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나였어도 -고대생의 편지 계엄, 나였어도 / 87년 헌법은 대통령의 독재를 방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의회의 전제화를 막을 장치는 미처 마련하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우리의 현행 헌법이 제정된 지 37년이 지났다. 군부독재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87년 체제는 분명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해야 할 때이다. 87년 헌법은 대통령의 독재를 방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의회의 전제화를 막을 장치는 미처 마련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군부독재의 경험이 헌법제정 과정에 과도하게 투영된 결과로, 87년 체제는 대통령이 독재자가 될 경우만을 상정했을 뿐. 의회가 독재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 제도적 결함은 현재 우리 정치 현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감사원장, 중앙지검장이 탄핵당하였으며, 야당의 스무 번이 넘는 탄핵 시도로 국정이 마비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예산안마저 정쟁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7000억을 지역화폐 사입으로 전용하고, 미래 에너지 안보의 핵심인 SMR 투자보다 중국산 태양광 패널 사업을 우선시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실효성이 없다고 밝혀진 정책들을 밀어붙이기 위해 국가의 미래 투자 예산을 삭감하고, 당대표 개인의 안위를 위해 검사들을 탄핵하며, 간첩법에 반대하는 이러한 행태들이 과연 '반국가적'이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180석을 넘겨준 데에 대한 책임이라 말하지만, 다수를 차지했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줄기차게 떠들어대는 자유민주주의인가? 지금 상황에서 현재 제기되는 대통령 탄핵 논의를 살펴보자. 과거 단핵 사례와 비교해 보면 현재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은 2016년 10월에 의후이 제기되어 그해 12월 탄핵소추가 이루어졌고, 뇌물죄 검찰 기소는 2017년 4월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의 직접적 원인이 된 열린우리당 창당은 2003년 11월, 탄핵소추는 2004년 3월이었다. 반면 현재의 비상계엄 논란은 이떠한가? 발생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사안을 두고, 야당은 6개월 남은 당대표의 대법 선고를 의식하듯 폭주기관차처럼 당장 탄핵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현 상황이 순수한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것이 아님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내란의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의 전말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에 탄핵을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정말 내란이라면 탄핵이 아니더라도 형사상 대통령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기에 물리적으로 극히 부족한 시간 안에 탄핵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허위 보도로 무고한 이들의 삶을 무너뜨린 전례가 있는 언론들이 탄핵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평소 정치적 성향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현재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에 대해 더욱 신중한 검증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대학교의 이름으로 행동을 서두르는 것이 과연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격변의 시기일수록 지성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냉철한 판단과 신중한 접근이다.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고 몸이 머리를 앞서갔을 때 그 결과가 참담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당장의 여론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 학생들은 대통령과 여당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내걸고 단체시위를 하는 데 열중하고, 총학은 이와 다를 바 없는 선언문으로 화답하고 있지만, 이는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지성인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 아닐까?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야 하는 법이다. 취임 이후 118차에 이른 촛불집회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노력이 우리 지식인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제도적 개선이다. 국회의 자의적인 예산 심의권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고, 대통령이 국회의 불합리한 압박에 대응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수단이 마련되어야 하며, 탄핵 절차가 정치적 도구로 남용되지 않도록 더욱 엄격한 요건과 절차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37년 전의 낡은 틀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약을 위해 용기 있는 첫 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나 정파적 판단이 아닌, 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개선이다. 헌법은 우리 공동체의 영구적 존속을 위해 존재한다. 악법은 고치라고 있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자유전공학부 24학번 임재욱 고려대학교 수학과 24학번 김병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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