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마음을 되찾자,
그리고 대 조화에의 길을 열자.
그것은 인간 사이의 대화에 의한 조화로,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경영의 합리화만으로 경제사회의 근본 해결은 바랄 수 없고,
노사의 부조화도 또한 물질 경제만으로 해결을 꾀할 수 없다.
그럼 어떠한 길을 선택하면 좋은 것인가.
그 길은 단 하나,
신리를 깨달아, 인간은 모두 형제이며, 동시대에 태어난 동급생임을 알고,
스스로의 환경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다시 생각하여,
서로가 인연으로 연결되는 인생 항로에 있어서 혼의 수행자로서,
인생이라고 하는 수행장에 있는 것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이다.
노동자는 일하는 환경에 대해,
지도자는 그 근로에 대해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의 수행장, 생활을 지탱하는 장으로서
그 환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력의 결과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보은인 것이다.
노사 쌍방의 감사의 마음의 실천 속에는,
투쟁과 파괴는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자신에게 족(足)함을 알았을 때,
그 결과가 물가의 안정으로도 되고,
공해라고 하는 부조화한 현상을 지울 수 있는 방법도 되는 것이다.
노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멀지 않아 스스로의 꾀에 빠져,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결말을 초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투쟁과 파괴에의 길은,
만물의 영장인 인류의 길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서로 양보하는 마음, 희생의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황하는 어린 양을,
양극단적인 사상에 의해 선동하여서는 안 된다.
그 선동은, 자기 자신에의 부조화한 상념으로 되어,
평화로운 평온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나 명예 따위의 집착을 버리는 것,
이것이 평안에의 지름길이다.
인간답게, 즐거운 일생을 보내는 것이,
일상심(日常心)을 그 방향으로 둔다고 하는 것이,
행복에의 길이며, 마침내는 조화의 사회를 이룩하는 근원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인생
인간은 왜 태어나고, 늙게 되고, 병을 앓고, 죽는 것일까.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인생.
친한 자와의 이별, 싫어하는 자와 생활하는 슬픔,
경제적인 고통, 원한, 질투, 시기, 분노의 마음,
독점욕, 겉으로는 화려해도 마음이 외로운 자,
잡을 수 없는 사랑, 이름을 파는 행위의 허무함,
유명인(권력자)을 믿고 뻐기는 교만함,
육체적 결함으로 마음이 병든 자,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중생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지도자,
종교를 사리사욕의 도구로 하는 위선자,
색정에 대한 욕망, 지위 명예욕, 인종차별에 우는 사람들,
동족의 권력싸움, 파벌싸움,
주의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등등
쓰면 끝이 없는 부조화한 인생!
이러한 슬픔, 고통의 원인은,
모두 중도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위에 의해 생긴 결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자기 자신을 매몰하여 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자는 인생에 실망하여,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손으로 육체를 버린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단, 난해한 것이다.
이 난해한 인생에 대해,
가장 알기 쉽게, 인생의 올바른 자세,
그 목적과 사명을 설교한 빛의 천사가 있다.
그것은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그 신리도, 오랜 세월의 경과 중에서,
많은 승려와 학자들에 의해
지식과 의(意)의 산물로 바뀌어 불교 철학으로 되어버렸다.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지식의 학문화와 상품화가 되어버려
그 안에서 신리를 찾아내는 것이 곤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치는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진실한 마음의 바른 자세와 실행의 방법이,
확실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마음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종교가,
현대사회의 왜곡을 만들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구원되는 유일한 길이란,
지식과 의(意)에 의해 도금된 불교랑 크리스트교를 버리고,
본래의 예수, 석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 종교, 관광 종교, 장례식 종교에서는,
현대사회의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종교의 추락에 의해,
인생의 목적이랑 사명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고,
자기 멋대로 인생을 보내고 마는,
물질 경제의 노예로 스스로를 내몰아 불성을 잃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것이다.
신리의 철학화, 프로 종교가에 의한 타력본원,
이익주의에의 종교의 치환, 신불의 대량 생산 방식,
그것은 종교의 왜곡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대중은 마음이 기댈 곳을 찾는다.
왜곡을 만든 종교가들의 죄는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달리 보면, 타력본원, 이익주의로 변화한 종교에도,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혹은 누구의 죄라고 할 것도 없이,
인류의 마음의 어려운 본질이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법연’이나 ’신란‘의 시대는 전란의 세상이며,
양심이 있는 승려들은, 대다수의 중생에 대해,
철학화한 불교를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지 ...
헤맸던 것일 것이다.
무지한 백성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하는 길은,
염불을 낭송하는 것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중생도, 염불에 의해 신불을 믿고,
저 세상의 실재를 믿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