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보는, 어두운 상념이 부조화한 결과를 일으켜,
언젠가 이 어두운 상념에 의해,
자기 자신의 몸에 부조화한 결과가 순환해 온다고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물리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안 된다.
살해당한 부모의 원수를 갚은 시점에서,
원수의 자식은 또 부모의 원수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끝이 없을 것이다.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상념은 아수라계로 통해서,
마음에 평온을 얻기는커녕,
어둡고 검은 자기 자신을 덮쳐, 지옥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지상계의 집념보다 한층 더 강대하게 되어,
연옥, 지옥에서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계에서도, 노리거나 노림을 당하거나 하며,
몇 십 배나 혹독한 환경 속에서,
불성을 깨닫기까지 수행받도록 되어 있다.
원수를 치기 전에, 그와 같은 결과가 된 것에 대해 그 원인을 추궁하고,
어디까지나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도의 입장에서 반성해 보는 것에 의해,
이성이 작용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지혜있는 인생의 수행자라고 하는 것이다.
정법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를 증오하지 않고, 가련하게 생각해서
< 신이시여, 가련한 자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잘못된 상념을 고쳐, 마음에 평안을 내려 주세요.>
라며 상대의 죄를 용서한다.
" 원한을 가지고, 원한으로 갚지 않고"
의 심경(心境)이,
조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보살의 마음인 것을,
우리는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무례한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지위나 권력에 의해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자기보존을 위한 어두운 상념은, 언젠가, 모습을 바꿔
자기에게 내리퍼붓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상념과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작은 문제라도,
그 원인과 결과를 잘 깨달아, 판단을 잘못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작은 어린이라도 바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장래,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작은 불은, 마침내 광대한 산야도 대도시도 다 태워버릴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빗방울의 힘도,
오랜 세월에는 딱딱한 대리석이라도 구멍을 뚫어버린다.
작은 실개천도, 큰 강이 되면 모든 사물을 쓸어내리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의 마음의 창이 열렸을 때에는
대자연이 인생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러한 것에 의해서도, 우리는 진실된 인생의 기쁨에 잠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정법의 실천 생활 속에 번뇌가 멸해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인생의 중심이다.
마음이 이 현상계의 제 현상을 즐기면,
방황과 고통이 생기고,
마음이 정도를 좋아하면, 깨달음과 기쁨이 생겨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실천에 의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
자비와 사랑에 의해 사람들에 대한 보살의 마음의 행위를 하는 것,
보다 마음을 정화해 평온함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육체는 인생 항로의 배에 불과하며,
언젠가는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혼은,
항상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여 변화하며,
모든 것은, 신불의 계획에 의한 인연에 의해 성립하고 있다.
전생 윤회의 법에 따르고 있다.
마음에 생기는 악의 원인을 끄집어내어,
현상화된 악의 결과를 잘 반성해서,
그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선(善)의 근원을 키우고,
정법을 믿고,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고,
항상 반성 속에서 마음을 정도에 통일하는 것에 의해
위대한 불지의 문은 열려간다.
자비는 자비를 키우는 것이며,
자비를 수행하는 것에 의해,
끝없는 욕심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슬픔은 슬픔을 돕는 것이며,
상대의 입장에 서서 중도의 판단을 잊지 않고,
슬픔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 분노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기쁨은 타인의 기쁨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것으로,
자기와 타인으로 사로잡히는 마음을 끊을 수 있다.
버릴 것은,
자신이 행한 행위의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
또한 은혜를 입지 않고,
은혜와 원한 어느 쪽의 사람에 대해서도
차별을 없애는 것에 의해 집착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그 결과, 중생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비이며,
모든 것을 평등하게 차별하지 않고,
중생에게 환희의 마음을 갖고 대하는 것,
이것이 희사(喜捨)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키워 번뇌를 이기는 것은 어렵다.
정도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른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인생 위에서의 상념 행위의 하나하나의 거듭됨이다.
그리고 그 안에, 부동의 마음은 만들어져 간다.
마음 ( 3 )
우리가 이 현상계에 태어나
경험한 지식이나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나은 인생을 보내기 위한 체험이 아니면 안 된다.
하지만 설사 인생 경험의 시간이,
60년이 되든 80, 90년이 되든
혼 생명(魂生命)의 영원한 전생 윤회의 과정에서 보면,
일순간의 불꽃같은, 짧은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영원한 전생윤회를 하는 혼으로,
그 잠재의식의 보고(寶庫)에는,
과거세에서 체험해 온 위대한 지혜가 매장되어 있다.
이 지혜도, 인생 항로에서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노력으로,
영감(靈感)으로 되어 현상화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