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융과 융섭의 진실 (생명의 진원) 2
철학과 인문의 장 2
사람에 와서야 생명 진화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각과 감성의 인식을 갖추어 인격으로 나아가 이를 통제함으로 이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인의 근저에는 무시 무종하는 성품이 있으며 대방광(大放光)하는 지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에의해 모든것들이 구비되며 충족되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성격이 규명되며 결정되게 되었습니다. 어째든 이러한 이치를 궁구하며 인간적인 삶의 지표를 제시함으로 우리의 이정표를 현료(顯了)함에 철학과 인문의 의미가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법과 법리가 함께 적용되고 있습니다. 물질 이전을 이법이라 하고 사물을 법리라 한다면 인문의 경우는 모두에 적용됨으로 이해에 난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書)를 완독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진리의 이치는 원융과 융섭함에 있습니다. 개체의 다양함이 모여 있어도 배척과 충돌이 없음으로 원융(圓融,相入)이라 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싸 섭입하여 하나로 나타나 융섭(融攝,相卽)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는 이사무애가 아닌 사사무애에 있습니다. 이사(理事)는 수행을 통하여 이(理)에 진입하는 의미가 있음으로 공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역대의 철학자는 과학과 인문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나누게 되었으며 현대에서는 서로 보완 관계에서 상생하고 있으며 이론적인 이치를 과학에서는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철학적 개념이 역사적으로 노출된 걸러진 법리로 간주하고 이를 주관적 관점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원숙한 전문가에 있어서도 완연한 차별이 있음으로 이는 개인적으로 형성된 사고의 배경에 기인함으로 진리를 구하는 이들은 반드시 출발선을 지켜야 합니다.
한마다로 우리가 진실하다고 믿고 살아가는 현실과 세상이 참된 것이 아닌 것으로 결론 짓고 있습니다. 즉 감정과 인식이 보여 주는 데로 삶을 맏기고 그것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진실한 세상은 이데아로 동굴 밖에 있으며 인간들은 동굴에 갇인 죄수와 같아 현실과 진실된 실상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은 진실의 그람자만 보고 있습니다.
다음 데카르트는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그 역할에서 다르게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다만 정신은 물질의 진로의 방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물질은 자연의 과학적 법칙에만 종속되어 정신적인 신적 존재도 물질을 가진 인간을 어쩔 수 없다는 의미가 있어 이렇게 철학적 사고와 법리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니체 칸트, 철학자들은 고도의 명상력으로 사물을 투시하여 수긍할 수 없음에는 단호히 대처하여 신은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칸트의 이성론에서 인간 이성은 동굴의 비유와 같이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성 인식 이성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면 이성의 비판력에도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상을 모르고 하는 비판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습니다. 이와같이 철학과 인문에서 단순한 현실 순응적 명상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고 면면히 전해 이어오는 철리를 상승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태초의 출발점은 마치 태극과 같이 순수한 자아와 개체성을 가진 자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음양의 대칭을 통하여 의식이 생성되고 개체가 등장하여 사회를 이루며 여기서 주인과 노예가 정신과 물질을 이루며 다른 한편 주인과 손님격으로 주제자와 보조인이 있어 현상계의 삶을 손님인 보조인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생명인 동물의 탄생과 자타를 떠난 이성의 출현과 저쪽 세계의 법칙인 법에 대한 제정과 검증은 불가함을 노출함으로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어 전체와 개아간에는 불가분하여 현상계의 삶은 실상이 아니며 플라톤의 이데아를 찾아야 하며 동굴 밖을 구경해야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