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에는 많은 비유가 나온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일곱 가지 비유를 ‘법화 7유’라 하며, 이 7가지의 내용은 <법화경>이 비유경이라 할 정도로 문학적 수준이 높은 부분이다.
그 법화 칠유(法華七喩)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화택(火宅)의 비유 - 비유품(譬喩品)
2) 궁자(窮子)의 비유 - 신해품(信解品) -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라고도 한다.
3) 약초(藥草)의 비유 - 약초유품(藥草喩品) - ‘운우(雲雨)의 비유’라고도 함.
4) 화성(化城)의 비유 - 화성유품(化城喩品)
5) 의주(衣珠)의 비유 - 수기품(授記品) - ‘계주(繫珠)의 비유’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라고도 함.
6) 계주(髻珠)의 비유 - 안락행품(安樂行品) - ‘정주(頂珠)의 비유’ ‘왕계(王髻)의 비유’라고도 함.
7) 의사(醫師)의 비유 -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 ‘의자(醫子)의 비유’라고도 함.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1) ‘화택의 비유(火宅譬喩)’
화택유(火宅喩) 혹은 화택삼거유(火宅三車喩)라고도 한다.
불난 집이란 모든 존재가 거주하고 있는 삼계(三界)를 지칭한다. 그 삼계가 불안하다는 말이다. 즉, 불(火)이란 정신적이면서도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를 의미한다.
집에 불이 났건만 그것을 모르고 철없이 노는 아이들을 보고, 소리쳐 불렀으나 노는데 정신이 팔려 듣지를 않는다. 문제는 그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탈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방편을 써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가 문밖에 있다고 달래어 화택(火宅)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이야기인데,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문 밖으로 나와 보니 세 수레는 없고 그 대신에 대백우거(大白牛車)가 준비돼 있었다.
큰 흰 소가 끄는 수레(大白牛車)는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칠보로 장엄 된 훌륭한 수레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세상에도 드문 큰 흰 소가 끄는 훌륭한 수레를 선물한 것이다. 아이들은 뜻하지도 않았던 큰 수레를 선물로 받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없는 기쁨을 느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중생이고, 양거ㆍ녹거ㆍ우거는 삼승(三乘)을 일컬으며, 대백우거는 일승(一乘)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그동안 방편으로 한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의 삼승을 다 모아 성불이라는 일불승(一佛乘)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비유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삼계(三界)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탐(貪)ㆍ진(瞋)ㆍ치(痴) 삼독(三毒)에 물들어 고통과 갈등의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은 다 그것을 끊고 성불의 길로 나아간다는 크나 큰 선언이 되는 것이다.
2) ‘궁자의 비유(窮子譬喩)’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라고도 한다.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이다.
가난뱅이 아들은 원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미아가 돼, 자기의 신분도 모르고 유랑 걸식하며 성장한다. 성장한 뒤에도 가난과 싸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하며 유랑 걸식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자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장자 집 앞에 도달했지만 비천한 신분에 다가갈 수 없다고 느껴 도망간다.
그러나 장자는 거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직감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를 자신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인한다.
그리고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마침내는 장자의 출납을 담당하는 회계사로 키운다. 이후 집사로 성장시켰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일체의 재산을 다 물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의 핵심어는 세 가지이다. 장자, 가난뱅이 아들, 고향이다.
여기서 장자는 불타를 의미한다. 가난뱅이 아들은 중생이다. 중생을 성숙시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데, 이는 불타의 자비가 어떠한 방식으로 중생들에게 전달되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고향으로 본능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 정신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일승, 일불승, 즉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중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일승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법화경>의 핵심 사상을 말하고 있다.
3) ‘약초의 비유(藥草譬喩)’
‘운우(雲雨)의 비유’라고도 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나 숲, 그리고 약초가 많지마는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니라.
먹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 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이나 숲이나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이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중⋅하에 따라서 제 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에 따라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이상의 내용에서 구름과 비는 불타의 자비를 상징하고, 약초는 중생을 의미하며,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는 법계(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초 중에는 작은 것, 중간 것, 큰 것의 차별이 있고, 나무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초목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예로부터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상초(上草), 중초(中草), 하초(下草)와 대수(大樹), 소수(小樹)다. 이것을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라 한다.
불타가 뿌리는 자비의 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지만, 그 비를 받아들이는 대상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중생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도 각각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경전이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즉,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은 일미평등(一味平等)이지만, 중생들의 성품에 따라 각각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고 작고 간에 풀과 나무들이 당연히 자라고 있는 것처럼 세간 중생들이 점차로 수행해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초이목의 비유’를 통해 간과해선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부처님은 설법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천차만별이 아닐 수 없다. 취미도 다르고, 관심도 제 각각이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도 동일하지 않으며, 지니고 있는 개성이나 소질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법화경>이 중생을 초목에 비유한 것은 절묘하다고 하겠다. 부처님은 그러한 중생들의 성품과 욕망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시는데, 이는 한결같이 생명의 실상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의 법우(法雨:진리의 비)를 근기에 따라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근본적인 차별의 이유는 아니다. 삼초이목이 우주 법계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며, 그와 같이 현상적인 차별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차별상의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4) ‘화성의 비유(化城譬喩)’
‘보처화성(寶處化城)의 비유’라고도 한다.
여기서 불타와 중생을 여행객과 그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묘사한다.
긴 여행에서 여행객들이 피로에 지쳐 목적지에 가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고자 할 때 짐짓 목적지인양 중간 귀착지로 환상의 성(化城)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피로를 풀게 한 후 진짜 목적지로 향한다는 말로서 화성에서 심기일전하는 계기로 삼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이 비유의 핵심어는 안내자, 여행객, 중간 귀착지인 화성, 최종 목적지인 보처(寶處)이다. 보처는 보소(寶所)나 보성(寶城)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은 보처에 가는 것이다. 보배로운 장소, 혹은 보배로운 도시, 보배가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이 보배로운 도시 혹은 보배로 가득 찬 도시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에서 오백유순(五百由旬)이라는 아득하게 떨어진 세계로 묘사된다.
그리고 가고자 하더라도 그 과정 역시 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행객으로 묘사되고 있는 중생은 궁극적으로는 이 보배로운 도시에 도달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 길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여행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가이드가 필요하며, 그 가이드는 여행의 도정에서 막히고 뚫린 곳, 쉬고 가야할 곳을 훤하게 아는 가이드이다.
그리고 길고 긴 여행에서 지친 여행객을 위해 등장하는 것이 화성이다. 화성은 그림자와 같은 도시란 의미이며,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은 도시이다. 그렇지만 보성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시라는 점에서 방편을 의미한다. 보성은 진실을 상징한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의 문을 열어 진실한 세계를 보여준다는 <법화경>의 핵심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5) 의주(衣珠)의 비유(衣珠譬喩)
‘계주(繫珠)의 비유’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라고도 함.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 가서 놀다 주인은 술이 취해 잠이 들었다. 급한 일이 생긴 친구는 잠든 주인 친구를 위해 그 사람의 옷 안에 값 비싼 구술을 매달아 주고 나갔다. 필요할 때 팔아서 활용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다른 나라에 가서까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조금 소득이 생기면 만족하고 사는 정도였는데, 하루는 구슬을 넣어준 친구를 만나게 돼 무가보주(無價寶珠)가 자기 옷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계(繫)’는 꿰맨다는 뜻이다.
누구나 이처럼 귀중한 보배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설하고 있으며, 후대의 선종에서 “자가보장(自家寶藏)”이란 용어로 널리 활용된다.
이는 성문과 연각의 두 승려가 과거세에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의 처소에서 대승과 인연을 맺었지만 무명(無明)에 가려 깨닫지 못하고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다가 여래의 방편에 의거한 안내에 의해 일불승에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핵심 용어는 옷 속의 보배 구술, 가난한 방랑자이다. 보배 구술은 일승, 가난한 방랑자는 중생을 의미한다. 중생은 불성이란 보배를 지니고 살면서도 아직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6) ‘계주(髻珠)의 비유(髻珠譬喩)’
‘정주의 비유(頂珠譬喩)’ - ‘왕계의 비유(王髻譬喩)’라고도 함.
‘계(髻)’는 상투 계자이다. 상투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여러 나라를 항복받고자 할 때 작은 나라의 왕들이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전륜성왕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한다. 이때 전륜성왕은 전공에 따라 상을 주는데 말이나 코끼리, 집이나 재물 등을 나누어 주지만 상투 속에 있는 명주(明珠)만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 하나 뿐이기도 하지만, 이 구술을 나누어 주면 전륜성왕 주변의 여러 권속(眷屬)들이 놀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아끼던 명주도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준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중생들로 하여금 멸도하게 해 열반에는 이르게 했지만 <법화경>을 설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래(如來)의 으뜸가는 법인 <법화경>을 이제야 설해주는 것은 왕이 자신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용어는 전륜성왕, 작은 나라의 임금, 전쟁, 명주이다. 전륜성왕은 불타를 상징하며, 작은 나라의 임금은 다양한 번뇌 망상을 상징한다. 전쟁은 수행을 의미하고, 명주는 일승 즉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번뇌 망상을 다스리고 수행을 완성하면 불성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교훈이다.
7) ‘의사(醫師)의 비유(醫師譬喩)’
‘의자의 비유(醫子譬喩)’라고도 함.
의사인 아버지에겐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의사인 아버지가 집을 비었을 때 그 아이들이 독약을 잘못 마셔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와서 그 모습을 보고 해독약을 처방해 아이들에게 먹였는데, 약을 먹고 바로 깨어나는 아이도 있었지만 본심(本心)을 잃고 약을 먹지 않으려 버티는 아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 길을 떠나며,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라고 일러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슬픈 나머지 마음을 바로 잡아 모두 해독약을 먹고 병을 낫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인 의사는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중생들이다. 본심을 잃은 아이들은 아버지가 처방한 약을 먹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방편을 써서 본심을 되찾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근기가 낮은 중생들에게 내리는 방편으로 제도했다는 단순한 이야기도 되고, 나아가서는 태어나고 수행하고 열반의 모습까지도 방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셨기 떄문에 부처님의 진실은 끝 간 데를 모를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닿아 있다는 부처님 생명의 영원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거짓으로 죽었다고 한 것은 진정 속임이 아니듯이 여래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용어는 의사, 아이들, 독약, 해독약, 거짓 죽음이다. 의사는 불타를 상징하며 아이들은 중생이다. 독약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의미하며, 이것을 삼독(三毒)이라 한다. 색⋅향⋅미(色香味)를 잘 섞어서 해독약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해독약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말한다. 이처럼 불타의 자비심은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다양한 방편을 활용한다.
훌륭한 의사의 비유에서는 다양한 처방이란 용어를 통해 방편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또한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이란 것을 잘 알기에 이들을 위해 삼학이란 해독약을 제조해 제시했다. 그러나 삼학을 좋아하지 않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교화하기 위한 마지막 자비심으로 거짓 죽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방편열반이라 한다. 다양한 방편을 통해 중생을 일승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유(九喩)를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앞의 칠유(七喩)에 ⑧착정비유(鑿井譬喩), ⑨부소비유(父少譬喩), 둘을 더한 것이다.
⑧ ‘법사품(法師品)’에 착정비유(鑿井譬喩)가 나온다.
우물을 팔 때 깊이에 따라 마른 흙에서 차츰 젖은 흙으로, 다시 물기가 많은 흙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물이 가깝다는 것을 알게 돼 결국 물을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점차 일승에 이르는 단계를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착정비유’ 대신 ‘맹인비유(盲人譬喩)’를 넣는 경우도 있다. ‘맹인비유’는 선천적인 맹인이 약초로 시력을 얻고 나서 점차 이전의 무지를 각성해 진실한 여래의 지혜를 얻는다는 비유이다.
⑨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 부소비유(父少譬喩)가 나온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교화한 지 40여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땅으로부터 수많은 보살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언제 이렇게 많은 보살들을 교화했느냐"고 감탄했으나, 그 많은 보살을 모두 부처님이 교화한 것을 믿지 않은 이도 있었다.
스물다섯의 젊은이가 백 살 된 노인을 보고 아들이라 하고, 백 살 된 노인 또한 그 젊은이를 보고 아버지라 한다면, 젊은 아버지에 늙은 아들이라 믿지 않는 것처럼 이 경의 가르침이 몹시 심오함을 믿지 않는 이도 있다는 비유를 한 것이다.
이상의 비유들의 특징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법화경>을 대표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전의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용을 불타의 자비와 본질로의 회귀를 설명하는 비유와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비유로 구분할 수도 있다.
불난 집의 비유,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 약초의 비유, 화성의 비유, 훌륭한 의사의 비유는 불타의 자비가 어떻게 중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를 설하는 비유에 해당한다.
반면에 옷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와 상투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는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세친(世親)은 <법화경론>에서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를 일곱 가지의 교만함을 치유하기 위해 전개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대승불교는 석존의 근본정신에로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시작된 운동이었다. 따라서 대승경전의 내용은 전문적 교의 이론보다는 평이하고 현실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용이한 방법으로 서술돼있다.
인연설화, 악마설화, 범천설화, 비유설화 등 다양한 비유와 인연담으로 설하게 되는데 <법화경>에는 일곱 가지(아홉 가지)의 비유설화(譬喩說話)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법화칠유(法華七喩 혹은 法華九喩)‘라 한다.
그런데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나 ‘개권현실(開權顯實)’이란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회삼귀일이란 삼승을 모아 일승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개권현실(開權顯實)이란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결국 삼승과 일승, 방편과 진실이란 대칭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삼승은 방편이나 작용, 일승은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법화칠유 역시 이러한 <법화경>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출처] <법화 칠유(法華七喩)>|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