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맑은 자유게시판

차향을 머금은 찻잔 ----동은스님

작성자고구마감자|작성시간24.12.16|조회수102 목록 댓글 5

차향을 머금은 찻잔  

 

 

하루 일과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아침 공양 후 산책을 마치고 

조용히 차 한잔하는 시간이다.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 

 

이때만큼이라도 오롯이 

혼자 있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다구는 간단하다. 

 

보이차를 마실 때 필요한 다탁은 

옹기 가게에서 

산 작은 단지 뚜껑이다. 

 

다관 받침은 

오래전 영월 동강에 갔다가 

주워온 납작한 돌이다. 

 

그러고 보니 

다관은 20년이 넘었다. 

 

서울 수도승首道僧 시절 

인사동 노점상에서 

2만 원 주고 산 것이다. 

 

그리고 찻잔. 

 

이 찻잔은 

사연이 많은 찻잔이다. 

 

 37년 전 겨울, 

 

입춘을 

며칠 앞두고 있었지만 

 

지리산 계곡을 

몰아치는 찬바람이 

 

은 토굴 지붕을 

들썩거려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희뿌옇게 동녁이 밝아왔다. 

 

목이 칼칼해서 머리맡에 놓아둔 

사발을 찾으니 꽁꽁 얼어 있었다. 

 

토굴 아래에 있는 샘물을 

뜨러 갈까 하다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며칠째 몸살 기운으로 

오한이 들어 

문밖으로 나가기가 망설여졌다.  

 

이불 속에서 

온갓 망상들이 떠올랐다.

 

'날이 밝는 대로 

읍내 약방이라도 갔다 올까? 

 

아냐. 이까짓 몸살 정도로 

약방 갈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여길 오지 말았어야지. 

 

그래도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까짓, 죽기밖에 더하겠어?' 

 

혼자 이런저런 생각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스님 계세요?" 

 

잠결에 잘못 들었나 하고 

있으니 

다시 인기척 소리가 났다. 

 

"스님 안 계세요?"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이 용수철 튀듯 일어났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떴는지 토굴 안이 환했다.

 

 ---"누구세요?" 

 

문이랄 것도 없는 

토굴 문을 여니 

 

웬 스님 한 분이 서 계셨다. 

순간 내가 잘못 봤나 했다. 

 

오대산에서 

같이 행자 생활을 하고 

계를 받은 도반 스님이었다.

 

 ---"아니, 스님이 어쩐 일이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둘이 앉기에도 좁은 

방 안에서 

큰절로 인사를 나눴다. 

 

스님은 

 

내려놓은 걸망에서 쌀이며 

반찬거리를 주섬주섬 내놓으셨다. 

 

산 아랫마을까지 첫차를 

타고 와 한참을 걸어온

 

스님은 

공양준비 안 하냐며 

쌀 씻을 그릇을 찾았다. 

 

석유풍로에 올려져 

있는 비 뚜껑을 여니 

 

몇 술 안 남은 

밥이 꽁꽁 얼어 있었다. 

 

---"스님, 

내가 몸이 좀 안 좋아 그러니, 

저 아래 샘물에 가서 

쌀 좀 씻어다 주세요."

 

''허허, 이 스님 

도대체 며칠을 굶은 거야? 

 

알았어요.

내가 점심 준비할 텡께 

스님은 좀 누워 쉬시오, 잉."

 

도반 스님이 

공양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김치와 된장을 꺼냈다. 

반찬이라곤 그게 다였다. 

 

며칠 만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먹었다. 

 

입이 까끌까끌했지만 

입맛은 살아 있어 

꿀떡꿀떡 잘도 넘어 갔다. 

 

삭발도 안 하고 

수염도 텁수룩한 내 모습을 

기가 막힌 듯이 쳐다보면서 

 

도반 스님은 

공양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스님, 차나 한잔합시다." 

 

공양도 제대로 하지 않은 

스님이 개울에서 

그릇을 씻어오며 말했다.

 

 ---"네, 그런데 차가 없는데요." 

 

"걱정 마쇼, 내가 다 가져왔응께." 

 

스님은 걸망에서 끈으로 묶은 

차 봉지와 찻잔 두 개를 꺼냈다.

 

다관이 없어 

먹던 밥그릇에 차를 우렸다. 

 

푸르스름한 

찻물이 조금씩 우러났다. 

 

스님이 

다시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이 제 막 봉오리를 

맺은 매화 송이였다.

 

''올라오는데 매화가 막 

피었기에 몇 송이 실례했어라."

 

밥그릇에서 

우려진 차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매화 송이를 

몇 개 올려놓으셨다.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속으로

 

'저 매화가 

뜨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잠시 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봉오리였던 매화 송이가 

조금 씩 벌어지더니 

이내 활짝 피어나는 것이었다. 

 

매화향이 

좁은 토굴 안을 가득 채웠다.

 

'스님, 공부도 좋지만 

몸도 좀 생각하면서 하시오. 잉." 

 

스님이 차를 

따르면서 이야기하셨다. 

 

번지도 없는 

이 첩첩산중 토굴을 

물어물어 찾아와. 

 

봄소식을 알려주는 스님의 

그 말씀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수행이란 내 의지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공부를 점검해줄 

스승이 곁에 없으면 

 

이루기가 힘든 법이다. 

 

어설픈 용맹심 하나로 

토굴에 

들어온 지도 어언 일 년. 

 

공부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 전부터 

수행에 관심이 많았던 

 

도반 스님은, 

지금 나의 처지를 꿰뚫고 있었다. 

 

하시는 말씀마다 지당했다. 

 

수행 길에 만나는 스승과 도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것이다. 

 

겨울 해는 짧았다. 

 

같이 있어봤자 잘 공간도 

부족한 걸 눈치챈 스님이 

 

산그늘이 마당으로 

슬금슬금 발을 걸칠 때쯤,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산을 내려가셨다.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가다가 

한 번 뒤돌아보시더니, 

 

땅바닥에 

큰절을 하고 이내 사라졌다. 

 

난 마당 끝에 서서 

망부석이라도 된 듯. 

 

스님이 사라진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몸살 난 것을 깜박 잊고 

찬바람을 너무 쐰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마시던 

찻자리를 정리하는데, 

 

좌복 밑에 

봉투가 하나 있었다. 

 

도반 스님이나 나나 

스님이 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났는데 

슨 돈이 있겠는가. 

 

아마 행각 중에 받은 

여비를 나한테 주고 가신 듯했다.

 

'그래, 

이렇게 약값을 주고 가셨으니 

내일은 읍내 약방에 

가서 약이라도 지어 먹자.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정진하는 것이 

 

스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일 아니겠는가'? 

 

스님은 가시면서 수행할 때 

가끔 차나 한잔씩 하라며 

 

내가 마시던 

찻잔과 차 봉지를 두고 갔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투박한 찻잔. 

 

두 손으로 조용히 감싸 들고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식은 차를 마셨다. 

 

아! 이 매화 향기. 

 

정좌처다반향초 (靜坐處茶半香初)

 

도반은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차향은 

아직도 찻잔 속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소식마저 끊긴 스님. 

 

지리산 토굴에서 수행하며 

꿈같이 

행복했던 아름다운 시절은, 

 

찻잔에 밴 차향처럼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뗏목 | 작성시간 24.12.16 나무아미타불 🙏
  • 작성자청락 | 작성시간 24.12.16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이보명화 | 작성시간 24.12.16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4.12.16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 작성자지혜의 숲 | 작성시간 24.12.16
    나무아미타불.().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