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이는 것이 전부 다 금이 아니듯
보여지는 것이 전부를 말하지는 않는다.
보여지는 것에 현혹되기보다는
보여지지 않는 아름다운 보석을
볼 줄 아는 지혜로
부딪치는 모든 대상과 사람들을 대하고
관조해 볼 수 있는 날들이 되소서.
2006.10. 20 07:46 칠통 조규일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 칠통 조규일
질문: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건가요. 어찌 보면 사람은 살아간다고 표현하지만, 오히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것 역시 육신에 한정되어 있어 산다 죽는 다고 표현한 것이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목적으로 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을 확실히 안다는 건 어렵고 힘이 들겠지만 말입니다. 자신의 사명감을 제대로 안다는 건 참 어렵습니다. 이왕이면 나보다는 남을 위해 이익이 되는 것이면 좋을 겁니다.
여기서도 남과 나를 구별하기에 진정으로 남을 위한다는 건 불가능한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삶이란 살아가는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면 왜 삶이란 것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업이 있기 때문에 업으로 인하여 현재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업이란 무엇인가? 영혼 즉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 내지 무의식 업입니다.
그럼 업은 어떻게 해서 나를 형성하는가? 이름하여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한 생각을 일으킨 것이 업의 시작으로 ' 나 ' 를 인식함으로 생긴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 나 ' 를 버리고 한 생각을 돌이키면 깨달음의 본성의 자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님들은 한 생각에 부처가 나고 한 생각에 중생이 난다 하며 한 생각에 부처와 중생이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늘 한 생각을 돌이키라 하셨지요. 흔히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 골몰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한 생각 번뜩하는 가운데 있어서 골몰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한 생각 번뜩하는 가운데 벗어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부딪치고 부딪치는 가운데 부딪치고 부딪치는 것을 어떻게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부딪치고 부딪치는 모든 일들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벌어진 일은 매 한가지일지라도.
이제 질문의 요지를 들어갈까요?
본성의 자리에서 보면 진정한 삶이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체를 삶이라 하지만 삶 자체는 영혼의 성장 내지 의식의 진화 ... 또는 본성의 자리 ... 본 성품의 자리에 들 때까지 육체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란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미숙아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인큐베이터 안에서 영양을 공급받으며 성장하는 것과 같이, 어떤 형태의 형상의 몸 즉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 태어난 형태의 형상에 맞는 영혼 즉 업을 가졌기에 그 영혼의 업에 맞는 인큐베이터를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큐베이터 인간이란 몸을 받아 그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근본의 본 성품은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하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가 인큐베이터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 줄 알고 그 안에서 헤매다 보니 막상 인큐베이터가 수명을 다하여 바뀌어야 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인큐베이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난 영혼의 성장 내지 의식이나 무의식을 갖지 못하니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또 다시 자신에게 맞는 형태의 형상의 인큐베이터몸을 받고 다시 태어나니 이를 육도윤회라 하지요.
그러니 진정한 삶의 목적이라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삶은 부처가 되어서야 그 막을 내린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이 성불하여 부처가 될 때까지 어떤 형태의 형상의 인큐베이터는 계속 이어진다 할 것입니다.
Re:어디서 무엇을 보고 행하느냐에 따라 / 칠통 조규일
본성에서 보면
모두가 뜬구름 같은 것을 두고
이 구름은 참이지 저 구름은 참이 아니지 하는 듯합니다.
어느 것 하나 본성 아닌 것이 없으니
참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다 참이다 하겠으나
구름에서 보면 참이라 할 것이 없다 하겠지요.
지금 님이 어디서 무엇을 보고 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여지고 느끼고 나타나는 것과 같이
님이 대하며 말을 주고받는 모든 분들과의 관계가 그러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에도 말했듯 모든 사람들은 신끼가 있고 예정력이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개발 발전시키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더 빛을 발할 수도 있고 퇴색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전생에 수행한 수행공덕으로
이생에 와서 인생에 고뇌하게 되고
그럼으로 철학을 접하고
단전호흡 및 수행..묵언을 하게 되는 경험까지도 하게 되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묵언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단순히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했을 겁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았을 뿐
남들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탐구해 가는 것이 더 좋았다고 봐야 할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랬던 것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저는 묵언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즐겨했던 것 같네요.
전생의 수행으로부터 ...이어 온
이생에서의 인생 탐구와 철학을 가까이 하게 되다 보니
남들보다 철이 빨리 들고 애어른이 되고...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하나 둘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맑은 의식은 맑히게 되고 질문으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개발되고
하나를 맞추니 둘 셋 더 잘 맞추려고 하고 틀리지 않으려고 하고
그럼으로 더욱 더 예지력이 생긴 것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에
나는 이러 이러해 라고 하는 자성의 경계를 만들어 놓고
그 자성의 경계 속에 갇혀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계를 드러내며
그렇게 봐 주었으면 하는 자기를 위로 끌어올리려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과 아만심이 혹여 자란 것은 아닌지
사실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하심하는 것이 좋고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을 수행인이라면 멀리하는 것이 좋음에도
그것들을 우선으로 하고 여타 다른 일반적인 것들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닌지
여기서 바르면 다른 것 역시도 바르게 하면 되지
이것은 바르게 하면서 저것은 바르게 못하고
또한 어떤 행을 행함에 있어
지금 행한 행은 바르고 그르고 판단하고
또는 행하면서 이것은 거짓되고 저것은 진실 되고
진실과 거짓은 누구로부터 일어나는 분별이고
진실과 거짓은 누가 진실 되다 했으며 거짓되다 했는가요?
지금의 상황의 행함에 있어서의 표현으로 보면
이분법적 논리와 분별에 빠져
참과 거짓 진실 선과 악...에 빠져서
행함에 있어서 행함의 걸림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의식 생각으로...거기다가 마음까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 가지고 있는 생각 의식 마음으로부터 걸려 있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에 구애를 받고 중도의 행할 할 수 없을뿐더러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나를 더 중요시하고
내가 하는 것은 옳고 진실 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거짓되고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니 그런 것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해서 바라보면 또 다를 겁니다.
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 의식 마음부터 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참, 진실된 것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참이 아닌 것이 없고
진실 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거짓된 것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거짓되지 않은 것이 없이 전부다 거짓되고
오직 나만이 진실 되고 참인 듯 생각하고 의식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기가 쉽지요.
이는 상대방이 어때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문제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하여 그 문제로 인하여
문제 속에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니
혹여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문제가 있다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며
스스로의 가지고 있는 생각 의식 마음에 갇혀서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고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바른 행으로 드러내며 주변 사람들과 또는 하고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더불어 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우주와 하나됨을 느끼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평화가 넘치는 것을 느끼고
사람을 마주할 때도 행복의 소리가 넘치는 것을 느끼고.. 한다하더라도
생각이 그러하고 의식이 그러하고 마음이 그러하지 못하여
말한 것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할겁니다.
우주가 하나됨을 느끼며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로 동체로 일체일 것이며
아름답다면 우주의 모든 것이 그러할 것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평화... 행복이라면...
진실과 거짓됨 속 선과 악....
이분법적 논리에 빠져 분별을 일으키지는 않을 겁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심을 가지고 생각해 봐요
좀 더 진지하게...
그러면 무엇인가 잡지 않을까 싶네요.
2005. 09. 27 13:38
칠통 조규일 선사님 :
쉽지 않지요... 그러니 어떤 체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마음으로부터 공부가 되어야 마음 공부된 만큼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여여할 수 있다 하겠지요? 완연히 마음 공부된 자라면 설령 지옥에 있다할지라도 있는 그곳이 지옥이 아니지 않겠는지요?
마음 공부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설령 있는 그곳이 천계 광계에 있다할지라도 그곳은 마음 공부되어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이 어떠냐 가 더 중요하다 하겠지요. 마음의 경계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님이라면 깨어서 바른 마음 바른 생각 바른 행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2005. 09. 27 오후 08:25
뿌듯하게 느껴지는 것과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의 원리 / 칠통 조규일
진리이거나 진실성이 있는 말이나 글을 대할 때에는
가슴 뭉클함과 뿌듯함이 느껴지지만
일상적이거나 진실성이 없는 말이나 글을 대할 때에는
가슴에서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것에는 어떤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말이나 글에도 파장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의식을 가지고 파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들 안에 있는 본성은 끊임없이 밝히고 있고
본성의 속성은 전달하고 형태의 형상을 가진 업(티끌) 본성을 감싸고 있기에
이 감싸고 있는 업의 작용인 마음작용을 뚫고 본성이 밖으로 전달될 때
둘러싸고 있는 업의 작용
즉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의 가진 마음작용으로
일어난 말이나 글이 밖으로 드러남으로 그 드러난 것을
보고 듣고 인식함으로 내 안에 전달되면서
내 안에 본성을 둘러싸여진 업식에 와 닿고 와 닿음으로 해서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업이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작용으로
마음이 작용을 하니
이러한 작용을 인식함으로 질문한 것들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는 화자로 보면
말하는 사람이 업이 두껍고 엷고
업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는...
그럼으로 업이 식(識:8식 7식 6의식)으로 나타나는 작용인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즉 어떤 의식을 가지고 밝히느냐에 따라
본성의 빛이 어느 정도 밖으로 현현하느냐에 따라
본성과 업(식) 사이 본성의 속성으로 전달되는
즉 본성의 속성에 실려 업식이 전달되는
본성의 빛의 밝힘에 드러남으로 업식을 뚫고 밖으로 향하는 사이
업식의 작용인 마음 작용
그 마음작용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그 마음작용이 의식이 되고 생각이 되어
말로 또는 글로 전해져서
상대방 즉 듣는 사람에게 전달됨으로 해서
듣는 사람을 자극함으로 해서 듣는 사람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하는 사람에 따라
본성과 업사이
즉 본성과 8식 7식 6 의식 생각 ...안이비설신의 5식 사이에서
말하는 사람이 어느 부분의 식(識)을 밝혀서 드러내고 나타내느냐에 따라
어느 부분을 밝히고 드러내는 말과 글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요.
이 많은 차이 속 말과 글을 접하면
접하는 상대방 즉 청취자나 독자는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 말이냐에 따라 자극 받는 부분 또한 다르다 할 것인 즉
이 자극받는 부분이 다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성을 말할 때 본성에서 자극을 받는다면 많은 자극이 될 것이고
본성을 말하고 글로 전하나 업이 두꺼워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본성을 밝혀서 말하는 글은 업이 두꺼운 사람에게는 전혀 자극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 또는 8식을 말할 때 7식을 말할 때
의식적으로 말할 때 생각으로 말할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진실되게 말할 때와 마음을 닫고 말할 때
많은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다면
그것이 생각에서든 의식에서든 7식 8식 본성에서 하든
그 어디를 밝혀 말하든 진실성이 있고
진실성은 마음이 열려 있는 있는 만큼
말하는 사람의 본성에서부터 말과 함께 본성이 전해져서
밝고 맑으며 밝음이 많다하겠습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닫혀 있다면
닫혀 있는 마음에서 본성을 말하고 진리 또는 8식을 말할 때 7식을 말할 때
의식적으로 말할 때 생각으로 말할 때
아무리 진실되다 해도 마음이 닫혀 있는 만큼
진실성이 없으며 진실성이 없는 만큼
본성에서 밝고 맑은 것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업식을 전달하는 본성의 속성으로 전해지는 만큼
전해지고 나타난 말이나 글이
비록 본성을 말하고 진리 8식 7식 의식 생각을 말하고 글로 전한다해도
맑고 밝지 않으며 무명이 있으며 어둡다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로 말하는 사람이
어떤 의식 속에서 말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똑같은 말을 할지라도 그 차이는 크다할 것입니다.
말을 듣거나 글을 읽는 사람으로 보면
말을 듣고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 깨어 있느냐 따라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것을
어디에서 듣느냐에 따라 또한 차이가 많다 하겠습니다.
이심전심으로 듣고 본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이심전심으로 듣고 보는 것이 그리 쉽지 않지요.
깨어서 진리에서 듣거나 8식 7식 6의식에서 생각만으로 듣는다면
자극은 듣는 것으로부터 일어날 것인 즉 차이가 많지요.
그리고 이 차이와 같이
듣고 보는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려 있느냐에 따라
마음이 열려 있다면 비록 생각만 할지라도
전해지는 것은 본성까지 전해질 것이니
그 전달되는 파장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닫혀 있다면
닫혀 있는 마음에서 듣는 것인 즉
어디서 듣느냐에 따라 즉 깨어 있느냐에 따라
깨어 있는 그곳에서만 인식하고 의식하니
전달되는 파장은 듣고 보는 사람이 가진 만큼 업식만큼
듣고 보고 인식 의식한다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경지만큼 보고 듣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똑같은 말이고 글임에도
누가 말을 하느냐에 따라
누가 글을 썼느냐에 따라
그것을 보고 듣고 이해 의식 인식하는 것이 다르고
똑같은 말이고 글임에도
듣고 보는 내가 상대방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고
보고 듣는 내가 활짝 열린 마음인지
또 어느 정도 열리고 닫혀 있는 마음인지에 따라
전달되는 말과 글을 생각하고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로 해서
어떤 말과 글은 보고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말하고 글로 전하되 전해지는 것이 없이
나에게 와서 전혀 자극을 주지 않고 비껴갈 것인 즉
혹시나 기대했던 마음에 전혀 자극없고
말이나 글이 전해지지 않고 무의미하게 비껴갈 때
가슴에서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이와 반대로 전혀 기대하지 않고
듣고 보고 했는데 마음 깊이 자극을 주거나 마음에 크게 각인될 때
가슴 뭉클함과 뿌듯함이 느껴지지요
그래서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일들로 알 수 있듯
마음이 열려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상의 자비는 용서지요
용서가 되지 않을 때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해도 되지 않을 때 주변을 살펴보고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싶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며 실익을 생각해 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내가 편안한 쪽 마음 편안 쪽으로 생각해 보며
인생 전체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 듯싶어요.
이해와 용서 화해 속 상생하게 되면
누구보다 먼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내가 편안하고)
이 일로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고도 행복하게 해 준다할 것입니다.
좋은 일들
행복한 일들
가슴벅차고 가슴 뭉클함과 뿌듯함이 많은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충만한 사람 / 칠통 조규일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라.
요구만 해서는 만족할 수 없다.
만족은 요구의 충족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의 만족과 충만함이다.
마음이 허한 사람은 만족할 줄을 모르고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매사에 만족한다고 하겠다.
마음이 허한 사람이 되지 말고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라.
2007. 07.24 07:44 칠통 조규일
지혜는 앎으로 밝히는 것이다. / 칠통 조규일
앎에는 두 가지 앎이 있다
하나는 지식이 되어 업이 되는 앎이고
하나는 지혜가 되어 업을 놓게 되는 앎이다.
이 두 가지 앎은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쌓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한다.
지혜는 밝히는 것이다 / 칠통 조규일
산다고 하는 인생이란 흐르고 흐르는 흐름 속에서
부딪침의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없던 것을 가짐으로 지식을 쌓아가며 뽐내는 이가 있고
부딪침의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안으로부터의 고정된
인식이 변화하여
인식이 변화됨으로 가지고 있던 고정의 인식 의식을
놓아버림으로 깨어나는 이가 있다.
이렇듯 작은 지식이 쌓이고 쌓여 앎으로의 무명을 더욱 깊게 하고
흔히 깨달았다고 하는 작은 인식의 변화가 모이고 모여서
큰 대각 정각의 깨달음을 얻는다.
인생이란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일반인은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수행자는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놓아버림으로
지혜가 더욱 더 밝아져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는다 할 것이다.
지식은 앎을 쌓는 것이고
지혜는 앎으로 밝히는 것이다.
쌓는 것 업이고
밝히는 것 업이다.
지혜는 밝히는 것이다
본성이 밝아지며
밖으로부터 부딪쳐 오는 것을
참견이 드러내며 밝히는 것이다.
2003. 11. 11 칠통 조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