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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재(10)마음의 발견(과학편)P30

작성자오로지팔정도|작성시간24.12.01|조회수43 목록 댓글 1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설사 타인에게서 비난을 받을지라도,

매를 맞더라도, 돌에 맞을지라도, 칼로 베어지더라도,

감정적이 되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인욕의 마음을 갖고,

일체의 제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부동의 마음으로,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도,

분노의 마음을 가져서는 신리의 생활을 지킬 수 없다.

 

마음이 정법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성취해서, 잘 인내하고,

베풀기 힘든 것이라도 자주 베푸는 것,

선행을 베풀어도 그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항상 갖고,

마음의 길을 구해 정진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인생의 목적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물질문명이 향상되어, 경제적으로 의식주가 안정되면,

인간은 다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자나,

이것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상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 등은

마음에 평온함이 없고,

마음의 격투가 계속되는 인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범하고 있는 죄에 만성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설()하는 사람들이, 사리사욕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더한층 어두운 상념에 지배되어 마음의 평온을 잃고,

육체적으로도 부조화한 현상이 나온다.

 

종교적 지도자 중에서, 언제나 병약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격투가 있고, 마음에 평온이 없고,

자기 자신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지(), ()에 의해 중생을 인도하는 것은,

그 마음을 미치게 하고 만다.

믿고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더욱 큰 죄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현상계에서도 지옥의 생활을 체험하고,

게다가 저 세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보다 혹독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영능자는, 이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즉석에서,

가장 명쾌하게 알고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든 믿지 않든 관계없이,

이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빛의 세계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심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의 양식이며, 생활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공염불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다.

정법에 따라,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한 실생활의 노력을 한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술(記述)에 불신이 있다면,

기도하는 것만으로, "뜻밖의 행운"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리적 생활 이외에는, 인간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적인 종교적 행사가, 반드시 신리(神理)라고 할 수 없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경문을 올리는 것으로

진정 성불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형식적인 행사에 대해서도, 잘 반성해야만 할 것이다.

경문을 올리는 기도만이 신앙은 아니다.

마음을 잃은 근행 등은 생활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에 의해,

평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신리에 적합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도 빛의 세계에 살고,

부조화의 마음을 갖고 항상 불안이 있는 사람들은,

지옥계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까지 어두운 생활을 체험하도록 되어 있다.

 

선조에 대한 공양은,

생존하고 있는 자손이, 바르고 밝게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조의 최고의 기쁨이며 최대의 공양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조는, 자손들의 마음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도 반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방황하고 있는 선조가 있기 때문에 불행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불행은, 가족의 마음이 신리에 반한

부조화에 기인하고 있음을 반성하지 않는 한,

어두운 상념을 제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마음이 아름답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공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불행은, 살아 있는 인간이 만들어 내며,

부조화한 상념 행위가, 방황하는 빙의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가족 일동의 마음이, 항상 정도를 걷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신불의 빛에 의해 뒤덮이고,

집도 또한 빛에 뒤덮이기 때문에,

방황하는 영은, 이 빛에 의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성불할 수가 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방황하는 영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역(靈域)을 바로잡는 것이,

자기 자신을 또한 구하는 것이 된다.

마음을 잃은 경문을 몇 만 번 올려도,

인내력과 성대의 연습뿐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목의 신리를 생활 속에 살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깨닫는 지름길인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투쟁이라는 말은 없다.

" 원수를 사랑하라."

"인내"

"오른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라."

" 인욕" 등등

모두 조화라고 하는 것이 신리인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미담으로 되어 있는 원수갚기 등도.

신불의 자식으로서는 해야 할 행위는 아니다.

충동적 감정적 행위이며,

이 집념은 우리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인욕의 마음이 없고, "부모의 원수" " 남편의 원수"라며,

항상 마음의 평온이 없는 생활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은,

상호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생겼던 것으로,

그 결과를, 감정적으로 당사자나 관계자가 응보(應報)한다는 것은,

한층 더 죄를 깊게 할 뿐이다.

 

응보는, 어두운 상념이 부조화한 결과를 일으켜,

언젠가 이 어두운 상념에 의해,

자기 자신의 몸에 부조화한 결과가 순환해 온다고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물리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안 된다.

살해당한 부모의 원수를 갚은 시점에서,

원수의 자식은 또 부모의 원수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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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4.12.01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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