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현담과 화엄 사상에서 理事와 생명 7(一念3千 始敎 終敎 로봇과인식 생명)
지금 까지의 外道에서는 이치인 理를 독립적으로 궁리 연구하여 왔었습니다. 즉 진리를 고유한 것으로 판단하여 진리에 열중하여 어떤 대치관계나 상관관계적인 개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가령 우리의 우주가 여러 차원으로 존재하는데도 3차원의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하여 존재와 생명을 고착화시켜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것들이 실재로 놓여져 있다는 판단하에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理性을 중요시 하면서도 理性을 비판하였습니다. 한편 니체는 낙타적인 삶, 사자의 삶, 어린아이적인 삶,으로 나누어 맹목적에서 반항의 자기 주장, 어린아이의 자기가 없는 천진한 삶으로 발전하여 갔습니다.
法爾로서 법이 그러므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法性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법의 德相과 德用에 수순하여 수행함으로 覺者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如幻忍, 如影忍으로 환영이며 그림자와 같음을 여래님은 똑똑이 관찰하시며 중생세계를 살피고 계십니다. 그래서 경 율 논 3藏이 있습니다.
歷然者 不壞相~
((역연(歷然)은 행포(行布)를 잡았으니 相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요, 상작(相作)은 원융을 잡았으니 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이 無礙(不壞이면서 壞이며, 壞이면서도 不壞함)하여야 비로소 玄門이 세워지는 것이다.))
理事가 교차하여 서로 상대를 빌려서 존립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호 연기하면서 진행되어 나아가도 사물의 자기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理法界의 모습으로 동일한 理의 세계입니다. 즉 理는 影趣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 원융하게 존재하는 것은 그 相은 동일하여 하나인 없는 것과 같습니다. 事法界입니다. 理를 나타내므로 事는 影趣와 같습니다. 즉 사물이 상작(상즉)하여 理와 다름 없으므로 事를 혜안으로 보면 空입니다. 다시 말하면 空과 事를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와 여럿의 관계에서 본성의 하나는 不壞이나 여럿으로 壞相이며 반대로 여럿에서 하나로 모일 때 괴상이나 불괴입니다. 理는 원래 不壞이므로 事가 壞로 나타나나 실지로는 事도 理입니다. 여래님은 방 한 칸에 사람 10명이나 10만명을 수용해도 조금도 방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理로 바꾸면 개개가 자기 시간과 공간을 갖기 때문에 법계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계의 數는 정해져 있습니다. 중생의 數는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상호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緣起입니다. 법성인 法爾와 생명인 사람이 같이 의지하면서 평행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空도 지혜없는 빈공은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있다면 그 因이 있어야 하며 바로 시작은 없습니다. 3大 體相用이 모여 하나를 성립시키고 있으며 지수화풍이 모여 4大가 되어 법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시공도 법계입니다.
참고로 법리의 개념이 衆口難防이므로 思量이나 分別을 망상이나 망념으로 취급함으로 주체인 자신도 망언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리의 개념은 理智라 하여 3차원 사람은 3차원 識으로 분별하여야 함으로 망상이라 하지않고 그 법리의 분별을 理智라 합니다. 여래님도 有情으로 識과 性이 있으며 여기서 識은 無漏입니다. 범부인 사람도 理智를 분별할 때 무루지에 가깝게 하고 있습니다. 보살이나 아라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소속의 차원 言語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만 心不住입니다. 즉 삼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法空입니다. 앞의 그런 주장은 我見이라할 수 있습니다. 소승 대승 일승에서 확연한 법리의 차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법리의 분별이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이 필요한 것은 깨달음에서 단계적 깊이가 있기 때문이며 대승경전에서 체상용으로 다 분별하고 있습니다. `가령 다만 모를 뿐이다. 든지 혹은 무조건 다 갖추고 있다. 또는 누구나 그냥 다 완전하다`. 라고 하는 것은 6도나 여러 차원 세계를 몰라 말할 수 없으므로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간단이 짚고 넘어가면 소승이 我空이기 때문에 분별 망상의 法에 대한 我見에 갇쳐 있기 때문에 他나 남에 대한 관계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모를 뿐이다,하는 것입니다. 차원을 알 수 없습니다. 다음 대승 始敎는 空을 알고 무주상 보시를 하기 때문에 타인 과의 괴리(乖離)를 좁혀 가고 있습니다. 반야인 바라밀을 닦아가는 단계입니다.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아 第三 인욕바라밀을 얻으면 空으로 第一 보시바라밀 보다 공덕이 수승하다. 하였습니다. 반야는 지혜인 空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차례대로 6바라밀을 닦는 과정이므로 始敎입니다.
十住는 智인 지혜(直心,집착하는 바가 없고 能所의 생각이 끊어진 것이라서 念眞如라고 한다.) 이며 즉 空으로 10주까지 나아가면 바라밀을 함께 수행하기 때문에 완성에 이르는 관정주(灌頂住)에 도달합니다. 十行은 보살행을 행하는 행포(行布)이므로 深心으로 지혜가 깊어 갑니다. 즉 관계를 알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十廻向은 원력인 자비심의 증장이며 즉 自他의 구별을 없이 하여서 十地인 決定心(善決定)으로 굳어져 움직임이 없습니다. 여기서 지위를 높여 가면서 소승법에의 계율, 37조도품, 등의 지혜를 심화하여 6지 現前地에서 반야가 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비심이 앞의 直心을 따르며, 앞의 두 마음에 다 大悲가 있으며, 대비와 직심이 深心을 따르니 行願이 가없다. 말하자니 三心의 차제를 갖지만 어느 마음도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大願으로 主를 삼는다. 그러나 願은 한량없는데 대체로 사홍서원을 말하는 것은 지음 없는 四諦의 이치이기 때문이다.))현담주해
((즉 중생무변서원도은 괴로움의 근원을 건네는 것이요, 번뇌무진서원단은 結集을 끊는 것이요, 법문무량서원학은 道諦를 배우는 것이요, 불도무상서원성은 滅理를 증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음없는 無作이라는 말은 '소승의 生滅이 있음'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취하고 버리지 않고 곧 바로 진실에 나아가는 것을 無作이라 한다.))
여기서 소승이나 외도에서의 생멸이 있음은 즉 해탈을 독자적 현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간단하게 진리를 단정하면 편하고 좋으나 현실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6상원융의 에를 들면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이 서로 융섭하므로 완전 독립, 독자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의 예로서 6면의 거울로 이루어진 방안에 야광주을 가운데 하나 두고 우선 서로 대면하는 거울2을 관찰하면 갑,을 거울속에는 자체의 야광주에 상대의 구슬을 받아드림으로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2층에서 서로를 받아드려 3층응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하여 4층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할 것은 거울의 6면을 모두 활용하면 각 차원의 계층마다 구슬의 숫자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며 자기 구슬의 주체는 한 차원 위에 있습니다, 가령 갑의 구슬은 2층에는 자기 것이 없으므로 1층이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즉 갑은 다른 곳에서 손님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化身이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원래 一心이므로 모두가 正覺입니다. 원칙적으로는 3층의 구슬은 3층에만 비치며 다른 층은 차단되어 비치지 않으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一心이 될 때는 전 차원이 하나가 되어 모습이 다른 여러 차원도, 다른 국토도 각자의 눈으로 각각이 분별할 수 있습니다.
((所化의 사람이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 이 경의 所化가 보는 것은 한량없고 수없으며 광대하여서 다른 경의 所化가 보는 것과는 다르다.
`三千~이란` 천태종에서 萬有의 모든 법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즉 지옥계에서 佛界에 이르기까지의 10界가 원융하여 서로를 갖추니 곧 100界가 되며, 이 100界가 十如是(性,相,體,力,作,因,緣,果,報,本末究竟)의 뜻이 있으니 곧 1000이되며, 이것은 三世間에 배대하여 三千이 된다.
鈔의 뜻은 이 경의 所化는 이러한 三天으로 分限이 분명한 것에 국한되지 않음을 말한다.))현담주해
((依他起의 법에는 다른 性이 없다. 풀어서 말하자면 依他 법에는 徧計所執의 常인 無常의 常이 없으며, 圓成實의 常인 有相의 常이 없다. 그러므로 無彼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승 初敎의 뜻이다. 依他 법 중에 染分이 한 가지로 遍計함을 잡았기 때문에 淨分이 한 가지로 圓成하는 常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實敎의 뜻이다.))
((또 性은 곧 相이기 때문에 不生不滅이 바로 無常의 뜻이요, 相은 곧 性이기 때문에 생멸은 常의 뜻이다. 서로 빼앗는다면 둘 다 잘못이요, 서로 이룬다면 둘 다 성립된다. 하였다. 이것은 오직 性이 相에 즉하였음을 취하였으니 곧 終敎의 뜻이다. 이 뜻은 性相이 서로 어우러져 통함을 바로 드러내었다.두 뜻이 서로를 이루어 생멸의 相이 다하니 無常은 곧 常이라서 불생불멸이 곧 無常의 뜻이요, 緣을 따라서 변하여 바뀌니 常은 곧 無常이라서 생멸이 곧 無常의 뜻이다.))
隋(수)나라 천태 智者대사는 법화현의(玄義) 論藏을 저술했습니다. 법화경을 필두로 하였으므로 화엄사상과 서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모두 일승 원교이므로 頓敎를 갖추고 있으나 漸敎 개념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일승 원교에서는 개별인 점차에서도 일승이므로 하나가 되어 이것이 대승 시교(始敎)와 종교(終敎)와의 다른 점입니다. 즉 지혜의 깊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라한과 보살의 지혜가 서로 다른 점과 같습니다. 그래서 화엄에서는 다른 경전을 일승을 향한 점차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0가지 법계를 갖춘다는 것은 10가지 차원으로 세계를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생명의 삶의 형태가 대략 10가지 라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주하는 국토를 필요로 함으로 생명의 대상인 환경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규명하는데 인류는 과학 철학 종교 그리고 여러 사상을 개발하였습니다. 인문학에서는 주로 감성적인 성정에서 다른 사상을 원용함으로 하늘의 구름과 같아 지표가 분명하지 못합니다. 한편 지적설계론은 외도의 존우론과 같아 우상 숭배처럼 특별한 존재를 설정하여서 생명의 비밀을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지적설계론은 진화론과 같으나 빅뱅이나 理界의 상황에서는 모순적이며 물질을 설명하는데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봇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인식이 생겨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법성인 자연에서 스스로 일어나 3차원에서 형성된 법성인 물질의 집적으로 理의 4단계 지혜가 영혼을 갖추게 되어, 氣로 전환되어진 법성이 理事의 중간에서 마음인 인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이므로 이 생명에서 理계로 나아가신 붓다님은 생명으로 理인 자연의 지혜를 운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인 理와 생명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면서 생명이란 별따로 없습니다. 이계 4단계도 氣가 성립될 수 있으며 차원간에는 理事와 같으나 3차원의 물질이 아니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