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현자를 만나다
전생 리딩을 하다 보면
놀랍게도
부처나 예수의 제자로
살았던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공자나 맹자 등의
제자였던 사람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대부분
현생에서도 중교인이나 명상가.
혹은 저명한 학자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본인들은 자신의
영적 자아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지,
즉, 영적 사명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이번 생에서
무엇을 배우러 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참나'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스스로 진지한 탐구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분들에겐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전생에서 익히고 배운
율법이나 계율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생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현생의 의식에도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전생에서
자신의 영적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현생의 의식은 대부분 과거생의
무의식 창고에서 비롯되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현생에 다시 태어난 것은
이런 편협함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경험을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서
너그러운 융통성과
원만함을 배워야 합니다.
따뜻한 지혜로 삶에 대한
긍정적 성품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전생에서 배운
영적 교훈을 현생에서
널리 베풀고 나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례로
교회 목사와 결혼하겠다는
딸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어머니의 리딩에서,
그 딸은
전생에 (성경)의 구약에
등장하는 욥의
딸로 태어나 살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짙은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인 욥의 능력 덕분에
넉넉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래서 현생에서도
딸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역을 이행하는
목사에 대한
선입감이 좋게 작용하고 있다고
리딩은 말합니다.
전생에 종교인으로 살았던
사람은 대부분
영혼이 맑고 순수합니다.
하지만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보다는
삶을 혜쳐나가는
원만함이나 현장성이 부족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영혼 스스로가 현생에서
평범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적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생에
한번 입력된 외곬의 삶은
그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번에 세상의 세속적인
삶의 흐름 속에
맞춘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결국 그 세상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고뇌의 밤이 점점 길어집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죄 없는 고집불통보디는
후회하고 반성하는
죄인이 휠씬 인간적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영적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