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연’이나 ’신란‘의 시대는 전란의 세상이며,
양심이 있는 승려들은, 대다수의 중생에 대해,
철학화한 불교를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지 ...
헤맸던 것일 것이다.
무지한 백성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하는 길은,
염불을 낭송하는 것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중생도, 염불에 의해 신불을 믿고, 저 세상의 실재를 믿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일연의 시대도 또한,
사회적 배경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대의 권력과 손잡고 자기 종파의 안태를 꾀하거나,
타력본원에 의한 무지한 대다수의 백성들의 불교 귀의,
즉 조상숭배와 아미타 정토에의 즉신성불 신앙에로의 변모,
하지만 마음을 잃어버린 종교는,
한때 번영하여도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잊혀,
언젠가 종파의 난립과 파벌싸움의 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또 오랜 역사적 세월 속에서,
육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단가라고 하는 단골 거래처가 있으므로,
성립된 장례식 불교라고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일찌기 석가의 불교는,
이러한 파벌의 난립이나.
살았던 인간의 마음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다. 불교는 학문이 아닌,
살았던 인간의 실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문은,
살아있는 인간 생활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가의 가르침은 신리이며,
현대사회 인류의 마음의 고향으로 우리는,,,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 선조의 관습이나 종교적 관습에 기초하여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교의 이것저것이,
정법(正法)인지, 사법(邪法)인지, 구별도 확실해지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신사, 불각, 교회가 신불이 있는 장소,
기원하는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고 말아서,
언젠가부터 타력본원적인 이익 신앙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신사, 불각, 교회는 살아있는 인간에 대해서
신불의 자식다운 자각과 신리를 가르쳐,
실생활에 살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왜냐하면, 석가가 신불을 모시거나,
우상을 모시어 많은 중생들과 제자들에게 두 손 모아 빌게 하였던 것일까.
라자그리하 교외의 베르베나도, 스라바스디 교외의 제타베나도,
그 밖에 많은 정사(精舍)는,
각국의 왕이나 장자들에 의해 기진된 것이며,
교단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숙사이며,
신리를 설하기 위한 전당이었다.
또 어떤 때는, 그르드락타의 산꼭대기나 공원의 광장 등이 설법의 장소가 되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리를 설한 예수 그리스도도,
신불이나 우상을 모시어, 기도하게 하였던 것일까.
수많은 교회를 만들었던 것일까.
역시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병든 중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어떨 때는 요단강, 나자렛의 언덕, 헤르몬산에서 신리를 설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설명된 신리는,
현대에 있어서도 불멸이며,
우리는 석가와 예수의 시대의 신리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곳이야말로, 마음의 신리는 있었던 것이며,
경문의 진정한 정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파의 싸움이나 파벌의 추한 투쟁을 버리고,
신리의 큰길로의 종교로 되돌리지 않으면,
마침내 대다수의 양심이 있는 중생으로부터는 외면된다.
종파의 고집은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으며,
파멸로 인도하고 만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리의 실천이 결핍된 학문 종교는,
지식에만 머물러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행위로써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행위와 신리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
자기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자기 자신이 깨닫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석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설한 신리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지식과 의(意)에 의한 도금이 입혀져,
이미 말법으로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중생의 대다수는 자신의 마음을 잃고,
부조화한 생활 행위를 하도록 되어,
사회 혼란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물질 경제 지상주의의 현세에 있어서,
과연 인간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신불에게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말법의 사회로 인한 부자연한 이익 종교,
타력본원에의 광신, 맹신으로 점점 자신을 잃어,
종교지도자 따위의 희생자로 되어 가는 것이다.
또 그와는 별도로 어떤 자는 신불을 믿지 않고,
유물주의에 마음을 팔아,
인간사회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 나가며,
물질문명은 그것에 의해 번영해 간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과 의(意)에 의해
마음을 잃은 사람들의 사상은,
실은 동물적 본성이기 때문에,
약육강식적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밖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에서도 그 길을 걷고 있는데,
물질적인 사물의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기때문에
심부재(心不在)의 폭력에 의해 피의 혁명을 실행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록 일시 성공하여도,
신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른 마음의 사람들까지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깨달을 것이다.
일시적인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사상을 통일하여도,
인간이란 것은,
물질 경제에 혜택받아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본래의 불성으로 돌아가,
일념삼천인 그 마음은 자유를 구하도록 되어,
마음의 평안을 구하도록 바뀌어 간다.
이것에 의해서도, 마음을 잃은
지(智), 의(意)만의 지도자에 의해서 강제로 주입된 사상은,
비록 세뇌라고 해도,
그것은 단지 도금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을 것이다.
언젠가, 외면적인 마음이 없는 도금은 자연히 벗겨지고,
인간 본래의 불성의 맨살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신리에 반한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가 만들어 낸 것이다.
부조화한 사상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는 상념 행위로 되어 투쟁과 파괴를 만들어내고,
고통과 슬픔의 현상으로 되어 순환되어 간다.
왜냐하면,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투쟁에 의해 잃어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