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재테크
리딩을
하러오는 사람들중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어떻게 하면 다음 생을 위하여
선근을 쌓을 수 있을까요?" 하는
물음이다.
그 질문에 대해 리딩의 답은
--- "그날 그날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봉사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봉사를 통한 선근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봉사정신이
더 값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봉사는
남을 위하기보다는
그 행동과 마음을 통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것이 진정한 봉사의
의미가 가지는 철학이다.
학문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또는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그 무엇이라도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베푼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중에 가장
휼륭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그런 이타적인 덕은
자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경험일뿐더러,
남의
인생관이나 의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인생 항로까지도
바꾸어줄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숨어있다.
무서운 병에 걸리고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과거생의 죄를 정화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카르마의
작용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보고 연민과
동정심으로
그들의 불행을 돕기 위해
자선과 봉사의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 생을 위한
영혼의 재테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주 은행에 영혼의 자산을
저축하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예를 들면,
의사는
환자를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함으로써
선근을 지을 수 있으며,
종교인은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서 있는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선행을 통한
선근을 지을 기회가 널려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 홀릉한 기회를 모른척 한다.
걸음이 불편한 노인을 도와
길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는 일이나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작은 수고가
선근의 기초를 닦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작은 선행의 흔적이 비록
10원의 가치로 비유되어
우주 은행에 저축이 된다 해도
많은 생을 통하여
그 저축을 더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예금의 액수에 놀랄 것이다.
이웃에 대한 봉사는 자신에 대한
최고의 봉사라고 리딩을 말한다.
이 원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는
그 봉사 정신이
진실하고 순수할 떄,
경제의 안정이라든가
명성이라든가
세속적인 성공에 관계된 목표는
수레가 소를 따라오듯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500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가들을 조사해본 결과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적선을
많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적선이란, 말 그대로 선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선을 많이 해야
집안이 잘된다는 명제는
이론이 아니라
500년의 임상결과이다.
그 공덕은 당장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후손을 통해서
반드시 나타난다고 한다
그 좋은 예가
경주의 최부잣집이다.
그 집안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려 300년을 통하여 장기간
만석의 부를 누렸다고 하는데,
항상 남을 위해 배풀고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바쳤다고 한다.
그들은 권력을 멀리하고
일정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항상 검소하게 살며
이웃에게
자선을 배풀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쩌면 그 공덕의 선근으로
그렇게 긴 세월동안
부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공수레 공수거' 의
말을 인용하치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는 모두 자기 것이 아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많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가쳤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은
자신이 쌓은 업 뿐이다.
그것만이 다음 생을
위한 유일한 밑천이다.
윤회와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지난생에 선행을 지은 사람은
가는 곳마다 은인을 만날 수 있고,
악행을
일삼던 사람은 길목마다
빚쟁이를
만나고 강도를 만날 것이다.
그때 그 영혼은 한 겹 두른
얇은 속웃마저
냉혹한 강도에게 뺏기고
추운 겨울날 발가벗겨진
몸으로 울면서
이렇게 탄식한다고 한다.
--- "얼굴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나여
,
나를 위해 왜 아무것도
준비해 두지 않았는가?
지금 이렇게 춥고
고단한 신세가 될 줄
왜 몰랐단 말인가?" 하고.
긴 영혼의 한평생 중에서
그 영혼의 하루가 사람의 일생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여러 생에서
선행과 악행의
두가지를 모두 하였으며,
그러한 각 행위의 인과에 따라
선행에는 언제나
행복과 더 좋은 기회가 따르고,
악행에는 항상
비통과 제약이 따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으로나
제약과 장애가 따른다면
그것은 언젠가 자신이 만들었거나,
영혼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견뎌야할 슬픔이나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다
사람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운명들은
그들이
이전의 한 행위의 선악에 정확하고
조금도, 틀림없이 일치된 결과이다.
윤회의 개념에 따르면
불행한 사람은
그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속죄하거나
정화시켜 나가야 하고,
그 반대편의 사람들은
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의 마음을 내고 봉사함으로써
더 큰 덕과 선근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인과율이 지배하는
이 지상의 삶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사람은 각자
자신의 행위를 통해
미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며,
그 미래의
기초를 닦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표면적인 장애에 굴복하여
소극적인 태도가
되어 버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궁극적 의미에서의 인간은
신에 앞서
스스로를 만드는 창조자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적 존재이며
의지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우주의 창조 에너지와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카르마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카르마를 그저
징벌이나 고통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카르마라는 말은
그대로 '업 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지극히 중립적인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상계의
일체의 것에는 극이 있다.
그리하여 음과 양의
두 면이 있는 것이다.
카르마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히 행위는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으며,
이기적일 수도 이타적일 수도 있다.
만약 행위가 선이라면
그에 대한
보상과 은혜가 분명 따르지만,
그 행위가 악일 때
그것은 우주의 교정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교정의 법칙이란
카르마 자체가 지니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힘의 고통스러운 작용을 통하여
자기 완성을 위해
가해지는 자연의 힘이다.
---"정말 하늘을 우러러
열심히 살아온 죄 뿐인데
왜 내가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비통해 하는
사람들의 리딩에서는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생의
부정적 카르마에서 시작한
사악한 파동이 현재의 불행을
끌어들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 불행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리딩에서는
--- "그 사람의 영적 완성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 영혼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 라고 리딩은 지적한다.
아이를 낳다가 원인이 불분명한
하반신 마비의 불구가 되어버린
어느 젊은 여성의 리딩에서는
그녀는 일제시대 때,
남방 어느 섬에서 종군위안부를
관리하던 일본군 장교였는데
그때
임신하게 된 만삭이 된
어느 불쌍한 위안부를
잔인하게
학대했던 악행의 카르마가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병의 원인이라고
리딩은 지적했다.
또 다른 경우에서는
어느 사업가가
자기 형에게 자기 재산의
일부를 명의신탁해 놓았는데,
그 형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형 앞으로 명의가 된 재산 문제로
집안간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 재산에 대한
원래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사업가는
최종심의 재판에서 패소하게 되고,
그 억울함에 따르는
분노와 괘씸한 마음 때문에
마침내 큰 병을
얻게 되어 드러눕게 되고
집안간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한다.
리딩에서 밝혀진 내용은
일제시대 때
고급 경찰이었던 지금의 사업가는
어느 지주 집안
자식의 약점을 잡아
그 집이 소유했던
많은 토지와 임야를
간교한 책략으로 빼앗게 되는데,
그때 그 지주 집안의
자식이 지금 형님 집 조카라고
리딩은 밝혔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원래 빼앗겼던 땅의 권리를
그 주인들이 되찾아
간것이라고 리딩은 밝혔다.
그 사업가는
리딩에서 밝혀진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아마
어쩌면 더 화를 낼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그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
애꿎은 역정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들은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
그 일들이
그에게 진짜로
억울한 일이라면
우주의 법칙에서는 언제가
그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라도 말이다.
이 세상에 인과율처럼
더 분명한 진리는 없다.
그러나 윤회론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과학적 근거나 증명이 없으면
그 이론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설명이 따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를
설명하는데는
그 어떤 과학적인
이치와 논리보다
카르마의 법칙과
윤회론의 견해가
더 정밀하고 합리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면에서
건전하며
어떤 이치를 설명하는데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중에는
왜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윤회론은
그 어둡고 먼 밤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나침반처럼 빛나는
북극성처럼
분명한 삶의 목적을 알려 준다.
또한 영성이 부족하여
카르마의 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현재 처지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비참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새벽을 향해
갈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결코 아직은 길을 잃은것은
아니라는 안심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