 고뇌했는데 불빛을 비춰보니까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다. 이것이 깨치는 것이다. 그러면 「반야심경」에 “일체의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롭고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갈등, 대립, 그리고 전쟁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 무아를 보기 위해, 뱀이라 착각한 것을 새끼줄로 보기 위해 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공부의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늘 결론은 불교는 무아다. 왜 무아냐? 연기이기 때문에 무아다. 그러면 연기는 무엇이냐? 지금 현대 물리학에서도 거의 90% 부처님 말씀한 그 연기를 설명을 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그것을 설명하겠다.
강의 3회
“수행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입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스승을 찾아가는 목적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죠.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불교는 이 ‘마하반야바라밀법’에 다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이 경이 267자라 하는데 핵심 되는 말이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우리 마음 속에 마하반야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육조단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뿐입니다. 육조스님이 이렇게 저렇게 달리해서 설명해도 내용은 ‘오온개공’입니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마하반야’를 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그걸 못 느끼고 행위도 못하느냐. 이게 문제인데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행위 할 때는 당신도 괴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깨닫고 난 후에 자기가 없다는 무아, 오온개공에서 행복하게 사는 바라밀법이 나왔습니다. 무아를 안 지혜로 세상을 보면서 생활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할 때 ‘깨끗하다’의 반대가 ‘더럽다’이니,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렇게 이해하지요. 이것은 일반 상식의 이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끗함은 ‘깨끗하다-더럽다’는 그 양변을 초월한 깨끗함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면 벌써 마하반야바라밀법이 우리 마음속에 성취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면 ‘더럽다-깨끗하다’, ‘나다-너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한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또한 이것이 ‘오온개공’과도 같은 말입니다.
대사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한참 침묵하시다가 이에 말하되,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혜능스님이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이렇게 말하고 당신도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여기에 깨끗하다도 앞의 설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법회에서 법문 듣기 전에 잠깐 입정하면서 죽비를 치지요. 바로 그 죽비 치는 것과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침묵하는 것과 같습니다. 침묵할 때 내 마음 속에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하는 분별심을 비우라는 거지요. 그게 죽비 친 뜻입니다.
비우고 이 강의를 듣게 되면 훨씬 공부가 잘 되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죽비치는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무슨 의례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할 때 이 조용한 것도, 시끄럽다에 상대되는 고요함이 아니고 ‘시끄럽다-조용하다’는 양변을 초월해서 마음을 그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단경」은 깨달은 분이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의미가 깊습니다.
‘선지식(善知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부 많이 해서 도통한 스님을 선지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법문 들으러 온 분들께 선지식이라 했습니다.
왜 선지식이라 했느냐? 우리 존재원리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지식아’ 한 겁니다. 격려하는 차원도 있지만, 도인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다 도인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견해가 다르다고 외도들이 와서 공격하고 욕하고 심지어 부처님 얼굴에 침까지 뱉는 모욕을 주어도 화를 안 냅니다. 화 안 내는 이유는 그 사람도 존재원리가 부처님이다, 본래 부처인데 착각해서 부처님 행위를 못 하고 상대편을 비난하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 착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움이 안 일어나고 오히려 연민하기 시작합니다. 깔보는 아니라 동등하게 부처라는 것을 알고 그 선상에서 연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 안내는 제일 좋은 방법이 이 길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깨끗하다, 조용하다, 또 오온개공(五蘊皆空), 응무소주(應無所住) 이걸 알면, 이 마음의 존재원리를 이해하면 인간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습니다.
나는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세계가 도깨비 방망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이 사회나 남북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어요. 정치문제도 다 풀립니다. 차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활화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의식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그것을 실천하고 싶은 생각이 나고, 실천해보면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중에는 안 하면 더 괴로워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 범양이다. 좌천해서 영남의 신주로 옮겨 살다가
*********************************************************
범양은 지금 북경 부근인데 범양 노씨가 우리로 말하면 명문 집안이었답니다. 그런데, 좌천되어 지금 홍콩 가까운 광주 부근에 유배되어 현지 소수 민족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지금 전해지는 육조스님 진신상을 보면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어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혜능이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노모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 가난해서 시장에 나무를 팔고 살았다.
***************************************************************
혜능스님은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겁니다. 가난했으니 교육도 못 받았습니다. 당시는 유교사회니까 효가 삶의 최고 덕목이었는데, 효행은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해서 시장에 팔아 어머니 방 따뜻하게 해드리고 생활도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를 모셨겠지요.
******************************************************************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니 혜능이 숙소까지 나무를 날라다 주고 돈을 받아 나오려다가 「금강경」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이 한번 들음에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깨달아
*****************************************************************
여기에 깨달았다는 것은 확철대오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연히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덕이본 육조단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깨달음은 확철대오가 아닙니다.
************************************************************
그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손님이 답하기를 “내가 기주 황매현 동쪽 빙무산의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니 지금 그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 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바로 견성하여 부처가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듣고 보았다.”
***************************************************************
지금도 황매현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10㎞ 정도 올라가면 5조스님이 계셨던 오조사가 있어요. 그 산을 빙무산이라 하고 동쪽에 오조사가 있고, 서쪽에 정각사라는 절이 4조 도신스님이 주석한 절이죠. 그 황매현 빙무산 오조사에 오조 홍인스님이 주석하셨습니다.
오조스님께서 「금강경」을 굉장히 권했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조 도신스님까지는 달마로부터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전해 왔는데 오조스님부터 금강경으로 바뀝니다. 「금강경」은 내가 경 중에 제일 좋아해서 강의도 하고 열심히 봤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이 발견한 그 존재원리나 이 「육조단경」이나 「백일법문」도 모두 중도연기 하나로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모두 ‘오온개공’이라 표현하는 것은 거의 같습니다.
***********************************************************
혜능이 그 말을 듣고 전생의 업연이 있어 곧 어머니와 인사하고 황매현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였다.
***********************************************************
당신이 확철대오는 못 해도 ‘내가 이 공부에 대한 인연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겁니다.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출가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육조스님이 살아온 내용이나 도인이 되고 나서 고향에 국은사를 세우고 어머니, 아버지를 합장해서 묘를 모셨어요. 지금도 있습니다. 이런 지극한 효성으로 보면, 만일 「금강경」을 안 듣고 못 깨달았으면 목에 칼을 대고 너 출가해라해도 절대 안 갈 분입니다.
금강경을 듣고 의식에 상당한 변화가 생긴 겁니다. 어머니에게 세속적인 효만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각이 바뀝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심히 볼 대목입니다.
흔히 불교 공부를 고행하는 걸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부처님도 고행이 아니라고 했어요. 시각이 조금씩 바뀌면 바뀐 만큼 마음이 밝아지거든요. 밝아지는 것만큼 우리 마음도 행복감도 더 느끼고 즐거움도 더 느낍니다. 불교 수행은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것도 억지로 앉아 있으면 다리도 아프고 고행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뭔가 육조스님과 같이 느끼고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에 대한 가치를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어서 앉아 있으면 절대 그게 고통으로 안 느껴집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걸 어떻게 해, 그 어려운 거 어떻게 해,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보는데 이런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시각만 바뀌면 즐거움으로 공부하면서 생활도 그렇게 하게 됩니다.
강의4회
불성에 남북 없거늘 무엇을 차별하리
“불성에는 귀천도 없고 고하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이것만 알면 정말 편안합니다.스스로 괴로울 때 한번 점검해 보세요. 내가 남하고 무엇인가 비교하고 있지 않는가?”
*********************************************************
오조스님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인데 지금 이 산에 와서 나에게 예배하며, 무엇을 구하는가?”
***********************************************************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죠. 우리가 절에 가면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더러 목적 없이 오는 이가 있어요. 또 절에 가는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분도 많고요.
심지어 ‘아들, 딸 시집가는데 날 잡아주십시오’ 하는 분도 있어요.
여기 오조스님도 그걸 물은 겁니다. “무엇 때문에 찾아 왔느냐?”
육조스님이 살던 신주에서 오조스님이 사신 양자강 황매현까지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덕이본」에는 한 달이 걸렸다고 나오죠. 육조스님이 「금강경」 듣고 확철대오는 아니지만, 이미 지견(知見)이 났고,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긴 상태에서 한 달 동안 걸어왔으니까 그 과정이 그대로 공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차타고 가니까 잘 안 되지요.
당시에는 멀리 선지식을 찾아 걸어가는 과정이 그냥 공부였어요.
******************************************************************
혜능이 답하기를 “저는 영남의 신주 사람입니다. 이렇게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 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
멀리서 온 것은 부처 되는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 부처 되는 법이 마하반야바라밀법이고, 오온개공, 응무소주 이생기심이고 이게 불법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절에 가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복 빌러(祈福) 가는 분도 많지요.
「금강경」에 대해서 조사스님들이 풀이해 놓은 것을 보니까, “기복은 놋그릇 구하는 것이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진금(眞金)을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했어요. 색은 놋그릇이나 금이 비슷하지요. 그렇지만, 금이 더 좋고 가치가 있으니 우리는 기복이 아니라 법을 구해야 합니다.
***************************************************************
오조 홍인스님이 혜능에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
오조스님이 “너는 변방에 사는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되겠느냐?” 하는데, 혜능스님을 떠보는 겁니다.
*******************************************************************
혜능이 답하기를 “사람은 남과 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佛性)은 남과 북이 없습니다.”
******************************************************************
여기에 우리가 존재원리를 알면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에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다. 이 불성을 바로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도 평등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짱’, ‘몸짱’도 필요 없어요. 뚱뚱한 사람, 날씬한 사람 다 평등합니다. 모든 게 다 평등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티코를 타더라도 벤츠 타는 게 안 부럽고, 지방 대학 다녀도 서울 대학 다니는 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벤츠 탄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니듯이 티코 탄다고 불행한 게 아닙니다. 또 서울 대학 나와서 사회에 진출하면 다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 안 나와도 행복한 사람 얼마든지 있어요. 명문 대학에 가서 적성과 소질에 맞지 않는 것 억지로 배워서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자기 소질을 살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나는 “불성은 남북이 없다” 이 말이 굉장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사람들이 이 말의 가치를 이해만 한다면 자기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돈 벌고 출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요. 그 노력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지위도 높아지고 돈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요. 정말 인간답게 살아 보겠다고 출세하고 돈 벌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남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출세하고 돈 벌려는 분은 아무리 높이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더라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목적이고 거기에 필요한 수단이 돈벌이입니다. 만약 돈벌이와 출세가 목적이 되면, 이것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해치고 부정 비리도 저지르지요. 그런 사람은 유혹에도 약하고 또,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뉴스에 자주 보지만,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이것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것 때문에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직장 생활하는 그 자체가 가치있고 재미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직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질을 발휘해서 직장과 사회에 기여하고 그만큼 돈을 벌어 인간답게 사는 것이죠. 우리가 직장 생활하는 것이나 공부 등 일상 생활에서 목적과 수단만 가릴 줄 알아도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반야바라밀” “오온개공”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모르더라도 이 생활에서 목적과 수단만 제대로 구분한다면 개인의 삶이 달라지고,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국가가 달라질 것 같아요.
이 불교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지 수단과 목적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립과 갈등을 줄이면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면서 최소한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다르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
오랑캐라고 하니 나는 오랑캐이고 스님은 아니니 다르지만, 불성은 어찌 차별이 있습니까? 몸은 키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고, 뚱뚱하거나 마른 사람이 있어 다르나 그 불성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 불성(佛性)이 뭐냐? “오온 개공” 하는 그 ‘공(空)’이 불성입니다. 응무소주하는 응무소주 된 상태가 불성이고, 아까 “깨끗한 마음” 하는 그 자리가 불성이고, 또 “고요하게 들으라” 하는 그 자리가 불성입니다. 말을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우리는 왜, 착각하고 있느냐?’ 형상만 보고 불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불성을 보면 ‘아, 이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없다’고 하니까 그냥 허망하고 공허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없다”고 하니까 이것만 구별해 보고 또 이걸 모르는 사람은 있는 것만 있다고 자꾸 고집하고 집착합니다. 실제 우리가 다 보거든요. 없는 것도 아니다는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보는데 있는 것 속에 공이라고 하니까 이게 깨져서 공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컵에 불성이 있어요. 이 마이크에도 불성이 있고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합니다. 오온이 공이다. 오온이 공이라는 것을 알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예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설명하자면,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지요. 그런데 반쪽만 보고 있어요. 그 나머지 반쪽인 불성은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성이 이 형상에서 분리되어 있느냐. 아니에요. 같이 있는 거예요. 이 안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물과 그 존재원리인 불성, 이것을 동시에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별 거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서 못 보는 거예요. 공간이 좀 떨어져 있으면 알텐데 하나로 되어 있으니까 너무 가까워서 못 봐요. 그래서 이것을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 없다고 비유합니다. 거울을 통해서야 내 눈을 보지 그냥 자기 눈이 눈을 볼 수 없지요. 이 불성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 불성에는 귀천도 없고 고하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이것만 알면 정말 편안합니다.
스스로 괴로울 때 한번 점검해 보세요. 내가 남하고 무엇인가 비교하고 있지 않는가? 거의 비교하고 있습니다. 유행도 그래서 생긴 겁니다. 그거 안 입으면 자기가 낙오된다고 생각하니까 남보다 쳐지고 남한테 천대받는다고 생각하니까 유행을 쫓아갑니다.
평등하다는 것을 알면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인종도 극복할 수 있고요. 빈부,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양이라면 그 본질은 불성, 공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컵에 불성하고, 이 마이크에 불성이 각각 있어요. 이것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전체의 불성을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이것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허공 같다.
************************************************************
오조스님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더 묻지 않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
오조 홍인스님이 보니까 갓 출가하러 온 행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대단하지요. 오조스님이 더 이야기하려다가 행자와 툭 터놓고 얘기하면 오래 산 스님들이 텃새하고 해칠까 싶어 가서 일이나 해라. 그 정도면 너가 불교를 이해하는 깊이를 알겠다 그런 것이죠.
************************************************************
그때 혜능은 한 행자의 안내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
스승을 찾아가서 선문답을 하고 방앗간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합니다.
스승 찾아간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강의5회
福에도 고통 따르니 生死 벗어날 수 없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
3.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命偈)
******************************
여기에 육조스님이 행자생활을 끝내고 법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
오조 홍인스님이 하루는 문인(門人)을 다 불러 모이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
혜능행자가 온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조스님께서 천여 명 대중을 다 불러 모읍니다.
**********************************************************************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
세상 사람은 생사의 일이 제일 크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생사는 태어남과 죽음도 포함되지만, 그것보다 일상생활로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안하면 생각이 일어났다-꺼졌다 반복합니다. 이게 속성입니다. 도인이든, 아니든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심으로 일어났다-꺼졌다 하면서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데, 우리 본질인 불성을 깨달으면 똑같이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만, 그것이 전혀 우리한테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인도에서는 한 찰나라고 하면 1/30초라고 하는데요. 한 찰나 간에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이 수십 번 한답니다. 이것이 뭐와 같는가 하면, 문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떠다니는 먼지와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면, 그 자체가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 결과가 되는데 우리가 그 본질, 불성 자리, 오온개공 자리를 보게 되면, 그것이 전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별심이 안 일어나야 도인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는데 잘못 이해한 겁니다. 하나는 세탁이 되어 깨끗한 데에서 생멸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는 오염이 되어 분별하고 있는 차이입니다. 그럼, 오염이 진짜 오염이냐. 그것도 착각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을 꿈 깨는 것에 비유합니다. 꿈 깨는 것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생사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생각을 일으켰다가 거두어들였다, 일으켰다 거두어 들였다 하는 그것을 생사로 보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이 안에도 태어나고 죽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죽음까지 가니까, 그러나, 죽음만 생사하는 게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 일어났다가 또 사그러졌다 하는 그 마음을 통틀어 생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생사의 일이 굉장히 큰데 복만 지어서 되겠느냐? 그 복 가지고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복에도 항상 고통이 따라 다닌다는 말입니다.
법을 공부해서 “오온개공”을 알고 법을 체험하면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다.
*********************************************************************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스스로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조로 삼을 것이니 어서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
대중을 다 불러놓고 복으로는 태어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 ‘본래 성품의 반야지혜’는 마하반야를 말하지요. 그 마하반야로 게송을 하나 지어 오너라. 만일 그 게송이 깨달음의 게송이라면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대조사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일천여 명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공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다 알 수 없으니까, 대중의 공부 능력을 게송으로 공모하는 방식이지요.
당시 대중에서 신수스님이 제일 빼어난 분이었어요. 그런데 육조스님과 같이 행자도 뛰어난 견해를 가진 분이 있으니 대중의 공부 견해를 게송으로 받아 당신의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물색하는 것입니다.
*********************************************************
문인들이 지시를 받고 각자 방으로 돌아와서 서로 말하기를 ‘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뜻으로 게송을 지어 스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상좌가 교수사이니, 법을 얻은 후에 자연히 의지하면 되니까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짓지 않았다.
**********************************************************
神秀신수상좌가 당시에 오조 홍인스님 밑에서는 교수사로 제일 공부가 많이 되어 가르치고 있었어요. 지금 총림의 유나(維那)로 방장을 보좌하여 대중을 통솔하던 분이 자타가 공인하는 신수스님이 있으니까 우리는 게를 지어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스님이 게송을 지어 바치고 법도 얻을 테니 우리는 신수스님한테 의지하면 된다. 대중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 때에 오조스님 방 앞에 세 칸의 회랑이 있어 그 회랑 벽에 ‘능가 변상도’와 오조스님이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유행시켜 기념하고자 화인 노진에게 벽을 살피게 하여 다음날 시작하려 했다.
******************************************************************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오조스님이 ‘금강경’만 읽으면 견성성불 한다 하시고 벽화는 ‘능가경 변상도’를 그린다고 했지요. 변상도(變相圖)는 경의 특색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금강경’ 그림을 그리면 맞는데 ‘능가경’을 그리라 했어요. 조금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
4. 신수(神秀)
******************
신수(606~706)스님은 스승인 오조 홍인(594~674)스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됩니다.
신수스님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많이 한 분입니다. 굉장히 유식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키도 8척이나 되었다고 해요. 반면에 육조스님은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았어요. 신수스님은 여러 모로 능력을 갖춘 분이었지만, 육조스님에 비하여 불성 보는 것에는 뒤떨어 졌던가 봅니다.
이 불성 자리를 보면 외형적 조건이나 능력 같은 것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수스님보다는 혜능스님이 도를 깨치고 난 후에 훨씬 더 행복하게 산 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성 보는 것이 능력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신수스님은 생각하되, ‘모든 사람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신수스님이 교수사로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이 게를 안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를 바치지 않으면 오조스님께서 어떻게 나의 견해가 깊고 얕음을 알 것인가?
게를 안 바치면 오조스님이 자기의 심중을 볼 수 없지요?
내가 오조스님께 마음의 게송을 지어 뜻을 밝혀 법을 구하는 것은 옳거니와, 조사의 지위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함은 오히려 범부의 마음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으려 함과 같다.
게송을 지어 오조스님께 바쳐 법을 구하는 것은 옳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그 자리를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수스님은 겸손한 분 같아요. 법으로 후계를 이어야지 다른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신분상승 하려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렇게 신분 상승해도 실제로 이 마음을 모르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행복하지 않아요. 나쁜 방법으로 얻으면, 그만큼 마음이 불안한 것이 당연하지요. 왜냐, 자기도 그렇게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다른 사람도 그런 식으로 내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침묵하며 생각하고 생각하되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게를 쓰려고 하니 자신은 없고, 안 쓰려고 하니 난감하고, 대중은 전부 자기 얼굴만 쳐다보는 것 같아 정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요.
밤이 삼경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니 남쪽 회랑 중간 벽에 마음의 게를 써놓고 법을 구해 보아야겠다.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사람 안 보는 밤중에 벽에다 써놓자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없지요. 이래선 안됩니다.
만약 오조스님이 게를 보시고 이 게가 합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면 내가 전생 업장이 두터워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
이 게를 보고 “견성 못한 게다.” 하시면, 성인의 뜻을 내가 이해 못한 것이니 육조가 되려는 것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신수스님이 상당히 사리 판단이 분명한 분입니다. 나중에 육조스님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 분은 낙양, 장안 쪽에서 3대 황제 동안 국사(國師)를 합니다. 그때 측천무후한테 육조스님이 도인이니까 그 분을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한 적도 있습니다. 육조스님은 측천무후의 초청에 병을 핑계대고 안 갔어요.
강의6회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보지 못한다”
오조스님이 말하기를, “너가 지은 이 게는 조그마한 견해는 이루었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안에 들지는 못했다. 범부가 이 게를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나, 이 견해로 만약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려 하면 얻지 못한다.”
신수스님이 밤 삼경에 촛불을 들고 남쪽 회랑 중간 벽에 게송을 쓰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게송은 이러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明鏡)과 같으니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중국의 옛날 명경(明鏡)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옛날 명경처럼 세우면 세워지고 접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안 보이고 그런 거라면 이 비유가 참 좋아요. “마음이 명경대와 같다.” 마음이 그렇잖아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면서) 이렇게 내면 작용하고 (손을 돌려 손등을 보이면서) 거두어 들이면 접어 들어가는 것과 같잖아요.
중국 명경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비유가 잘 되었다고 볼 수가 있어요. 명경대가 일어났다-꺼졌다,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의 비유로는 잘 되었다고 보는데 여기에 문제되는 대목이 뭐냐?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勤拂拭)”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문제냐?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불교를 “뗏목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저 언덕에 건너가면 뗏목은 건너는 수단이니, 저 언덕에서는 뗏목이 필요 없지요.
이 ‘육조단경’ 보는 것도 뗏목과 같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저 언덕에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단경’을 보는 것은 저 언덕,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지요.
그리고 ‘능엄경’에는 손가락과 달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지시하는 표현이죠.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라 하는 건데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죠.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하는 것은 손가락, 뗏목이에요. 오조 홍인스님은 무엇을 요구했느냐? 깨달은 내용을 요구한 것이죠. 즉 손가락이 아닌 달을 요구한 겁니다. 그런데 신수스님은 손가락을 이야기한 거예요. 오조 스님이 요구한 것에 충족이 안 된 겁니다.
그러나 신수스님의 이 게송은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인과법(因果法)은 충분히 됩니다. 우리가 “선인선과 악인악과” 이 가르침대로 삶을 살면 선업을 닦아가는 것이죠. 실제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은 인과 법문을 참 많이 하시거든요. 부처님도 인과 법문을 참 많이 했고요. ‘아함경’은 거의 인과법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과법도 지키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그래서 그게 수용되는 거예요.
우리 한국 불교는 현대에 동산스님이나 효봉스님 계실 때에 신도들에게 인과법문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인과법문 잘한 분 중에 석암스님이라는 언변이 뛰어나신 분이 계셨는데, 인과 법문만 해도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고 그랬습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이 정도만 되어도 인과법문은 훨씬 넘습니다.
여기에 잠깐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달라이라마 스님도 법에 대한 법문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법문을 주로 하는데 그것은 티벳 불교의 특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티벳 불교는 끝없이 보살행을 하면서 성불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불교입니다.
그래서 내가 달라이라마 스님에게 직접 물은 적이 있어요. “달라이라마들은 끝없이 윤회를 거듭 하는데 그것이 불교의 열반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분 얘기가 “부처님이 끝없이 보살행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달라이라마도 그렇게 윤회를 하면서 보살행을 하고 성불을 향해서 하고 있다” 하더라고요. 이것이 티벳 불교의 특징입니다.
티벳 불교와는 달리 한국 불교는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인과법문 보다도 법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합니다. 많은 시간을 수행해서 성불로 가는 게 아니고 선종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단번에 바로 여래의 경지에 오른다. 그래서 꿈 깨는 것이다. 꿈 깨는 것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그것을 위한 법문을 많이 합니다. 요즘 선원장 스님들이 법문하는 걸 보니까 선 법문을 많이 하더군요.
여기에 보면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이 대목이 바로 손가락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손가락, 뗏목에 해당한 법문이지 “오온 개공” 하는 법문은 아닙니다. 육조스님의 법문에 비해서는 굉장히 질적으로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인가를 못 받은 겁니다.
신수 상좌가 이 게송을 쓰고 방에 돌아와 누우니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드디어 노공봉을 불러 남쪽 회랑에 능가변상도를 그리게 하려다가 문득 이 게를 보고 읽기를 마치고, 공봉에게 돈 3만냥을 주어 멀리 온 것을 깊이 위로하면서 변상도는 그리지 않겠다 하고 돌려 보냈다.
신수상좌가 게송을 벽에다가 써고 방에 돌아오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 이튿날 아침에 오조스님이 그림 그리는 노공봉을 불러 회랑에다 능가 변상도하고 오조스님까지 법을 전해온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밤 사이에 한 게송이 쓰여 있거든요. 오조스님은 이걸 누가 쓴 건지 모르지요. 그 게송을 읽어보고는 깨달음의 게송은 아니지만 이것이 변상도와 오조스님 법 전하는 그림을 그려 놓는 것보다 더 좋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노 공봉에게 멀리 돈 3만냥을 위로금으로 주고 돌려 보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바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하니 이 게를 남겨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해서 이것을 의지해 수행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보다 못하다.
이 게를 남겨 이것을 외우면서 수행하게 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림 그리는 것보다 낫다 그런 겁니다.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사람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림보다는 법을 의지해서 공부하는 것이 큰 이익이 있다
곧 오조스님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서 게송 앞에 향을 사르게 하니, 대중이 보고는 다 존경하는 마음을 내었다. 오조스님께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게를 외우면 바야흐로 견성을 할 것이니, 이것을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문인들이 모두 외우고 존경심을 내어 함께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오조스님께서 이 게송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만한 게송이 나오지 않으니 이것을 남겨 공부하게 하는 방편을 쓰십니다.
오조스님께서 드디어 신수상좌를 방으로 불러 묻기를, “네가 게를 지었느냐?
오조스님이 당신 방으로 신수스님을 불러서 그 게를 지었는지 확인합니다.
만약, 네가 지었으면 응당 내 법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나의 법을 얻으리라’ 하는 대목 때문에 이 게가 손가락이 아니고 달이 아니겠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여기는 그냥 격려하는 뜻에서 얘기한 것이지 법을 바로 봤으니 법을 얻는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지었으나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앞에 법으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육조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범부들이 하는 것과 같다. 그랬지요. 그 뜻입니다. 실은 신수가 지었으나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조그마한 소견이지만 그 소견에 의해서 법을 구하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서 보아 주십시오. 제자가 조그마한 지혜라도 있어서 대의를 알았습니까?”
자기가 작은 지혜로서 부처님의 존재원리 우리의 존래원리 대의를 알았습니까?
오조스님이 말하기를, “너가 지은 이 게는 조그마한 견해는 이루었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안에 들지는 못했다.
문 안에 못 들어오고 문 밖에 있다.
범부가 이 게를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나, 이 견해로 만약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려 하면 얻지 못한다.
이 게 가지고는 견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게를 의지해서 수행하면 인과, 즉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닦는 그런 효과는 있다.
모름지기 문 안에 들어야만 스스로 본성을 봄이니, 네가 가서 며칠 동안 생각하여 다시 한 게를 지어 나에게 보여라. 만일 문 안에 들어 스스로 본성을 보면, 마땅히 너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리라.”
너는 견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문 안에 들지 못하고 문 밖이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무상정각을 얻을 수 없으니, 돌아가서 하루나 이틀 사이에 다시 한번 생각해서 새로 게를 지어오면 그 게가 대의를 깨달으면 너한테 가사와 법을 부촉하겠다.
신수상좌가 돌아가 며칠이 지났으나 게송을 짓지 못했다.
오조스님이 대중한테 게를 받아 후계자를 정하려고 했는데 신수스님이 게를 바치기는 바쳤는데 제대로 안 된 게를 바쳤지요.
다음은 혜능스님이 제대로 된 게를 바쳐 법을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강의 7회
' 본래무일물’ 알면 모든 갈등 절로 소멸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
5. 게송을 바침(呈偈)
*************************
혜능 스님은 8개월 동안 방아 찧고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게송을 짓습니다. 이제 혜능 스님이 게송을 바쳐 오조 스님으로부터 법을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가면서 이 게송을 외우고 있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한 동자가 지나가면서 신수 스님이 지은 게송을 외우는데 혜능 스님은 그것이 성품도 보지 못했고, 대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 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모르는가?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어나고 죽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을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육대(六代)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선뜻 남쪽 복도 벽에 상(相)이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바로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남짓 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에도 가 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워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 하였다.
***********************************************************
혜능 스님이 오조 스님 방 앞에 가지 않은 것은 오조 스님과 가까이 지내면 대중들이 자신을 위해(危害)할까 싶어 그걸 알고 일부러 오조 스님 방을 멀리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에 예배하였고,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어떤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의(大意)를 알았다.
****************************************************************
알다시피 혜능 스님은 글자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기 「단경」에 보면, 「금강경」, 「열반경」을 많이 인용한 걸로 봐서는 글자는 몰랐다 하더라도, 그 분이 마음 성품자리를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경을 읽거나 어록을 읽으면 자기가 깨달은 내용하고 그 대목하고 서로 계합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암기가 되어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이걸 보고 학자들 중에는 혜능 스님을 ‘무식한 분이 아니다’, ‘글을 아는 분이다’, ‘잘못 전해졌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글을 모른다고 해서 중요한 대목을 모르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혜능 스님 다른 사람보고 신수 스님의 게송을 읽어달라고 해서 그 게송을 듣고 나서 깨달음에서 나온 게송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어요.
***********************************************************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고 자기 성품을 보아야만(識心見性) 바로 큰 뜻을 깨닫느니라.
**************************************************************
혜능 스님은 신수 스님의 게송이 성품 그 자리를 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게송을 지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서쪽 벽상에 대신 쓰게 하여 스스로 본심을 드러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할 부분은 “본래 마음(本心)을 알지 못하면 법을 외우더라도 이익이 없다.” 입니다. ‘본래 마음을 안다’는 것에는 깨달음의 얘기도 물론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보다도 ‘본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고 공부해야 이익이 있지 ‘우리가 중생이다’, ‘닦아서 증득해야 된다’, ‘닦아서 부처가 되어야 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뭔가 닦을 것이 있고, 수행할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이해하고 공부를 하면 공부에 큰 이익은 없다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고 하면 항상 손가락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설사 우리가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본래 부처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공부를 해야 이익이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심을 모르면 법을 외우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
혜능 스님의 이 게송은 어찌 보면 신수 스님이 지은 게송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이 게송을 깨달음의 게송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직 혜능 스님이 확철대오 상태는 아닙니다. 오조 스님 방에 들어가서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거기에서 확철대오를 하게 되지 아직은 80 ~ 90% 가까이 간 것입니다.
“밝은 거울에 받침이 없다.” 여기 ‘대가 없다’는 말에 대한 해석을 정확히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접으면 밝은 거울이 사라지고 열면 대가 거울을 받쳐줘서 거울이 나타나지요. 그렇게 해석하면 어느 정도 이 대에 대한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깨닫거나 깨닫지 않거나 본래 존재는 성불해 있다. 대를 펴는 것도 거울이 하고 접는 것도 거울이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을 해 봅니다. 우리의 번뇌가 팔만사천 가지이면 지혜도 팔만사천 가지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굉장히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까? 강의를 들으러 앉아 있으면서도 생각은 집에 왔다 갔다 하지요.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을 하지만 밝은 거울과 대가 접혔을 때를 정혜(定慧)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암(明暗)이라고 하기도 하고 살활(殺活)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깨달으면 말할 것도 없고 못 깨달았더라도 불교를 이해하면 우리의 의식구조가 굉장히 단순하다는 것을 압니다. 의식구조뿐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인들은 성격이나 마음 쓰는 것이 참 단순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그런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사장되고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수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굉장히 단순화시키는 겁니다.
*****************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
*******************
돈황본에는 이렇게 나오는데 「조당집」이나 다른 판본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나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본래무일물’이라고 하면 조금 선(禪)적인 표현이 되는데,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 라고 하니 교(敎)적인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래무일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이나 ‘불성이 항상 청정하다’라는 말은 같아요. 왜 청정하다고 하느냐 하면 ‘더럽다-깨끗하다’의 상대적인 청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정은 ‘더럽다-깨끗하다’를 초월한 양변을 여읜 청정입니다. 그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본래무일물’이나 ‘청정하다’는 그 자리는 ‘너다-나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인종도 ‘검다-희다’, 종교도 ‘네 종교-내 종교’, 민족도 ‘네 민족-내 민족’ 등 여러 가지 상대되는 해석을 하며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그런 양변을 모두 초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자리를 이해하고 보기 위해서 「육조단경」도 보고, 출가도 하고, 불교도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형상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쪽만 보고 있는 겁니다. 본래 청정한 자리, 즉 본래무일물이라는 자리를 봐야 온전히 다 보는 겁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모든 갈등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반쪽만 보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 부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형을 ‘부시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에서 데모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로인해 잃게 되는 비용 또한 엄청납니다.
본래무일물의 그 자리, 항상 청정한 그 자리를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여기에서 육조 스님께서 ‘본래무일물’의 그 자리를 알고서 이 게송을 지었다는 사실은 굉장합니다. 「육조단경」을 요약하면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불교를 얘기하라고 하면 ‘본래무일물’ 이 한마디입니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공부하고 어록을 공부하는 것도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래도 ‘부처님 말씀에는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절에도 가고, 저 또한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삭발하고 지금 스님으로 사는 겁니다. 안 그러면 머리 깎고 절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지금 계속 이 법문이 나오는데, 이 법문에 전부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항상 청정하니’,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다 똑같은 소리입니다. 그 자리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그런 게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티끌과 먼지를 나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무일물 자리를 알면 티끌과 먼지가 금보다 귀중한 물건으로 바뀝니다.
강의 8회
자기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하게 된다
“지위가 높은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니라. 너는 국민을 괴롭히는 국왕이나 대신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이다.”
우리는 ‘똥은 더럽다’고 ‘금은 귀하다’고 합니다. 상당히 대립되는 물건인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로 그 자리를 깨달으면 금이나 똥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아주 깨끗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혼용하지는 않습니다. 금덩어리를 밖에 두지 않고, 또 똥 덩어리를 귀하다고 해서 옷장 안에 넣어 두지는 않습니다.
각기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쓰면서도 어느 것이 더럽고, 깨끗하고, 귀하고, 천하다 이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알면 사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차이를 초월하면 인위적으로 분배 안 해도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듯이 자연적으로 빈부 차이는 있는 그대로 평등하면서 또 많은 데서 적은 데로 자연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그런 의식으로 전환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다타 장자에게 ‘더 많이 가져도 좋다’ 하신 뜻
부처님 당시 굉장한 부자였던 수다타 장자(長子)가 “부처님이시여, 제 재산이 제가 공부하고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를 체험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더 가져라.” 하셨습니다. 부자인데 더 가져라 합니다. 왜 일까요?
원래 ‘수다타(Sudatt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데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급고독(給孤獨)’ 즉, ‘외롭고 소외된 사람한테 배급을 잘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래무일물’을 모르기 때문에 재산 활용을 못해서 그걸로 인하여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문에 매일 나옵니다. 땅값이 올라서 졸부가 되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수다타 같은 분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기도 도움 되고 남도 도움 되는 이 존재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본래무일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다타 장자에게 “너는 더 가져라.”고 하셨던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이 가지거나 적게 가지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종교 얘기하기가 그렇습니다마는 예수님은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굉장히 부지런한 분입니다. 부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분이 부처님이 아니에요. 살아서 삶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행동하는 분이 부처님이지, 산중에서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분이 부처님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이해심도 많고 굉장히 지혜롭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돕고 남을 돕는 것인지를 너무나 지혜롭게 잘 아는 분이십니다.
**********************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
여기서 다시 이 게송이 나오는데 이것은 〈돈황본〉에 나오니까 할 수 없이 거론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덕이본〉이나 다른 판본에는 이 게송이 없습니다. 내용을 보더라도 앞의 게송만 해도 충분한데 두 번째 나온 이 게송은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내용도 거의 유사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편집을 하면서 뒤의 게송에 대한 필요성을 안 느꼈기 때문에 뺀 것 같기도 합니다.
******************************************************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
이렇게 게송 두 개를 벽에 썼습니다. 서쪽 벽에 썼는데 절 내에 있는 대중들이 혜능 스님이 능히 이 게송을 짓는 것을 보고는 다들 괴이하게 여깁니다.
일자무식(一字無識)이고 이름도 제대로 불려 지지 않았던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묵묵히 방아만 찧던 혜능 스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안 가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게송을 지어내니까 대중들이 잘 알지는 못해도 신수 스님보다 낫다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이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겼던 겁니다.
*********************************************************************
오조 스님께서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바로 큰 뜻을 잘 알고 있음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이 게송도 또한 아직 요달(了達)하지 못하였다!” 하셨다.
**********************************************************************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의 게송을 보고 손가락을 벗어난 달의 입장에서 게송을 지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오조 스님은 깨달음의 게송을 지은 사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법을 전해 육조(六祖)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신수 스님이나 다른 스님이 이 게송을 지었다면 오조 스님도 반가워하고 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도 하고 법을 전해줬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법의 전수를 놓고 스님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이 대중들로부터 위해(危害)를 받을까 굉장히 조심합니다.
여기에서도 대의를 잘 알았으나 대중들이 알까 두려워서, 혜능을 위해할까 싶어서 오조 스님은 대중들에게 ‘이 게송도 또한 아직 요달하지 못했다’ 즉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런 걸로 봐서 그 당시에도 스님들이 견성 못 했으니까, 사람이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패거리도 있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가 지금과 조금 다른 점은 법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닌 법 때문에 그랬다고 하니까 조금은 낫습니다. 그러나 법 때문에 했든 명예나 돈 때문에 했든 다투는 마음을 갖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본래무일물’ 그 자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니 직업에는 빈부귀천이 없다.
제가 어디 가면 이 얘기를 잘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 똥 푸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계급사회였으니까, 모두가 똥 푸는 일을 하는 사람을 천민으로 여겼고, 스스로도 자기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해서 자기 학대를 많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하고, 바른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을 한 번 만나 뵈었으면 했는데, 스스로 자기 직업이 부끄럽고 옷에 냄새도 나고 해서 부처님을 뵐 생각을 못했어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 똥 푸는 사람이 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는데, 이 분이 부처님이 계시는 모습을 보자 스스로 부끄러워 다른 길로 피해갔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 날 그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이 분이 피해가는 것을 보시고는 그 길을 따라 갑니다. 그래서 이 똥 푸는 일을 하시는 분이 부처님이 자기를 따라 오시는 것을 아시게 되었죠. 그래서 이 분이 부처님께 가셔서 “부처님이시여! 왜 저를 괴롭히십니까? 저는 부끄러워 부처님 근처에 가지 않으려 하는데 왜 부처님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자신을 천민이라고 학대하는데, 천민이라는 것도 힘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도이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귀천이 있었겠느냐.” “그러면 제 직업이 천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천하지 않느니라.
아무리 지위가 높은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니라. 너는 남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기꺼이 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열심히 돈도 벌고 있으니까, 너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너는 국민을 괴롭히는 국왕이나 대신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하게 된다.
우리도 ‘본래무일물’ 자리를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을 굉장히 사랑하게 됩니다. 불교는 어찌 보면 자기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기를 희생하는 종교다.” 라고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만에요.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도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남도 학대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사랑 안 하면 절대 남한테 사랑받지 못합니다.
저도 제 자신을 굉장히 학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대 때문에 젊어서 출가 전에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얼마 전에 신도님의 권유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폐가 70내지 60퍼센트 밖에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해요.
저는 폐병에 걸린 이유를 출가한 이후에 알았습니다. ‘나를 학대해서 폐병이 걸렸구나!’ 그 후로부터는 제 스스로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굉장히 저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어찌 보면 불교는 자기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절대 희생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강의 9회
‘몰록’ 깨친 순간부터가 꿈 아닌 진정한 현실
‘금강경’-‘응무소주이생기심’ 결국 같은 이야기
욕심으로 필요없는 면적 키우면 싸움 절로 생겨
*********************************************************
6. 법을 받음(受法)
오조 스님이 밤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하자,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言下)에 바로 깨달았다. 그 밤에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다.
************************************************************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을 보호하려고 했지요. 밤 삼경이면 다 잘 때인데, 대중 몰래 혜능을 방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줍니다.
그런데 『덕이본』을 보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돈황본』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들어간 것이죠. 그렇지만, 『금강경』 전체 내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하는 그 자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입니다. 그 자리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가 바로 그 자리를 표현해서 『금강경』 전체가 이 내용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나 같은 얘기입니다. 후대로 오면서 구체적으로 그 대목을 넣은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아는 것이 가장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오는 그런 자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옷 잘 입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몸짱, 얼짱 되는 게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이해하면 그 분은 몸짱, 얼짱 되려고 따로 노력 안 해도 충분히 그렇게 됩니다.
왜냐? 자기 생활에 욕심으로 인해서 필요 없이 면적 키우는 일 안 합니다. 적당히 먹고 사고하고 행위해서 스트레스 받아 얼굴에 기미가 낀다든지 그런 일 없어요. 화장 안 해도 굉장히 예뻐집니다. 그래서 화장 하는 방법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고입니다. 화장 값 아끼려면 응무소주(應無所住,)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확실히 이해하셔요.
****************************************************************
“오조스님이 『금강경』을 설해 주니까 혜능스님이 한번 듣고 언하에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았다.”
****************************************************************
이것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한마디 말에 바로 깨달았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점수(漸修)인가? 천만에요. 점수와 돈오(頓悟)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모르고 수행하는 것은 아무리 100년, 200년을 닦더라도 그것은 착각 속에서, 꿈속에서 닦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닦았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그럼, 꿈속이 아닌 깨어 있는 현실은 언제부터냐? 바로 깨닫는 순간부터 꿈에서 깨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몰록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몰록 깨닫기 위해서 그냥 우연히 되는 게 아니고 꿈속이지만, 착각 속이지만 준비를 해온 겁니다.
예를 들어 육조 스님이 시장에서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얘기를 듣고, 뭔가 거기에서 깨달음이 생기거든요.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지만 그것을 알고 보니까, 어머니에게 하는 효(孝)보다 더 큰 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이죠. 불교의 깨달음 세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있었을 것이고, 저 홍콩 근처 광주라는 곳에서 양자강 기슭까지 가는데, 기록에 한 달이라고 나옵니다. 그 걸어가는 과정에 이 분은 누구보다도 공부를 많이 한 겁니다. 착각 세계지만 이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8개월 방아를 찧으면서 그 준비가 깊이 들어가서 『금강경』 한 번 더 읽는 소리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린 겁니다.
깨친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단박에 깨친다고 돈오(頓悟), 또는 돈법(頓法)이라고 합니다. 몰록 깨달았다, 몰록은 당장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8개월, 또 1개월 또 준비해온 과정 그것은 닦은 게 아닌가? 물론 닦았지요. 닦았으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왜? 착각 속에서 닦았기 때문에, 그래서 몰록 그런 것이지, 이 몰록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또, 몰록 깨친다고 아무 준비 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그렇게 깨쳤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점점 닦아가는 수행이 있지만, 그건 아직 꿈속이고 착각 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로 인정을 안 합니다.
‘몰록 깨쳤다’ 오해 많아
그럼 인정은 언제부터냐? 깨닫는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그게 꿈 깬 세계니까, 그게 진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 듣고 보고 하면서 절에 불교 믿는다고 수십 년 왔다 갔다 했는데 전부 꿈속에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꿈이다. 그런데 우리는 꿈인 줄 모르고 현실 중에 현실이라고 그 꿈을 집착해서 정말로 머리가 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하고 많이 싸운다고 해요.
이것을 알게 되면 싸움을 왜 합니까?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게 되지요. 내가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그 싸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존심 건드리는 게 제일 싸움을 크게 한다고 해요. 서로 인정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남남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도 그렇고 뭐든지 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저 사람 돕는 일이 나를 돕는 것이고, 나를 돕는 일이 저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 무슨 유토피아 같은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100%는 경험 못 했는데 그래도 몇 % 경험을 해보니까 그 말이 맞아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요. 이해관계로 싸우는 마음으로, 대립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결하려면 더 괴로워요. 그런데 부처님 말씀한대로 사고하고 생각하면서 인간관계도 맺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즐거워요. 안 깨달아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절대 고행이 아니다. 하면 하는 것만큼 즐거움이 나고 행복감이 생깁니다. 절대 고행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은 못 하더라도 이 체험이 100%가 있고 1%가 있고 2%가 있지 않습니까? 그 체험하는 %만큼 즐겁고 행복감을 느낀다.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여기에 언하(言下)에 몰록 깨친다. 그냥 된 게 아니라 준비가 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깊이 느끼고 믿는 사람은 그 기간이 짧을 것이고, 그 믿음이 약한 사람은 길 것이다. 그 차이이지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존재원리는 같다, 그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 믿음의 차이에 의해서 빠르고 늦음이 있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원리는 빠른 사람이나 늦은 사람이나 같다.
그리고 이것을 믿고 조금이라도 실천하게 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재미가 있습니다. 세속에서 이 원리를 알면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요. 이게 굉장한 겁니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그 일을 즐겁게 합니다. 즐겁게 하면 열심히 하고 깊이 있게 하고 그러다 보면 전문가가 되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보수도 따라오고 명예도 따라옵니다. 보수, 명예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한 가지가 해결됩니다. 뭐냐? 보수, 명예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분의 인격도 같이 형성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른이 없지 않습니까, 학계나 정치계나. 종교계에도 어른이 없어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인정 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장차 자라면 인격자가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직업 가지려는 목적이 돈입니다. 그런 한은 절대로 인격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방금 제가 말한 대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지, 돈을 추구해서는 인격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유스럽고 참 좋습니다. 좋은데 이걸 극복 못 하면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망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완성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불교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민주주의, 불교 통할때 완성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전부 돈이에요. 이래서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격자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부르기를 옆집 강아지 부르듯 합니다. 대통령 존경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나라에서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 부정하고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성세대 부정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성세대라도 과거도 보고 현재도 보고 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라서 우리도 변해서 포교하는 방법, 공부하는 방법도 변하고, 기성세대에서 잘못된 점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가 답습해온 그 길을 와서는 안 된다 변화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이 사회에 인격자가 없다는 거 정말로 불행한 일이에요.
돈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직업도 갖고 사회활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 사회가 정말로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가 완성되어 가려면 불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하고 민주주의하고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 법하고 180도로 어긋나게 제도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돈에 있다는 이것은 정말로 고쳐야 합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고는 전쟁, 갈등, 대립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전부 아까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보시면 정확하게 진단하신 겁니다. 부처님 말씀이 2,500년 전 일이지만 육조스님은 600년대니까 1,4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현실에 너무나 필요합니다.
강의 10회
대승 핵심은 定과 慧…말 달라도 내용은 하나
선지식 타령말고 법에 대한 가치 먼저 알아야
법통으로 다퉈도 다툼은 진정한 불교 아니다
*******************************************************
6. 법을 받음(受法)
곧 오조 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며 말씀하셨다.
“너는 육대 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 신표를 삼는다. 대대로 받들어 서로 전함에 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되 마땅히 스스로 깨닫게 하라.”
********************************************************
오조 스님이 깨닫도록 법(法)을 쓰시기는 했지만, 육조 스님이 그만큼 신심이나 여러 가지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선지식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공부 못하는 것이 선지식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전혀 안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100% 맞는 소리도 아닙니다. 자기도 준비해야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준비하면 선지식을 못 만났더라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산 스님이란 분이 “내 본래 면목이 뭐꼬?” “내 본래 면목이 뭐꼬?” 화두하고 다녔거든요. 어느 시장을 지나는데 사람 둘이 피가 나게 싸우다가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화해할 때 악수하면서 “이 사람아 자네 볼 면목이 없네” 했어요. 그런데 “내 본래 면목이 뭐꼬?” 화두 하던 분이 “면목이 없네” 하는 소리에 깨쳐 버립니다. 우리가 준비만 되면 도처에 선지식이 있습니다. 저 뒤에 가면 내 안에 있는 선지식을 찾아라, 내 밖에 있는 선지식은 내 안에 있는 선지식을 찾는데 도움을 줄뿐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지식 타령 하지 말고 법에 대한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 가치를 알아야 공부할 거 아닙니까, 가치 없는 일을 누가 하겠어요.
스님들이나 재가자들이 공부 안 되는 것도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가치만 알면 공부가 저절로 됩니다. 귀중한 일이니까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가치를 10원 짜리나 500원 짜리로 알면 공부 안 합니다. 이 가치가 1조원 하면 그 사람은 열심히 합니다. 10원이나 500원 짜리 가치로 알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짜들이 단위가 더 높더라고요. 이게 문제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몰록 깨닫는다고 하니까,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라 하거든요.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참선할 때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을 삼요소라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손가락이에요. 그 뒤에 중요한 달의 말이 있어요.
“그렇게 갖춰서 용맹정진하고 장자불와(長坐不臥) 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이 달의 말을 가지고 뜬 구름 잡는 소리다.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것이 허망한 소리가 아닙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은 뗏목입니다. 노를 저으면서 배 멀미를 해서 구역질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쩔쩔매면서 강기슭에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소리는 그 멀미하고 쩔쩔 매는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다 저 언덕으로 건너 주는 말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리를 뜬 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가짜 돈을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
오조 스님이 또 말하기를, “혜능아, 예로부터 법을 전할 때에는 목숨이 실낱과 같으니,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다. 너는 속히 떠나거라.”
************************************************************************
이런 대목을 보면 나도 마음이 안 좋아요. 도를 통했으면 그 스님을 존경하여 모시고 같이 공부하려고 마음먹어야지, 오조 스님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하셨어요. 그런데 여기는 법을 가지고 다투니까 좋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법 때문에 싸우는 것도 싸움이니까, 싸우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서로 다투면 불교가 아니다”는 말이 뒤에도 나옵니다. 그래서 법으로 다투든지 명예로 다투든지 다투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 삼경에 떠나려 하니 오조 스님이 몸소 혜능을 구강역까지 전송했는데, 바로 그 때 오조 스님이 지시하기를, “너는 가서 노력하여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설하지 말라.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다. 뒤에 널리 교화해서 미혹한 사람을 잘 이끌어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달음과 다름이 없으리라.”
혜능은 곧 하직 인사를 마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
여기서 미혹한 사람을 잘 인도해서 마음을 깨치게 하면 네가 깨달은 내용이나 그때에 깨달은 내용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부처님이 2,500년 전에 깨달은 것이나 지금 우리가 깨달으면 그 깨달은 내용은 같습니다. 이 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죠.
***************************************
그래서 “하직 인사를 마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
어떤 기록에 보면 육조 혜능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은둔한 곳이 광주 부근 해주와 사회입니다. 은둔기간이 16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39세에 지금 광주(廣州)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출가 수계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늦게 출가한 것이죠.
****************************************************************
두 달 반 만에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 수백 인이 따라와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중간에 다 돌아가고, 오직 한 스님이 있었으니 성은 진씨,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해서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와 범행하고자 하였다.
곧 혜능이 가사를 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이렇게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가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혜명에게 법을 전하니, 혜명이 문득 듣고 말끝(言下)에 마음이 열렸다. 혜능이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
대유령은 광주(廣州) 부근입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가면 삼도(三道)봉이 있듯이 대유령도 광동성과 다른 두 성의 경계에 있는 고개입니다.
육조 스님은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그 배후에 수백 명이 가사를 뺏고 자기를 해치려고 따라오는 줄 몰랐어요. 수백 명이 오다가 중간에 모두 돌아갔다, 그런데 한 사람만 남았어요. 성은 진씨(陳氏)고 이름은 혜명(惠明)이다.
덕이본(德異本)을 보면 이 상황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쫓아와서 가사를 뺏으려고 하니까 혜능 행자가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놓고 숲 속에 숨습니다. 혜명이 가서 그 발우를 드니까 안 들려요. 그때서야 두려운 생각이 들어 행자한테 ‘내가 의발을 뺏으러 온 게 아니고 법을 얻으러 왔습니다’ 라고 해서 혜능 스님이 법을 설해줬다.
“악(惡)도 생각하지 말고 선(善)도 생각 안 할 때 너의 본래 면목이 어떠하냐?” 이렇게 물었을 때 혜명이 그 말에 깨달았다 하지요. 거기에 해석을 붙이면 ‘악도 생각하지 마라’ 한 것은 가사를 뺏으러 올 때는 나쁜 마음으로 온 거고, 또 그 후에 발우가 안 들리니까 겁이 나서 발우를 뺏으러 온 게 아니고 법을 얻으러 왔다면서 좋은 마음으로 바뀐 거지요.
그래서 나쁜 마음-좋은 마음 둘 다 안 일으킬 때 네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 거기에서 깨달았다는 것인데 돈황본에는 그 대목이 없습니다. 덕이본은 상당히 법(法)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각색을 한 것 같아요.
****************
7. 정·혜(定慧)
****************
앞에서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나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것이 정(定)이고, “이생기심(而生其心)” 하는 것이 혜(慧)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왔다 갔다 하는 이 존재원리가 몸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고 정·혜 두 개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게 사는데 실제 따지고 보면 정·혜 밖에 없어요. 의식도 그렇고 이 몸, 컵, 마이크, 건물 전부 정·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초기불교에서는 “현상이 있든 없든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써 존재한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그래서 존재 = 연기 = 법 = 여래 = 또 존재 그래서 본래 부처라는 것이죠. 전부 정·혜로 되어 있습니다. 연기 현상이 정·혜입니다. 중도가 정·혜이고 말은 다른데 내용은 하나입니다.
미얀마에 가서 불교가 뭡니까? 물으면 백 스님, 천 스님한테 묻더라도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삼법인(三法印)으로 설명한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정·혜 둘 뿐입니다. 요약하면,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니까 “색이 공이고 공은 색이다” 하는 소리가 바로 이거예요. 색은 혜이고 공은 정입니다.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것을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내용은 같은데 지금 제가 얘기한 것도 수가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복잡하고 다양하니까 이것의 장점보다도 단점이 부각되어서 우리나라 스님한테 불교가 뭡니까? 하고 열 사람에게 물으면 열 사람 불교가 다 다릅니다. 백 사람에게 물으면 백 가지 불교가 나와요. 이게 단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장점으로 나타나면 백 사람이 얘기하든 천 가지, 만 가지로 얘기하든 정·혜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양하게 이해하고 또 깊이 이해해서 그것을 체험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대승불교의 장점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장점을 버리고 단점만 드러나서 듣는 스님들마다 천 가지 만 가지 불교가 따로 따로 얘기하니까 신도님들이 혼란이 와서 평생 불교 아는데 세월을 다 보내요. 미얀마에서는 열 사람, 백 사람 같은 얘기를 하니까 불교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답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뭘 하느냐 수행을 한답니다.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쪽은 단순한 걸 장점으로 살려서 불교 목적대로 잘 가고 있는데 우리는 장점은 없어지고 단점만 부각되어서 본래 목적대로 못 가고 제자리걸음이에요. 〈계속〉
강의 11회
“나·너 초월한 그 자리가 정토이며 극락”
법에 두 가지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면 정혜가 평등하지 않고,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다.
***************
7. 정·혜(定慧)
***************
여기에 제일 먼저 정(定)과 혜(慧)가 나옵니다. 정과 혜가 나오는데 이 자체가 우리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듣고 보고 계시는 게 정혜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혜는 작용하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시죠? 보고 계시죠? 듣고 계시죠? 지금 정신 작용도 하고 육체 작용도 하는 것을 혜(慧)라 하고, 작용하고 있는 그 근본 체(體)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아울러서 우리는 사고도 하고 행동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육조 스님이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보시면 됩니다.
*****************************************************************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와 도교인, 재가자들과 여러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聖人)이 전하는 바이고,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들어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
이 가르침은 정혜에 대한 것이죠. 듣고 보고 움직이는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이지 혜능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성인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존재원리를 이해하고 이 세상을 살면 갈등이나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 존재원리를 모르고 착각합니다.
어떻게 착각하느냐? 겉모습 형상만 보고 본질은 못 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듣고 보고 하는 그 존재원리의 반쪽만 보고 다른 반쪽은 못 봅니다. 반쪽만 보고 내가 있다고 착각하여 서로 내가 옳다고 매일 서로 싸웁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싸웁니다. 국가 간에도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원리를 반쪽이 아니고 전체를 보면 모든 다른 것들이 평등하여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며 싸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해서 듣기를 마치고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여기에는 육조 스님의 간절한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하는데 이걸 백지같이 깨끗이 한다, 또 때 묻은 옷을 세탁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반쪽만 보던 것을 나머지 반쪽까지 보게 되면 색이 공인 줄 알게 됩니다. 공인 줄 아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미혹한 것을 제거해서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내가 ‘반쪽을 마저 보아서 내 존재원리를 바로 봐야 되겠다.’ 이렇게 원력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반쪽을 뭐라고 하느냐? 선(禪)에서는 ‘한 개 반 개’ 라고 합니다. 나를 보라고 하니까 ‘한 개 반 개’ 밖에 못 본 거예요. 그러면 다른 ‘한 개 반 개’를 마저 보아야 그게 진짜 보는 겁니다. 이 ‘한 개 반 개’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 말이야 말로 그 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말이에요. 한 개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한 개이기 때문에 한 개 반 개라고 합니다.
************************************************************************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
선지식아, 깨달음을 만나면 지혜를 이루리라.”
*************************************************************************
‘선지식아!’, 선지식아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을 부르는 겁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세상 사람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한 개 반 개’에서 또 다른 면의 ‘한 개 반 개’ 이걸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본래 다 있으나 마음이 미혹해서, 반쪽 밖에 못 보는 겁니다. 미혹한 게 별 게 아니에요. 두 쪽을 다 봐야 하는데 한 쪽 밖에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두 쪽을 다 보면 반야 지혜가 스스로 나오게 됩니다.
**********************************************************************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반드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體)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用)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는 정이 혜에 있고, 또 정이 되어 있을 때에는 혜가 정에 있느니라.
***********************************************************************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 ‘한 개 반 개’와 또 다른 ‘한 개 반개’로 근본을 삼는다. 이것은 계속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해하실 줄 압니다. 미혹해서 ‘반 개’만 보고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반 개’가 있고 다른 ‘반 개’가 있어 두 개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혜는 보는데 정은 못 보거든요.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것이 그 본체(本體) 자리와 둘이 아니다. 지금 내가 본체(本體)자리라는 말을 쓰는데요. 내가 걸어가고 행위하고 이해하고 다 아는데 그것을 일으키고 있는 그 근본자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둘 아닌 것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못 보고 있는 정(定)은 뭐냐? 우리가 작용하고 있는 그 본체(本體)자리이고, 뿌리이다. 혜(慧)는 뭐냐? 그 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라는 거지요. 혜가 작용이 될 때에는 정은 어떻게 되느냐? 그 뿌리가 작용하는 곳에 같이 있는 거예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시며) 혜 할 때는 정이 혜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손을 돌려 손등을 보이며) 정 할 때는 혜가 정에 있는 겁니다. 손에 손바닥과 손등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존재들이 각각 서로 서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가 되어 갈등과 대립·투쟁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 뿐입니다.
****************************************************************
선지식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평등하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뜻을 짓되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
이 손바닥을 혜라 하면 손등인 정은 여기에 항상 따라 다닙니다. 이 혜하면 정이 항상 뒤에 있고, 정(定)하면 혜가 항상 따라다녀요. 뒤에 있어요. 이게 분리가 된 게 아닙니다. 분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 작용하고 있는 이대로 공이라는 거지요.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면 정혜가 평등하지 않고,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이 선하지 아니하면 정혜가 같지 아니하다. 따로 따로 있다고 보는 사람은 선할 수가 없다 하는 얘기입니다.
분리 안 되어 있는 이 자리, 작용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작용하지 않는 원리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선악이 내 마음 속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절대 선으로 가서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하는 일마다 좋은 일이 됩니다.
그때는 자동적으로 되니까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위해(危害)를 하고 불이익을 주더라도 증오심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연민하면서 해결해 간다는 거예요.
***************************************************************************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다툰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승부심을 끊지 못한다. 승부를 끊지 못하니 도리어 법이라는 아집이 생겨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한다.
***************************************************************************
그런데 세속에서 이해관계로 다투는 것은 또 괜찮은데, 도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견해를 달리 한다고 해서 다투는 일이 더러 있지요. 예를 들어서 돈오돈수다, 점수다 그것은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법을 아는 사람이면 절대로 다툴 수가 없어요.
정이 먼저라든지 혜가 먼저라든지 이렇게 선후를 다투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승부를 못 끊어요.
승부심을 못 끊으니 도리어 법(法)과 아(我)가 생겨서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 합니다.
************************************************************************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이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다.
************************************************************************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뭐냐?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만, 정혜를 바로 이해해서 그렇게 사고하고 행위하는 사람은 일행삼매입니다. 같은 소리입니다. 말만 바꾼 겁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이것이다.’ 곧은 마음(直心)이 뭡니까?
이것이 ‘너다-나다’ ‘있다-없다’ 양변을 여읜 자리입니다. 그래서 곧은 마음은 도량이고 양변을 여읜 그 마음을 가지면 여기가 법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은 마음, ‘너다-나다’를 초월한 마음을 가지면 화장실도 법당이고, 정토고, 곧 극락(極樂)이라는 거예요.
직심을 가지고 화장실에 가면 그곳이 극락이 되는 거예요.
**********************************************************************
마음으로 아첨하고 비뚤어지게 행하고, 입으로는 법이 곧음을 말하지 말라.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
‘너다-나다’ ‘좋아 한다-싫어 한다’ 이런 분별심을 일으키면서 입으로는 그런 것을 떠나라. 이렇게는 얘기하지 말아라. 이것을 행하지 못하면 절에 아무리 다녀도 불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양변을 초월하고 그 정과 혜가 분리 안 되고, 하나로써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집착하는 일도 없고 또 배척할 일도 없어서 자유자재하면서 평상심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강의 12회
정-혜가 하나돼도 소통해 흘러야 道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비로소 통류는 가능하다.
******************************************************************
7. 정혜定慧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法相)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얽매여 앉아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곧은 마음(直心)이라 생각하며, 또 망상을 없애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
여기서 직심은 ‘너다-나다’ 하는 양변을 여의는 것인데, 일행삼매와 법상에 집착한 사람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직심(直心)이라고 오해합니다.
‘좌부동(坐不動)’ 하며 ‘앉아서 동(動)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여기는 것인데, 이런 분들이 꽤나 많습니다. ‘참선하면 무조건 앉아 있어야 참선이다’라고 생각해서 이런 테크닉을 배워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조(馬祖)스님 같은 분도 처음에는 이것을 오해해서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참선 공부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승인 남악회양(南岳懷讓)선사가 그 앞에 가서 기왓장을 쓱쓱 갈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마조스님이 스승에게 “기왓장을 왜 갑니까?” 하니까, 스승이 “거울을 만들려고 간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라고 되물었고,
이에 남악 선사는 “그러면 좌선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느냐?”라고 답하면서
“수레가 안 가면 소를 때려야 하느냐?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소를 때려야 되지요.
우리 사회에 참선하는 분 중에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앉아서 허리 세우고 다리를 어떻게 하고 손과 호흡은 어떻게 하고 그런 테크닉을 배워서 그것을 참선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선사스님들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우리는 각자 마음이 자발적으로 발심하는 방법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게 소를 때리는 겁니다.
***************************************************
“망상을 없애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
망상을 없애어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그러면 무정물(無情物)이 되는 거예요. 망상을 없애는 게 아니고 그 망상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알면 그 망상 자체가 정화(淨化)가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밥 먹고 화장실에 가고,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하셨어요. 부처님은 목석 같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수명이 다해서 가신 분이 아니에요. 길도 걸어가시고 배고프면 밥을 드시고 피곤하면 잠도 주무시고 아프면 약도 드시고 이렇게 했던 분이에요. 우리와 똑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문제는 내면입니다. 우리와 내면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내가 있다’고 집착해서 양변에 떨어져 매일 남과 비교하며 앙앙하면서 살아가는데 부처님은 그게 없었습니다. 작용(作用)을 해도 우리가 하는 작용하고 달라서, 정화가 된 작용을 하십니다. 참 편안하신 분이지요. 굉장히 자유로운 분이고요.
그래서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다.” 이 역시 둘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사를 젖혀놓고 열반이 따로 있고, 번뇌를 없애고 보리가 따로 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는 정화한 것이고, 하나는 정화 못한 것이지 똑같습니다.
우리 주위에 자기와 견해가 다르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어져야 자기가 잘 사는 걸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정말로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반복하고 되풀이 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산다고해서 생각을 똑같이 하는 게 아닙니다.
다양함 속에 서로 서로 인정하면서 대립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동색(同色)이 되자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이것을 성철 스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하고 물은 분명히 다르잖아요. 그런데 또 하나다. 하나면서 둘이다. 우리는 둘이라면 영원히 쪼개 놔야 둘이고 하나라면 진짜 생각도 하나가 되어야 하나인 줄 알아요. 다양한 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그 다양한 속에 우리가 통일된 것이 있거든요. 이것이 제가 자꾸 못 보고 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 속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많이 가진 사람도 없고, 적게 가진 사람도 없고, 정상인도 없고 장애자도 없고 오로지 하나입니다. 하나로 통일된 그게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 것도 생각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道)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으로 오히려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될 것이다.
*********************************************************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通流). 어찌 머물러 있을까?
*********************************************************
통류(通流)가 되어야 합니다.
A라는데도 통류가 되고, B라는데도 통하고 C하고도 통하고, 다 통하는 그런 것이 우리가 못 보는 면이에요. 그게 내가 말한 ‘반 개’라고 하기도 하고 ‘한 개 반 개’라고도 한 것입니다. 다 통해요.
이것이 〈덕이본(德異本)〉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도, 도가 아니다. 그 하나 된 자리에서 통류가 되어야 한다.” 동색(同色)이 되어가지고 전부다 한 가지로 닮으라고 하면 닮을 수도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닮더라도 그것은 도(道)가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가 되어서, 그 하나 된 자리에서 통류가 되어야 된다.
그것이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산은 산이고, 물은 물” 그대로 통일이 되어 있지, 긴 것을 잘라서 작은 것에 붙이고 뚱뚱한 것을 끊어 내서 마른 것에 붙이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마르면 마른대로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뚱뚱한 것하고 마른 것하고, 키 큰 것하고 작은 것하고 같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절대로 뚱뚱하거나 마른 걸로 인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이니까요. 그 뿐 아닙니다. 노동자와 기업가도 존재 원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다투지 않습니다.
이 통류라는 말이 〈돈황본〉 보다 뒤에 나온 〈덕이본〉에 좀 더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저는 〈덕이본〉의 “통류되어야 그것이 진짜 도다.” 하는 대목에서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오늘날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 “통류(通流)”를 알고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도(道)는 모름지기 통류할지니 어찌 도리어 걸리리오.”
**********************************************
뚱뚱한 데 걸리고 마른 데 걸리고, 작은 데 걸리고 키 큰 데 걸리면 도가 아닙니다. 어디든지 다 통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 참으로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니까 자기를 학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것도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고, 비굴한 것도 다 자기를 학대하는 겁니다. 통류, 이걸 알면 참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옛날에는 차별심이 일어나서 한편은 괴롭고 또 다른 한편은 기분이 좋았는데 그게 없어져요. 그러니까 자유자재(自由自在) 하게 됩니다.
*********************************************************************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음은 합당치 않은 것이리라.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不住在)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다.”
*********************************************************************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말고 이렇게 되면 통류가 됩니다. 어디에도 안 통하는 데가 없이 다 통하게 되지요. “만일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다.” 자유하지 못하면 구속이 되지요.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숲 속 가운데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꾸짖음이 옳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숲 속에서 가만히 있으니까, 유마힐이 “앉는 것이 도는 아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다 도이다.” 이렇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쳐 이것으로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집착해서 착각함이 수백 가지이니, 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이것은 간단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소리입니다.
이 정혜가 나오고, 일행삼매가 나오고, 다음에 정혜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
정혜를 등(燈)과 빛이 하나가 되어 등불이라 하듯이 정혜도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인 줄 알면 큰 등도 있고 작은 등도 있고, 색 있는 등도 있고 색 없는 등도 있고, 아름다운 색도 있고 까만색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래도 그 색이 다르고 등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등과 빛은 둘이 아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리해서 보면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형상되어 있는 것을 빛이라 보면, 등은 지금 우리가 못 보고 있습니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이게 빛이라면, 등은 (손의 뒷부분인 손등을 보이며) 이 뒤에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빛과 등이 두 개가 아니며, 앞에서 “한 개 반 개”라 표현한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지 본질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의 13회
형상과 본질 둘 아님을 깨달으면 윤회 ‘끝’
본질 보는 것이
무상(無相)
분별 하지않으면
무념(無念)
정혜 하나된 마음이
무주(無住)
8. 무념(無念) - 생각이 없음
*************************************************************************************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본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
앞에 정혜를 또 다른 말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념입니다.
“선지식아, 법(法)에는 돈점(頓漸)이 없다.” 법에는 빠른 것도 없고 점차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본심(本心)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보는 것이 견성(見性)입니다. 마음은 빠르기도 하고 늦기도 하고 또 선한 마음이기도 하고 악한 마음이기도 한데, 그 본질을 이해하면 성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컵을 들면서)은 형상이지요? 이것도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큰 것을 보든지 작은 것을 보든지 이것을 보면서 본질을 함께 보는 그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을 보면서 본성을 봐야 본성과 이 형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가 정말로 비교 안 하고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형상하고 본질하고 차별이 없어요. 하나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 동안 윤회를 합니다. 내생(來生) 뿐 아니라 금생(今生)도 윤회는 많이 합니다. 열 살 때까지 윤회했다가 스무 살 때, 그리고 80이 될 때까지 윤회하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형상을 통해서 본질을 보면, 형상하고 본질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윤회는 끝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相)에서 모양(相)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
무상으로써 체(體)를 삼는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무상이 뭐냐? 무상이라는 것은 상(相)에서 상(相)을 여의는 것입니다. 본질을 본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상이지, 무상이라고 아무 것도 없는 게 무상이 아니에요.
무념은 도대체 뭐냐? 정혜와 같습니다. 염(念)해서 염(念)하지 아니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다-나다’ 분별하지 않는 거지요. 분별 안 하면서 생각하는 게 무념입니다. 무념이라고 하니까 생각도 없는 게 무념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는 생각입니다. 그게 무념입니다.
또 그 다음에 무주(無住)가 나옵니다. 정혜가 하나 된 상태에서 우리 마음속에 그게 생각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앞의 생각과 지금 생각과 후 생각이 상속(相續)해서 단절함이 없나니,” 지금도 보세요. 앉아서 이 생각 했다가 저 생각 했다가 생각 일으켰다가 꺼졌다 계속 상속하고 있잖아요. 이게 우리 존재원리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유무(有無)에 집착해서 분별심으로 속성 그대로 작용하는 게 우리라면, 부처님은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서 ‘너다-나다’를 초월해서 초월한 그 생각이 그 속성대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 안 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 그것은 내 속성하고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도(道)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고(苦)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속성이에요.
*********************************************************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
사실은 이 대목이 조금 문제입니다. 육조 스님이 설하신 거니까 믿어야 하겠지만, 육조 스님이 설하고 난 후에 각자 단경을 필사하는 과정에 뭔가 잘못되어서 제자인 혜총 국사가 ‘단경이 요즘 변질되어 간다. 그러면 큰 일 난다’ 하고 걱정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대목이 아니었나 싶어요.
법신(法身)이 색신(色身)을 여읜다, 정신이 육체를 떠나간다는 이런 뉘앙스가 풍기는 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실제는 우리의 몸도 법신과 색신이 있어요. 또 이 정신에도 색신과 법신이 있어요.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개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이 안 맞는 거예요.
********************************************************************************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
한 생각이 주(住)해버리면, 염염(念念)이 주(住)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소리예요. 생각 생각 집착하는데 우리는 정말로 좋은 일에도 집착을 하지만 나쁜 일에는 더 집착을 하거든요. 그러면 그 집착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굉장히 구속시켜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병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이 정신하고 육체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무주로서 근본을 삼는다고 한다.”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없는데 무슨 집착을 합니까? 밖으로 집착하는 거, 안으로 집착하는 거,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줄 알면 밖에 있는 그것도 같이 없는 줄 알아요. 그럼 집착을 안 하면 무관심해지고 그런 것이냐,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집착을 안 하게 되면 그 상태를 더 좋게 할 수 있는 지혜도 나오고 더 다정해집니다. 어떤 일이라도 잘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나옵니다. 그게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相)이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自性)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無相)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의는 것이 무상이니,”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무상이니 다만 능히 상을 여의면 자성이 청정함이라.” 이 성품의 체(體)가 아까 내가 말한 본질입니다.
“백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아니해서 생각을 다 제거하지 말아라.” 아까 가만히 있는 게 도(道)라고 집착한 거 그것입니다. 생각마저도 다 없애버리는 거, 그렇게 하면 단멸에 떨어집니다.
*********************************************************************************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法意)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
아까 법신이 색신을 떠난다 하는 것과 같은 비슷한 얘기입니다. 법의(法意)를 쉰다는 말은 법의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못되는 것은 오히려 과하거니와 다시 타인에게 권할까보냐.” 스스로 혼자 잘못 되는 건 괜찮은데 타인에게 또 피해까지 입혀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먼 코끼리가 눈먼 코끼리 떼를 몰고 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 빠져 죽잖아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잘못되는 것도 경계를 해야 되겠지만 그 잘못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도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삼가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이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긴다.
************************************************************************************
“미혹한 사람이 경계상(境界上)에 생각이 있고.” 이 생각이 “나다-너다” 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 위에다가 문득 사견(邪見)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이 우리가 고통을 받아 가는 과정입니다.
한번 잘 보시면 미혹한 사람은 “있다-없다” ‘ 집착하는 사람이지요.
그 미혹한 사람은 경계상에 객관이 되었든 내 마음속에 일어났든 분별심이 있어요.
그 분별심 위에다가, “있다-없다”로 삿된 견해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가지를 치고 또 잎이 피고 이래가지고 일체 진로(塵勞) 속에서 윤회하고 고통받고 하는 그런 수고를 합니다.
강의 14회
“허망한 생각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다.
************************************************
실체가 없고 공(空)이다. 상(相)이 상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무념입니다.
그래서 이 육조스님의 가르침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으로 삼습니다.
만약 무념을 종으로 삼지 않고 유념(有念)을 종으로 삼는다면, 일체 진로 망념(塵勞 妄念)이 나와서 드라마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 진로 망념은 티끌세상에서 일으키는 고통을 말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삿된 생각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드라마를 씁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멋지게 쓰면 되는데 이기심 때문에 멋지게 쓸 수가 없어요. 고통스러운 드라마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념(無念)이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無念)도 또한 세우지 않는다.
***********************************************************************************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 하니까 무념을 고착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 본래 속성에 또 틀리기 시작합니다. 무념에 집착하면 법집(法執·법에 대한 집착)이 됩니다. 법집이 되어서 또 무념이 안 됩니다.
무념도 세우지 않는 그것이 무념이에요. 더 깊이 얘기한다면 우리가 무념 상태에 갔다고 하더라도 그 무념 상태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무념에서 또 작용으로 작용에서 무념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고정 불변되어서 딱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긴 속성대로 무념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맡기면서 사고하고 생활하면 부처님과 같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행복해집니다.
***************************************************************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
‘있다-없다’ 두 생각에 우리가 집착하게 되면 그 티끌세상에서 우리가 수고하는 고통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무념이라고 하는 그 무(無)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있다-없다’로 해서 내가 고통 받고 있는 그것을 여읜 것입니다. 정확하게 무념을 해석한다면, ‘있다-없다’가 없는 생각, ‘생각이 없다’가 아니라 ‘있다-없다’ 하는 것이 없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염(念)자는 무엇을 염이라고 하는가 하면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여본성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를 여읜 그 자리가 진여본성이에요. 진여본성과 두 생각을 여읜 것이 같은 것입니다.
**********************************************************************************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자기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
저 앞에 정혜(定慧)할 때 정은 혜의 체이고, 또 혜는 정의 작용이라는 소리와 똑같아요.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반드시(第一)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다.
책에서는 제일(第一)을 ‘첫째 뜻에 있어서’라고 하는데, 제일(第一)은 부사로 쓰일 때 반드시라고 쓰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라고 쓰면 말이 분명해 집니다.
********************************
반드시 동하지 말지니라.
********************************
동하지 말라는 말은 ‘있다-없다’에 집착해서 분별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
9. 좌선(坐禪)
*************
우리가 참선한다, 좌선한다고 하는데 그럼, 좌선(坐禪)은 뭘까요?
이 좌선도 역시 우리 존재원리를 잘 이해해서 그걸 활용하고 쓰는 사람이 잘 합니다. 앉아 있는 걸 잘하는 것이 꼭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좌선, 참선한다고 해서 앉는 방법을 배우고 화두 드는 법을 가르치면서 그것이 공부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사람들은 목에다 힘도 주고 어깨에 힘도 주고 하는데, 여기 육조 스님께서 좌선을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앉는 방법, 화두 드는 방법을 아는 것은 테크닉에 불과합니다.
***********************************************************************************
선지식들아! 이 법문에서 좌선(坐禪)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著)하지 않으며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다.
*************************************************************************************
여기에서 우리가 마음을 본다는 대목에서의 마음은 작용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허망하더라. 이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면 이 생각 일으켰다 저 생각 일으켰다 별별 생각을 일으키잖아요? 아까 드라마 쓴다고 했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다 사실은 허망하지요. 그것은 허깨비(幻)와 같은 고로 볼 바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마음을 본다고 했는데, 그것은 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허망한 마음은 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본다는 말도 안 맞습니다.
만약 깨끗한 것을 본다고 말하면,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를 초월한 게 진짜 깨끗한 것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자리가 진짜 깨끗한 겁니다.
***********************************************************************************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나 허망한 생각이 진여를 덮은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다.
*************************************************************************************
우리가 본래 깨끗한데 망념이 그 깨끗한 진여를 덮어버려요. 그래서 망념만 없으면 깨끗해져요. 이 망념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 하는 그것이 망념입니다.
그것만 없으면 우리 본래 이 마음은 깨끗해요.
육조 스님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는 그 자리가 바로 그 깨끗한 자리입니다.
************************************************************************************
자기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한 것을 보면 오히려 깨끗하다는 망상(淨妄)이 생긴다.
*************************************************************************************
본래 깨끗한 그 마음은 못 보고 마음을 일으켜서 깨끗하다고 그런 생각을 일으키면, 그 깨끗한 마음에 깨끗한 생각이 하나 더 붙은 거예요. 그러면 깨끗하다는 망상에 우리가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있다-없다’, ‘깨끗하다-더럽다’ 하는 그 상태를 초월해서 그 자리를 본 사람은 이런 오류를 안 일으키는데, 상대적인 깨끗한 것을 지향하는 사람은 깨끗하다는 망상을 하나 더 일으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거기에 또 집착을 많이 해요.
선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법당에서 49재를 한다고 목탁을 치니까, 선방 스님 한 분이 공부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법당에 가서 스님의 목탁을 뺏어 버렸어요. 목탁을 뺏긴 그 스님이 요령으로 염불을 하니까 또 올라가서 요령도 뺏어 버려요. 이런 분은 조용하다는 망상에 집착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스님은 세속 사람이 당신 방에 와서 앉았다가 나가면 바로 청소한다는 거예요. 깨끗하다는 망상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성품을 발현시키는데 장애요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발견한 깨끗한 세계에 대해서 못 깨닫더라도 무엇이 깨끗하다는 것인지, 더럽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깨끗한 것에 집착한 것도 오히려 더러운 거예요. 더러운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정견을 갖추어 가야 공부하는데 방해가 안 되지, 만일 맹신을 해서 깨끗한 데에 집착한 사람이 ‘더럽다-깨끗하다’ 시비하고 있으면 그 사람 언제 공부합니까?
*****************************************************************************
망상은 처소(處所)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허망된 것임을 알라.
*****************************************************************************
망상은 처소가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깨끗한 것을 본다고 한다든지 더러운 것을 본다고 한다든지 그것도 다 망상입니다.
깨끗함은 모양이 없는데 오히려 깨끗하다는 모양을 세워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된다.
깨끗하다는 것은 형상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상을 세워 이것이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견해를 내는 사람은 스스로 본성을 장애해서 도리어 깨끗하다는 경계에 얽매이게 된다. 깨끗하다는데 구속 되어 버려요.
************************************************************************************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不動者)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이는 자성(自性)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
부동자(不動者)가 나왔습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겁니다. 분별을 안 하니까,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아니한다. 왜 허물을 보지 아니하는가 하면 부처님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인데 잠시 착각에 빠져서 허물을 일으키니까 연민을 합니다. 그 상태에 가면 허물을 안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육조 스님도 우리를 ‘선지식’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우리 존재는 선지식으로, 또 본래 부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허물은 착각이고 허구입니다. 그래서 허물을 보지 아니하면 자기 스스로 성품도 움직이지 않아요. 밉다는 생각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또 예쁘다는 생각으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사람을 그냥 무한히 놔두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허물이 있다고 보고 만일 허물을 지적한다면 내 마음 속에서 벌써 증오심도 일어나고 미운 생각도 일어나고 그러면 벌써 동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으로 보고, 고치더라도 부처님으로 일단 보세요.
그러면 감정은 안 일어나거든요. 감정이 안 일어나고 얘기하면 상대편도 기분 좋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이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면 그때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좋은 소리로 안 들립니다.
강의 15회
“일체 경계에 생각 일으키지 않는 것이 坐”
앉아 있는게 좌가 아니고
밖으로 분별심
안 일으키는게 ‘좌’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아니한 것을
보는 것이 ‘선’
*********************************************************************************
미혹한 사람은 자기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진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니(今記汝),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無碍)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
여기에 좌선(坐禪)이 나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있다-없다’에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밖으로 일체 경계에 생각(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며, 그러니까 밖으로 어떤 분별심을 안 일으키는 겁니다.
분별심을 안 일으키려면 어떻게 하는가? 일체 경계가 상(相) 아닌 걸로 보면 분별심을 안 일으킵니다. 앉아 있는 게 좌가 아니고, 밖으로 분별심 안 일으키는 게 좌이고, 또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이 ‘선(禪)’입니다. 그래서 ‘좌선(坐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누워있든 밥을 먹든 누구와 얘기를 하든 거리를 걸어가든 일을 하든 밖으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24시간 좌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1초를 앉았는데도 ‘내가 있다’ 생각하고 내가 좌선을 하니까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좌선 안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10년, 20년 동안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좌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집착하지 아니해 본성이 어지럽지 않으면 좌선입니다.
*****************************************************************************
또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禪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定정이다.
*******************************************************************************
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상(相)을 여읜 것이 선(禪)이고, 상을 상 아닌 걸로 보면 상을 여의는 거지요. 그러면 안으로 어지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정(定)이라 합니다. 그러면 앞에 좌선이나 선정이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무념도 같은 얘기이고 정혜도 같은 얘기예요. 다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다르면 내가 여러 개가 돼요. 내가 하나인데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
만약 밖으로 모양(相)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하다.
************************************************************************************
이 부분이 『덕이본(德異本)』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상이 있으면 안으로 마음이 곧 어지러움이니라. 밖에 상이 있다고 보면 마음이 어지럽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밖으로 상을 여의면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아니하다.” 이렇게 해야 분명히 말이 되는데, 여기에는 “만약 밖으로는 이 상을 상으로 보면서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아니하면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조금 모순이 있습니다. 『덕이본』에는 이렇게 고쳐놨어요.
만일 밖으로 상이 있으면 내 안 마음도 어지러워진다. 상이 있다고 보니까 여기에 분별을 일으키니까 어지러울 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밖으로 상은 있으나 안으로 어지럽지 아니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는 겁니다.
************************************************************************************
만약 경계에 부딪히면 어지러우니 모양을 여의고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여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는 것이 곧 선정(禪定)이라 이름한다.
*************************************************************************************
이것은 설명 안 해도 아실 것 같습니다.
***********************************************************************************
『유마경』에 말하기를 ‘즉시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하였고, 『보살계경』에 말하되, ‘본래 근원인 자기 성품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선지식아, 자기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짓는 것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
『유마경』에서 깨닫는다는 말은 ‘있다-없다’를 초월하는 겁니다. ‘있다-없다’를 초월하게 되면 본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또 『보살계경』에서는 본래 근원자리 자성이 청정함이라 하니, 우리의 본래 그 자리는 청정해요. ‘깨끗하다-더럽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데 우리는 착각을 일으켜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그런 허구에 속아서 우리는 괴로움을 받고 삽니다.
**************
10. 삼신(三身)
**************
이제 삼신, 세 몸이 나오는데 이것도 세 가지 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세 가지 몸이 있어요.
다른 걸로 보시면 안 됩니다.
***********************************************************************************
선지식아, 모두 마땅히 스스로의 몸으로 무상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세 몸의 부처(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게 귀의합니다.’ 하라(이상 세 번 따라 부름).
************************************************************************************
혜능스님이 우리 스스로 삼신불이 있는 것을 보게 해주겠다 그럽니다.
마음속에나 이 색신에나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이 세 가지 부처님이 있어요.
그러면 이 세 가지가 각각 있느냐 하면 이 세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가 어떤 상태에 가면 법신불이라 하고, 어떤 상태에 가면 보신불이라 하고, 어떤 상태에 가면 화신불이라 합니다.
이 세 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은 하나인데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에 보면 이 세 가지를 어떻게 표현 했느냐? 이 형상되어진 것은 즉가(卽假)입니다. 즉할 즉자 거짓 가자. 연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즉가라고 하고, 이 즉가 속에 즉공(卽空)이 있습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다.
또 그것이 두 개가 합해져 있는 것을 즉중(卽中). 중도(中道)할 때 즉중입니다. 그러면 즉중 속에 즉가, 즉공이 있고 즉공 속에 즉가, 즉중이 있고 즉중 속에 즉공, 즉가가 있다. 그러니까 세 개가 어울려 있다. 역시 이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앞에서 정혜를 공부했어요.
정혜는 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했고, 여기에서는 세 가지로 분리해서 얘기한 건데 사실은 똑같습니다. 두 가지로도 얘기할 수 있고 세 가지로도 얘기할 수 있고 다 얘기할 수 있습니다.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가히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三身)은 자기의 법성(法性)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 여래(如來)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三性佛)를 보지 못하니라.
*************************************************************************************
법신, 보신, 화신, 이 삼신이 법성 속에 있어서 세상 사람이 다 있어요. 없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있고 무정물도 있고 다 있어요. 여기에서는 미혹해서 밖으로만 찾고 안으로는 안 찾는다, 이런 얘기거든요.
우리는 있는 것을 잘 알아요. ‘있다-없다’ 할 때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거든요. 또 죽는 것은 굉장히 슬퍼하고 괴로워해요. 그것은 잘 알아요. 그런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건 몰라요.
그러면 여기에서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이 세 부처님 중에 어느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겠어요? 이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있는 줄도 모르잖아요. 부처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부분이 있는 걸 몰랐구나,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
선지식아 들어라. 선지식에게 말하여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색신 속에 있는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
여러분들의 법성 속에 삼신불이 있는 걸 내가 보게 하겠다. 잘 들어라. 이거거든요. 그 다음에 잘 들으세요.
************************************************************************************
이 세 몸의 부처(三身佛)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法身佛)라 하는가?
*************************************************************************************
이 삼신불은 성품을 쫓아서 나옵니다.
우리의 성품인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거기에 쫓아서 나온다 그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청정 법신불이라 하는가?
************************************************************************************
선지식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 성품에 있다.
************************************************************************************
그 성품 속에 있어요. 거기에는 악(惡)도 있고, 거기에는 선(善)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고 다 있습니다.
************************************************************************************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한 것을 행하고, 모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선행을 닦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속에 있어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라.
*************************************************************************************
이거 조금 의문이 가지요?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악행을 하고, 선한 것을 생각하면 선행을 하는데, 그걸 청정하다고 해요. 악한 일 하는 건 청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청정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아주 맑은 거울이 있는데 똥이 나타나면 비춥니까? 안 비춥니까? 비추잖아요. 금덩어리가 나타나도 비추거든요. 그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면 왜 비추느냐? 거울에 만약에 때가 묻었다면 안 비치지요. 깨끗하기 때문에 비추는 겁니다.
우리가 왜 무명(無明)이 생겼느냐? 지난번에 누군가 질문을 하셨는데요. 여기 논리대로 한다면 깨끗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무명이다, 깨달음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겁니다. 무명이 나쁜 게 아니에요. 악이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나쁜 거예요. 그러면 악한 일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라고 생각하고요, 선한 것도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선악이 없어집니다.
초월해 버려요.
상대가 없는 절대에서 영원히 선으로만 작용하게 됩니다.
한 생각 선해져 ‘공’ 알면 지혜 생긴다
불교에서의 ‘선함’은
‘있다-없다’ 초월한 행위
곧 부처님의 행 의미
양변 여읜 자리가 ‘귀의’
중생-부처 나누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닦아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보지 못한다.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모두 일시에 나타난다.
이것도 비교가 하나 되지요.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면 진공묘유(眞空妙有) 일체 삼라만상이 다 보이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맑은 하늘과 같아 혜(慧)는 해(日)와 같고, 또 지(智)는 달(月)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內外明徹) 자기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한다.
....................................................................................................................................................................................
저 앞에서 뭐가 청정 법신이냐고 물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외(內外)가 명철하다는 말은 주관과 객관 모두 실체가 없고 공이란 것을 알게 되면 자성 가운데에 만법이 다 나타납니다. 여기서 일체 법은 존재를 말합니다. 일체 법의 자재한 성품이 청정 법신이라고 이름한다. 우리 성품 그 자리를 청정 법신이라 하고 그 성품에서 모든 작용도 나오고 그 작용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
스스로 귀의(歸依)한다 함은 무엇인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함이다.
...........................................................................................................................................................
선하지 못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행위가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마음씨 좋은 것과 불교에서 말하는 선한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좋고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양변에 집착해 있는 한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에서 말한 선한 행위는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하는 행위, 그것을 선하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또 부처님 행입니다.
...........................................................
천백억 화신불이란 무엇인가?
.............................................................
그 법신 자리에서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성품이 공하고 법신 그대로 있는 거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으면 굉장히 편하겠네, 이런 생각도 하는데 우리 이 존재원리의 속성은 절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서울에 갔다가 부산에 갔다가 하지요. 이 마음이란 것은 절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활발발(活潑潑)이라고 합니다. 작용했다 하면 벌써 작용 안 하고 작용 안 했다 하면 벌써 작용하고, 둘이라 하면 벌써 한 개가 되어 있고 한 개라 하면 벌써 두 개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 속성입니다.
........................................................................................................................................................................
생각(思量)하지 않으면 성품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천당이 되며, 독과 해침(害)은 변하여 축생(畜生)이 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하여 윗 세계(上界)가 되고, 또 어리석음은 변해서 하방(下方)이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은바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
그래서 성품 그 자리에서 생각하면 곧 스스로 작용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쁜 생각을 하면, 변해서 지옥이 되고요. 또 선법(善法)을 생각하면 변해서 천당이 되고, 또 독한 마음으로 누구를 해치는 것은 변해서 축생이 되고, 자비스런 마음을 가지면 변화해서 보살이 되고, 지혜는 변화해서 상계(上界)가 되고, 상계라고 해서 천당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이 상계 상태가 되는 겁니다. 또 어리석은 것은 변화해서 하방(下方)이 되어서 자성의 변화가 심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일어날 때에 그 생각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이해를 하면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체험하면 아예 나쁜 생각이 안 일어나고 자유자재합니다. 이런 경지에 못간 사람이라도 또 나쁜 생각 일어나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나쁜 행위까지는 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니까 행동까지도 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정견(正見)만 갖춰도 만일에 화가 일어나면 얼른 알아챕니다. 알아채면 그 자리에서 녹이는데, 또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또 며칠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시간 가는 사람이라도 행위로까지는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거예요.
..........................................................................................................
한 생각이 선하면 지혜가 생하니, 이것을 자성화신(自性化身)이라 한다.
..........................................................................................................
여기에서도 우리가 생각에 따라서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되고 짐승도 되고 보살도 되고 상계도 되고 여러 가지 변한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렇게 변하는데 미혹한 사람은 변하여 일어나는 줄도 몰라요. 모르고 그냥 일어남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겨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일념(一念)이 선하면, 한 생각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거기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성 화신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란 무엇인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
지금 여기가 깜깜하다고 했을 때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환해지지요? 바로 그 소리예요. 깜깜한데 위에서부터 조금 조금씩 밝혀오는 게 아니고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전체가 환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 마음 상태가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면, 천년, 만년 어두웠던 것이 일시에 환하게 됩니다. 그게 돈오돈수(頓悟頓修)예요.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되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고, 단계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대승불교 특히 선(禪)은 한 몫에 다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예요.
감이 가을 햇살을 받고 세월이 흘러 홍시가 되는 것이지, 땡감이 하루아침에 홍시가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단계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단계를 얘기하는가 하면, 사실 홍시가 되기까지의 그 단계를 꿈에 비유하면, 꿈에 이런 저런 고통을 받다가 딱 깨는 순간에 고통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렇듯이 꿈속에서 우리가 깨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현실과 사실은 뭐냐? 깬 것뿐이에요. 꿈속의 고통은 허구예요. 그래서 그 허구를 이 대승불교, 즉 선불교에서는 인정을 안 합니다. 오직 사실과 현실만 인정해요. 잠자고 깬 거 이것뿐이에요.
................................................................................................................................................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선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 한다.
................................................................................................................................................
전후(前後)를 논하는데, 전은 ‘있다-없다’ 분별심으로 하는 거라고 보시면 되고, 후는 우리가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를 초월한 걸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후념이 선한 것이 이름해서 보신불이 됨이니라.
.........................................................................................................................................................................................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선함을 물리쳐 그치고, 한 생각의 선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없앤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선함을 보신불(報身佛)이라 한다.
.....................................................................................................................................................................................
악한 과보라고 하니까 몹시 나쁜 짓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있다-없다’로 생각하는 과보입니다. 여기에 선한 과보할 때의 선(善)은 선악을 초월한 과보입니다. 한 생각 선한 과보는 도리어 천년의 악을 멸하나니, 이것은 영원히 멸해 버립니다. 다시는 어두움으로 안 오고 악으로도 안 옵니다. 절대 선입니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란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다-없다’를 초월한 그 선이 보신불이라고 이름 한다.
법신(法身)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化身)이고, 생각 생각이 선한 것이 보신(報身)이다.
생각 생각이 선한 것, 이것은 양변을 여읜 상태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곧 귀의(歸依)라 한다.
........................................................................................
귀의라는 것은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귀의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나는 중생이니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귀의하겠다’ 이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귀의(歸依)라고 합니다.
...........................................................................................................................................................
가죽과 살은 색신(色身)이며 집이므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三身)을 깨치면 곧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사택이라 돌아갈 바가 있지 아니하다고 그랬는데, 사실 이 색신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단일로 독립된 물체가 아니고, 연기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체가 없구나, 공이구나 하는 그 자리가 법신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육신도 법신이 있어요. 그래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고 그랬잖아요. 오온은 뭡니까? 색신은 몸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이거든요. 정신, 몸 다 공이에요. 그러면 그 공 자리를 우리는 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육조 스님이 조금 간략하게 하느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지 몰라도, 집이다, 색신이다 그러는데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반야심경하고는 안 맞는 소리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육조단경을 필사하는 과정에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러나 다른 데 봐가지고는 조금도 단경이 우리가 말하는 정견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까 육조 스님까지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심은 비굴이 아니라 더욱 당당해지는 것
‘있다·없다’ 삿된 견해
우치와 미망 속 성품 있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 비우는 훈련 해야
11. 네 가지 원(四願)
우리는 계속 정혜, 무념, 무상, 무주, 좌선, 삼신불 이렇게 우리 존재원리를 다양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우리는 법을 깊이 이해했으니까 원력을 세워 이것을 바탕으로 중생 교화를 하자. 말하자면 자기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자는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자본주의 체제가 자유스럽고 능력에 따라서 살아가는 시장원리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나쁜 것은 모든 것을 밖으로 밖으로 자꾸 소유하고자 하는 것 욕망 때문에 이 자본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잘못된 방향을 사회주의로 바로잡아야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갈등과 혼란만 자초할 뿐입니다. 자본주의가 잘못되는 패해가 있다면 이것은 부처님 법으로 바로잡아 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에 의해 돈만을 목표로 살지 말고, 그 돈은 수단이고, 정말로 인간답게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인간냄새 사람냄새 나는 사회로 만들어 가면 이 자본주의가 정말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이 어찌 보면,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을 공부하게 되면 최소한 수단과 목적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과 목표가 완전히 뒤엉켜 혼돈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은 직장 가지고 돈벌이 하는 것도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무슨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시대나 육조 스님 시대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 생활화도 강조를 하셨지만 네 가지 원(願,)을 세워 사회화도 강조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말씀하셨잖아요. 상구보리(上求菩提)가 생활화이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사회화입니다.
.......................................................................................................................................................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게 귀의해 마쳤으니, 선지식으로 하여금 네 가지 넓고 큰 원(四弘大願)을 발하리라.
선지식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가없는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 번 합창〉
.........................................................................................................................................................
이렇게 세분화한 거지요. 우리는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무상불도서원성이라고 거꾸로 했는데 같은 것입니다.
선지식아,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을 각각 자기 성품(自性)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없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마음 가운데 중생을 각각 자신의 자성으로써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그 자리를 보면 바로 제도가 됩니다.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뒤에 나옵니다만, 마음 밖에 아무리 선지식이 있더라도 마음 속의 선지식을 못 보면 제도가 안 됩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내면의 선지식을 봐야 한다는 말이 뒤에 나옵니다. 이 말도 그와 같은 말입니다.
그럼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를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邪見)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정견(正見)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삿된 견해가 뭔가 하면 ‘있다-없다’ 하는 견해거든요. ‘있다-없다’ 하는 견해와 번뇌와 우치(愚癡)와 미망(迷妄)하는 그 속에 본각성(本覺性)이 있어요. 성품이 있어요. 사견 속에 성품이 있고, 번뇌 속에도 성품이 있고, 우치 속에도 성품이 있고, 미망 속에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견과 번뇌와 우치와 미망이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중도라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악행이 나오고 선한 것을 생각하면 선행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선하든 악하든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걸 알면 악이 악이 아니고, 선이 된다고 그랬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견, 번뇌, 우치, 미망 그 속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 하는 걸 알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아요.
정견을 가져 제도한다고 하는데, 정견이 뭡니까?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사견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고, 번뇌도 우치도 미망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정견을 가지면 바로 제도가 되는 거예요.
.......................................................................................................................................
이미 정견(正見)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다.
..........................................................................................................................................
여기는 제거라는 말을 썼는데 정견을 깨달으면 우치, 미망이 변해 가지고 바로 반야가 돼 버려요. 제거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변해서 된 거예요. 우치, 미망이 바로 변해서 반야가 되면 중생이 각각 스스로 제도하는 게 됩니다. 그럼, 정견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오는 정견이 뭡니까?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게 정견입니다. 우리가 바른 수행을 하려면 먼저 정견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근대에 효봉 스님 같이 발심이 바로 된 사람은 이런 게 필요 없습니다만, 대체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중도연기를 바르게 이해해서 일상생활과 수행의 길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춰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견을 세운다면 화를 내거나 초조, 불안, 근심, 걱정 등 스트레스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차별하더라도 상대나 나나 본래는 연기로 존재하는 무아이니 비난과 차별도 실체가 없는 연기적 현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로 정견으로 본다면 화낼 나도 없고 화낼 대상도 실체가 없는 연기 현상일 뿐입니다. 단지, 나와 남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착각 속에서 화를 내고 초조, 불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서 정견으로 지혜로 보는 사람은 웬만한 스트레스는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견이라는 것도 이해한 정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을 해서 정견이 세워질 때는 이와 같이 연기, 무아로 볼 수 있는데, 급박한 상황이나 화가 극도로 나는 상황에서는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즉 순경계나 역경계에서도 자유자재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중도연기와 하나가 되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은 중도연기, 무아, 공을 이해해서 정견을 세우고 하게 되면 바르고 빠르게 향상할 수가 있는 겁니다.
.......................................................................................................................................................................................
삿된 것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濟度)하고,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또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善)으로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니, 이와 같이 제도(濟度)함을 진실한 제도라 한다.
.....................................................................................................................................................................................
여기에 선(善)도 양변을 여읜 겁니다.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誓願)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한 것을 없앰이요,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無上正法)을 배움이요, 위 없는 불도(無上佛道)를 다 이루기를 서원하는 것은 항상 마음 낮추는 행동(下心)을 하여 일체를 공경하며 어리석은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를 내어 미망(迷妄)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루어 서원력을 행함이다.
무상정법(無上正法)은 양변을 여읜 겁니다. 여기에서 항상 하심(下心)을 행하고, 일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굴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고, 그 자리가 실체가 없고 공인 줄 알면 첫째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당당해져요.
왜냐면 남하고 비교해서 나보다 조금 나은 사람 앞에 가면 위축되고 또 나보다 못한 사람한테는 교만심도 내고 이러거든요. 그런 게 없어지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나 못한 사람 앞에 항상 당당해집니다. 그리고 당당해지면서 굉장히 겸손해집니다. 항상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자비스럽고 이해심 많고 친절해지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상참회로 삼세죄장을 없애라
죄라는 것은 연기현상
공 이라는 것 알아야
존재 원리를 보게 되면
어리석은 데 물들지 않아
12. 참회(懺悔)
그 동안에 우리가 육조스님 법문 중에 정혜, 무념, 좌선, 삼신불, 서원을 공부하고 이제 참회인데, 이것이 표현은 다양해도 내용은 결국 같은 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우리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이 마음 즉, 마음의 모양이나 작용하고 있는 걸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견성이라 합니다. 그것을 바로 보게 되면 그렇게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본질을 보니까 평등한 줄 알고 평등한 남하고 비교 안하고, 비교 안하니까 마음이 그렇게 평화롭게 됩니다.
또 어떤 경계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예전에는 거기에 끄달리고 지배 받아서 속상하고 자기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고 이렇게 했지만,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또 나를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합니다.
이제 참회에 들어가는데 참회 앞에 네 가지 원,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을 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지구가 하나가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만 편할 수 없고 내 개인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고 이 사회하고 우리도 유기적인 관계인 까닭에 나 하나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를 사회화시키는 것이 자기 생활화이고, 생활화 하는 것이 사회화와 둘이 아닙니다. 이런 원력을 갖고 살아야 더불어서 함께 잘 살지, 이제는 옛날처럼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겠다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걸 보면서 마음을 키우고 시야도 넓히고 이 사회 세상이 바로 가야 우리도 함께 그 속에서 평화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인식과 원력으로 향상해 나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참회는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맹세하면서 그걸 반성하는 것이죠.
그런데 육조스님이 하는 참회 방법하고 우리가 하는 참회 방법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참회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으니까 참회해서 다시 재발 안 하도록 맹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참회가 바르게 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신도분이 말하기를 자기가 뭘 안 하겠다고 늘 맹세하는데 그게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요. 그 분이 그것을 스스로 비유하기를 풀 위에다 돌 얹어 놓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돌 치우면 풀은 또 올라오거든요.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참회를 하고 개과천선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것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스스로도 자기한테 실망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향상이 없게 되지요.
여기에 육조스님이 말씀하시는 무상참회(無相懺悔), 이 참회는 그냥 죄가 있다고 해서 참회하는 게 아니고 죄의 뿌리까지 캐내는 참회법입니다. 이게 육조스님의 방법만도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방법도 아니고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그 자체가 근본 풀뿌리까지 캐내는 그런 참회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반야심경〉 여러 군데 그 말이 나오는데 “오온이 모두 공하다”를 알면 죄도 함께 공해 버려요. 그러면 그것이 풀뿌리까지 캐내는 참회법이 됩니다. 이 불교는 우리 모두에게 보편되어 있는 존재원리지만 부처님이 이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거예요. 이런 참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두 ‘죄가 있다’고 보고 ‘그 죄를 반성하고 다시는 안 짓겠다’ 이렇게 하지만, 그것은 뿌리까지 뽑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범도 하고 삼범도 하지요.
부처님이 발견한 이 세계는 본래 죄가 없어요. 이것을 알면 다시는 그것을 범하지 않는 그런 참회가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깨달았을 때 가능합니다. 깨달아야 가능한데 못 깨달았더라도 우리가 그 원리를 알고 있으면 죄가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참회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도 편안하고 재범 확률도 훨씬 적어집니다. 실제로 교도소나 수용소에 있는 분들에게 불교의 참회법을 얘기해주면 효과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회법은 일반 사회에서 하는 참회법하고 다릅니다. 죄가 있다고 후회하고 참회하는 것은 설사 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학대하고 여러 가지로 자기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는데, 불교의 참회는 정말로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참회법입니다.
.....................................................................................................................................................................................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에게 모양 없는 참회(無相懺悔)를 해서 삼세의 죄장(三世罪障)을 없애게 하리라.”
.........................................................................................................................................................................................
여기에 “모양 없다(無相)”는 말이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흔히 부처님한테 업장 소멸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한테 참회한다’, ‘큰스님한테 참회한다’ 하지만, 사실은 참회할 것도 없고 참회할 대상도 없어요. “모양 없는 참회”라는 말이 바로 이겁니다.
불교에서는 인과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바르게 참회하면 인과도 뛰어 넘습니다. 전생까지 끌어다가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고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하는 분이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삼세, 즉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그런 죄로 인한 장애를 멸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럼 육조스님이 무상 참회를 선지식들에게 일러줘서 삼세에 죄 안 짓게 해 주겠다 하셨는데, 무상참회는 무엇입니까?
무상(無相)이란 말에 반대되는 게 유상(有相)인데요. 여기에서 말하는 무상은 유상에 대비되는 무상이 아니고 유상, 무상을 초월한 무상입니다. 양변을 여읜 겁니다.
왜 양변을 여의느냐? 우리의 존재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이렇게 양변을 여의었다는 겁니다. 그런 존재원리가 나한테 있어요. 그것을 ‘한개 반개’라 합니다. 본래 나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만 발견하고 체험만 하면 무상 참회가 되는 겁니다.
무상참회를 해가지고 삼세죄장을 없애게 하리라. 그러면 과거나 현재 죄를 없애는 것도 굉장히 반갑고 고마운 일인데, 미래의 죄도 멸해 주겠다는 것은 앞으로 죄를 안 짓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 이 얘기입니다.
이 무상참회에 대해서 무상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해주시고 이 무상도 우리가 양변을 여읜 거, ‘있다-없다’ 양변을 여읜 무상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앞 생각(前念)과 뒷 생각(後念)과 현재의 생각(今念)이 생각마다 어리석음과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나쁜 행동(惡行)을 단번에 끊어 자기 성품에서 없애면 이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 ...................................................................................................................................................................................
전념, 후념, 금념이 앞에 말한 삼세입니다. 전념은 과거이고 금념은 지금 현재고요. 후념은 미래입니다. 그렇게 ‘생각마다 어리석고 미혹한데 물들지 아니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어리석고 미혹한 데 물들면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들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있다-없다’에 집착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우리 존재원리를 보게 되면 이렇게 어리석은 데 물들지 않아서 과거에 지어오던 나쁜 행위를 일시에 끊어버립니다.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
죄가 있다고 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후회하고 참회한다 하더라도 돌로 풀을 눌러 막으려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러면 언젠가 돌을 치우면 풀이 다시 올라와요. 그런데 뿌리까지 캐내버리면 다시 그 풀이 안 올라오듯이 죄라는 것도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걸 알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죄 뿐 아니라 이런 상태에 간 분은 매일 매일 행복할 뿐 아니라 하는 일마다 자기를 돕는 것이 남을 도운 게 되고 남을 도운 게 자기를 도운 게 되어서 정말로 사람과 사람의 갈등, 사상과 사상의 갈등, 국가 사이의 갈등 이런 걸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법을 자기가 갖고 있고 모두 다 보편되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자기만 이익 되겠다고 이익을 추구하니까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 그럴 수도 있고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고 국가 간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
앞 생각(前念), 뒷 생각(後念), 현재의 생각(今念)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아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矯心)을 없애도록 하라. 이를 영원히 끊으면 자성참회(自性懺悔)가 된다.
........................................................................................................................................................................................
교광심(矯心)이란 거짓되고 속이는 마음입니다. 앞에는 악행을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거짓되고 속이는 마음을 없애 길이 끊으면 그것을 자성참회라고 합니다. 그 자성자리는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앞에는 악행을 얘기했고, 다음에 거짓과 속이는 것, 이 세상에 거짓과 속이는 일이 참 많습니다.
육조스님 당시에도 많았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이 얘기를 하신 것 같아요.
1. 序言 - 머리말
혜능(慧能)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도교인(道敎人)·속인 등, 일 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儒家)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大師)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法海)로 하여금 설법 내용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宗旨)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2. 尋師 - 스승을 찾아감
혜능대사는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대사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의 본관은 범양(范陽)인데 좌천되어 영남의 신주(嶺南新州) 백성으로 옮겨살았고 혜능은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난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혜능을 데리고 관숙사(官宿舍)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값을 받고서 문을 나서려 하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 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黃梅縣) 동빙무산에서 오조(五祖) 홍인(弘忍)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門人)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오조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自性)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業緣)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홍인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하였다.
오조대사께서는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하셨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얼굴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오조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시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 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3. 命偈 -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
오조 홍인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셨다. 문인들이 다 모이자 말씀하셨다.
"내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만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자성(自性)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六代)의 조사(祖師)가 되게 하리니, 어서 빨리 서둘도록 하라."
문인들이 처분을 받고 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서로 번갈아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써서 게송을 지어 큰스님께 모름지기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神秀)상좌는 우리의 교수사(敎授師)이므로 신수상좌가 법을 얻은 후에는 저절로 의지하게 될 터이니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하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바치지 않았다.
그 때 화공 노진이 홍인대사의 방 앞에 있는 삼칸의 복도에 <능가변상>과 오조대사가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전하여 기념하고자 벽을 살펴본 뒤 다음날 착수하려고 하였다.
4. 神秀 - 신수스님
상좌인 신수는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게송(心偈)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오조 스님께서 내 마음속의 견해가 얕고 깊음을 어찌 아시겠는가. 내가 마음의 게송을 오조스님께 올려 뜻을 밝혀서 법을 구함은 옳지만, 조사(祖師)의 지위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도리어 범인의 마음(凡心)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음과 같다. 그러나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法)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참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다. 밤이 삼경(三更)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마음의 게송을 지어서 써 놓고 법을 구해야겠다. 만약 오조스님께서 게송을 보시고 이 게송이 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시면 나의 전생 업장이 두꺼워서 합당이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은 알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리라."
신수상좌가 밤중에 촛불을 들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게송을 지어 써 놓았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게송은 이르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
신수상좌가 이 게송을 다 써 놓고 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노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에 '능가변상'을 그리게 하려 하시다가, 문득 이 게송을 보셨다. 다 읽고 나서 공봉에게 말씀하셨다.
"홍인이 공봉에게 돈 삼만 냥을 주어 멀리서 온 것을 깊이 위로하니, 변상을 그리지 않으리라.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 하셨으니,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게 하여, 이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법을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니라."
이윽고 홍인대사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여 게송을 앞에 향을 사루게 하시니,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므로 오조스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이 게송을 외라. 외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을 볼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리라."
문인들이 다들 외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오조스님이 신수상좌를 거처로 불러서 물으시되,
"내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만약 지은 것이라면 마땅히 나의 법을 얻으리라"하셨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부끄럽습니다. 실은 제가 지었습니다만 감히 조사의 자리를 구함이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보아주옵소서. 제자가 작은 지혜라도 있어서 큰 뜻을 알았겠습니까?"하였다.
오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없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와 보여라. 만약 문안에 들어와서 자성(自性)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너에게 부촉하리라"하셨다.
신수상좌는 돌아가 며칠을 지났으나 게송을 짓지 못하였다.
5. 呈偈 - 게송을 바침
한 동자가 방앗간 평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見性)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너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육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곧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남짓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에 가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어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 하였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에 예배하였고,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어느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강의 뜻을 알았다. 혜능은 또한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이었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아야만 곧 큰 뜻을 깨닫느니라.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明鏡亦無臺)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佛性常淸淨)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요.(何處有塵埃)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心是菩提樹)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明鏡本淸淨)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何處染塵埃)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 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시어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 하셨느니라.
6. 受法 - 법을 받음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었다. 혜능이 한 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言下便悟)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며, 떠날 때 문득 오조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陳)이요 이름은 혜명(惠明)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이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7. 定慧 - 정과 혜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서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坐不動)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던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거나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 無念 - 생각이 없음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르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9. 坐禪 - 좌선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忘無處所).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自作自成佛道)."
10. 三身 - 세 몸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自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 귀의합니다'하라.(이상을 세 번 한다)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선지식들은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法身)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慧)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밝아 사무쳐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空寂)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의 화신(化身)이라 하니라.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11. 四願 - 네 가지 원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三身佛)에 귀의하여 마쳤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發四弘大願).
선지식들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衆生無邊誓願度).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煩惱無邊誓願斷).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法門無邊誓願學).
위없는 불도 모두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無上佛道誓願成).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의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般若智)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 버리면 중생들 저마다 스스로 제도한 것이니라. 삿됨(邪)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하고 미혹함(迷)이 오면 깨침(悟)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愚)이 오면 지혜(智)로 제도하고 악함(惡)이 오면 착함(善)으로 제도하며 번뇌(煩惱)가 오면 보리(菩提)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眞度)라고 하느니라.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는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虛妄)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없는 바른 법(無上正法)을 배우는 것이다.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下心行)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라."
12. 懺悔 - 참회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어서 삼세(三世)의 죄장(罪障)을 없애게 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懺悔)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自性懺)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선지식들아, 무엇을 이름하여 참회(懺悔)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13. 三歸 - 세 가지 귀의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無相三歸依戒)'를 주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覺兩足尊)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正離欲尊)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淨衆中尊)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自性)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小欲知足) 재물(財)을 떠나고 색(色)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말한다면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14. 性空 - 성품이 빔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들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어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大智惠彼岸到)'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 외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摩訶)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一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자성이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摩訶行)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15. 般若 - 반야
"어떤 것을 반야(般若)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 '저 언덕에 이른다(彼岸到)'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억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卽煩惱是菩提),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五陰)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 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戒定惠)로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無念)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16. 根機 - 근기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法界)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말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閻浮提)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과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邪見)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正見)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塵勞)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17. 見性 - 견성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18. 頓悟 - 단박에 깨침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弘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頓見眞如本性).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頓悟)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因緣)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觀照)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다.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無念)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六賊)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六塵)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인 무념행(無念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19. 滅罪 - 죄를 없앰
"선지식들아, 뒷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나의 법신이 너희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선지식들아, 이 돈교(頓敎)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同見同行) 소원을 세워 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받아 지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에는 모름지기 예로부터 말없이 법을 부촉하여 큰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곧 모름지기 분부(分付)한 것이니라.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 만겁 천생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느니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三業)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요.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懺悔)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시니, 위사군(韋使君)과 관료와 스님들도 도교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기지 않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20. 功德 - 공덕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 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宗旨)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들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功德)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고 복밭(福田)에 있지 않으니라.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見性)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內見佛性 外行恭敬).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功)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21. 西方 - 서방극락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西方)에 가서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어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去此不遠)'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니라.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바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속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隨其心淨 則佛淨土)'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願生)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으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이 없는 돈법(無生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로 보게 하리니 사군은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色身)은 성(城)이요 눈·귀·코·혀·몸(眼耳鼻舌身)은 곧 성의 문(門)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佛是自性作),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자비(慈悲)는 곧 관음(觀音)이요 희사(喜捨)는 세지(勢至)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人我相)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용이며 진로(塵勞)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三毒)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十善)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자기 마음의 땅 위에 깨달은 성품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眼耳鼻舌身意)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欲界)의 모든 여섯 하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라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22. 修行 - 수행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道俗)을 위하여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어 가지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한 곳에 있음과 다름이 없느니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頓敎)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수는구나.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자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無餘)에 이르는 도다.
보리(菩提)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 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더라도
일체가 다 방해되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 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 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正行)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 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邪見)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正見)는 세간을 벗어남(出世間)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23. 行化 - 교화를 행하심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어 가지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천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지거라. 혜능은 조계산(曹溪山)으로 돌아가리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리라(同見佛性)."
함께 앉아 있던 관료·스님·속인들이 육조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치심이여! 옛적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오'한 다음 한꺼번에 다 흩어졌다.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韶州)·광주(廣州)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 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이 삼오천 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宗旨)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였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 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頓敎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24. 頓修 - 단박에 닦음
세상 사람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南能北秀)'라고 하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神秀)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玉泉寺)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시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딘즉 '점(漸)'이요, 견해가 빠른즉 '돈(頓)'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疾直指路)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志誠)스님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서 혜능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왔다 하지 말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스님과 나의 견해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첫째로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卽契本心).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결합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렷다!"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니옵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정·혜(戒定惠)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惡)을 짓지 않는 것을 계(戒)라고 하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惠)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고 합니다. 신수스님의 말씀은 그렇거니와, 큰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 다르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스님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無非)이 자성의 계(戒)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無亂)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癡)이 자성의 혜(惠)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 생각마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을 단박 닦으라(自性頓修).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은 예배하고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25. 佛行 - 부처님의 행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어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正法之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正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一佛乘)을 듣고서 이불승(二佛乘)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空寂)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리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開示悟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자리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一乘)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三乘)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心行) <법화경>을 굴리고(轉法華),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구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轉經)이니라."
법달은 한 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佛)."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26. 參請 - 예배하고 법을 물음
그 무렵 지상(智常)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원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四乘)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中乘)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大乘)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은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神會)라고 하였으며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앉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依法修行).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 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 머물렀다.
27. 對法 - 상대되는 법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法海), 지성(志誠), 법달(法達), 지상(智常), 지통(志通), 지철(志徹), 지도(志道), 법진(法珍), 법여(法如), 신회(神會) 등을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열 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 곳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삼과(三科)의 법문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性相)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 마저 없게 하라.
삼과법문(三科法門)이란 음(蔭). 계(界). 입(入)이다. 음(蔭)은 오음(五陰)이요, 계(界)는 십팔계(十八界)요, 입(入)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어떤 것을 오음(五陰)이라고 하는가?
색음(色陰)·수음(受蔭)·상음(相蔭)·행음(行蔭)·식음(識蔭)이니라.
어떤 것을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가?
육진(六塵)·육문(六門)·육식(六識)이니라.
어떤 것을 십이입(十二入)이라고 하는가?
바깥의 육진(六塵)과 안의 육문(六門)이니라.
어떤 것을 육진(六塵)이라고 하는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니라.
어떤 것을 육문(六門)이라고 하는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이니라.
법의 성품(法性)이 육식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과 육문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육은 십팔이니라(3*6=18).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 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對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相對)요,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라.
논란하는 말과 직언 하는 말의 대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 두 가지가 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 상대이며,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상대이며,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空)이 상대이며,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상대이며, 맑음(淸)과 흐림(濁)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老)과 젊음(少)이 상대이며, 큼(大)과 작음(少)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高)과 낮음(下)이 상대이니라.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 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邪) 바름(正)이 상대요, 어리석음(癡)과 지혜(惠)가 상대이며, 미련함(愚)과 슬기로움(智)이 상대요, 어지러움(亂)과 선정(定)이 상대이며, 계(戒)와 잘못됨(非)이 상대이며, 곧음(直)과 굽음(曲)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險)과 평탄함(平)이 상대이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상대이며, 사랑(慈)과 해침(害)이 상대이며, 기쁨(喜)과 성냄(嗔)이 상대이며, 버림(捨)과 아낌( )이 상대이며,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이 상대이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함(常)과 덧없음(無常)이 상대이며,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상대이며,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며, 본체(體)와 작용(用)이 상대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상대이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 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데 열 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 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相離相),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에서 공을 떠나나니(空離空) 공(空)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相)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은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을 말하나 바른 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열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니라.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으니라."
열 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마치고 <단경>을 베껴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28. 眞假 - 참됨과 거짓
대사께서는 선천(先天) 이년 팔월 삼일에 돌아가셨다. 칠월 팔 일에 문인들을 불러 고별하시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國恩寺)에 탑을 만들고 선천 이년 칠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리라."
법해(法海)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아니하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신회는 도리어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그렇다면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내가 모른다고 근심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들 마침내 너희에게 고별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니라.
너희들은 다 앉거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노니,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이다. 너희들이 다 외어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라."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假)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假)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유정(有情)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무정(無情)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不動行)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나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도다.
능히 모양(相)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씀(用)이니라.
모든 도를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用意)
대승(大乘)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존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도(道)의 뜻을 잃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29. 傳偈 - 게송을 전함
대중스님들은 다 듣고 대사의 뜻을 알았으며,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아니하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대중이 일시에 예배하니, 곧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무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상좌인 법해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큰스님이시여, 큰스님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게 부촉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전하여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내가 떠난 뒤 이십여 년에 삿된 법이 요란하여 나의 종지(宗旨)를 혼란케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종지를 세우리니, 이것이 곧 나의 바른 법이다.
그러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믿지 않을진대는 내가 선대의 다섯 분 조사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신 게송들을 외어 주리라.
만약 제일조 달마조사의 게송의 뜻에 의거하면 곧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외리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제일조 달마화상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노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제이조 혜가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삼조 승찬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사조 도신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도다.
제오조 홍인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유정(有情)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無情) 씨앗도 없나니(無種)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육조 혜능의 게송에 말한다.
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도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첫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心地)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五葉)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는도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육조스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밖으로 나온 문인들은 생각하였으니,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실 것임을 알았다.
30. 傳統 - 법을 전한 계통
그 뒤, 육조스님께서는 팔월 초삼일에 이르러 공양 끝에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차례를 따라 앉아라. 내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법해가 여쭈었다.
"이 돈교법(頓敎法)의 전수는 옛부터 지금까지 몇 대입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은 일곱 부처님으로부터 전수되었으니, 석가모니불은 그 일곱째이시다.
대가섭은 제팔, 아난은 제구,
말전지는 제십, 상나화수는 제십일
우바국다는 제십이, 제다가는 제십삼,
불타난제는 제십사, 불타밀다는 제십오,
협비구는 제십육, 부나사는 제십칠,
마명은 제십팔, 비라장자는 제십구,
용수는 제이십, 가나제바는 제이십일,
라후라는 제이십이, 승가나제는 제이십삼,
승가야사는 제이십사, 구마라타는 제이십오,
사야타는 제이십육, 바수반다는 제이십칠,
마나라는 제이십팔, 학륵나는 제이십구,
사자비구는 제삼십, 사나바사는 제삼십일,
우바굴은 제삼십이, 승가라는 제삼십삼,
수바밀다는 제삼십사,
남천축국 왕자 셋째 아들 보리달마는 제삼십오,
당나라 스님 혜가는 제삼십육, 승찬은 제삼십칠,
도신은 제삼십팔, 홍인은 제삼십구,
나 혜능이 지금 법을 받은 것은 제 사십대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서로서로 전수하여 모름지기 의지하고 믿어서 종지를 잃지 말라."
31. 眞佛 - 참 부처님
법해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뒷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들어라. 뒷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도 보지 못하리라.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게 하려고 다시 '참 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를 남기리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이는 곧 보느니라."
"법해는 듣기를 바라오며 대대로 유전하여 세세생생에 끊어지지 않게 하리이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들어라. 내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여 주리라.
만약 뒷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離衆生無佛心).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해탈송(自性眞佛解脫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으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 부처를 보리라. 너희에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게송을 말씀하셨다.
진여(眞如)의 깨끗한 성품(淨性)이 참 부처(眞佛)요
삿된 견해의 삼독(三毒)이 곧 참 마군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가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化身)과 보신(報身)과 정신(淨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쁹는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한 씨앗이니라.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頓敎)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32. 滅道 - 멸도
대사께서 게송을 말씀해 마치시고 드디어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며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살아 있던 날과 한가지로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탄연히 적정하면 이것이 큰 도이니라.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춘추는 일흔 여섯이었다.
33. 後記 - 후기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니 같이 배운 도제(道 )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悟眞) 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만약 이 법을 부촉할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음이로다.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워야만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덕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출처: www.bulsang.com
.....................................................................................................................................
고우큰스님의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신문(www.beopbo.com) 전재
강의 1회
행복하게 사는 방법 일러준 것이 곧 ‘단경’
기사등록일 [2006년 06월 07일 수요일]
법보신문은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이 조계종 중앙신도회 산하 인재개발원 초청으로 1년간 진행하는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강의 내용을 격주로 연재한다.
연재되는 내용은 매월 한차례씩 이어지는 강의를 녹취해 요약한 것이며,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했다.
「법보신문」은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한 ‘육조단경 대강좌’ 지상중계를 통해 보다 많은 독자 여러분이 『육조단경』의 정수를 만나기 바란다. 편집자
요즘 세상이 바쁘다고 하는데, 이렇게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의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실제 우리가 육조 혜능 스님의 단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기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 「단경」 강의는 대부분 불자들이 듣겠지만, 혹 불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금강경」에도 나와 있지만, “불교가 불교 아니기 때문에 불교다.” “부처님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라고 한다. 불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육조(638~713) 스님께서 존재 실상을 깨닫고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단경」이다. 여기에는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 민족도 초월하고, 다 초월한다. 그래서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육조 스님께서 이것을 몸으로 체험하시고 밝혀놓은 책이다. 또 우리 존재에 대해 체험한 내용이 우리를 무한히 행복하게 해준다. 여기에 「육조단경」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과학자들도 이 우주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우리 존재의 실상을 체험하고 알게 된 것이 굉장히 중요한 데, 그것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또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에게는 없고 그냥 어떤 평범한 사실을 규명한 것이라면 오늘날 불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선(禪) 특히 「육조단경」 같은 책들이 1,300년이나 전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육조 스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를 자유롭게하고 평화롭게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이 지구상에 전쟁은 없어진다. 누구하고 다툼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 갈등도 이 내용을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하루아침에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이 「육조단경」 강의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물론 세상 어느 나라에나 대립 갈등하고 싸우는 일이 다 있다. 또 어느 사회에도 있고, 어느 가정에도 있다. 더 축소해보면 개인도 자기와 자기가 싸운다.
그런데 나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심한 것 같다.
조선조 500년 동안 자기와 뜻이 맞지 않다고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일도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목을 쳤다고 한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일제 36년을 핍박받았다. 그만큼 했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해방 이후에 또, 남북이 갈렸다. 그리고 또, 남쪽에서는 어땠는가?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나면 오순도순 잘 살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갈등하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것을 만들어 갈등할 것인가!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불교에 있고, 이 「육조단경」에 있다.
공장을 몇 십 개, 몇 백 개 지어 생산하는 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노사 관계를 예로 들면, 1년에 노-사 대립으로 몇 조원 손해가 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육조단경」에 담겨 있는 핵심사상만 배운다면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그런 노-사가 서로 존중하고 위하는 인간다운 관계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면 파업과 같은 소모적인 갈등이 필요 없어진다. 손해 본 몇 조원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나는 이 선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시민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 우리 사회 전반의 갈등, 대립을 없애는데 앞장서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켜 보고 싶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선 센터’를 세웠으면 하는데 아직 인연이 안되고 있다. 어쨌든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국제적인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데 이 선이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다. 이 「단경」 강의를 통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마음을 낸 것이다.
이 「육조단경」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갠지스강 모래수로 비유한다.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많은 보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부처님 말씀 한 마디를 이해하고 남에게 전해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자기 몸을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나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한마디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한테 전해주는 그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듯이 이 「단경」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지금 우리 한국에는 12,000명의 스님들이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수행자들이 전문가가 못 되고 엉거주춤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뭐냐?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공부는 재가-출가가 없다. 나중에 나오지만, 육조 스님은 이 형상만 가지고 재가-출가를 나누지 않고 마음으로 나눴다. 부처님 법을 믿고 그 가치를 알고 생활하면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출가다. 하지만 형상은 머리를 깎고 가사도 입었지만 부처님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출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재가자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뜻도 있다.
그래서 이 「단경」 공부도 전문가가 하는 공부라 생각하지 말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1. 머리말(序言)
혜능(惠能) 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니 그때 그 법좌 아래에는 비구, 비구니, 도교인, 속인이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刺史)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생 등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할 때, 자사가 문인(門人) 법해(法海)로 하여금 기록을 모아 널리 유행케 하여 후대(後代)에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서로 전해주게 함이라. 의지하고 믿는 바가 있어 받들고 계승하기 위해서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
이 「단경」을 설한 대범사는 중국 광동성 소관시에 있는 절로, 현재는 ‘대감사(大鑑寺)’라 한다. 대범사를 대감사로 고친 것은 당나라 황제가 육조 스님이 입적하자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서언(序言)이란 머리말인데, 「단경」을 설한 이유를 밝혔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뭐냐?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했다.”
이 뜻을 알면, 「단경」을 다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자. 여기에 ‘승니(僧尼)’는 비구, 비구니이고, 도속(道俗)은 도교를 배우는 사람, 또 재가자 1만여 인이 있었고, 유교 선비와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기를 청했다.”
당시 중국에는 기독교가 없었고, 유교, 도교, 불교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뜻이 있다.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육조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왔다는 것이다. 이 「육조단경」을 듣게 되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하는 그 종지를 깨닫게 된다. 그 종지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선은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실제 신부, 수녀님들도 참선을 많이 한다.
「단경」을 설할 당시 소주 지방의 위거라는 관리가 법해 스님에게 내용을 기록해서 먼 후대 사람에게도 이것을 듣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자해서 기록하여 남겨 우리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좋은 뜻이 없었으면 우리도 이 「단경」 법문을 들을 수 없었다.
강의 2회
생활 속 ‘자타일여’ 실천이 곧 ‘상구보리’
육조 스님 시대나 지금이나 존재원리는 ‘마음’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듯 ‘내가 있다’고 집착
그런데 여기에 “종지宗旨를 계승한다” 하는 이 ‘종지’는 우리 존재원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말하는데, 이것이 갠지스강 모래수의 보물보다 더 가치가 있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끊이지 않게 전해지도록 위거라는 분이 법해 스님한테 기록하라 했듯이 육조 스님이 또한 「단경」을 설한 의도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종지(宗旨)’란 무엇이고, ‘마하반야바라밀법’은 무엇이냐?
이것이 우리 존재원리의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먼 얘기 같지만, 지금 내가 얘기하고 여러분들이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존재원리를 말한다.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천년, 만년이 가더라도 이 존재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육조 스님은 600년대 분이고, 지금이 2006년이니까, 1,400년 전에 육조 스님이 깨달은 그 존재원리와 현재 우리가 얘기하고 듣고 있는 그 존재원리가 다르냐? 절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이 존재원리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마음(心)’이라 하기도 하고 법성(法性), 자성(自性)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든 일을 만드는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도 만들고 과학도 만들고, 우리 일상생활에 마음이 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래서 이 존재를 알게 되면 모든 일에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는데, 그 역기능은 영원히 없어지고 순기능만이 지속된다.
중국의 운문 스님은 이것을 “매일 매일 좋은 날”이라 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정말 믿어도 좋다. 아까 갠지스강 모래 비유를 했지만, 그 표현도 부족하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믿지만 나는 부처님 말씀대로 안 하면 더 괴롭다. 좀 과장이 있더라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사회 갈등, 대립, 투쟁, 전쟁 이런 것을 다 해소할 수 있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고,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하게 되면, 거기에 무슨 대립 갈등이 있겠는가!
몇 달 전에 교계 신문에서 달라이라마가 ‘지혜로운 이기심’ 이라 표현한 것을 보았다. 이기심(利己心)이 있으면 괴로움(苦)이 따른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기심을 없애라 한다. 그 분은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되 앞에 ‘지혜로운’이란 말을 넣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지혜로운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는 데까지 ‘굉장히 고심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도 가끔 ‘지혜로운 이기심’이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가 존재원리를 알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원리가 옛날과 지금, 그리고 미래에 달라지는 게 아니다. 똑같다. 사회의 나쁜 현상 또한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립 갈등은 비슷하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공부를 나는 운동이라 하고 싶다.
이 공부를 확대해서 운동이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굉장히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 거창하게 나라까지 안 가더라도 자기 개인, 가정만이라도 그렇게 하다보면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견을 세우면 포교가 수행, 수행이 포교다.
이 종지를 배워서 생활화하는 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이다. 또 사회화 하는 것을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한다. 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거창한 말은 아니다. 이것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면 상구보리다. 이웃에 한 사람이라도 불교 얘기를 해주면 그것이 사회화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이나 육조 스님이 발견한 이 존재원리를 아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을 체험해서 아는 것을 ‘깨달았다(覺)’하고 그냥 이해하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이 「육조단경」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간다면 정말 그 이상 더 좋은 일은 없다. 깨닫지 못해도 정견을 갖춰 생활에 100%는 적용하기 어려워도 1%부터 시작해서 10%만이라도 적용해 보면 부처님 법대로 안 하면 오히려 더 괴롭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질문이 있는데 “사회가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하면 손해 보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 절대로 아니다. 조금만 노력해 보라.
노력하면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참 좋구나!”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런 느낌이 오면 보람과 행복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것을 이웃사람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한다. 또 얘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이 되고, 또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도 굉장하다.
그래서 포교가 수행이고, 수행이 포교다. 이 「육조단경」 공부하는 사람은 일당백이 되어 자기 수행도 열심히 하면서 이것을 사회화 하는 데에도 같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공부다.
다음에 스승을 찾아간다. 육조 스님이 「단경」을 설하는 목적이 종지를 전하여 후대까지 계승 발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 종지의 가치를 어떻게 얻었느냐? 스승을 찾아가서 공부해야 한다.
*************************************
2. 스승을 찾아감(尋師)
혜능 대사가 말했다.
“선지식善知識아, 마음을 깨끗이 해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하니까, ‘더럽다-깨끗하다’ 하는 깨끗한 것을 생각한다. 여기에 말하는 깨끗한 것은 ‘마하반야바라밀법’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기심(利己心) 일으킨 것이 무엇인가? ‘나’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다-너다’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 이 양변을 여읜 것이 깨끗한 마음이다.
**************************************
이제부터 법(法)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 전에 어느 젊은 스님이 다녀갔는데 미얀마에 가서 1년 가까이 공부하고 와서 그곳의 공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곳은 스님 열 분을 만나든지 백 분을 만나 ‘불교가 뭡니까?’ 하고 물으면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삼법인(三法印)’을 가지고 똑같이 대답한단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스님을 만나 “불교가 뭡니까?” 물으면 대답이 다 각각이다.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럽다. 또,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남방은 통일되어 불교를 얘기하니까, 1년 안되어 배운다. 배우고 나서 알려 하는 것보다 수행에 집중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많은 생각을 했다. 다양한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 하나를 놓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금강경」의 표현이 다르고, 「화엄경」, 「법화경」 표현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중국에는 엄청나게 종파가 많았다.
선(禪)에서는 또 다르다. 이 선이라는 것은 다른 종파와 분명 브랜드가 다르다. 이것은 차차 이야기 하자. 불교의 다양함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다양한 것을 이해하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다. 그런데 단점도 있다. 단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일생을 다 보낸다.
초기, 중관, 유식, 천태, 화엄, 정토, 선을 다 배우려면 평생을 해도 불가능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나부터 통일하자고 해서 ‘중도연기(中道緣起)’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중도연기(中道緣起)로 말하고 있다.
다양한 것을 한 꾸러미 꿰듯이 회통한 분이 원효 스님이다. 그래서 원효 스님을 ‘회통불교’라 한다. 그런데 거기까지 능력이 안되는 분은 이 불교, 저 불교 하니까 자꾸 대립하는 걸로 오해한다. 또 실제 갈등도 한다. 육조 스님도 그것이 안타까워 “다투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라고 하셨다.
여기에 ‘마하반야바라밀’의 ‘마하’는 ‘크다(大)’고, ‘반야’는 ‘지혜’다. ‘바라밀’은 ‘큰 지혜로 저 언덕을 건너간다’ 라는 말이다. 이 ‘마하’는 ‘깨끗한 마음이 허공과 같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이 뭐냐 하면, ‘너다-나다’가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무상(無常), 무아(無我)라 했는데 여기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라” 이것도 무아(無我)를 얘기한 것이다. “내가 없다.” 이게 핵심이다.
「반야심경」 맨 앞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있다. 오온은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행위(行)ㆍ의식(識)을 말한다. 물질(色)은 이 몸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형상 지어진 것이다. 그 오온 중에 느낌(受)ㆍ생각(想)ㆍ행위(行)ㆍ의식(識)이 정신이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난다(五蘊皆空 度一切苦厄).” 했듯이 괴로움의 원인은 “내가 있다”는 데 있다. 처음 듣는 분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중도연기를 간단히 설명하면, 어두운 곳을 가다가 새끼줄이 길게 있으면, 이기심 때문에 착각을 한다. 긴 것이 뱀이라는 경험에 의해서, 새끼줄로 보지 않고 뱀으로 본다. 뱀이라 보면 그때부터는 ‘저 뱀한테 물리면 죽는다.’는 공포심도 일어나고, ‘저 놈을 잡아야 한다’ 하고 망상을 계속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새끼줄이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뱀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괴로움과 재앙이 벌어진다. 그러면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고뇌하다가 밝은 불빛으로 새끼줄을 비춰보면 어떻게 되나? 정말 황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새끼줄을 뱀이라 착각하는 것이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면 우리 존재원리를 왜 무아(無我)라 하느냐? 이렇게 듣고 보고 하는데, 왔다 갔다 하는데 왜 무아냐?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무아다.
어쨌든 우리가 새끼줄을 뱀이라고 착각해서 공포심도 일어났고, 증오심도 일어나 여러 가지로 고뇌했는데 불빛을 비춰보니까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다. 이것이 깨치는 것이다. 그러면 「반야심경」에 “일체의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롭고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갈등, 대립, 그리고 전쟁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 무아를 보기 위해, 뱀이라 착각한 것을 새끼줄로 보기 위해 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공부의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늘 결론은 불교는 무아다. 왜 무아냐? 연기이기 때문에 무아다. 그러면 연기는 무엇이냐? 지금 현대 물리학에서도 거의 90% 부처님 말씀한 그 연기를 설명을 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그것을 설명하겠다.
강의 3회
“수행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입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스승을 찾아가는 목적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죠.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불교는 이 ‘마하반야바라밀법’에 다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이 경이 267자라 하는데 핵심 되는 말이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우리 마음 속에 마하반야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육조단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뿐입니다. 육조스님이 이렇게 저렇게 달리해서 설명해도 내용은 ‘오온개공’입니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마하반야’를 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그걸 못 느끼고 행위도 못하느냐. 이게 문제인데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행위 할 때는 당신도 괴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깨닫고 난 후에 자기가 없다는 무아, 오온개공에서 행복하게 사는 바라밀법이 나왔습니다. 무아를 안 지혜로 세상을 보면서 생활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할 때 ‘깨끗하다’의 반대가 ‘더럽다’이니,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렇게 이해하지요. 이것은 일반 상식의 이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끗함은 ‘깨끗하다-더럽다’는 그 양변을 초월한 깨끗함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면 벌써 마하반야바라밀법이 우리 마음속에 성취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면 ‘더럽다-깨끗하다’, ‘나다-너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한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또한 이것이 ‘오온개공’과도 같은 말입니다.
대사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한참 침묵하시다가 이에 말하되,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혜능스님이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이렇게 말하고 당신도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여기에 깨끗하다도 앞의 설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법회에서 법문 듣기 전에 잠깐 입정하면서 죽비를 치지요. 바로 그 죽비 치는 것과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침묵하는 것과 같습니다. 침묵할 때 내 마음 속에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하는 분별심을 비우라는 거지요. 그게 죽비 친 뜻입니다.
비우고 이 강의를 듣게 되면 훨씬 공부가 잘 되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죽비치는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무슨 의례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할 때 이 조용한 것도, 시끄럽다에 상대되는 고요함이 아니고 ‘시끄럽다-조용하다’는 양변을 초월해서 마음을 그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단경」은 깨달은 분이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의미가 깊습니다.
‘선지식(善知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부 많이 해서 도통한 스님을 선지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법문 들으러 온 분들께 선지식이라 했습니다.
왜 선지식이라 했느냐? 우리 존재원리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지식아’ 한 겁니다. 격려하는 차원도 있지만, 도인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다 도인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견해가 다르다고 외도들이 와서 공격하고 욕하고 심지어 부처님 얼굴에 침까지 뱉는 모욕을 주어도 화를 안 냅니다. 화 안 내는 이유는 그 사람도 존재원리가 부처님이다, 본래 부처인데 착각해서 부처님 행위를 못 하고 상대편을 비난하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 착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움이 안 일어나고 오히려 연민하기 시작합니다. 깔보는 아니라 동등하게 부처라는 것을 알고 그 선상에서 연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 안내는 제일 좋은 방법이 이 길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깨끗하다, 조용하다, 또 오온개공(五蘊皆空), 응무소주(應無所住) 이걸 알면, 이 마음의 존재원리를 이해하면 인간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습니다.
나는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세계가 도깨비 방망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이 사회나 남북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어요. 정치문제도 다 풀립니다. 차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활화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의식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그것을 실천하고 싶은 생각이 나고, 실천해보면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중에는 안 하면 더 괴로워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 범양이다. 좌천해서 영남의 신주로 옮겨 살다가
*********************************************************
범양은 지금 북경 부근인데 범양 노씨가 우리로 말하면 명문 집안이었답니다. 그런데, 좌천되어 지금 홍콩 가까운 광주 부근에 유배되어 현지 소수 민족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지금 전해지는 육조스님 진신상을 보면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어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혜능이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노모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 가난해서 시장에 나무를 팔고 살았다.
***************************************************************
혜능스님은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겁니다. 가난했으니 교육도 못 받았습니다. 당시는 유교사회니까 효가 삶의 최고 덕목이었는데, 효행은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해서 시장에 팔아 어머니 방 따뜻하게 해드리고 생활도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를 모셨겠지요.
******************************************************************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니 혜능이 숙소까지 나무를 날라다 주고 돈을 받아 나오려다가 「금강경」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이 한번 들음에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깨달아
*****************************************************************
여기에 깨달았다는 것은 확철대오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연히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덕이본 육조단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깨달음은 확철대오가 아닙니다.
************************************************************
그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손님이 답하기를 “내가 기주 황매현 동쪽 빙무산의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니 지금 그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 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바로 견성하여 부처가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듣고 보았다.”
***************************************************************
지금도 황매현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10㎞ 정도 올라가면 5조스님이 계셨던 오조사가 있어요. 그 산을 빙무산이라 하고 동쪽에 오조사가 있고, 서쪽에 정각사라는 절이 4조 도신스님이 주석한 절이죠. 그 황매현 빙무산 오조사에 오조 홍인스님이 주석하셨습니다.
오조스님께서 「금강경」을 굉장히 권했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조 도신스님까지는 달마로부터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전해 왔는데 오조스님부터 금강경으로 바뀝니다. 「금강경」은 내가 경 중에 제일 좋아해서 강의도 하고 열심히 봤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이 발견한 그 존재원리나 이 「육조단경」이나 「백일법문」도 모두 중도연기 하나로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모두 ‘오온개공’이라 표현하는 것은 거의 같습니다.
***********************************************************
혜능이 그 말을 듣고 전생의 업연이 있어 곧 어머니와 인사하고 황매현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였다.
***********************************************************
당신이 확철대오는 못 해도 ‘내가 이 공부에 대한 인연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겁니다.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출가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육조스님이 살아온 내용이나 도인이 되고 나서 고향에 국은사를 세우고 어머니, 아버지를 합장해서 묘를 모셨어요. 지금도 있습니다. 이런 지극한 효성으로 보면, 만일 「금강경」을 안 듣고 못 깨달았으면 목에 칼을 대고 너 출가해라해도 절대 안 갈 분입니다.
금강경을 듣고 의식에 상당한 변화가 생긴 겁니다. 어머니에게 세속적인 효만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각이 바뀝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심히 볼 대목입니다.
흔히 불교 공부를 고행하는 걸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부처님도 고행이 아니라고 했어요. 시각이 조금씩 바뀌면 바뀐 만큼 마음이 밝아지거든요. 밝아지는 것만큼 우리 마음도 행복감도 더 느끼고 즐거움도 더 느낍니다. 불교 수행은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것도 억지로 앉아 있으면 다리도 아프고 고행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뭔가 육조스님과 같이 느끼고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에 대한 가치를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어서 앉아 있으면 절대 그게 고통으로 안 느껴집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걸 어떻게 해, 그 어려운 거 어떻게 해,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보는데 이런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시각만 바뀌면 즐거움으로 공부하면서 생활도 그렇게 하게 됩니다.
강의4회
불성에 남북 없거늘 무엇을 차별하리
“불성에는 귀천도 없고 고하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이것만 알면 정말 편안합니다.스스로 괴로울 때 한번 점검해 보세요. 내가 남하고 무엇인가 비교하고 있지 않는가?”
*********************************************************
오조스님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인데 지금 이 산에 와서 나에게 예배하며, 무엇을 구하는가?”
***********************************************************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죠. 우리가 절에 가면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더러 목적 없이 오는 이가 있어요. 또 절에 가는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분도 많고요.
심지어 ‘아들, 딸 시집가는데 날 잡아주십시오’ 하는 분도 있어요.
여기 오조스님도 그걸 물은 겁니다. “무엇 때문에 찾아 왔느냐?”
육조스님이 살던 신주에서 오조스님이 사신 양자강 황매현까지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덕이본」에는 한 달이 걸렸다고 나오죠. 육조스님이 「금강경」 듣고 확철대오는 아니지만, 이미 지견(知見)이 났고,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긴 상태에서 한 달 동안 걸어왔으니까 그 과정이 그대로 공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차타고 가니까 잘 안 되지요.
당시에는 멀리 선지식을 찾아 걸어가는 과정이 그냥 공부였어요.
******************************************************************
혜능이 답하기를 “저는 영남의 신주 사람입니다. 이렇게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 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
멀리서 온 것은 부처 되는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 부처 되는 법이 마하반야바라밀법이고, 오온개공, 응무소주 이생기심이고 이게 불법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절에 가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복 빌러(祈福) 가는 분도 많지요.
「금강경」에 대해서 조사스님들이 풀이해 놓은 것을 보니까, “기복은 놋그릇 구하는 것이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진금(眞金)을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했어요. 색은 놋그릇이나 금이 비슷하지요. 그렇지만, 금이 더 좋고 가치가 있으니 우리는 기복이 아니라 법을 구해야 합니다.
***************************************************************
오조 홍인스님이 혜능에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
오조스님이 “너는 변방에 사는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되겠느냐?” 하는데, 혜능스님을 떠보는 겁니다.
*******************************************************************
혜능이 답하기를 “사람은 남과 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佛性)은 남과 북이 없습니다.”
******************************************************************
여기에 우리가 존재원리를 알면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에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다. 이 불성을 바로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도 평등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짱’, ‘몸짱’도 필요 없어요. 뚱뚱한 사람, 날씬한 사람 다 평등합니다. 모든 게 다 평등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티코를 타더라도 벤츠 타는 게 안 부럽고, 지방 대학 다녀도 서울 대학 다니는 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벤츠 탄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니듯이 티코 탄다고 불행한 게 아닙니다. 또 서울 대학 나와서 사회에 진출하면 다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 안 나와도 행복한 사람 얼마든지 있어요. 명문 대학에 가서 적성과 소질에 맞지 않는 것 억지로 배워서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자기 소질을 살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나는 “불성은 남북이 없다” 이 말이 굉장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사람들이 이 말의 가치를 이해만 한다면 자기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돈 벌고 출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요. 그 노력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지위도 높아지고 돈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요. 정말 인간답게 살아 보겠다고 출세하고 돈 벌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남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출세하고 돈 벌려는 분은 아무리 높이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더라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목적이고 거기에 필요한 수단이 돈벌이입니다. 만약 돈벌이와 출세가 목적이 되면, 이것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해치고 부정 비리도 저지르지요. 그런 사람은 유혹에도 약하고 또,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뉴스에 자주 보지만,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이것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것 때문에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직장 생활하는 그 자체가 가치있고 재미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직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질을 발휘해서 직장과 사회에 기여하고 그만큼 돈을 벌어 인간답게 사는 것이죠. 우리가 직장 생활하는 것이나 공부 등 일상 생활에서 목적과 수단만 가릴 줄 알아도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반야바라밀” “오온개공”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모르더라도 이 생활에서 목적과 수단만 제대로 구분한다면 개인의 삶이 달라지고,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국가가 달라질 것 같아요.
이 불교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지 수단과 목적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립과 갈등을 줄이면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면서 최소한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다르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
오랑캐라고 하니 나는 오랑캐이고 스님은 아니니 다르지만, 불성은 어찌 차별이 있습니까? 몸은 키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고, 뚱뚱하거나 마른 사람이 있어 다르나 그 불성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 불성(佛性)이 뭐냐? “오온 개공” 하는 그 ‘공(空)’이 불성입니다. 응무소주하는 응무소주 된 상태가 불성이고, 아까 “깨끗한 마음” 하는 그 자리가 불성이고, 또 “고요하게 들으라” 하는 그 자리가 불성입니다. 말을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우리는 왜, 착각하고 있느냐?’ 형상만 보고 불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불성을 보면 ‘아, 이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없다’고 하니까 그냥 허망하고 공허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없다”고 하니까 이것만 구별해 보고 또 이걸 모르는 사람은 있는 것만 있다고 자꾸 고집하고 집착합니다. 실제 우리가 다 보거든요. 없는 것도 아니다는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보는데 있는 것 속에 공이라고 하니까 이게 깨져서 공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컵에 불성이 있어요. 이 마이크에도 불성이 있고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합니다. 오온이 공이다. 오온이 공이라는 것을 알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예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설명하자면,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지요. 그런데 반쪽만 보고 있어요. 그 나머지 반쪽인 불성은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성이 이 형상에서 분리되어 있느냐. 아니에요. 같이 있는 거예요. 이 안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물과 그 존재원리인 불성, 이것을 동시에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별 거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서 못 보는 거예요. 공간이 좀 떨어져 있으면 알텐데 하나로 되어 있으니까 너무 가까워서 못 봐요. 그래서 이것을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 없다고 비유합니다. 거울을 통해서야 내 눈을 보지 그냥 자기 눈이 눈을 볼 수 없지요. 이 불성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 불성에는 귀천도 없고 고하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이것만 알면 정말 편안합니다.
스스로 괴로울 때 한번 점검해 보세요. 내가 남하고 무엇인가 비교하고 있지 않는가? 거의 비교하고 있습니다. 유행도 그래서 생긴 겁니다. 그거 안 입으면 자기가 낙오된다고 생각하니까 남보다 쳐지고 남한테 천대받는다고 생각하니까 유행을 쫓아갑니다.
평등하다는 것을 알면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인종도 극복할 수 있고요. 빈부,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양이라면 그 본질은 불성, 공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컵에 불성하고, 이 마이크에 불성이 각각 있어요. 이것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전체의 불성을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이것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허공 같다.
************************************************************
오조스님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더 묻지 않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
오조 홍인스님이 보니까 갓 출가하러 온 행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대단하지요. 오조스님이 더 이야기하려다가 행자와 툭 터놓고 얘기하면 오래 산 스님들이 텃새하고 해칠까 싶어 가서 일이나 해라. 그 정도면 너가 불교를 이해하는 깊이를 알겠다 그런 것이죠.
************************************************************
그때 혜능은 한 행자의 안내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
스승을 찾아가서 선문답을 하고 방앗간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합니다.
스승 찾아간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강의5회
福에도 고통 따르니 生死 벗어날 수 없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
3.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命偈)
******************************
여기에 육조스님이 행자생활을 끝내고 법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
오조 홍인스님이 하루는 문인(門人)을 다 불러 모이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
혜능행자가 온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조스님께서 천여 명 대중을 다 불러 모읍니다.
**********************************************************************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
세상 사람은 생사의 일이 제일 크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생사는 태어남과 죽음도 포함되지만, 그것보다 일상생활로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안하면 생각이 일어났다-꺼졌다 반복합니다. 이게 속성입니다. 도인이든, 아니든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심으로 일어났다-꺼졌다 하면서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데, 우리 본질인 불성을 깨달으면 똑같이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만, 그것이 전혀 우리한테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인도에서는 한 찰나라고 하면 1/30초라고 하는데요. 한 찰나 간에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이 수십 번 한답니다. 이것이 뭐와 같는가 하면, 문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떠다니는 먼지와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면, 그 자체가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 결과가 되는데 우리가 그 본질, 불성 자리, 오온개공 자리를 보게 되면, 그것이 전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별심이 안 일어나야 도인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는데 잘못 이해한 겁니다. 하나는 세탁이 되어 깨끗한 데에서 생멸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는 오염이 되어 분별하고 있는 차이입니다. 그럼, 오염이 진짜 오염이냐. 그것도 착각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을 꿈 깨는 것에 비유합니다. 꿈 깨는 것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생사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생각을 일으켰다가 거두어들였다, 일으켰다 거두어 들였다 하는 그것을 생사로 보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이 안에도 태어나고 죽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죽음까지 가니까, 그러나, 죽음만 생사하는 게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 일어났다가 또 사그러졌다 하는 그 마음을 통틀어 생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생사의 일이 굉장히 큰데 복만 지어서 되겠느냐? 그 복 가지고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복에도 항상 고통이 따라 다닌다는 말입니다.
법을 공부해서 “오온개공”을 알고 법을 체험하면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다.
*********************************************************************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스스로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조로 삼을 것이니 어서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
대중을 다 불러놓고 복으로는 태어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 ‘본래 성품의 반야지혜’는 마하반야를 말하지요. 그 마하반야로 게송을 하나 지어 오너라. 만일 그 게송이 깨달음의 게송이라면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대조사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일천여 명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공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다 알 수 없으니까, 대중의 공부 능력을 게송으로 공모하는 방식이지요.
당시 대중에서 신수스님이 제일 빼어난 분이었어요. 그런데 육조스님과 같이 행자도 뛰어난 견해를 가진 분이 있으니 대중의 공부 견해를 게송으로 받아 당신의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물색하는 것입니다.
*********************************************************
문인들이 지시를 받고 각자 방으로 돌아와서 서로 말하기를 ‘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뜻으로 게송을 지어 스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상좌가 교수사이니, 법을 얻은 후에 자연히 의지하면 되니까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짓지 않았다.
**********************************************************
神秀신수상좌가 당시에 오조 홍인스님 밑에서는 교수사로 제일 공부가 많이 되어 가르치고 있었어요. 지금 총림의 유나(維那)로 방장을 보좌하여 대중을 통솔하던 분이 자타가 공인하는 신수스님이 있으니까 우리는 게를 지어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스님이 게송을 지어 바치고 법도 얻을 테니 우리는 신수스님한테 의지하면 된다. 대중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 때에 오조스님 방 앞에 세 칸의 회랑이 있어 그 회랑 벽에 ‘능가 변상도’와 오조스님이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유행시켜 기념하고자 화인 노진에게 벽을 살피게 하여 다음날 시작하려 했다.
******************************************************************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오조스님이 ‘금강경’만 읽으면 견성성불 한다 하시고 벽화는 ‘능가경 변상도’를 그린다고 했지요. 변상도(變相圖)는 경의 특색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금강경’ 그림을 그리면 맞는데 ‘능가경’을 그리라 했어요. 조금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
4. 신수(神秀)
******************
신수(606~706)스님은 스승인 오조 홍인(594~674)스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됩니다.
신수스님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많이 한 분입니다. 굉장히 유식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키도 8척이나 되었다고 해요. 반면에 육조스님은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았어요. 신수스님은 여러 모로 능력을 갖춘 분이었지만, 육조스님에 비하여 불성 보는 것에는 뒤떨어 졌던가 봅니다.
이 불성 자리를 보면 외형적 조건이나 능력 같은 것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수스님보다는 혜능스님이 도를 깨치고 난 후에 훨씬 더 행복하게 산 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성 보는 것이 능력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신수스님은 생각하되, ‘모든 사람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신수스님이 교수사로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이 게를 안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를 바치지 않으면 오조스님께서 어떻게 나의 견해가 깊고 얕음을 알 것인가?
게를 안 바치면 오조스님이 자기의 심중을 볼 수 없지요?
내가 오조스님께 마음의 게송을 지어 뜻을 밝혀 법을 구하는 것은 옳거니와, 조사의 지위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함은 오히려 범부의 마음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으려 함과 같다.
게송을 지어 오조스님께 바쳐 법을 구하는 것은 옳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그 자리를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수스님은 겸손한 분 같아요. 법으로 후계를 이어야지 다른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신분상승 하려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렇게 신분 상승해도 실제로 이 마음을 모르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행복하지 않아요. 나쁜 방법으로 얻으면, 그만큼 마음이 불안한 것이 당연하지요. 왜냐, 자기도 그렇게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다른 사람도 그런 식으로 내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침묵하며 생각하고 생각하되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게를 쓰려고 하니 자신은 없고, 안 쓰려고 하니 난감하고, 대중은 전부 자기 얼굴만 쳐다보는 것 같아 정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요.
밤이 삼경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니 남쪽 회랑 중간 벽에 마음의 게를 써놓고 법을 구해 보아야겠다.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사람 안 보는 밤중에 벽에다 써놓자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없지요. 이래선 안됩니다.
만약 오조스님이 게를 보시고 이 게가 합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면 내가 전생 업장이 두터워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
이 게를 보고 “견성 못한 게다.” 하시면, 성인의 뜻을 내가 이해 못한 것이니 육조가 되려는 것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신수스님이 상당히 사리 판단이 분명한 분입니다. 나중에 육조스님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 분은 낙양, 장안 쪽에서 3대 황제 동안 국사(國師)를 합니다. 그때 측천무후한테 육조스님이 도인이니까 그 분을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한 적도 있습니다. 육조스님은 측천무후의 초청에 병을 핑계대고 안 갔어요.
강의6회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보지 못한다”
오조스님이 말하기를, “너가 지은 이 게는 조그마한 견해는 이루었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안에 들지는 못했다. 범부가 이 게를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나, 이 견해로 만약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려 하면 얻지 못한다.”
신수스님이 밤 삼경에 촛불을 들고 남쪽 회랑 중간 벽에 게송을 쓰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게송은 이러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明鏡)과 같으니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중국의 옛날 명경(明鏡)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옛날 명경처럼 세우면 세워지고 접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안 보이고 그런 거라면 이 비유가 참 좋아요. “마음이 명경대와 같다.” 마음이 그렇잖아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면서) 이렇게 내면 작용하고 (손을 돌려 손등을 보이면서) 거두어 들이면 접어 들어가는 것과 같잖아요.
중국 명경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비유가 잘 되었다고 볼 수가 있어요. 명경대가 일어났다-꺼졌다,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의 비유로는 잘 되었다고 보는데 여기에 문제되는 대목이 뭐냐?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勤拂拭)”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문제냐?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불교를 “뗏목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저 언덕에 건너가면 뗏목은 건너는 수단이니, 저 언덕에서는 뗏목이 필요 없지요.
이 ‘육조단경’ 보는 것도 뗏목과 같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저 언덕에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단경’을 보는 것은 저 언덕,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지요.
그리고 ‘능엄경’에는 손가락과 달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지시하는 표현이죠.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라 하는 건데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죠.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하는 것은 손가락, 뗏목이에요. 오조 홍인스님은 무엇을 요구했느냐? 깨달은 내용을 요구한 것이죠. 즉 손가락이 아닌 달을 요구한 겁니다. 그런데 신수스님은 손가락을 이야기한 거예요. 오조 스님이 요구한 것에 충족이 안 된 겁니다.
그러나 신수스님의 이 게송은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인과법(因果法)은 충분히 됩니다. 우리가 “선인선과 악인악과” 이 가르침대로 삶을 살면 선업을 닦아가는 것이죠. 실제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은 인과 법문을 참 많이 하시거든요. 부처님도 인과 법문을 참 많이 했고요. ‘아함경’은 거의 인과법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과법도 지키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그래서 그게 수용되는 거예요.
우리 한국 불교는 현대에 동산스님이나 효봉스님 계실 때에 신도들에게 인과법문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인과법문 잘한 분 중에 석암스님이라는 언변이 뛰어나신 분이 계셨는데, 인과 법문만 해도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고 그랬습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이 정도만 되어도 인과법문은 훨씬 넘습니다.
여기에 잠깐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달라이라마 스님도 법에 대한 법문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법문을 주로 하는데 그것은 티벳 불교의 특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티벳 불교는 끝없이 보살행을 하면서 성불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불교입니다.
그래서 내가 달라이라마 스님에게 직접 물은 적이 있어요. “달라이라마들은 끝없이 윤회를 거듭 하는데 그것이 불교의 열반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분 얘기가 “부처님이 끝없이 보살행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달라이라마도 그렇게 윤회를 하면서 보살행을 하고 성불을 향해서 하고 있다” 하더라고요. 이것이 티벳 불교의 특징입니다.
티벳 불교와는 달리 한국 불교는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인과법문 보다도 법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합니다. 많은 시간을 수행해서 성불로 가는 게 아니고 선종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단번에 바로 여래의 경지에 오른다. 그래서 꿈 깨는 것이다. 꿈 깨는 것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그것을 위한 법문을 많이 합니다. 요즘 선원장 스님들이 법문하는 걸 보니까 선 법문을 많이 하더군요.
여기에 보면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없게 하라.” 이 대목이 바로 손가락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손가락, 뗏목에 해당한 법문이지 “오온 개공” 하는 법문은 아닙니다. 육조스님의 법문에 비해서는 굉장히 질적으로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인가를 못 받은 겁니다.
신수 상좌가 이 게송을 쓰고 방에 돌아와 누우니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드디어 노공봉을 불러 남쪽 회랑에 능가변상도를 그리게 하려다가 문득 이 게를 보고 읽기를 마치고, 공봉에게 돈 3만냥을 주어 멀리 온 것을 깊이 위로하면서 변상도는 그리지 않겠다 하고 돌려 보냈다.
신수상좌가 게송을 벽에다가 써고 방에 돌아오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 이튿날 아침에 오조스님이 그림 그리는 노공봉을 불러 회랑에다 능가 변상도하고 오조스님까지 법을 전해온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밤 사이에 한 게송이 쓰여 있거든요. 오조스님은 이걸 누가 쓴 건지 모르지요. 그 게송을 읽어보고는 깨달음의 게송은 아니지만 이것이 변상도와 오조스님 법 전하는 그림을 그려 놓는 것보다 더 좋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노 공봉에게 멀리 돈 3만냥을 위로금으로 주고 돌려 보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바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하니 이 게를 남겨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해서 이것을 의지해 수행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보다 못하다.
이 게를 남겨 이것을 외우면서 수행하게 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림 그리는 것보다 낫다 그런 겁니다.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사람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림보다는 법을 의지해서 공부하는 것이 큰 이익이 있다
곧 오조스님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서 게송 앞에 향을 사르게 하니, 대중이 보고는 다 존경하는 마음을 내었다. 오조스님께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게를 외우면 바야흐로 견성을 할 것이니, 이것을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문인들이 모두 외우고 존경심을 내어 함께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오조스님께서 이 게송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만한 게송이 나오지 않으니 이것을 남겨 공부하게 하는 방편을 쓰십니다.
오조스님께서 드디어 신수상좌를 방으로 불러 묻기를, “네가 게를 지었느냐?
오조스님이 당신 방으로 신수스님을 불러서 그 게를 지었는지 확인합니다.
만약, 네가 지었으면 응당 내 법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나의 법을 얻으리라’ 하는 대목 때문에 이 게가 손가락이 아니고 달이 아니겠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여기는 그냥 격려하는 뜻에서 얘기한 것이지 법을 바로 봤으니 법을 얻는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지었으나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앞에 법으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육조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범부들이 하는 것과 같다. 그랬지요. 그 뜻입니다. 실은 신수가 지었으나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조그마한 소견이지만 그 소견에 의해서 법을 구하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서 보아 주십시오. 제자가 조그마한 지혜라도 있어서 대의를 알았습니까?”
자기가 작은 지혜로서 부처님의 존재원리 우리의 존래원리 대의를 알았습니까?
오조스님이 말하기를, “너가 지은 이 게는 조그마한 견해는 이루었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안에 들지는 못했다.
문 안에 못 들어오고 문 밖에 있다.
범부가 이 게를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나, 이 견해로 만약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려 하면 얻지 못한다.
이 게 가지고는 견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게를 의지해서 수행하면 인과, 즉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닦는 그런 효과는 있다.
모름지기 문 안에 들어야만 스스로 본성을 봄이니, 네가 가서 며칠 동안 생각하여 다시 한 게를 지어 나에게 보여라. 만일 문 안에 들어 스스로 본성을 보면, 마땅히 너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리라.”
너는 견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문 안에 들지 못하고 문 밖이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무상정각을 얻을 수 없으니, 돌아가서 하루나 이틀 사이에 다시 한번 생각해서 새로 게를 지어오면 그 게가 대의를 깨달으면 너한테 가사와 법을 부촉하겠다.
신수상좌가 돌아가 며칠이 지났으나 게송을 짓지 못했다.
오조스님이 대중한테 게를 받아 후계자를 정하려고 했는데 신수스님이 게를 바치기는 바쳤는데 제대로 안 된 게를 바쳤지요.
다음은 혜능스님이 제대로 된 게를 바쳐 법을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강의 7회
' 본래무일물’ 알면 모든 갈등 절로 소멸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
5. 게송을 바침(呈偈)
*************************
혜능 스님은 8개월 동안 방아 찧고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게송을 짓습니다. 이제 혜능 스님이 게송을 바쳐 오조 스님으로부터 법을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가면서 이 게송을 외우고 있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한 동자가 지나가면서 신수 스님이 지은 게송을 외우는데 혜능 스님은 그것이 성품도 보지 못했고, 대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 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모르는가?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어나고 죽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을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육대(六代)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선뜻 남쪽 복도 벽에 상(相)이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바로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남짓 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에도 가 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워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 하였다.
***********************************************************
혜능 스님이 오조 스님 방 앞에 가지 않은 것은 오조 스님과 가까이 지내면 대중들이 자신을 위해(危害)할까 싶어 그걸 알고 일부러 오조 스님 방을 멀리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에 예배하였고,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어떤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의(大意)를 알았다.
****************************************************************
알다시피 혜능 스님은 글자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기 「단경」에 보면, 「금강경」, 「열반경」을 많이 인용한 걸로 봐서는 글자는 몰랐다 하더라도, 그 분이 마음 성품자리를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경을 읽거나 어록을 읽으면 자기가 깨달은 내용하고 그 대목하고 서로 계합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암기가 되어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이걸 보고 학자들 중에는 혜능 스님을 ‘무식한 분이 아니다’, ‘글을 아는 분이다’, ‘잘못 전해졌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글을 모른다고 해서 중요한 대목을 모르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혜능 스님 다른 사람보고 신수 스님의 게송을 읽어달라고 해서 그 게송을 듣고 나서 깨달음에서 나온 게송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어요.
***********************************************************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고 자기 성품을 보아야만(識心見性) 바로 큰 뜻을 깨닫느니라.
**************************************************************
혜능 스님은 신수 스님의 게송이 성품 그 자리를 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게송을 지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서쪽 벽상에 대신 쓰게 하여 스스로 본심을 드러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할 부분은 “본래 마음(本心)을 알지 못하면 법을 외우더라도 이익이 없다.” 입니다. ‘본래 마음을 안다’는 것에는 깨달음의 얘기도 물론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보다도 ‘본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고 공부해야 이익이 있지 ‘우리가 중생이다’, ‘닦아서 증득해야 된다’, ‘닦아서 부처가 되어야 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뭔가 닦을 것이 있고, 수행할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이해하고 공부를 하면 공부에 큰 이익은 없다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고 하면 항상 손가락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설사 우리가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본래 부처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공부를 해야 이익이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심을 모르면 법을 외우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
혜능 스님의 이 게송은 어찌 보면 신수 스님이 지은 게송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이 게송을 깨달음의 게송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직 혜능 스님이 확철대오 상태는 아닙니다. 오조 스님 방에 들어가서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거기에서 확철대오를 하게 되지 아직은 80 ~ 90% 가까이 간 것입니다.
“밝은 거울에 받침이 없다.” 여기 ‘대가 없다’는 말에 대한 해석을 정확히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접으면 밝은 거울이 사라지고 열면 대가 거울을 받쳐줘서 거울이 나타나지요. 그렇게 해석하면 어느 정도 이 대에 대한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깨닫거나 깨닫지 않거나 본래 존재는 성불해 있다. 대를 펴는 것도 거울이 하고 접는 것도 거울이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을 해 봅니다. 우리의 번뇌가 팔만사천 가지이면 지혜도 팔만사천 가지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굉장히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까? 강의를 들으러 앉아 있으면서도 생각은 집에 왔다 갔다 하지요.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을 하지만 밝은 거울과 대가 접혔을 때를 정혜(定慧)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암(明暗)이라고 하기도 하고 살활(殺活)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깨달으면 말할 것도 없고 못 깨달았더라도 불교를 이해하면 우리의 의식구조가 굉장히 단순하다는 것을 압니다. 의식구조뿐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인들은 성격이나 마음 쓰는 것이 참 단순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그런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사장되고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수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굉장히 단순화시키는 겁니다.
*****************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
*******************
돈황본에는 이렇게 나오는데 「조당집」이나 다른 판본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나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본래무일물’이라고 하면 조금 선(禪)적인 표현이 되는데,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 라고 하니 교(敎)적인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래무일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이나 ‘불성이 항상 청정하다’라는 말은 같아요. 왜 청정하다고 하느냐 하면 ‘더럽다-깨끗하다’의 상대적인 청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정은 ‘더럽다-깨끗하다’를 초월한 양변을 여읜 청정입니다. 그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본래무일물’이나 ‘청정하다’는 그 자리는 ‘너다-나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인종도 ‘검다-희다’, 종교도 ‘네 종교-내 종교’, 민족도 ‘네 민족-내 민족’ 등 여러 가지 상대되는 해석을 하며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그런 양변을 모두 초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자리를 이해하고 보기 위해서 「육조단경」도 보고, 출가도 하고, 불교도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형상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쪽만 보고 있는 겁니다. 본래 청정한 자리, 즉 본래무일물이라는 자리를 봐야 온전히 다 보는 겁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모든 갈등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반쪽만 보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 부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형을 ‘부시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에서 데모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로인해 잃게 되는 비용 또한 엄청납니다.
본래무일물의 그 자리, 항상 청정한 그 자리를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여기에서 육조 스님께서 ‘본래무일물’의 그 자리를 알고서 이 게송을 지었다는 사실은 굉장합니다. 「육조단경」을 요약하면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불교를 얘기하라고 하면 ‘본래무일물’ 이 한마디입니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공부하고 어록을 공부하는 것도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래도 ‘부처님 말씀에는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절에도 가고, 저 또한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삭발하고 지금 스님으로 사는 겁니다. 안 그러면 머리 깎고 절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지금 계속 이 법문이 나오는데, 이 법문에 전부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항상 청정하니’,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다 똑같은 소리입니다. 그 자리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그런 게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티끌과 먼지를 나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무일물 자리를 알면 티끌과 먼지가 금보다 귀중한 물건으로 바뀝니다.
강의 8회
자기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하게 된다
“지위가 높은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니라. 너는 국민을 괴롭히는 국왕이나 대신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이다.”
우리는 ‘똥은 더럽다’고 ‘금은 귀하다’고 합니다. 상당히 대립되는 물건인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로 그 자리를 깨달으면 금이나 똥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아주 깨끗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혼용하지는 않습니다. 금덩어리를 밖에 두지 않고, 또 똥 덩어리를 귀하다고 해서 옷장 안에 넣어 두지는 않습니다.
각기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쓰면서도 어느 것이 더럽고, 깨끗하고, 귀하고, 천하다 이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알면 사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차이를 초월하면 인위적으로 분배 안 해도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듯이 자연적으로 빈부 차이는 있는 그대로 평등하면서 또 많은 데서 적은 데로 자연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그런 의식으로 전환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다타 장자에게 ‘더 많이 가져도 좋다’ 하신 뜻
부처님 당시 굉장한 부자였던 수다타 장자(長子)가 “부처님이시여, 제 재산이 제가 공부하고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를 체험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더 가져라.” 하셨습니다. 부자인데 더 가져라 합니다. 왜 일까요?
원래 ‘수다타(Sudatt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데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급고독(給孤獨)’ 즉, ‘외롭고 소외된 사람한테 배급을 잘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래무일물’을 모르기 때문에 재산 활용을 못해서 그걸로 인하여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문에 매일 나옵니다. 땅값이 올라서 졸부가 되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수다타 같은 분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기도 도움 되고 남도 도움 되는 이 존재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본래무일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다타 장자에게 “너는 더 가져라.”고 하셨던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이 가지거나 적게 가지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종교 얘기하기가 그렇습니다마는 예수님은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굉장히 부지런한 분입니다. 부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분이 부처님이 아니에요. 살아서 삶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행동하는 분이 부처님이지, 산중에서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분이 부처님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이해심도 많고 굉장히 지혜롭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돕고 남을 돕는 것인지를 너무나 지혜롭게 잘 아는 분이십니다.
**********************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
여기서 다시 이 게송이 나오는데 이것은 〈돈황본〉에 나오니까 할 수 없이 거론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덕이본〉이나 다른 판본에는 이 게송이 없습니다. 내용을 보더라도 앞의 게송만 해도 충분한데 두 번째 나온 이 게송은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내용도 거의 유사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편집을 하면서 뒤의 게송에 대한 필요성을 안 느꼈기 때문에 뺀 것 같기도 합니다.
******************************************************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
이렇게 게송 두 개를 벽에 썼습니다. 서쪽 벽에 썼는데 절 내에 있는 대중들이 혜능 스님이 능히 이 게송을 짓는 것을 보고는 다들 괴이하게 여깁니다.
일자무식(一字無識)이고 이름도 제대로 불려 지지 않았던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묵묵히 방아만 찧던 혜능 스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안 가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게송을 지어내니까 대중들이 잘 알지는 못해도 신수 스님보다 낫다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이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겼던 겁니다.
*********************************************************************
오조 스님께서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바로 큰 뜻을 잘 알고 있음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이 게송도 또한 아직 요달(了達)하지 못하였다!” 하셨다.
**********************************************************************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의 게송을 보고 손가락을 벗어난 달의 입장에서 게송을 지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오조 스님은 깨달음의 게송을 지은 사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법을 전해 육조(六祖)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신수 스님이나 다른 스님이 이 게송을 지었다면 오조 스님도 반가워하고 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도 하고 법을 전해줬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법의 전수를 놓고 스님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이 대중들로부터 위해(危害)를 받을까 굉장히 조심합니다.
여기에서도 대의를 잘 알았으나 대중들이 알까 두려워서, 혜능을 위해할까 싶어서 오조 스님은 대중들에게 ‘이 게송도 또한 아직 요달하지 못했다’ 즉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런 걸로 봐서 그 당시에도 스님들이 견성 못 했으니까, 사람이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패거리도 있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가 지금과 조금 다른 점은 법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닌 법 때문에 그랬다고 하니까 조금은 낫습니다. 그러나 법 때문에 했든 명예나 돈 때문에 했든 다투는 마음을 갖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본래무일물’ 그 자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니 직업에는 빈부귀천이 없다.
제가 어디 가면 이 얘기를 잘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 똥 푸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계급사회였으니까, 모두가 똥 푸는 일을 하는 사람을 천민으로 여겼고, 스스로도 자기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해서 자기 학대를 많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하고, 바른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을 한 번 만나 뵈었으면 했는데, 스스로 자기 직업이 부끄럽고 옷에 냄새도 나고 해서 부처님을 뵐 생각을 못했어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 똥 푸는 사람이 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는데, 이 분이 부처님이 계시는 모습을 보자 스스로 부끄러워 다른 길로 피해갔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 날 그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이 분이 피해가는 것을 보시고는 그 길을 따라 갑니다. 그래서 이 똥 푸는 일을 하시는 분이 부처님이 자기를 따라 오시는 것을 아시게 되었죠. 그래서 이 분이 부처님께 가셔서 “부처님이시여! 왜 저를 괴롭히십니까? 저는 부끄러워 부처님 근처에 가지 않으려 하는데 왜 부처님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자신을 천민이라고 학대하는데, 천민이라는 것도 힘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도이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귀천이 있었겠느냐.” “그러면 제 직업이 천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천하지 않느니라.
아무리 지위가 높은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니라. 너는 남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기꺼이 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열심히 돈도 벌고 있으니까, 너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너는 국민을 괴롭히는 국왕이나 대신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하게 된다.
우리도 ‘본래무일물’ 자리를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을 굉장히 사랑하게 됩니다. 불교는 어찌 보면 자기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기를 희생하는 종교다.” 라고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만에요.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도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남도 학대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사랑 안 하면 절대 남한테 사랑받지 못합니다.
저도 제 자신을 굉장히 학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대 때문에 젊어서 출가 전에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얼마 전에 신도님의 권유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폐가 70내지 60퍼센트 밖에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해요.
저는 폐병에 걸린 이유를 출가한 이후에 알았습니다. ‘나를 학대해서 폐병이 걸렸구나!’ 그 후로부터는 제 스스로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굉장히 저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어찌 보면 불교는 자기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절대 희생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강의 9회
‘몰록’ 깨친 순간부터가 꿈 아닌 진정한 현실
‘금강경’-‘응무소주이생기심’ 결국 같은 이야기
욕심으로 필요없는 면적 키우면 싸움 절로 생겨
*********************************************************
6. 법을 받음(受法)
오조 스님이 밤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하자,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言下)에 바로 깨달았다. 그 밤에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다.
************************************************************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을 보호하려고 했지요. 밤 삼경이면 다 잘 때인데, 대중 몰래 혜능을 방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줍니다.
그런데 『덕이본』을 보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돈황본』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들어간 것이죠. 그렇지만, 『금강경』 전체 내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하는 그 자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입니다. 그 자리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가 바로 그 자리를 표현해서 『금강경』 전체가 이 내용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나 같은 얘기입니다. 후대로 오면서 구체적으로 그 대목을 넣은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아는 것이 가장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오는 그런 자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옷 잘 입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몸짱, 얼짱 되는 게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이해하면 그 분은 몸짱, 얼짱 되려고 따로 노력 안 해도 충분히 그렇게 됩니다.
왜냐? 자기 생활에 욕심으로 인해서 필요 없이 면적 키우는 일 안 합니다. 적당히 먹고 사고하고 행위해서 스트레스 받아 얼굴에 기미가 낀다든지 그런 일 없어요. 화장 안 해도 굉장히 예뻐집니다. 그래서 화장 하는 방법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고입니다. 화장 값 아끼려면 응무소주(應無所住,)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확실히 이해하셔요.
****************************************************************
“오조스님이 『금강경』을 설해 주니까 혜능스님이 한번 듣고 언하에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았다.”
****************************************************************
이것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한마디 말에 바로 깨달았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점수(漸修)인가? 천만에요. 점수와 돈오(頓悟)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모르고 수행하는 것은 아무리 100년, 200년을 닦더라도 그것은 착각 속에서, 꿈속에서 닦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닦았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그럼, 꿈속이 아닌 깨어 있는 현실은 언제부터냐? 바로 깨닫는 순간부터 꿈에서 깨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몰록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몰록 깨닫기 위해서 그냥 우연히 되는 게 아니고 꿈속이지만, 착각 속이지만 준비를 해온 겁니다.
예를 들어 육조 스님이 시장에서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얘기를 듣고, 뭔가 거기에서 깨달음이 생기거든요.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지만 그것을 알고 보니까, 어머니에게 하는 효(孝)보다 더 큰 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이죠. 불교의 깨달음 세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있었을 것이고, 저 홍콩 근처 광주라는 곳에서 양자강 기슭까지 가는데, 기록에 한 달이라고 나옵니다. 그 걸어가는 과정에 이 분은 누구보다도 공부를 많이 한 겁니다. 착각 세계지만 이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8개월 방아를 찧으면서 그 준비가 깊이 들어가서 『금강경』 한 번 더 읽는 소리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린 겁니다.
깨친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단박에 깨친다고 돈오(頓悟), 또는 돈법(頓法)이라고 합니다. 몰록 깨달았다, 몰록은 당장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8개월, 또 1개월 또 준비해온 과정 그것은 닦은 게 아닌가? 물론 닦았지요. 닦았으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왜? 착각 속에서 닦았기 때문에, 그래서 몰록 그런 것이지, 이 몰록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또, 몰록 깨친다고 아무 준비 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그렇게 깨쳤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점점 닦아가는 수행이 있지만, 그건 아직 꿈속이고 착각 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로 인정을 안 합니다.
‘몰록 깨쳤다’ 오해 많아
그럼 인정은 언제부터냐? 깨닫는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그게 꿈 깬 세계니까, 그게 진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 듣고 보고 하면서 절에 불교 믿는다고 수십 년 왔다 갔다 했는데 전부 꿈속에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꿈이다. 그런데 우리는 꿈인 줄 모르고 현실 중에 현실이라고 그 꿈을 집착해서 정말로 머리가 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하고 많이 싸운다고 해요.
이것을 알게 되면 싸움을 왜 합니까?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게 되지요. 내가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그 싸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존심 건드리는 게 제일 싸움을 크게 한다고 해요. 서로 인정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남남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도 그렇고 뭐든지 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저 사람 돕는 일이 나를 돕는 것이고, 나를 돕는 일이 저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 무슨 유토피아 같은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100%는 경험 못 했는데 그래도 몇 % 경험을 해보니까 그 말이 맞아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요. 이해관계로 싸우는 마음으로, 대립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결하려면 더 괴로워요. 그런데 부처님 말씀한대로 사고하고 생각하면서 인간관계도 맺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즐거워요. 안 깨달아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절대 고행이 아니다. 하면 하는 것만큼 즐거움이 나고 행복감이 생깁니다. 절대 고행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은 못 하더라도 이 체험이 100%가 있고 1%가 있고 2%가 있지 않습니까? 그 체험하는 %만큼 즐겁고 행복감을 느낀다.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여기에 언하(言下)에 몰록 깨친다. 그냥 된 게 아니라 준비가 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깊이 느끼고 믿는 사람은 그 기간이 짧을 것이고, 그 믿음이 약한 사람은 길 것이다. 그 차이이지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존재원리는 같다, 그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 믿음의 차이에 의해서 빠르고 늦음이 있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원리는 빠른 사람이나 늦은 사람이나 같다.
그리고 이것을 믿고 조금이라도 실천하게 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재미가 있습니다. 세속에서 이 원리를 알면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요. 이게 굉장한 겁니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그 일을 즐겁게 합니다. 즐겁게 하면 열심히 하고 깊이 있게 하고 그러다 보면 전문가가 되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보수도 따라오고 명예도 따라옵니다. 보수, 명예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한 가지가 해결됩니다. 뭐냐? 보수, 명예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분의 인격도 같이 형성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른이 없지 않습니까, 학계나 정치계나. 종교계에도 어른이 없어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인정 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장차 자라면 인격자가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직업 가지려는 목적이 돈입니다. 그런 한은 절대로 인격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방금 제가 말한 대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지, 돈을 추구해서는 인격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유스럽고 참 좋습니다. 좋은데 이걸 극복 못 하면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망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완성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불교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민주주의, 불교 통할때 완성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전부 돈이에요. 이래서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격자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부르기를 옆집 강아지 부르듯 합니다. 대통령 존경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나라에서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 부정하고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성세대 부정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성세대라도 과거도 보고 현재도 보고 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라서 우리도 변해서 포교하는 방법, 공부하는 방법도 변하고, 기성세대에서 잘못된 점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가 답습해온 그 길을 와서는 안 된다 변화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이 사회에 인격자가 없다는 거 정말로 불행한 일이에요.
돈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직업도 갖고 사회활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 사회가 정말로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가 완성되어 가려면 불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하고 민주주의하고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 법하고 180도로 어긋나게 제도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돈에 있다는 이것은 정말로 고쳐야 합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고는 전쟁, 갈등, 대립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전부 아까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보시면 정확하게 진단하신 겁니다. 부처님 말씀이 2,500년 전 일이지만 육조스님은 600년대니까 1,4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현실에 너무나 필요합니다.
강의 10회
대승 핵심은 定과 慧…말 달라도 내용은 하나
선지식 타령말고 법에 대한 가치 먼저 알아야
법통으로 다퉈도 다툼은 진정한 불교 아니다
*******************************************************
6. 법을 받음(受法)
곧 오조 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며 말씀하셨다.
“너는 육대 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 신표를 삼는다. 대대로 받들어 서로 전함에 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되 마땅히 스스로 깨닫게 하라.”
********************************************************
오조 스님이 깨닫도록 법(法)을 쓰시기는 했지만, 육조 스님이 그만큼 신심이나 여러 가지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선지식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공부 못하는 것이 선지식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전혀 안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100% 맞는 소리도 아닙니다. 자기도 준비해야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준비하면 선지식을 못 만났더라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산 스님이란 분이 “내 본래 면목이 뭐꼬?” “내 본래 면목이 뭐꼬?” 화두하고 다녔거든요. 어느 시장을 지나는데 사람 둘이 피가 나게 싸우다가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화해할 때 악수하면서 “이 사람아 자네 볼 면목이 없네” 했어요. 그런데 “내 본래 면목이 뭐꼬?” 화두 하던 분이 “면목이 없네” 하는 소리에 깨쳐 버립니다. 우리가 준비만 되면 도처에 선지식이 있습니다. 저 뒤에 가면 내 안에 있는 선지식을 찾아라, 내 밖에 있는 선지식은 내 안에 있는 선지식을 찾는데 도움을 줄뿐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지식 타령 하지 말고 법에 대한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 가치를 알아야 공부할 거 아닙니까, 가치 없는 일을 누가 하겠어요.
스님들이나 재가자들이 공부 안 되는 것도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가치만 알면 공부가 저절로 됩니다. 귀중한 일이니까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가치를 10원 짜리나 500원 짜리로 알면 공부 안 합니다. 이 가치가 1조원 하면 그 사람은 열심히 합니다. 10원이나 500원 짜리 가치로 알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짜들이 단위가 더 높더라고요. 이게 문제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몰록 깨닫는다고 하니까,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라 하거든요.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참선할 때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을 삼요소라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손가락이에요. 그 뒤에 중요한 달의 말이 있어요.
“그렇게 갖춰서 용맹정진하고 장자불와(長坐不臥) 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이 달의 말을 가지고 뜬 구름 잡는 소리다.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것이 허망한 소리가 아닙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은 뗏목입니다. 노를 저으면서 배 멀미를 해서 구역질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쩔쩔매면서 강기슭에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소리는 그 멀미하고 쩔쩔 매는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다 저 언덕으로 건너 주는 말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리를 뜬 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가짜 돈을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
오조 스님이 또 말하기를, “혜능아, 예로부터 법을 전할 때에는 목숨이 실낱과 같으니,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다. 너는 속히 떠나거라.”
************************************************************************
이런 대목을 보면 나도 마음이 안 좋아요. 도를 통했으면 그 스님을 존경하여 모시고 같이 공부하려고 마음먹어야지, 오조 스님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하셨어요. 그런데 여기는 법을 가지고 다투니까 좋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법 때문에 싸우는 것도 싸움이니까, 싸우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서로 다투면 불교가 아니다”는 말이 뒤에도 나옵니다. 그래서 법으로 다투든지 명예로 다투든지 다투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 삼경에 떠나려 하니 오조 스님이 몸소 혜능을 구강역까지 전송했는데, 바로 그 때 오조 스님이 지시하기를, “너는 가서 노력하여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설하지 말라.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다. 뒤에 널리 교화해서 미혹한 사람을 잘 이끌어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달음과 다름이 없으리라.”
혜능은 곧 하직 인사를 마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
여기서 미혹한 사람을 잘 인도해서 마음을 깨치게 하면 네가 깨달은 내용이나 그때에 깨달은 내용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부처님이 2,500년 전에 깨달은 것이나 지금 우리가 깨달으면 그 깨달은 내용은 같습니다. 이 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죠.
***************************************
그래서 “하직 인사를 마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
어떤 기록에 보면 육조 혜능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은둔한 곳이 광주 부근 해주와 사회입니다. 은둔기간이 16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39세에 지금 광주(廣州)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출가 수계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늦게 출가한 것이죠.
****************************************************************
두 달 반 만에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 수백 인이 따라와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중간에 다 돌아가고, 오직 한 스님이 있었으니 성은 진씨,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해서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와 범행하고자 하였다.
곧 혜능이 가사를 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이렇게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가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혜명에게 법을 전하니, 혜명이 문득 듣고 말끝(言下)에 마음이 열렸다. 혜능이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
대유령은 광주(廣州) 부근입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가면 삼도(三道)봉이 있듯이 대유령도 광동성과 다른 두 성의 경계에 있는 고개입니다.
육조 스님은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그 배후에 수백 명이 가사를 뺏고 자기를 해치려고 따라오는 줄 몰랐어요. 수백 명이 오다가 중간에 모두 돌아갔다, 그런데 한 사람만 남았어요. 성은 진씨(陳氏)고 이름은 혜명(惠明)이다.
덕이본(德異本)을 보면 이 상황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쫓아와서 가사를 뺏으려고 하니까 혜능 행자가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놓고 숲 속에 숨습니다. 혜명이 가서 그 발우를 드니까 안 들려요. 그때서야 두려운 생각이 들어 행자한테 ‘내가 의발을 뺏으러 온 게 아니고 법을 얻으러 왔습니다’ 라고 해서 혜능 스님이 법을 설해줬다.
“악(惡)도 생각하지 말고 선(善)도 생각 안 할 때 너의 본래 면목이 어떠하냐?” 이렇게 물었을 때 혜명이 그 말에 깨달았다 하지요. 거기에 해석을 붙이면 ‘악도 생각하지 마라’ 한 것은 가사를 뺏으러 올 때는 나쁜 마음으로 온 거고, 또 그 후에 발우가 안 들리니까 겁이 나서 발우를 뺏으러 온 게 아니고 법을 얻으러 왔다면서 좋은 마음으로 바뀐 거지요.
그래서 나쁜 마음-좋은 마음 둘 다 안 일으킬 때 네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 거기에서 깨달았다는 것인데 돈황본에는 그 대목이 없습니다. 덕이본은 상당히 법(法)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각색을 한 것 같아요.
****************
7. 정·혜(定慧)
****************
앞에서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나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것이 정(定)이고, “이생기심(而生其心)” 하는 것이 혜(慧)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왔다 갔다 하는 이 존재원리가 몸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고 정·혜 두 개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게 사는데 실제 따지고 보면 정·혜 밖에 없어요. 의식도 그렇고 이 몸, 컵, 마이크, 건물 전부 정·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초기불교에서는 “현상이 있든 없든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써 존재한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그래서 존재 = 연기 = 법 = 여래 = 또 존재 그래서 본래 부처라는 것이죠. 전부 정·혜로 되어 있습니다. 연기 현상이 정·혜입니다. 중도가 정·혜이고 말은 다른데 내용은 하나입니다.
미얀마에 가서 불교가 뭡니까? 물으면 백 스님, 천 스님한테 묻더라도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삼법인(三法印)으로 설명한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정·혜 둘 뿐입니다. 요약하면,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니까 “색이 공이고 공은 색이다” 하는 소리가 바로 이거예요. 색은 혜이고 공은 정입니다.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것을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내용은 같은데 지금 제가 얘기한 것도 수가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복잡하고 다양하니까 이것의 장점보다도 단점이 부각되어서 우리나라 스님한테 불교가 뭡니까? 하고 열 사람에게 물으면 열 사람 불교가 다 다릅니다. 백 사람에게 물으면 백 가지 불교가 나와요. 이게 단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장점으로 나타나면 백 사람이 얘기하든 천 가지, 만 가지로 얘기하든 정·혜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양하게 이해하고 또 깊이 이해해서 그것을 체험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대승불교의 장점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장점을 버리고 단점만 드러나서 듣는 스님들마다 천 가지 만 가지 불교가 따로 따로 얘기하니까 신도님들이 혼란이 와서 평생 불교 아는데 세월을 다 보내요. 미얀마에서는 열 사람, 백 사람 같은 얘기를 하니까 불교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답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뭘 하느냐 수행을 한답니다.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쪽은 단순한 걸 장점으로 살려서 불교 목적대로 잘 가고 있는데 우리는 장점은 없어지고 단점만 부각되어서 본래 목적대로 못 가고 제자리걸음이에요. 〈계속〉
강의 11회
“나·너 초월한 그 자리가 정토이며 극락”
법에 두 가지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면 정혜가 평등하지 않고,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다.
***************
7. 정·혜(定慧)
***************
여기에 제일 먼저 정(定)과 혜(慧)가 나옵니다. 정과 혜가 나오는데 이 자체가 우리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듣고 보고 계시는 게 정혜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혜는 작용하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시죠? 보고 계시죠? 듣고 계시죠? 지금 정신 작용도 하고 육체 작용도 하는 것을 혜(慧)라 하고, 작용하고 있는 그 근본 체(體)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아울러서 우리는 사고도 하고 행동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육조 스님이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보시면 됩니다.
*****************************************************************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와 도교인, 재가자들과 여러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聖人)이 전하는 바이고,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들어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
이 가르침은 정혜에 대한 것이죠. 듣고 보고 움직이는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이지 혜능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성인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존재원리를 이해하고 이 세상을 살면 갈등이나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 존재원리를 모르고 착각합니다.
어떻게 착각하느냐? 겉모습 형상만 보고 본질은 못 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듣고 보고 하는 그 존재원리의 반쪽만 보고 다른 반쪽은 못 봅니다. 반쪽만 보고 내가 있다고 착각하여 서로 내가 옳다고 매일 서로 싸웁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싸웁니다. 국가 간에도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원리를 반쪽이 아니고 전체를 보면 모든 다른 것들이 평등하여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며 싸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해서 듣기를 마치고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여기에는 육조 스님의 간절한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하는데 이걸 백지같이 깨끗이 한다, 또 때 묻은 옷을 세탁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반쪽만 보던 것을 나머지 반쪽까지 보게 되면 색이 공인 줄 알게 됩니다. 공인 줄 아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미혹한 것을 제거해서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내가 ‘반쪽을 마저 보아서 내 존재원리를 바로 봐야 되겠다.’ 이렇게 원력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반쪽을 뭐라고 하느냐? 선(禪)에서는 ‘한 개 반 개’ 라고 합니다. 나를 보라고 하니까 ‘한 개 반 개’ 밖에 못 본 거예요. 그러면 다른 ‘한 개 반 개’를 마저 보아야 그게 진짜 보는 겁니다. 이 ‘한 개 반 개’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 말이야 말로 그 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말이에요. 한 개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한 개이기 때문에 한 개 반 개라고 합니다.
************************************************************************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
선지식아, 깨달음을 만나면 지혜를 이루리라.”
*************************************************************************
‘선지식아!’, 선지식아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을 부르는 겁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세상 사람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한 개 반 개’에서 또 다른 면의 ‘한 개 반 개’ 이걸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본래 다 있으나 마음이 미혹해서, 반쪽 밖에 못 보는 겁니다. 미혹한 게 별 게 아니에요. 두 쪽을 다 봐야 하는데 한 쪽 밖에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두 쪽을 다 보면 반야 지혜가 스스로 나오게 됩니다.
**********************************************************************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반드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體)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用)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는 정이 혜에 있고, 또 정이 되어 있을 때에는 혜가 정에 있느니라.
***********************************************************************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 ‘한 개 반 개’와 또 다른 ‘한 개 반개’로 근본을 삼는다. 이것은 계속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해하실 줄 압니다. 미혹해서 ‘반 개’만 보고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반 개’가 있고 다른 ‘반 개’가 있어 두 개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혜는 보는데 정은 못 보거든요.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것이 그 본체(本體) 자리와 둘이 아니다. 지금 내가 본체(本體)자리라는 말을 쓰는데요. 내가 걸어가고 행위하고 이해하고 다 아는데 그것을 일으키고 있는 그 근본자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둘 아닌 것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못 보고 있는 정(定)은 뭐냐? 우리가 작용하고 있는 그 본체(本體)자리이고, 뿌리이다. 혜(慧)는 뭐냐? 그 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라는 거지요. 혜가 작용이 될 때에는 정은 어떻게 되느냐? 그 뿌리가 작용하는 곳에 같이 있는 거예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시며) 혜 할 때는 정이 혜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손을 돌려 손등을 보이며) 정 할 때는 혜가 정에 있는 겁니다. 손에 손바닥과 손등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존재들이 각각 서로 서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가 되어 갈등과 대립·투쟁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 뿐입니다.
****************************************************************
선지식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평등하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뜻을 짓되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
이 손바닥을 혜라 하면 손등인 정은 여기에 항상 따라 다닙니다. 이 혜하면 정이 항상 뒤에 있고, 정(定)하면 혜가 항상 따라다녀요. 뒤에 있어요. 이게 분리가 된 게 아닙니다. 분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 작용하고 있는 이대로 공이라는 거지요.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면 정혜가 평등하지 않고,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이 선하지 아니하면 정혜가 같지 아니하다. 따로 따로 있다고 보는 사람은 선할 수가 없다 하는 얘기입니다.
분리 안 되어 있는 이 자리, 작용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작용하지 않는 원리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선악이 내 마음 속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절대 선으로 가서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하는 일마다 좋은 일이 됩니다.
그때는 자동적으로 되니까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위해(危害)를 하고 불이익을 주더라도 증오심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연민하면서 해결해 간다는 거예요.
***************************************************************************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다툰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승부심을 끊지 못한다. 승부를 끊지 못하니 도리어 법이라는 아집이 생겨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한다.
***************************************************************************
그런데 세속에서 이해관계로 다투는 것은 또 괜찮은데, 도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견해를 달리 한다고 해서 다투는 일이 더러 있지요. 예를 들어서 돈오돈수다, 점수다 그것은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법을 아는 사람이면 절대로 다툴 수가 없어요.
정이 먼저라든지 혜가 먼저라든지 이렇게 선후를 다투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승부를 못 끊어요.
승부심을 못 끊으니 도리어 법(法)과 아(我)가 생겨서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 합니다.
************************************************************************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이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다.
************************************************************************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뭐냐?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만, 정혜를 바로 이해해서 그렇게 사고하고 행위하는 사람은 일행삼매입니다. 같은 소리입니다. 말만 바꾼 겁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이것이다.’ 곧은 마음(直心)이 뭡니까?
이것이 ‘너다-나다’ ‘있다-없다’ 양변을 여읜 자리입니다. 그래서 곧은 마음은 도량이고 양변을 여읜 그 마음을 가지면 여기가 법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은 마음, ‘너다-나다’를 초월한 마음을 가지면 화장실도 법당이고, 정토고, 곧 극락(極樂)이라는 거예요.
직심을 가지고 화장실에 가면 그곳이 극락이 되는 거예요.
**********************************************************************
마음으로 아첨하고 비뚤어지게 행하고, 입으로는 법이 곧음을 말하지 말라.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
‘너다-나다’ ‘좋아 한다-싫어 한다’ 이런 분별심을 일으키면서 입으로는 그런 것을 떠나라. 이렇게는 얘기하지 말아라. 이것을 행하지 못하면 절에 아무리 다녀도 불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양변을 초월하고 그 정과 혜가 분리 안 되고, 하나로써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집착하는 일도 없고 또 배척할 일도 없어서 자유자재하면서 평상심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강의 12회
정-혜가 하나돼도 소통해 흘러야 道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비로소 통류는 가능하다.
******************************************************************
7. 정혜定慧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法相)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얽매여 앉아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곧은 마음(直心)이라 생각하며, 또 망상을 없애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
여기서 직심은 ‘너다-나다’ 하는 양변을 여의는 것인데, 일행삼매와 법상에 집착한 사람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직심(直心)이라고 오해합니다.
‘좌부동(坐不動)’ 하며 ‘앉아서 동(動)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여기는 것인데, 이런 분들이 꽤나 많습니다. ‘참선하면 무조건 앉아 있어야 참선이다’라고 생각해서 이런 테크닉을 배워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조(馬祖)스님 같은 분도 처음에는 이것을 오해해서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참선 공부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승인 남악회양(南岳懷讓)선사가 그 앞에 가서 기왓장을 쓱쓱 갈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마조스님이 스승에게 “기왓장을 왜 갑니까?” 하니까, 스승이 “거울을 만들려고 간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라고 되물었고,
이에 남악 선사는 “그러면 좌선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느냐?”라고 답하면서
“수레가 안 가면 소를 때려야 하느냐?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소를 때려야 되지요.
우리 사회에 참선하는 분 중에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앉아서 허리 세우고 다리를 어떻게 하고 손과 호흡은 어떻게 하고 그런 테크닉을 배워서 그것을 참선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선사스님들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우리는 각자 마음이 자발적으로 발심하는 방법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게 소를 때리는 겁니다.
***************************************************
“망상을 없애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
망상을 없애어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그러면 무정물(無情物)이 되는 거예요. 망상을 없애는 게 아니고 그 망상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알면 그 망상 자체가 정화(淨化)가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밥 먹고 화장실에 가고,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하셨어요. 부처님은 목석 같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수명이 다해서 가신 분이 아니에요. 길도 걸어가시고 배고프면 밥을 드시고 피곤하면 잠도 주무시고 아프면 약도 드시고 이렇게 했던 분이에요. 우리와 똑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문제는 내면입니다. 우리와 내면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내가 있다’고 집착해서 양변에 떨어져 매일 남과 비교하며 앙앙하면서 살아가는데 부처님은 그게 없었습니다. 작용(作用)을 해도 우리가 하는 작용하고 달라서, 정화가 된 작용을 하십니다. 참 편안하신 분이지요. 굉장히 자유로운 분이고요.
그래서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다.” 이 역시 둘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사를 젖혀놓고 열반이 따로 있고, 번뇌를 없애고 보리가 따로 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는 정화한 것이고, 하나는 정화 못한 것이지 똑같습니다.
우리 주위에 자기와 견해가 다르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어져야 자기가 잘 사는 걸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정말로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반복하고 되풀이 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산다고해서 생각을 똑같이 하는 게 아닙니다.
다양함 속에 서로 서로 인정하면서 대립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동색(同色)이 되자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이것을 성철 스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하고 물은 분명히 다르잖아요. 그런데 또 하나다. 하나면서 둘이다. 우리는 둘이라면 영원히 쪼개 놔야 둘이고 하나라면 진짜 생각도 하나가 되어야 하나인 줄 알아요. 다양한 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그 다양한 속에 우리가 통일된 것이 있거든요. 이것이 제가 자꾸 못 보고 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 속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많이 가진 사람도 없고, 적게 가진 사람도 없고, 정상인도 없고 장애자도 없고 오로지 하나입니다. 하나로 통일된 그게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 것도 생각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道)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으로 오히려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될 것이다.
*********************************************************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通流). 어찌 머물러 있을까?
*********************************************************
통류(通流)가 되어야 합니다.
A라는데도 통류가 되고, B라는데도 통하고 C하고도 통하고, 다 통하는 그런 것이 우리가 못 보는 면이에요. 그게 내가 말한 ‘반 개’라고 하기도 하고 ‘한 개 반 개’라고도 한 것입니다. 다 통해요.
이것이 〈덕이본(德異本)〉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도, 도가 아니다. 그 하나 된 자리에서 통류가 되어야 한다.” 동색(同色)이 되어가지고 전부다 한 가지로 닮으라고 하면 닮을 수도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닮더라도 그것은 도(道)가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가 되어서, 그 하나 된 자리에서 통류가 되어야 된다.
그것이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산은 산이고, 물은 물” 그대로 통일이 되어 있지, 긴 것을 잘라서 작은 것에 붙이고 뚱뚱한 것을 끊어 내서 마른 것에 붙이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마르면 마른대로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뚱뚱한 것하고 마른 것하고, 키 큰 것하고 작은 것하고 같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절대로 뚱뚱하거나 마른 걸로 인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이니까요. 그 뿐 아닙니다. 노동자와 기업가도 존재 원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다투지 않습니다.
이 통류라는 말이 〈돈황본〉 보다 뒤에 나온 〈덕이본〉에 좀 더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저는 〈덕이본〉의 “통류되어야 그것이 진짜 도다.” 하는 대목에서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오늘날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 “통류(通流)”를 알고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도(道)는 모름지기 통류할지니 어찌 도리어 걸리리오.”
**********************************************
뚱뚱한 데 걸리고 마른 데 걸리고, 작은 데 걸리고 키 큰 데 걸리면 도가 아닙니다. 어디든지 다 통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 참으로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니까 자기를 학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것도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고, 비굴한 것도 다 자기를 학대하는 겁니다. 통류, 이걸 알면 참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옛날에는 차별심이 일어나서 한편은 괴롭고 또 다른 한편은 기분이 좋았는데 그게 없어져요. 그러니까 자유자재(自由自在) 하게 됩니다.
*********************************************************************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음은 합당치 않은 것이리라.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不住在)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다.”
*********************************************************************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말고 이렇게 되면 통류가 됩니다. 어디에도 안 통하는 데가 없이 다 통하게 되지요. “만일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다.” 자유하지 못하면 구속이 되지요.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숲 속 가운데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꾸짖음이 옳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숲 속에서 가만히 있으니까, 유마힐이 “앉는 것이 도는 아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다 도이다.” 이렇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쳐 이것으로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집착해서 착각함이 수백 가지이니, 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이것은 간단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소리입니다.
이 정혜가 나오고, 일행삼매가 나오고, 다음에 정혜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
정혜를 등(燈)과 빛이 하나가 되어 등불이라 하듯이 정혜도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인 줄 알면 큰 등도 있고 작은 등도 있고, 색 있는 등도 있고 색 없는 등도 있고, 아름다운 색도 있고 까만색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래도 그 색이 다르고 등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등과 빛은 둘이 아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리해서 보면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형상되어 있는 것을 빛이라 보면, 등은 지금 우리가 못 보고 있습니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이게 빛이라면, 등은 (손의 뒷부분인 손등을 보이며) 이 뒤에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빛과 등이 두 개가 아니며, 앞에서 “한 개 반 개”라 표현한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지 본질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의 13회
형상과 본질 둘 아님을 깨달으면 윤회 ‘끝’
본질 보는 것이
무상(無相)
분별 하지않으면
무념(無念)
정혜 하나된 마음이
무주(無住)
8. 무념(無念) - 생각이 없음
*************************************************************************************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본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
앞에 정혜를 또 다른 말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념입니다.
“선지식아, 법(法)에는 돈점(頓漸)이 없다.” 법에는 빠른 것도 없고 점차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본심(本心)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보는 것이 견성(見性)입니다. 마음은 빠르기도 하고 늦기도 하고 또 선한 마음이기도 하고 악한 마음이기도 한데, 그 본질을 이해하면 성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컵을 들면서)은 형상이지요? 이것도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큰 것을 보든지 작은 것을 보든지 이것을 보면서 본질을 함께 보는 그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을 보면서 본성을 봐야 본성과 이 형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가 정말로 비교 안 하고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형상하고 본질하고 차별이 없어요. 하나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 동안 윤회를 합니다. 내생(來生) 뿐 아니라 금생(今生)도 윤회는 많이 합니다. 열 살 때까지 윤회했다가 스무 살 때, 그리고 80이 될 때까지 윤회하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형상을 통해서 본질을 보면, 형상하고 본질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윤회는 끝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相)에서 모양(相)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
무상으로써 체(體)를 삼는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무상이 뭐냐? 무상이라는 것은 상(相)에서 상(相)을 여의는 것입니다. 본질을 본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상이지, 무상이라고 아무 것도 없는 게 무상이 아니에요.
무념은 도대체 뭐냐? 정혜와 같습니다. 염(念)해서 염(念)하지 아니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다-나다’ 분별하지 않는 거지요. 분별 안 하면서 생각하는 게 무념입니다. 무념이라고 하니까 생각도 없는 게 무념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는 생각입니다. 그게 무념입니다.
또 그 다음에 무주(無住)가 나옵니다. 정혜가 하나 된 상태에서 우리 마음속에 그게 생각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앞의 생각과 지금 생각과 후 생각이 상속(相續)해서 단절함이 없나니,” 지금도 보세요. 앉아서 이 생각 했다가 저 생각 했다가 생각 일으켰다가 꺼졌다 계속 상속하고 있잖아요. 이게 우리 존재원리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유무(有無)에 집착해서 분별심으로 속성 그대로 작용하는 게 우리라면, 부처님은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서 ‘너다-나다’를 초월해서 초월한 그 생각이 그 속성대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 안 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 그것은 내 속성하고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도(道)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고(苦)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속성이에요.
*********************************************************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
사실은 이 대목이 조금 문제입니다. 육조 스님이 설하신 거니까 믿어야 하겠지만, 육조 스님이 설하고 난 후에 각자 단경을 필사하는 과정에 뭔가 잘못되어서 제자인 혜총 국사가 ‘단경이 요즘 변질되어 간다. 그러면 큰 일 난다’ 하고 걱정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대목이 아니었나 싶어요.
법신(法身)이 색신(色身)을 여읜다, 정신이 육체를 떠나간다는 이런 뉘앙스가 풍기는 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실제는 우리의 몸도 법신과 색신이 있어요. 또 이 정신에도 색신과 법신이 있어요.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개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이 안 맞는 거예요.
********************************************************************************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
한 생각이 주(住)해버리면, 염염(念念)이 주(住)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소리예요. 생각 생각 집착하는데 우리는 정말로 좋은 일에도 집착을 하지만 나쁜 일에는 더 집착을 하거든요. 그러면 그 집착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굉장히 구속시켜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병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이 정신하고 육체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무주로서 근본을 삼는다고 한다.”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없는데 무슨 집착을 합니까? 밖으로 집착하는 거, 안으로 집착하는 거,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줄 알면 밖에 있는 그것도 같이 없는 줄 알아요. 그럼 집착을 안 하면 무관심해지고 그런 것이냐,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집착을 안 하게 되면 그 상태를 더 좋게 할 수 있는 지혜도 나오고 더 다정해집니다. 어떤 일이라도 잘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나옵니다. 그게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相)이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自性)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無相)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의는 것이 무상이니,”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무상이니 다만 능히 상을 여의면 자성이 청정함이라.” 이 성품의 체(體)가 아까 내가 말한 본질입니다.
“백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아니해서 생각을 다 제거하지 말아라.” 아까 가만히 있는 게 도(道)라고 집착한 거 그것입니다. 생각마저도 다 없애버리는 거, 그렇게 하면 단멸에 떨어집니다.
*********************************************************************************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法意)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
아까 법신이 색신을 떠난다 하는 것과 같은 비슷한 얘기입니다. 법의(法意)를 쉰다는 말은 법의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못되는 것은 오히려 과하거니와 다시 타인에게 권할까보냐.” 스스로 혼자 잘못 되는 건 괜찮은데 타인에게 또 피해까지 입혀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먼 코끼리가 눈먼 코끼리 떼를 몰고 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 빠져 죽잖아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잘못되는 것도 경계를 해야 되겠지만 그 잘못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도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삼가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이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긴다.
************************************************************************************
“미혹한 사람이 경계상(境界上)에 생각이 있고.” 이 생각이 “나다-너다” 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 위에다가 문득 사견(邪見)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이 우리가 고통을 받아 가는 과정입니다.
한번 잘 보시면 미혹한 사람은 “있다-없다” ‘ 집착하는 사람이지요.
그 미혹한 사람은 경계상에 객관이 되었든 내 마음속에 일어났든 분별심이 있어요.
그 분별심 위에다가, “있다-없다”로 삿된 견해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가지를 치고 또 잎이 피고 이래가지고 일체 진로(塵勞) 속에서 윤회하고 고통받고 하는 그런 수고를 합니다.
강의 14회
“허망한 생각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다.
************************************************
실체가 없고 공(空)이다. 상(相)이 상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무념입니다.
그래서 이 육조스님의 가르침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으로 삼습니다.
만약 무념을 종으로 삼지 않고 유념(有念)을 종으로 삼는다면, 일체 진로 망념(塵勞 妄念)이 나와서 드라마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 진로 망념은 티끌세상에서 일으키는 고통을 말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삿된 생각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드라마를 씁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멋지게 쓰면 되는데 이기심 때문에 멋지게 쓸 수가 없어요. 고통스러운 드라마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념(無念)이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無念)도 또한 세우지 않는다.
***********************************************************************************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 하니까 무념을 고착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 본래 속성에 또 틀리기 시작합니다. 무념에 집착하면 법집(法執·법에 대한 집착)이 됩니다. 법집이 되어서 또 무념이 안 됩니다.
무념도 세우지 않는 그것이 무념이에요. 더 깊이 얘기한다면 우리가 무념 상태에 갔다고 하더라도 그 무념 상태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무념에서 또 작용으로 작용에서 무념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고정 불변되어서 딱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긴 속성대로 무념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맡기면서 사고하고 생활하면 부처님과 같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행복해집니다.
***************************************************************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
‘있다-없다’ 두 생각에 우리가 집착하게 되면 그 티끌세상에서 우리가 수고하는 고통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무념이라고 하는 그 무(無)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있다-없다’로 해서 내가 고통 받고 있는 그것을 여읜 것입니다. 정확하게 무념을 해석한다면, ‘있다-없다’가 없는 생각, ‘생각이 없다’가 아니라 ‘있다-없다’ 하는 것이 없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염(念)자는 무엇을 염이라고 하는가 하면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여본성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를 여읜 그 자리가 진여본성이에요. 진여본성과 두 생각을 여읜 것이 같은 것입니다.
**********************************************************************************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자기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
저 앞에 정혜(定慧)할 때 정은 혜의 체이고, 또 혜는 정의 작용이라는 소리와 똑같아요.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반드시(第一)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다.
책에서는 제일(第一)을 ‘첫째 뜻에 있어서’라고 하는데, 제일(第一)은 부사로 쓰일 때 반드시라고 쓰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라고 쓰면 말이 분명해 집니다.
********************************
반드시 동하지 말지니라.
********************************
동하지 말라는 말은 ‘있다-없다’에 집착해서 분별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
9. 좌선(坐禪)
*************
우리가 참선한다, 좌선한다고 하는데 그럼, 좌선(坐禪)은 뭘까요?
이 좌선도 역시 우리 존재원리를 잘 이해해서 그걸 활용하고 쓰는 사람이 잘 합니다. 앉아 있는 걸 잘하는 것이 꼭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좌선, 참선한다고 해서 앉는 방법을 배우고 화두 드는 법을 가르치면서 그것이 공부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사람들은 목에다 힘도 주고 어깨에 힘도 주고 하는데, 여기 육조 스님께서 좌선을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앉는 방법, 화두 드는 방법을 아는 것은 테크닉에 불과합니다.
***********************************************************************************
선지식들아! 이 법문에서 좌선(坐禪)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著)하지 않으며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다.
*************************************************************************************
여기에서 우리가 마음을 본다는 대목에서의 마음은 작용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허망하더라. 이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면 이 생각 일으켰다 저 생각 일으켰다 별별 생각을 일으키잖아요? 아까 드라마 쓴다고 했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다 사실은 허망하지요. 그것은 허깨비(幻)와 같은 고로 볼 바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마음을 본다고 했는데, 그것은 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허망한 마음은 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본다는 말도 안 맞습니다.
만약 깨끗한 것을 본다고 말하면,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를 초월한 게 진짜 깨끗한 것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자리가 진짜 깨끗한 겁니다.
***********************************************************************************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나 허망한 생각이 진여를 덮은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다.
*************************************************************************************
우리가 본래 깨끗한데 망념이 그 깨끗한 진여를 덮어버려요. 그래서 망념만 없으면 깨끗해져요. 이 망념이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 하는 그것이 망념입니다.
그것만 없으면 우리 본래 이 마음은 깨끗해요.
육조 스님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는 그 자리가 바로 그 깨끗한 자리입니다.
************************************************************************************
자기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한 것을 보면 오히려 깨끗하다는 망상(淨妄)이 생긴다.
*************************************************************************************
본래 깨끗한 그 마음은 못 보고 마음을 일으켜서 깨끗하다고 그런 생각을 일으키면, 그 깨끗한 마음에 깨끗한 생각이 하나 더 붙은 거예요. 그러면 깨끗하다는 망상에 우리가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있다-없다’, ‘깨끗하다-더럽다’ 하는 그 상태를 초월해서 그 자리를 본 사람은 이런 오류를 안 일으키는데, 상대적인 깨끗한 것을 지향하는 사람은 깨끗하다는 망상을 하나 더 일으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거기에 또 집착을 많이 해요.
선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법당에서 49재를 한다고 목탁을 치니까, 선방 스님 한 분이 공부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법당에 가서 스님의 목탁을 뺏어 버렸어요. 목탁을 뺏긴 그 스님이 요령으로 염불을 하니까 또 올라가서 요령도 뺏어 버려요. 이런 분은 조용하다는 망상에 집착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스님은 세속 사람이 당신 방에 와서 앉았다가 나가면 바로 청소한다는 거예요. 깨끗하다는 망상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성품을 발현시키는데 장애요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발견한 깨끗한 세계에 대해서 못 깨닫더라도 무엇이 깨끗하다는 것인지, 더럽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깨끗한 것에 집착한 것도 오히려 더러운 거예요. 더러운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정견을 갖추어 가야 공부하는데 방해가 안 되지, 만일 맹신을 해서 깨끗한 데에 집착한 사람이 ‘더럽다-깨끗하다’ 시비하고 있으면 그 사람 언제 공부합니까?
*****************************************************************************
망상은 처소(處所)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허망된 것임을 알라.
*****************************************************************************
망상은 처소가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깨끗한 것을 본다고 한다든지 더러운 것을 본다고 한다든지 그것도 다 망상입니다.
깨끗함은 모양이 없는데 오히려 깨끗하다는 모양을 세워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된다.
깨끗하다는 것은 형상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상을 세워 이것이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견해를 내는 사람은 스스로 본성을 장애해서 도리어 깨끗하다는 경계에 얽매이게 된다. 깨끗하다는데 구속 되어 버려요.
************************************************************************************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不動者)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이는 자성(自性)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
부동자(不動者)가 나왔습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겁니다. 분별을 안 하니까,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아니한다. 왜 허물을 보지 아니하는가 하면 부처님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인데 잠시 착각에 빠져서 허물을 일으키니까 연민을 합니다. 그 상태에 가면 허물을 안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육조 스님도 우리를 ‘선지식’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우리 존재는 선지식으로, 또 본래 부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허물은 착각이고 허구입니다. 그래서 허물을 보지 아니하면 자기 스스로 성품도 움직이지 않아요. 밉다는 생각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또 예쁘다는 생각으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사람을 그냥 무한히 놔두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허물이 있다고 보고 만일 허물을 지적한다면 내 마음 속에서 벌써 증오심도 일어나고 미운 생각도 일어나고 그러면 벌써 동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으로 보고, 고치더라도 부처님으로 일단 보세요.
그러면 감정은 안 일어나거든요. 감정이 안 일어나고 얘기하면 상대편도 기분 좋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이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면 그때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좋은 소리로 안 들립니다.
강의 15회
“일체 경계에 생각 일으키지 않는 것이 坐”
앉아 있는게 좌가 아니고
밖으로 분별심
안 일으키는게 ‘좌’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아니한 것을
보는 것이 ‘선’
*********************************************************************************
미혹한 사람은 자기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진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니(今記汝),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無碍)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
여기에 좌선(坐禪)이 나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있다-없다’에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밖으로 일체 경계에 생각(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며, 그러니까 밖으로 어떤 분별심을 안 일으키는 겁니다.
분별심을 안 일으키려면 어떻게 하는가? 일체 경계가 상(相) 아닌 걸로 보면 분별심을 안 일으킵니다. 앉아 있는 게 좌가 아니고, 밖으로 분별심 안 일으키는 게 좌이고, 또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이 ‘선(禪)’입니다. 그래서 ‘좌선(坐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누워있든 밥을 먹든 누구와 얘기를 하든 거리를 걸어가든 일을 하든 밖으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24시간 좌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1초를 앉았는데도 ‘내가 있다’ 생각하고 내가 좌선을 하니까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좌선 안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10년, 20년 동안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좌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집착하지 아니해 본성이 어지럽지 않으면 좌선입니다.
*****************************************************************************
또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禪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定정이다.
*******************************************************************************
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상(相)을 여읜 것이 선(禪)이고, 상을 상 아닌 걸로 보면 상을 여의는 거지요. 그러면 안으로 어지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정(定)이라 합니다. 그러면 앞에 좌선이나 선정이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무념도 같은 얘기이고 정혜도 같은 얘기예요. 다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다르면 내가 여러 개가 돼요. 내가 하나인데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
만약 밖으로 모양(相)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하다.
************************************************************************************
이 부분이 『덕이본(德異本)』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상이 있으면 안으로 마음이 곧 어지러움이니라. 밖에 상이 있다고 보면 마음이 어지럽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밖으로 상을 여의면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아니하다.” 이렇게 해야 분명히 말이 되는데, 여기에는 “만약 밖으로는 이 상을 상으로 보면서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아니하면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조금 모순이 있습니다. 『덕이본』에는 이렇게 고쳐놨어요.
만일 밖으로 상이 있으면 내 안 마음도 어지러워진다. 상이 있다고 보니까 여기에 분별을 일으키니까 어지러울 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밖으로 상은 있으나 안으로 어지럽지 아니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는 겁니다.
************************************************************************************
만약 경계에 부딪히면 어지러우니 모양을 여의고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여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는 것이 곧 선정(禪定)이라 이름한다.
*************************************************************************************
이것은 설명 안 해도 아실 것 같습니다.
***********************************************************************************
『유마경』에 말하기를 ‘즉시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하였고, 『보살계경』에 말하되, ‘본래 근원인 자기 성품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선지식아, 자기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짓는 것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
『유마경』에서 깨닫는다는 말은 ‘있다-없다’를 초월하는 겁니다. ‘있다-없다’를 초월하게 되면 본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또 『보살계경』에서는 본래 근원자리 자성이 청정함이라 하니, 우리의 본래 그 자리는 청정해요. ‘깨끗하다-더럽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데 우리는 착각을 일으켜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그런 허구에 속아서 우리는 괴로움을 받고 삽니다.
**************
10. 삼신(三身)
**************
이제 삼신, 세 몸이 나오는데 이것도 세 가지 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세 가지 몸이 있어요.
다른 걸로 보시면 안 됩니다.
***********************************************************************************
선지식아, 모두 마땅히 스스로의 몸으로 무상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세 몸의 부처(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게 귀의합니다.’ 하라(이상 세 번 따라 부름).
************************************************************************************
혜능스님이 우리 스스로 삼신불이 있는 것을 보게 해주겠다 그럽니다.
마음속에나 이 색신에나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이 세 가지 부처님이 있어요.
그러면 이 세 가지가 각각 있느냐 하면 이 세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가 어떤 상태에 가면 법신불이라 하고, 어떤 상태에 가면 보신불이라 하고, 어떤 상태에 가면 화신불이라 합니다.
이 세 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은 하나인데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에 보면 이 세 가지를 어떻게 표현 했느냐? 이 형상되어진 것은 즉가(卽假)입니다. 즉할 즉자 거짓 가자. 연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즉가라고 하고, 이 즉가 속에 즉공(卽空)이 있습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다.
또 그것이 두 개가 합해져 있는 것을 즉중(卽中). 중도(中道)할 때 즉중입니다. 그러면 즉중 속에 즉가, 즉공이 있고 즉공 속에 즉가, 즉중이 있고 즉중 속에 즉공, 즉가가 있다. 그러니까 세 개가 어울려 있다. 역시 이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앞에서 정혜를 공부했어요.
정혜는 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했고, 여기에서는 세 가지로 분리해서 얘기한 건데 사실은 똑같습니다. 두 가지로도 얘기할 수 있고 세 가지로도 얘기할 수 있고 다 얘기할 수 있습니다.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가히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三身)은 자기의 법성(法性)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 여래(如來)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三性佛)를 보지 못하니라.
*************************************************************************************
법신, 보신, 화신, 이 삼신이 법성 속에 있어서 세상 사람이 다 있어요. 없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있고 무정물도 있고 다 있어요. 여기에서는 미혹해서 밖으로만 찾고 안으로는 안 찾는다, 이런 얘기거든요.
우리는 있는 것을 잘 알아요. ‘있다-없다’ 할 때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거든요. 또 죽는 것은 굉장히 슬퍼하고 괴로워해요. 그것은 잘 알아요. 그런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건 몰라요.
그러면 여기에서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이 세 부처님 중에 어느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겠어요? 이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있는 줄도 모르잖아요. 부처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부분이 있는 걸 몰랐구나,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
선지식아 들어라. 선지식에게 말하여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색신 속에 있는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
여러분들의 법성 속에 삼신불이 있는 걸 내가 보게 하겠다. 잘 들어라. 이거거든요. 그 다음에 잘 들으세요.
************************************************************************************
이 세 몸의 부처(三身佛)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法身佛)라 하는가?
*************************************************************************************
이 삼신불은 성품을 쫓아서 나옵니다.
우리의 성품인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거기에 쫓아서 나온다 그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청정 법신불이라 하는가?
************************************************************************************
선지식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 성품에 있다.
************************************************************************************
그 성품 속에 있어요. 거기에는 악(惡)도 있고, 거기에는 선(善)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고 다 있습니다.
************************************************************************************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한 것을 행하고, 모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선행을 닦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속에 있어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라.
*************************************************************************************
이거 조금 의문이 가지요?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악행을 하고, 선한 것을 생각하면 선행을 하는데, 그걸 청정하다고 해요. 악한 일 하는 건 청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청정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아주 맑은 거울이 있는데 똥이 나타나면 비춥니까? 안 비춥니까? 비추잖아요. 금덩어리가 나타나도 비추거든요. 그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면 왜 비추느냐? 거울에 만약에 때가 묻었다면 안 비치지요. 깨끗하기 때문에 비추는 겁니다.
우리가 왜 무명(無明)이 생겼느냐? 지난번에 누군가 질문을 하셨는데요. 여기 논리대로 한다면 깨끗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무명이다, 깨달음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겁니다. 무명이 나쁜 게 아니에요. 악이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나쁜 거예요. 그러면 악한 일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라고 생각하고요, 선한 것도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선악이 없어집니다.
초월해 버려요.
상대가 없는 절대에서 영원히 선으로만 작용하게 됩니다.
한 생각 선해져 ‘공’ 알면 지혜 생긴다
불교에서의 ‘선함’은
‘있다-없다’ 초월한 행위
곧 부처님의 행 의미
양변 여읜 자리가 ‘귀의’
중생-부처 나누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닦아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보지 못한다.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모두 일시에 나타난다.
이것도 비교가 하나 되지요.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면 진공묘유(眞空妙有) 일체 삼라만상이 다 보이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맑은 하늘과 같아 혜(慧)는 해(日)와 같고, 또 지(智)는 달(月)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內外明徹) 자기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한다.
....................................................................................................................................................................................
저 앞에서 뭐가 청정 법신이냐고 물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외(內外)가 명철하다는 말은 주관과 객관 모두 실체가 없고 공이란 것을 알게 되면 자성 가운데에 만법이 다 나타납니다. 여기서 일체 법은 존재를 말합니다. 일체 법의 자재한 성품이 청정 법신이라고 이름한다. 우리 성품 그 자리를 청정 법신이라 하고 그 성품에서 모든 작용도 나오고 그 작용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
스스로 귀의(歸依)한다 함은 무엇인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함이다.
...........................................................................................................................................................
선하지 못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행위가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마음씨 좋은 것과 불교에서 말하는 선한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좋고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양변에 집착해 있는 한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에서 말한 선한 행위는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하는 행위, 그것을 선하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또 부처님 행입니다.
...........................................................
천백억 화신불이란 무엇인가?
.............................................................
그 법신 자리에서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성품이 공하고 법신 그대로 있는 거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으면 굉장히 편하겠네, 이런 생각도 하는데 우리 이 존재원리의 속성은 절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서울에 갔다가 부산에 갔다가 하지요. 이 마음이란 것은 절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활발발(活潑潑)이라고 합니다. 작용했다 하면 벌써 작용 안 하고 작용 안 했다 하면 벌써 작용하고, 둘이라 하면 벌써 한 개가 되어 있고 한 개라 하면 벌써 두 개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 속성입니다.
........................................................................................................................................................................
생각(思量)하지 않으면 성품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천당이 되며, 독과 해침(害)은 변하여 축생(畜生)이 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하여 윗 세계(上界)가 되고, 또 어리석음은 변해서 하방(下方)이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은바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
그래서 성품 그 자리에서 생각하면 곧 스스로 작용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쁜 생각을 하면, 변해서 지옥이 되고요. 또 선법(善法)을 생각하면 변해서 천당이 되고, 또 독한 마음으로 누구를 해치는 것은 변해서 축생이 되고, 자비스런 마음을 가지면 변화해서 보살이 되고, 지혜는 변화해서 상계(上界)가 되고, 상계라고 해서 천당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이 상계 상태가 되는 겁니다. 또 어리석은 것은 변화해서 하방(下方)이 되어서 자성의 변화가 심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일어날 때에 그 생각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이해를 하면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체험하면 아예 나쁜 생각이 안 일어나고 자유자재합니다. 이런 경지에 못간 사람이라도 또 나쁜 생각 일어나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나쁜 행위까지는 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니까 행동까지도 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정견(正見)만 갖춰도 만일에 화가 일어나면 얼른 알아챕니다. 알아채면 그 자리에서 녹이는데, 또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또 며칠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시간 가는 사람이라도 행위로까지는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거예요.
..........................................................................................................
한 생각이 선하면 지혜가 생하니, 이것을 자성화신(自性化身)이라 한다.
..........................................................................................................
여기에서도 우리가 생각에 따라서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되고 짐승도 되고 보살도 되고 상계도 되고 여러 가지 변한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렇게 변하는데 미혹한 사람은 변하여 일어나는 줄도 몰라요. 모르고 그냥 일어남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겨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일념(一念)이 선하면, 한 생각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거기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성 화신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란 무엇인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
지금 여기가 깜깜하다고 했을 때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환해지지요? 바로 그 소리예요. 깜깜한데 위에서부터 조금 조금씩 밝혀오는 게 아니고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전체가 환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 마음 상태가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면, 천년, 만년 어두웠던 것이 일시에 환하게 됩니다. 그게 돈오돈수(頓悟頓修)예요.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되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고, 단계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대승불교 특히 선(禪)은 한 몫에 다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예요.
감이 가을 햇살을 받고 세월이 흘러 홍시가 되는 것이지, 땡감이 하루아침에 홍시가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단계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단계를 얘기하는가 하면, 사실 홍시가 되기까지의 그 단계를 꿈에 비유하면, 꿈에 이런 저런 고통을 받다가 딱 깨는 순간에 고통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렇듯이 꿈속에서 우리가 깨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현실과 사실은 뭐냐? 깬 것뿐이에요. 꿈속의 고통은 허구예요. 그래서 그 허구를 이 대승불교, 즉 선불교에서는 인정을 안 합니다. 오직 사실과 현실만 인정해요. 잠자고 깬 거 이것뿐이에요.
................................................................................................................................................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선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 한다.
................................................................................................................................................
전후(前後)를 논하는데, 전은 ‘있다-없다’ 분별심으로 하는 거라고 보시면 되고, 후는 우리가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를 초월한 걸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후념이 선한 것이 이름해서 보신불이 됨이니라.
.........................................................................................................................................................................................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선함을 물리쳐 그치고, 한 생각의 선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없앤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선함을 보신불(報身佛)이라 한다.
.....................................................................................................................................................................................
악한 과보라고 하니까 몹시 나쁜 짓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있다-없다’로 생각하는 과보입니다. 여기에 선한 과보할 때의 선(善)은 선악을 초월한 과보입니다. 한 생각 선한 과보는 도리어 천년의 악을 멸하나니, 이것은 영원히 멸해 버립니다. 다시는 어두움으로 안 오고 악으로도 안 옵니다. 절대 선입니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란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다-없다’를 초월한 그 선이 보신불이라고 이름 한다.
법신(法身)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化身)이고, 생각 생각이 선한 것이 보신(報身)이다.
생각 생각이 선한 것, 이것은 양변을 여읜 상태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곧 귀의(歸依)라 한다.
........................................................................................
귀의라는 것은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귀의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나는 중생이니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귀의하겠다’ 이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귀의(歸依)라고 합니다.
...........................................................................................................................................................
가죽과 살은 색신(色身)이며 집이므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三身)을 깨치면 곧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사택이라 돌아갈 바가 있지 아니하다고 그랬는데, 사실 이 색신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단일로 독립된 물체가 아니고, 연기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체가 없구나, 공이구나 하는 그 자리가 법신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육신도 법신이 있어요. 그래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고 그랬잖아요. 오온은 뭡니까? 색신은 몸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이거든요. 정신, 몸 다 공이에요. 그러면 그 공 자리를 우리는 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육조 스님이 조금 간략하게 하느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지 몰라도, 집이다, 색신이다 그러는데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반야심경하고는 안 맞는 소리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육조단경을 필사하는 과정에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러나 다른 데 봐가지고는 조금도 단경이 우리가 말하는 정견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까 육조 스님까지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심은 비굴이 아니라 더욱 당당해지는 것
‘있다·없다’ 삿된 견해
우치와 미망 속 성품 있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 비우는 훈련 해야
11. 네 가지 원(四願)
우리는 계속 정혜, 무념, 무상, 무주, 좌선, 삼신불 이렇게 우리 존재원리를 다양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우리는 법을 깊이 이해했으니까 원력을 세워 이것을 바탕으로 중생 교화를 하자. 말하자면 자기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자는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자본주의 체제가 자유스럽고 능력에 따라서 살아가는 시장원리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나쁜 것은 모든 것을 밖으로 밖으로 자꾸 소유하고자 하는 것 욕망 때문에 이 자본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잘못된 방향을 사회주의로 바로잡아야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갈등과 혼란만 자초할 뿐입니다. 자본주의가 잘못되는 패해가 있다면 이것은 부처님 법으로 바로잡아 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에 의해 돈만을 목표로 살지 말고, 그 돈은 수단이고, 정말로 인간답게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인간냄새 사람냄새 나는 사회로 만들어 가면 이 자본주의가 정말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이 어찌 보면,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을 공부하게 되면 최소한 수단과 목적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과 목표가 완전히 뒤엉켜 혼돈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은 직장 가지고 돈벌이 하는 것도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무슨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시대나 육조 스님 시대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 생활화도 강조를 하셨지만 네 가지 원(願,)을 세워 사회화도 강조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말씀하셨잖아요. 상구보리(上求菩提)가 생활화이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사회화입니다.
.......................................................................................................................................................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게 귀의해 마쳤으니, 선지식으로 하여금 네 가지 넓고 큰 원(四弘大願)을 발하리라.
선지식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가없는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 번 합창〉
.........................................................................................................................................................
이렇게 세분화한 거지요. 우리는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무상불도서원성이라고 거꾸로 했는데 같은 것입니다.
선지식아,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을 각각 자기 성품(自性)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없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마음 가운데 중생을 각각 자신의 자성으로써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그 자리를 보면 바로 제도가 됩니다.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뒤에 나옵니다만, 마음 밖에 아무리 선지식이 있더라도 마음 속의 선지식을 못 보면 제도가 안 됩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내면의 선지식을 봐야 한다는 말이 뒤에 나옵니다. 이 말도 그와 같은 말입니다.
그럼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를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邪見)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정견(正見)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삿된 견해가 뭔가 하면 ‘있다-없다’ 하는 견해거든요. ‘있다-없다’ 하는 견해와 번뇌와 우치(愚癡)와 미망(迷妄)하는 그 속에 본각성(本覺性)이 있어요. 성품이 있어요. 사견 속에 성품이 있고, 번뇌 속에도 성품이 있고, 우치 속에도 성품이 있고, 미망 속에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견과 번뇌와 우치와 미망이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중도라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악행이 나오고 선한 것을 생각하면 선행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선하든 악하든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걸 알면 악이 악이 아니고, 선이 된다고 그랬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견, 번뇌, 우치, 미망 그 속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 하는 걸 알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아요.
정견을 가져 제도한다고 하는데, 정견이 뭡니까?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사견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고, 번뇌도 우치도 미망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정견을 가지면 바로 제도가 되는 거예요.
.......................................................................................................................................
이미 정견(正見)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다.
..........................................................................................................................................
여기는 제거라는 말을 썼는데 정견을 깨달으면 우치, 미망이 변해 가지고 바로 반야가 돼 버려요. 제거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변해서 된 거예요. 우치, 미망이 바로 변해서 반야가 되면 중생이 각각 스스로 제도하는 게 됩니다. 그럼, 정견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오는 정견이 뭡니까?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게 정견입니다. 우리가 바른 수행을 하려면 먼저 정견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근대에 효봉 스님 같이 발심이 바로 된 사람은 이런 게 필요 없습니다만, 대체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중도연기를 바르게 이해해서 일상생활과 수행의 길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춰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견을 세운다면 화를 내거나 초조, 불안, 근심, 걱정 등 스트레스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차별하더라도 상대나 나나 본래는 연기로 존재하는 무아이니 비난과 차별도 실체가 없는 연기적 현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로 정견으로 본다면 화낼 나도 없고 화낼 대상도 실체가 없는 연기 현상일 뿐입니다. 단지, 나와 남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착각 속에서 화를 내고 초조, 불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서 정견으로 지혜로 보는 사람은 웬만한 스트레스는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견이라는 것도 이해한 정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을 해서 정견이 세워질 때는 이와 같이 연기, 무아로 볼 수 있는데, 급박한 상황이나 화가 극도로 나는 상황에서는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즉 순경계나 역경계에서도 자유자재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중도연기와 하나가 되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은 중도연기, 무아, 공을 이해해서 정견을 세우고 하게 되면 바르고 빠르게 향상할 수가 있는 겁니다.
.......................................................................................................................................................................................
삿된 것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濟度)하고,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또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善)으로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니, 이와 같이 제도(濟度)함을 진실한 제도라 한다.
.....................................................................................................................................................................................
여기에 선(善)도 양변을 여읜 겁니다.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誓願)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한 것을 없앰이요,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無上正法)을 배움이요, 위 없는 불도(無上佛道)를 다 이루기를 서원하는 것은 항상 마음 낮추는 행동(下心)을 하여 일체를 공경하며 어리석은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를 내어 미망(迷妄)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루어 서원력을 행함이다.
무상정법(無上正法)은 양변을 여읜 겁니다. 여기에서 항상 하심(下心)을 행하고, 일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굴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고, 그 자리가 실체가 없고 공인 줄 알면 첫째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당당해져요.
왜냐면 남하고 비교해서 나보다 조금 나은 사람 앞에 가면 위축되고 또 나보다 못한 사람한테는 교만심도 내고 이러거든요. 그런 게 없어지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나 못한 사람 앞에 항상 당당해집니다. 그리고 당당해지면서 굉장히 겸손해집니다. 항상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자비스럽고 이해심 많고 친절해지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상참회로 삼세죄장을 없애라
죄라는 것은 연기현상
공 이라는 것 알아야
존재 원리를 보게 되면
어리석은 데 물들지 않아
12. 참회(懺悔)
그 동안에 우리가 육조스님 법문 중에 정혜, 무념, 좌선, 삼신불, 서원을 공부하고 이제 참회인데, 이것이 표현은 다양해도 내용은 결국 같은 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우리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이 마음 즉, 마음의 모양이나 작용하고 있는 걸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견성이라 합니다. 그것을 바로 보게 되면 그렇게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본질을 보니까 평등한 줄 알고 평등한 남하고 비교 안하고, 비교 안하니까 마음이 그렇게 평화롭게 됩니다.
또 어떤 경계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예전에는 거기에 끄달리고 지배 받아서 속상하고 자기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고 이렇게 했지만,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또 나를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합니다.
이제 참회에 들어가는데 참회 앞에 네 가지 원,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을 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지구가 하나가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만 편할 수 없고 내 개인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고 이 사회하고 우리도 유기적인 관계인 까닭에 나 하나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를 사회화시키는 것이 자기 생활화이고, 생활화 하는 것이 사회화와 둘이 아닙니다. 이런 원력을 갖고 살아야 더불어서 함께 잘 살지, 이제는 옛날처럼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겠다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걸 보면서 마음을 키우고 시야도 넓히고 이 사회 세상이 바로 가야 우리도 함께 그 속에서 평화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인식과 원력으로 향상해 나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참회는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맹세하면서 그걸 반성하는 것이죠.
그런데 육조스님이 하는 참회 방법하고 우리가 하는 참회 방법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참회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으니까 참회해서 다시 재발 안 하도록 맹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참회가 바르게 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신도분이 말하기를 자기가 뭘 안 하겠다고 늘 맹세하는데 그게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요. 그 분이 그것을 스스로 비유하기를 풀 위에다 돌 얹어 놓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돌 치우면 풀은 또 올라오거든요.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참회를 하고 개과천선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것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스스로도 자기한테 실망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향상이 없게 되지요.
여기에 육조스님이 말씀하시는 무상참회(無相懺悔), 이 참회는 그냥 죄가 있다고 해서 참회하는 게 아니고 죄의 뿌리까지 캐내는 참회법입니다. 이게 육조스님의 방법만도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방법도 아니고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그 자체가 근본 풀뿌리까지 캐내는 그런 참회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반야심경〉 여러 군데 그 말이 나오는데 “오온이 모두 공하다”를 알면 죄도 함께 공해 버려요. 그러면 그것이 풀뿌리까지 캐내는 참회법이 됩니다. 이 불교는 우리 모두에게 보편되어 있는 존재원리지만 부처님이 이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거예요. 이런 참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두 ‘죄가 있다’고 보고 ‘그 죄를 반성하고 다시는 안 짓겠다’ 이렇게 하지만, 그것은 뿌리까지 뽑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범도 하고 삼범도 하지요.
부처님이 발견한 이 세계는 본래 죄가 없어요. 이것을 알면 다시는 그것을 범하지 않는 그런 참회가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깨달았을 때 가능합니다. 깨달아야 가능한데 못 깨달았더라도 우리가 그 원리를 알고 있으면 죄가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참회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도 편안하고 재범 확률도 훨씬 적어집니다. 실제로 교도소나 수용소에 있는 분들에게 불교의 참회법을 얘기해주면 효과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회법은 일반 사회에서 하는 참회법하고 다릅니다. 죄가 있다고 후회하고 참회하는 것은 설사 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학대하고 여러 가지로 자기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는데, 불교의 참회는 정말로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참회법입니다.
.....................................................................................................................................................................................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에게 모양 없는 참회(無相懺悔)를 해서 삼세의 죄장(三世罪障)을 없애게 하리라.”
.........................................................................................................................................................................................
여기에 “모양 없다(無相)”는 말이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흔히 부처님한테 업장 소멸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한테 참회한다’, ‘큰스님한테 참회한다’ 하지만, 사실은 참회할 것도 없고 참회할 대상도 없어요. “모양 없는 참회”라는 말이 바로 이겁니다.
불교에서는 인과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바르게 참회하면 인과도 뛰어 넘습니다. 전생까지 끌어다가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고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하는 분이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삼세, 즉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그런 죄로 인한 장애를 멸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럼 육조스님이 무상 참회를 선지식들에게 일러줘서 삼세에 죄 안 짓게 해 주겠다 하셨는데, 무상참회는 무엇입니까?
무상(無相)이란 말에 반대되는 게 유상(有相)인데요. 여기에서 말하는 무상은 유상에 대비되는 무상이 아니고 유상, 무상을 초월한 무상입니다. 양변을 여읜 겁니다.
왜 양변을 여의느냐? 우리의 존재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이렇게 양변을 여의었다는 겁니다. 그런 존재원리가 나한테 있어요. 그것을 ‘한개 반개’라 합니다. 본래 나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만 발견하고 체험만 하면 무상 참회가 되는 겁니다.
무상참회를 해가지고 삼세죄장을 없애게 하리라. 그러면 과거나 현재 죄를 없애는 것도 굉장히 반갑고 고마운 일인데, 미래의 죄도 멸해 주겠다는 것은 앞으로 죄를 안 짓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 이 얘기입니다.
이 무상참회에 대해서 무상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해주시고 이 무상도 우리가 양변을 여읜 거, ‘있다-없다’ 양변을 여읜 무상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앞 생각(前念)과 뒷 생각(後念)과 현재의 생각(今念)이 생각마다 어리석음과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나쁜 행동(惡行)을 단번에 끊어 자기 성품에서 없애면 이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 ...................................................................................................................................................................................
전념, 후념, 금념이 앞에 말한 삼세입니다. 전념은 과거이고 금념은 지금 현재고요. 후념은 미래입니다. 그렇게 ‘생각마다 어리석고 미혹한데 물들지 아니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어리석고 미혹한 데 물들면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들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있다-없다’에 집착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우리 존재원리를 보게 되면 이렇게 어리석은 데 물들지 않아서 과거에 지어오던 나쁜 행위를 일시에 끊어버립니다.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
죄가 있다고 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후회하고 참회한다 하더라도 돌로 풀을 눌러 막으려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러면 언젠가 돌을 치우면 풀이 다시 올라와요. 그런데 뿌리까지 캐내버리면 다시 그 풀이 안 올라오듯이 죄라는 것도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걸 알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죄 뿐 아니라 이런 상태에 간 분은 매일 매일 행복할 뿐 아니라 하는 일마다 자기를 돕는 것이 남을 도운 게 되고 남을 도운 게 자기를 도운 게 되어서 정말로 사람과 사람의 갈등, 사상과 사상의 갈등, 국가 사이의 갈등 이런 걸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법을 자기가 갖고 있고 모두 다 보편되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자기만 이익 되겠다고 이익을 추구하니까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 그럴 수도 있고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고 국가 간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
앞 생각(前念), 뒷 생각(後念), 현재의 생각(今念)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아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矯心)을 없애도록 하라. 이를 영원히 끊으면 자성참회(自性懺悔)가 된다.
........................................................................................................................................................................................
교광심(矯心)이란 거짓되고 속이는 마음입니다. 앞에는 악행을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거짓되고 속이는 마음을 없애 길이 끊으면 그것을 자성참회라고 합니다. 그 자성자리는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앞에는 악행을 얘기했고, 다음에 거짓과 속이는 것, 이 세상에 거짓과 속이는 일이 참 많습니다.
육조스님 당시에도 많았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이 얘기를 하신 것 같아요.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