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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般若波羅蜜經제7강 일상무상분 제9 / 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작성자일념통천|작성시간24.10.05|조회수35 목록 댓글 2

金剛般若波羅蜜經

 

제7강 일상무상분 제9

 

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출처 : 염화실

 

 

 

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須陀洹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하대 我得斯陀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대

 

而實無往來새 是名斯陀含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阿那含은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實無有法名阿羅漢이니

 

世尊이시여 若阿羅漢이 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著我人衆生壽者니이다

 

世尊이시여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에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나

 

世尊이시여 我不作是念호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하노이다

 

世尊이시여 我若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世尊이 卽不說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者어니와 以須菩提가 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이라하시나이다

 

 

 

 

 

제9, 하나의 상도 상이 없다[一相無相分]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의 과위(果位)를 얻었노라’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의 유(流)에 들다.’라고 이름 하지만 실은 어디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이나 그 외의 무엇에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수다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의 과위를 얻었노라’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온다’는 말이지만, 실은 가고 옴이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다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노라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아나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의 도(道)를 얻었노라’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고정된 것이 있어서 이름을 아라한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고 하면 이는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집착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가는 아라한입니다.

 

그러나 저는 ‘나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라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에게 고요한 행(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로 고요한 행을 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부르기를 ‘수보리는 고요한 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뿐입니다.”

 

 

 

 

 

관념과 그 관념의 부정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하나의 상도 상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상도 상이라고 내세우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상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상을 좀 낸들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 실체를 꿰뚫어보면 상을 어디에서고 찾을 길이 없는데, 공연히 환상에 사로잡혀서 내세웁니다. 생색내고 자랑하려고 하지만 자랑할 거리가 본래 없는데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상내지 마라’, ‘상 없는 것이 가장 중한 가르침이다’ 라고 금강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須陀洹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수다원이 능작시념하대 아득수다원과부아

 

수보리언하사대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금강경에는 수행의 점차로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고 하는 성문사과(聲聞四果)가 나옵니다. 수행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이야기하면 허황된 생각이 들고 지치게 되고 싫증을 내기가 쉬우므로 단계를 설정해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실은 수행에 있어서 단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처음도 사람이요, 중간도 사람이요, 마지막도 사람입니다.

 

수행의 점차를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이렇게 52단계까지 상당히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전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에 그 삶을 어떻게 사느냐, 삶의 질이 어떤가를 나눈 것이지요.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수다원 단계에 오른 사람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그러자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합니다.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다

 

하이고오 수다원은 명위입류로대 이무소입이니 불입색성향미촉법일새 시명수다원이니다

 

 

 

‘왜그런고 하면 수다원이 이름이 유에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다.’

 

‘어떤 물질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소리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향기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맛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어떤 감촉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법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그저 이 이름이 수다원일 뿐이다.’

 

금강경에서 소개하는 성문사과의 4단계는 부처님 이전부터 있었고,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바라문교에 근거합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4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처음은 범행기(梵行期), 학습기(學習期)라고 해서 7,8세가 되면 출가를 합니다. 출가하여 바라문교 단체에 들어가서 학습을 하고 나이가 20세쯤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을 가주기(家住期)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결혼도 하고 자녀를 두고 가업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한 20년 속세생활을 하다가 40세쯤 되면 다시 임서기(林棲期), 임주기(林住期)라고 해서 숲속으로 재출가를 합니다. 이것이 제3기인데 이 때쯤 되면 철도 들고 세상 경험도 많아서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재출가하여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서 수행이 상당해지면 다음으로는 교화를 하러 다닙니다. 그것을 유행기(遊行期)라고 합니다. 교화를 하러 다니는 이 마지막 단계가 아라한과에 해당하지요.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바라문 4기에 맞춰서 초기 불교에서는 성문사과라고 하는 4가지 수행의 단계를 설정했던 것입니다.

 

사실 소년 소녀 시절에 학습기에 들어갔다고 해도 사람일 뿐이고, 다시 세상에 나와서 가계를 이어갈 때도 사람일 뿐이예요. 재출가는 소년때와 같은 제도적인 출가가 아니므로 제대로 된 출가이지만 이렇게 한 사람 역시 사람일 뿐이고 공부가 완숙해져서 사람들을 교화하러 다닌다고 해도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개인적으로는 불자들도 바라문 4기와 같은 일생을 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가끔 ‘절순이’라는 말을 쓰는데 절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절의 의식이라든지 풍속이며 여러 가지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아도 정작 진정한 불법에 있어서는 캄캄한 신도들이 많습니다. 절에 다닌지 한 2,30년이 되어서 ‘절순이’가 다 되었지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불자생활을 한 4,50년을 하였다고 치고 10년을 수다원, 20년을 사다함, 30년을 아나함, 40년 이상을 아라한이라고 설정해도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10년 20년된 불자이고 수다원 사다함이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모두가 허망된 이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잡힐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하대 我得斯陀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대

 

而實無往來새 是名斯陀含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사다함이 능작시념하대 아득사다함과부아  

 

수보리언하사대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사다함은 명일왕래로대

 

이실무왕래일새 시명사다함이니다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대 ‘내가 두 번째 단계인 사다함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는가.’ 부처님이 묻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아닌고 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온다[一往來]’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다함은 가주기이니까 출가했다가 집에 한 번 되돌아옵니다. 사전적인 해석은 ‘죽어서 천상에 한 번 갔다가 다시 인간 세상에 와서 수행한다’ 고 되어있지만 죽어서 천상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 하는 일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나는 가주기에 머물렀다’ 아니면 ‘사다함에 머물렀다’ ‘사다함 결과에 이르렀다’라고 할 거리가 없어요. 얼마를 공부했던 간에 거기에 대해서 자신에게 관념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불자들이 20년 30년 공부한 입장에서 한 번 내놓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철저히 무상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면 무엇도 상으로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지혜에 입각해서 낱낱이 쪼개는 거예요. 낱낱이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낱낱이 부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을 ‘벼락을 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의 관념을 벼락을 치듯이 사정없이 흐트러놓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은 좀 지우친 감이 있을 정도로 상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관념을 파괴하는 가르침으로써 뛰어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阿那含은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아나함이 능작시념하대 아득아나함과부아  

 

수보리언하사대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아나함은 명위불래로대

 

이실무불래일새 시고로 명아나함이니다

 

 

 

 

 

앞서 ‘소위불법자(所謂佛法者)는 즉비불법(卽非佛法)일새 시명불법(是名佛法)이다’ 이런 말을 했는데 사과에 대한 것도 그 논리를 적용시키면 꼭 맞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의 결과 역시 ‘아나함이 아나함이 아니라 이 이름이 아나함이다’라는 뜻이 되지요. 부처님이 ‘아나함이 아나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수보리가 답합니다.

 

아나함은 명위불래(名爲不來)라고 하였습니다. 사전적 해석은 ‘천상에 가서 다시 인간세계에 오지 않는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바라문 사기에 맞춰서 해석을 한다면 아나함은 임서기라고 해서 재차 출가했으니 더이상 속가에 안 오지요. 안 오니까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뜻의 불래(不來)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이 불래일 뿐, 실무불래(實無不來)입니다. 이 사람이 겉으로 출가를 했든 다시 환속을 했든 재출가를 했든 어디로 가나 그냥 사람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그 사람일 뿐입니다. 교실에 있든 집에 있든 법당에 있든 목욕탕에 있든 식당에 있든 화장실에 있든 늘 그 사람이지 장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요. 예를 들어서 교실이나 법당에 오면 어엿한 불자이지만 법당을 벗어나면 어엿한 불자라는 것은 간곳이 없고 그냥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본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공연히 허상에 사로잡힐 것이 없습니다. 확대해석 하면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꼭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그러한 것은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 아나함의 입장에서도 불래라는 것은 이 이름이 불래일 뿐이지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實無有法名阿羅漢이니

 

世尊이시여 若阿羅漢이 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著我人衆生壽者니이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아라한이 능작시념하대 아득아라한도부아

 

수보리언하사대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실무유법명아라한이니

 

세존이시여 약아라한이 작시념하대 아득아라한도라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이다

 

 

 

 

 

여기에 이해하기 쉽도록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대 내가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 하는가’ 수보리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아닌가 하면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이름을 아라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은 사과중에 제일 높은 차원이지요. 부처님도 간혹 아라한이라고 불립니다. 아라한은 응공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는 뜻으로 공부가 거의 다 된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고,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면 수행을 많이 한 큰스님 중에도 제일 큰스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무슨 표가 있고 무슨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관념에 사로잡혀서도 안되고, 바라보는 사람도 그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사실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해요. 모든 사람에게는 공히 그 궁국적 차원에 부처라고 하는 고귀한 입장이 있습니다. 그 입장 그 자리는 누구에게나 공히 평등한 것입니다. 수행한지 몇 년이 됐다, 큰스님이다 작은 스님이다 이러한 차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세존이시여 만약에 어떤 큰스님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큰스님이다 라고 한다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따라옵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많이 했다고 하는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때부터 온갖 번뇌망상과 온갖 병들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이 다 딸려온다는 것입니다. 호박 같으면사 좋지만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 중생이라고 하는 열등의식 수자라고 하는 한계의식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하는 정도야 봐 줄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상을 내는 것은 봐 줄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世尊이시여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에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나  

 

世尊이시여 我不作是念호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하노이다

 

세존이시여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에 최위제일이라 시제일이욕아라한이라하시나

 

세존이시여 아부작시념호대 아시이욕아라한이라하노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나를 두고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가운데 최위제일이라’ 수보리가 말합니다. 무쟁삼매란 다툼이나 갈등, 시비가 없는 삼매입니다. 삼매라고 해서 특별한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비가 없는 사람, 갈등이 없는 사람, 분별이 없는 사람, 차별이 없는 사람 중에서 자네가 제일이야.’라고 부처님이 평소에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남을 보고는 칭찬은 할 수 있지요. ‘큰스님 참 공부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칭찬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칭찬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수보리에게 ‘욕심을 떠난 사람 중에 제일가는 아라한이라고 하시지만은’ 수보리 자신은 ‘나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이 이 금강경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어떤 사상, 어떤 위대한 가르침을 펼치려 한다는 것을 수보리라고 하는 위대한 제자가 잘 알고서 부처님 마음에 딱 맞게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평소에 저를 두고 참 자네는 시비를 떠난 사람이야 갈등을 떠난 사람이야 차별을 떠난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자네가 제일이야. 그리고 욕심을 떠난 아라한 중에 제일이다라고 하셨지만 저는 전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 또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칭찬을 듣고저 하는 마음을 다 떠나서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인 부처님과 수보리의 멋진 하모니를 이런 데서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世尊이 卽不說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者어니와 以須菩提가 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이라하시나이다

 

세존이 즉부설수보리가 시요아란나행자어니와 이수보리가 실무소행일새

 

이명수보리가 시요아란나행이라하시나이다

 

 

 

 

 

‘세존이시여 내가 만약에 이러한 생각을 하대 내가 아라한 도를 얻었다. 내가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다. 내가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세존께서 곧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란나행은 적정행이라고 해서 시비와 갈등, 차별심이 사라진 아주 고요한 행을 말합니다.  

 

수보리 마음속에 어떤 관념이 있었다면 부처님은 딱 꿰뚫어보시고 ‘저건 되도 않는 공부야. 공부 조금 하고서는 했다고 하는 상에 떨어져 있으면 그게 무슨 공부야.’ ‘부처님께서 나를 기피했을 것이고 나를 혐오했을 것이고 나를 제자라고도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으니까 부처님이 나를 최위제일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以須菩提가 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이라하시나이다

 

 

 

‘수보리가 시비를 떠나고 갈등을 떠나고 차별을 떠난 아란나행을 했으되 실로 전혀 그런 행을 한다는 바가 없다’

 

‘실로 그런 행을 하는 바가 없다[實無所行]’는 것은 해도 하는 바가 없는 행입니다. 본인이 아무런 관념없이 그런 행을 하니까 그저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예를들어 보시를 해도 보시하는 바가 없어서 관념에 남아 있지 않고, 훌륭한 수행을 했으되 훌륭한 수행을 한다고 하는 관념에 전혀 사로잡혀 있지 않아서 그 이름이 보시이고 그 이름이 수행일 뿐입니다.

 

수보리역시 ‘이름을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름이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 시비와 갈등, 차별을 떠난 아란나행이라고 하는 그 어떤 정신 세계에 대한 실체 역시 없는 것이지요.

 

금강경의 이대목은 수행의 4단계를 이야기 하면서 무상의 이치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좋은 일을 했을 경우입니다.

 

우리가 나쁜 일을 하는 경우야 감추려고 야단이므로 더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고는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침을 안 떼지요.

 

금강경을 다른 의미에서 보면 ‘시침떼기 작전’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했더라도 시침을 딱 떼는 것입니다. 속에까지,정신 깊은 곳에까지도 시침을 딱 떼야 됩니다.

 

일상무상분을 우리 일상에다 이끌어서 삶에 지침과 교훈으로 삼자면 ‘겉으로만 시침떼는 것이 아니고 깊은 속까지도 완전히 시침을 딱 떼버리는 마음자세’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염화미소

작성자 : byunsdd

 

 

무비스님 - 제7강 금강경 9.一相無相分

 

주소 : https://youtu.be/OK1OtOyqSxk?si=46cINyiqHdGtK4Z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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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일념통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05 무비스님 - 제7강 금강경 9.一相無相分

    주소 : https://youtu.be/OK1OtOyqSxk?si=46cINyiqHdGtK4Z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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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4.10.06 new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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