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또는 거기
봄이 오는 듯하더니
꽃샘추위가 매섭다.
남도에는 이미 봄꽃이
만발해서 상춘객들로 야단이다.
아직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한
봄을 마중하러 바람도 셀 겸
길을 나서볼까 하다가
'에이,
거기가 거기 지 뭐'
하는 마음으로 그만두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방 문에 써 붙여둔
게송 한 자락으로 위안을 삼았다.
봄을 찾아 모름지기
동쪽을 향해 가지 마라
너의 집 서쪽 뜰에 이미
눈을 뚫고 매화가 피었다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길에 나섰다.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 같은 데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밤중에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거리니
마침 머리맡에 물바가지가 있었다.
잘 되었다 싶어 물을
마시니 참으로 꿀맛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고는 깜짝 놀랐다.
간밤에 그렇게 맛있던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간밤에 마신 맛있는 물과
아침에 본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의 법도 소멸한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오직 인식에 기초한다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따로 무엇을 구하겠는가
일체유심조
즉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원효 스님은 가던
발걸음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생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을 노래하며
'여기'와 '거기' 가 둘이 아니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설법하셨다.
'피안'은
저 언덕이라는 뜻이다.
저 언덕이란
이상을 이룬 땅.
완전한 소망이 이룩된 땅.
행복의 땅이다.
그에 비해
'차안'은
고통과 번뇌가 가득한 땅.
여기 곧 우리네
범부들이 사는 세간이다.
'여기' 에 사는 중생들은
늘 고된 삶을 부지하며,
'거기'에 있다는 행복을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애를 쓴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결국에는 다
이루지 못하고 거기로 간다.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여기'에서
'거기'로 지향하는 원을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삼계개고 아당안지 , (三界皆苦 我當安之)
부처님의
탄생게 가운데 한 구절이다.
''삼계가
다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신통으로 한 번에 일체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생명도 유한한 것.
모든 부처님이 생멸을 거듭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설해,
괴로운 차안이 곧 피안인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것을 밖에서 찾는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여기 차안'은
'불행'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투덜거리고,
결코
갈 수 없는 '거기 피안'은 ''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허공 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부치 님께서는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라고 가르치셨다.
한 생각 편안하면 극락이요,
한 생각 괴로우면 지옥이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바뀌는 것이다.
대개
나는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다.
인因은 여기에 있고,
과果 는 거기에 있다.
내가 지은 인은 여기 차안에 있고,
내가 지은 과는 거기 피안에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한 생 열심히 살다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여
저세상으로 간 사람은,
숨 쉬고 살아 있는
이생이 피안이고
숨 떠난
그곳이 차안이다.
아파서 꼼짝 못 하고
숨만 쉬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병실이 차안이고,
사지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이 피안이다.
낮에는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저녁에는 이슬 피할 곳 찾아다니는
사지 멀쩡한 노숙자에게는
찬 길바닥이 차안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과 따끈한 방이 피안이다.
따뜻한 방에서
취업 준비하는 실직자에게는
취직 빨리 안 하냐며
잔소리해대는 엄마가 차안이고,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피안이다.
매일 교통지옥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상사의 눈치에서
벗어날 길 없는 회사가 차안이고,
아침에 느긋이 일어나 자기 맘대로
경영할 수 있는 자영업자가 피안이다.
남들 볼 때 속 편한 자영업자는
오늘 매출을
걱정해야 하는 가게가 차안이요,
출근해서 내 일만 하면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인이 피안이다.
추운 데 살면서 난방비로 허덕이는
사람은 지굿지굿한 겨울이 차안이요,
불 안 때도 되는
열대지방 사람들이 피안이다.
뜨거운 태양으로 대지가
타들어가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귀해 흙탕물을
걸러 먹는 이곳이 차안이요,
언제든지 맑은 물이
넘쳐나는 설산 계곡이 피안이다.
이제 그만하자.
이러다가 끝이 없겠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만 써도 이 정도인데,
작정하고 쓴다면
이박삼일은 걸릴 것 같다.
어느 선사가
봄을 찾아 산천을 헤매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니,
집 마당에 이미 매화가
피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네가 바로 부처인데
왜 그것을 모르고
먼 곳을 찾아 헤매는가.
사랑도 행복도
너의 마음속에 있으니
먼 곳에서 찾지 마라.
깨닫고 보니
그렇게 찾아 헤매던 부처가,
그리고 매일 나와 같이
먹고 자고 고락을 같이하던
이 물건이 바로 내가 찾던
부처이고 물건이었던 셈이다.
몇 년 전 천은사에서 법고 불사
회향기념으로 시계를 만들었다.
시계 판 숫자를 대신해서
해인사 팔만대장경 법보전
주련에 쓰인 글귀를 인용하기로 했다.
'원각도량하처(圓覺度量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 를
'행복세상어디 지금이곳여기''라는
우리말로 옮겨 썼다.
생사즉열반 번뇌즉보리다
차안이 곧 피안이요.
여기가 바로 거기다.
차안과 피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피차일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