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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 사례

금강경과 극락정토 왕생

작성자향련|작성시간10.09.21|조회수1,572 목록 댓글 7
金剛經持驗錄 - 금강경지험록 1


                          수 티안 청(許添誠) 모음
                              석 영곡 한글 역

 


    제1편 정토에 왕생하다


  1, 보살의 계위를 증명하다

 

당나라 때에 징쩐(淨眞)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장안의 적선사積善寺라고 하는 절에 머물고 계셨는데 평소에 늘 걸식에 의지하여 세월을 보내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일생동안 성을 내지 않으셨지요. 그것은 인욕바라밀을 깊이 체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징쩐스님께서는 금강경을 십만 편을 외우셨고 또한 오로지 염불정진을 하시어 마음은 이미 극락세계의 안양정토에 계셨습니다.


당나라 고종 5년 7월 어느 날에 스님께서는 약간의 질병에 걸리시자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근자에 5달 동안에 10여 차례에 걸쳐 아미타부처님을 뵈었다. 또한 극락세계에 이르러 보배 연꽃 위에서 동자가 노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다. 또 성인의 계위에 오르신 성스러운 스님 5분이 나를 향하여 이렇게 수기하셨다. <그대는 다가오는 세상에서 붓다가 되리라>”
비구니 스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서방극락세계의 상품에 왕생함을 얻었다.”
그리고는 이내 결가부좌를 하시고 생명을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세고 나자 놀랍게도 징쩐스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이미 보살의 계위를 얻고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두루 다니면서 공양하였다.”
그분은 말씀을 마치자 곧 입적하셨는데 찬란한 광명이 절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금강경』에 이러한 구절이 있지요.
“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을 좇아 나오느니라.”
『육조단경』에도 적합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위이며, 최고 제일이다. 오고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으며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그 속에서 나오느니라.”
이러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금강경이 수승한 지 알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2, 금강경 10만 번 독송하다

 

  당나라 영휘(永徽) 원년(元年)에 밍쭌(明濬)이라고 불리는 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누덕누덕 기운 파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는데 바로 염라대왕 앞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일생동안 어떻게 수행을 하였습니까?”


밍쭌스님이 답을 하였지요.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외쳤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만일에 10만 편을 독송하셨다면 내년에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그 때는 제가 스님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회복하여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러함을 겪고 나자 밍쭌스님은 마음에 용맹심이 솟구쳐 가행정진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듬해 3월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어느 날에 앉으신 채로 입적하시었는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코를 진하게 찌르는 신이한 향기의 상서로움에 젖어들었습니다.

 

  3, 서방에서 와서 영접하다

 

  웨이꽁(惟恭)은 당나라 때 찡쩌우(荊州)의 법신사法信寺의 스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30년 동안 매일 50편씩 금강경을 독송하셨습니다. 어느 날 같은 절에 사시는 링뀌(靈歸)스님께서 일이 있어 외출하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몸이 날렵하게 생긴 5~6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입은 옷이 평범하지 않고 매우 맑고 깨끗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악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링뀌스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웨이꽁어르신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링뀌스님께서는 그들에게 도리어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어느 지방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들이 말했습니다.
“서방에서 웨이꽁어르신을 영접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품속에서 오므린 모양의 한 송이 연꽃을 꺼내었습니다. 그 연꽃의 이파리마다 각각 신비로운 광명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절이 보이자 한 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날 웨이꽁스님께서는 곧바로 입멸하셨는데 절에 있는 대중들이 모두 관현악기에서 울려나오는 오묘한 음악을 들었다고 합니다.


    4, 칼을 내려놓고 보리의 길을 가다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후쩌우청(胡州城)의 남 쪽에 리우웡(陸翁)이라고 하는 도살업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23세 되던 해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운수행각 스님 한 분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문 앞에서 외쳤죠.
“인연있는 자를 교화하리라!”


리우웡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운수행각 스님은 리우웡을 때마침 보고는 곧바로 질문을 했습니다.
“그대가 도살한 돼지와 소와 양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구나. 어찌하여 그대의 업을 바꾸려고 하질 않는 것인가?”
리우웡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익힌 습이라 한꺼번에 버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운수행각 스님은 이렇게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대가 살생업을 버리지 못한다면 내세엔 결정코 짐승의 몸을 받게 될 터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죽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몸을 난도질 당하고 갈기갈기 찢겨져 죽임을 당하리라. 그러면 그대도 원한을 품게 되고 결국 원한과 원한이 서로 보복을 불러오게 되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기약이 없다. 내가 그대를 잘 들여다보니 과거 언젠가 선근을 쌓은 적이 있도다. 그러하니 금강경과 묘법연화경을 부지런히 지니고 외우라. 그러면 업장이 녹아 없어지고 복과 지혜가 늘어나게 되리라.”


말씀이 끝나자 그 운수행각 스님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리우웡은 그 자리서 즉각 깨달았습니다. 이로부터 살생업을 짓지 않고 몸을 마칠 때까지 채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화공에게 청하여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 등의 세 분 성인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 분 성인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지극정성으로 예배하고 공양하였습니다. 또한 매일매일 부처님 전에 금강경과 법화경을 독송하며 지성으로 간절하게 지난 악업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인 중생들이 모두 제도되고 해탈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채 5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리우웡은 금강경을 다 외워버렸습니다. 이렇게 정진하길 오래하다가 81세가 되기 보름 전 쯤에 친한 친우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었습니다.
“오는 11월 9일에 맛있는 음식을 잘 장만하고 그대들과 장차 고별인사를 나눌까 하니 두루 참석하여 주길 바라네.”
그날이 오자 친한 벗들이 모두 리우웡의 집에 모였습니다. 리우웡은 그들과 낱낱이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나서 목욕을 마치고 노래 한 수를 읊었습니다.

 

“오십년 전에 익혀왔던 도살업 그만두고
  손에 익은 칼과 저울 던지고 그윽히 닦아서
  오늘 아침 보리의 길에 척 나서노니
  물속에 피던 연꽃 불속에 만발하였구나”
  五十餘年離殺業,手提刀秤暗修行,
  今朝得赴菩提路,水裏蓮花火裏生

노래를 마치고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나니 거기 모였던 사람들 누구나 우러러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5, 138분의 수보리존자

 

씨쫑춘(襲仲淳)은 중국 명나라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쭈쓰(祝氏)는 위앤홍따오(袁宏道)의 남동생에게 있으면서 정토법문을 듣곤 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신심이 깊어서 마음 속에 부처님 명호를 지니고 외우고 금강경을 독송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어느 날엔가 쭈쓰 부인이 그녀의 아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3일 후에 나를 맞이하러 오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단다.”
이틀이 지나니 쭈쓰부인은 목욕을 정갈하게 하고나서 마루청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권속들이 빙둘러 모시고 앉았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쭈쓰부인이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수보리라고 하시는 부처님 한분이 오셨는데 부처님의 위대한 모습은 장엄하기 그지없어 무엇과도 비할 수 없구나.”


그리고나서 또 말하였습니다.
“맞이하여 이끌어주시는 한 부처님이 오셨는데 미간의 백호白毫에서 한 줄기 은빛광명을 놓아 내신다. 그 빛은 마치 춤을 추듯 이리저리 구르면서 드날리는데 길이가 자그마치 몇 미터나 되는 듯하구나.”
말씀을 끝내고 쭈쓰부인이 손을 펴서 백호를 잡자마자 부처님이 곧바로 그녀를 손바닥 속으로 거두어 들이셨습니다.


찰나에 그녀는 수보리존자가 일백부처님으로 화현함을 보았는데 장엄함이 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옆에서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금강경에 나오는 138수보리존자일 것입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권속들이 모두 향을 사루고 함께 부처님 명호를 외우니 쭈쓰 부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적멸에 들었습니다.


그 때, 아홉 살 쯤 되는 한 계집종이 홀연히 땅위로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곧 일어나서 선채로 말하기를,
“내가 몇 명의 금으로 된 갑옷을 입은 거인들이 당번幢幡을 잡고 부인을 위하여 앞길을 이끄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당번의 자루에 내 얼굴이 부딪쳐서 땅에 거꾸로 쳐박히고 말았어요. 깨어나 보니 이렇게 많이 아파요.”하였습니다. 집주인이 계집종의 얼굴을 살펴보니 과연 확실히 상처가 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상처는 점점 치유가 되었습니다. 쭈쓰부인의 몸을 염을 하여 관에 넣으니 관속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 나왔습니다.

 

    6, 명부의 관리를 사임하다

 

  유창(于昶)은 당나라 때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칭쪼우(慶州)에서 쓰마(司馬)로 부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측천무후가 집권할 때에는 삥쪼우(幷州)로 부임하여 문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매일 밤 11시 이후에야 잠이 들었는데 가슴 속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면 곧 정상으로 회복되곤 하였습니다. 비록 매우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몸이 특별히 허약해서 그러한 듯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면 매일 거의 얼굴에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고 기색이 초췌하여 모두가 기괴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물으면 유창은 아무 대답없이 그저 묵묵할 뿐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유창의 부인인 류쓰(柳氏)는 그냥 보기엔 비록 남편이 장부의 몸을 갖추고 있지만 이처럼 허약하니 좋은 의사를 청하여 병을 치료해 보는 것이 어떠할 지 남편에게 떠 보았습니다. 하지만 유창이 단번에 거절해버리자 류쓰가 남편더러 남에게 말못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캐물어보니 남편이 부득이 못이겨 겨우 털어놓았습니다.
“기실은 내가 무슨 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낮에는 공무를 처리하지만 밤이 되면 명부(저승)에 들어가서 관리가 되어 일을 하다 보니 이로 인해 체력이 조금 지탱해주지 못해서 그럴 뿐이오.”


류쓰 부인은 매우 놀랍기도하고 기이하기도 하여서 명부의 일을 계속해서 캐어 물었습니다. 유창은 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말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류쓰 부인은 재삼 붙들고 물어보았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유창은 재해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 수 있었기에 은근히 대처할 준비를 하게 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습니다. 류쓰 부인이 혹 남편의 친형제들로 하여금 묻게 하여도 그는 요지부동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럭저럭 5,6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낮에는 공무에 힘쓰고 밤에는 명부에 들어가서 일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힘들게 일하지만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부지런히 회향공덕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러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갚아보려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다시는 명부에 들어가 관리의 일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창은 금강경의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갓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금강경이야말로 모든 경전 가운데 최대의 복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도 금강경을 지송하게 하였고 널리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가 50세에 이르자 관리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던 유창의 사돈인 좌상左相 쑤량쓰(蘇良嗣)와、우상右相 웨이따이쨔(韋待價)와,대장군大將軍 리총쓔안(李沖玄)의 세 사람이 그에게 관직을 사임하지 못하도록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창은 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간사하고 잔인한 신하들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들을 모함하였습니다. 그 때 유창은 비록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에 살고 있었지만 저러한 몹쓸 무리들의 모함을 받게 되어 결국은 감옥으로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유창이 비록 감옥에 갇혔으나 내심으로는 터럭만큼도 슬퍼하거나 개탄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오래지않아 과연 찬란하고 밝은 서설이 쏟아지매 친한 벗들이 모두 불법의 가없음을 찬탄하였습니다.


유창이 평생에 비록 곤액을 여러 번 만났으나 금강경의 공덕을 인하여 위험을 도리어 평온함으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가 84세 되던 해에 중병에 걸렸으나 여전히 병을 안고서도 금강경을 독송하였으며 거의 죽음에 이르러도 그의 정신은 여전히 매우 맑았습니다. 한 때, 홀연히 신이한 향기가 실내에 꽉차고 아름다운 향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유창이 말하였습니다.


“화신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서방극락세계로 데려 가려 하신다.”
이윽고 친한 벗들에게 잘 있어라 말을 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7, 피로써 사경하여 부모님의 은혜를 갚다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 때의 일입니다. 오동나무가 무성한 한 마을(桐鄕)에 우쭌핑(吳君平)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매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너무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쭌핑은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보았으나 여러 번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핑계삼아 영은사靈隱寺의 밀폐된 방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자식은 봉양코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으시네>하고 벽에 써 붙여놓고 늘 부모님의 은혜를 갚지 못하였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올릴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 애탄해 하며 슬피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통곡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순수한 한 조각 효심의 성품을 온 우주에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쭌핑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어떤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아들 되는 자가 만일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불경을 베끼는 공덕이 최고라네.”
우쭌핑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 곧 49일간을 채식을 하며 피를 내어 금강경 1권을 사경할 것을 발심하였습니다.

 

그가 피로써 사경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밖으로 퍼져나간 후, 멀고 가까운 곳의 승속이 모두 지켜보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우쭌핑은 양팔과 앞가슴에 한꺼번에 11군데를 찔러서 몸 위에 고인 맑은 피로써 사경을 하였습니다. 사경이 끝나고 나자 이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이 찬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선생의 이와 같은 정성스런 마음의 고행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반드시 감동시킬 것이며
이와 같은 수승한 공덕은
양친의 은혜에 능히 보답한 것이 될 것이며
공명功名을 세상에 드날려 조상과 문중을 영광스럽게 함보다
천만 배나 훨씬 더 수승하리라.”


  한편 어떤 사람이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야목계 사바하)을 가리키며 아직 다 베끼질 못했다 하니 우쭌핑은 또 가슴팍을 찔러 피를 내어 보궐진언을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우쭌핑의 꿈에 부모님이 구름 끝자락에 선채로 나타나시어 말하였습니다.


“네가 피를 내어 사경을 한 그 효심이 하늘과 부처님이 감동케 하고야 말았구나. 우리가 금강경의 위대한 법력에 의지하여 덕분에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었다. 너의 운명에 본래 아들이 없게끔 결정되었었지만 부처님께서 이미 훌륭한 아이를 보내시어 너의 씨앗을 계속 잇게 하셨느니라.”

 

그 해에 우쭌핑의 아내는 과연 남자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기를 때에 과일과 함께 비릿내 나는 음식도 함께 먹이려 하니 굳이 입을 닫고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쭌핑이 그것을 보고 깨우친 바가 있어 그 자리에서 서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채식을 하며 아울러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8, 금강경과 지장경을 지극정성 외우다.

 

  후앙뚜안빠이(黃端伯)은 명나라 짼창(建昌) 사람입니다. 일찍이 나찡(南京)에서 의제儀制를 주로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쓰는 금강경과 지장경을 특히 지극정성으로 지송하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자기가 산꼭대기에서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광명이 몸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남편인 뚜안빠이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방극락세계를 가 보았더니 날씨가 매우 상쾌했어요.”
그리고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몸이 점점 불편해짐을 느끼더니 염불하면서 임종하였습니다.


9, 염라왕이 보궐진언을 주다

 

송나라 소흥紹興 9년에 밍쪼우(明州)에 왕쓰부인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평상시에 늘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왕쓰부인은 남편을 뒤따라 왔다가 치쪼우(岐州) 임지에는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왕쓰가 임신을 한 이후 28개월이 지나도록 아이가 여전히 태어나질 않았습니다. 또한 분만할 때엔 난산이 걱정되었습니다. 전 가족이 이로 인해 근심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왕쓰가 집대문의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때마침 만행을 하시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을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스님이 왕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하면 공덕이 한량없습니다.”
왕쓰는 출가인을 매우 존경해 왔으므로 이에 공경히 보시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스님은 공양을 손으로 받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숙세에 선근을 심어 놓았었는데 지금 큰 곤란을 만나서 어찌하여 금강경을 인쇄하여 보시하지 않습니까? 만일 기꺼이 발심하여 금강경 일천 권을 인쇄하여 보시한다면 이 곤란을 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울러 복과 수명을 늘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손들이 모두가 늘 단란하고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이별의 고통을 만나지 않게 되며, 일체의 구하는 바가 그대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7대 조상과 권속이 함께 선도善道에 뛰어 오를 것입니다.”

 

왕쓰가 숙세의 근기가 깊고 두터워 말씀을 듣고 열심히 반성하여 즉시에 스님의 신신당부를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일천 권을 인쇄하여 보시하고 스님들 일천 분을 모셔서 재를 베풀어 드리고 아울러 스님들께 금강경 일천독을 청하였습니다. 왕쓰는 또 직접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예배드리면서 숙세의 나쁜 악업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만할 때에 삼보의 보호하시고 도와주심으로 모자가 함께 평안하기를 기원드렸습니다.

 

그날 밤에 그녀는 꿈속에서 금강신을 뵈었는데 손에 금강저를 지니고서 그녀의 복부를 짚었습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을 느껴 깜짝 놀라 깨어났으나 다행히 편안하게 쌍둥이 남자아이를 분만하였습니다. 두 아이의 용모는 매우 아름답고 흠이 없어서 사람들이 보는 이마다 저절로 기쁨을 일으켰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모자母子가 평안하고 걱정거리가 없었으니 전 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쓰는 이로부터 다시 재계하고 채식을 하며 일심으로 금강경독송을 끊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61세가 되던 해에 왕쓰는 아무런 병도 없이 죽게 되었는데 두 사자가 명부로 데려 갔습니다. 거기서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생전에 일찍이 어떠한 선업을 지었소?”
왕쓰가 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금강경을 지송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염라대왕이 한 번 듣고는 매우 공경하여 금으로 된 탁자를 하사하여 왕쓰로 하여금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명부전 한 쪽에서 금강경 일편을 낭송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녀의 경전 독송하는 낭랑한 소리는 지옥에 매여 고통 받는 중생들 모두에게 은혜와 이익을 입게 하였으며 일체의 쓰라린 고통을 잠시 멈추어 쉬게 하였습니다.

왕쓰가 독송을 마치니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진언을 외우지 않습니까?”
그녀가 답하였습니다.
“세간에서는 진언본이 없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진언본을 취하여 그녀에게 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아울러 간곡한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대가 인간세상으로 돌아간 후에 이 진언본을 온 세상에 유통시킬 것이며 결코 유실치 말게 하여주십시오.”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수명이 다하게 되면 서방극락세계로 곧바로 왕생할 것입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이 속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예목계 사하>

1,회향: 진여실제에 마음과 마음이 계합함
2,회향: 위없는 부처님보리에 생각생각 원만함
3,회향: 법계의 일체 중생이 함께 정토에 왕생함


    10, 청량수

 

  첸삥(錢炳)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일찍이 푸양썐(富陽縣)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직을 하고 매일 금강경을 지니고 외우는 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임종할 때에 주변 식구들에게 청량수를 가져다가 마시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식구들이 물었습니다.
“청량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말하였습니다.
“방생한 연못의 물을 가져오면 된다.”
식구들이 이 말을 듣고 연못의 물을 떠다 주니 맛있게 들이키고 나서 합장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부처님의 힘으로 직접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었다.”  이 말을 마치고 나서 흔연히 기뻐하는 모습 그대로 앉은 채 생을 마쳤습니다.


    11, 염라왕이 돌려보내어 경을 지송케 하다

 

쨩아이(張愛)는 명나라 만력萬曆 때에 환관의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년에 그가 꾸준히 매진하던 일은 바로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병을 얻어 죽기 전에 가솔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경을 독송하고 잘 알아차리는 일을 반드시 잊게 해서는 안된다.”


쨩아이가 비록 그렇게 믿음이 깊고 마음에 두어 잘 새기고 했으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쨩아이가 두 명의 파란 옷을 입은 저승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를 데려가서 산동에 이르게 되면 여자의 자궁에다 반드시 던져버릴 것이오.”


그들이 한 길로 나는 듯이 그를 데리고 달려갔습니다. 쨩아이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서 도착하니 몸을 받을 부모가 있었습니다. 쨩아이가 일심으로 금강경을 지송하면서 동악의 궁전에 이르러 묶여 있는데 위에서 근엄하게 앉아 있던 왕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응당 이곳에 이르러 태에 들어가리라.”
쨩아이가 말했습니다.


“제가 금강경을 지송하면서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였지 태에 들어가길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대의 금강경 지송한 공덕의 힘이 적었기 때문이다.”
쨩아이가 말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듣기로는 십념을 성취하면 즉시에 왕생할 수 있다하였는데 하물며 제가 이미 수년간을 금강경을 지송한 공덕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잠시 그대를 놓아주어 다시 금강경을 지송할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는 곧 사자들에게 명을 내려 쨩아이를 세상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쨩아이가 다시 살아 난 이후 집을 떠나 서쪽 산에 있는 벽운사碧雲寺에 머물면서 마음을 오로지 금강경을 지송하는데 매진하였습니다.


다시 11년이 지난 어느 날 모두들 모아 놓고 외쳤습니다.
“내가 금강경을 지송한 공덕의 힘으로 지금 바로 서방극락세계로 간다.”
말을 마치고 나서 단정히 앉아 생을 마쳤습니다.


    12, 벽에서 부처님형상이 출현하다

 

쎤춘쨔오(沈春郊)는 명나라 때 후쪼우(湖州)의 썅린쩐(雙林鎭)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벼슬길에 오른 후에야 페이쓰(費氏)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녀는 애석하게도 어렸을 적에 과부가 되어 직물 짜는데 의지하여 자급자족하며 살았습니다. 40여년을 재계하며 살면서 한 폭의 부처님형상과 단향목檀香木으로 새긴 관세음보살님의 성상에 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반드시 금강경 1권을 독송하였고 부처님명호를 일천 번 외웠는데 춥거나 덥거나 결코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숭정崇禎 무인년戊寅年에 이 땅에 급성 전염병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위 쨩쓰마오(張世茂)의 집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누각 위에다 관음보살님의 성상을 겨우 모셔놓고 공양하고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불상은 여전히 옛 살던 집에 모셔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매일 불상을 향하여 향을 사르고 경전을 독송하였는데 이 향기가 부처님 계신 곳에 직접 이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순식간에 3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신사년辛巳年 봄이 되었습니다. 홀연히 허공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 내려와서 누각을 며칠 동안 에워싸고 돌았습니다. 그리고 하얀 벽 위에 부처님형상이 솟아 나타났는데 장엄하기 그지없고 정미롭고도 미묘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멀고 가까운 곳으로 퍼져나가자 우러러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금방 닦은 것처럼 색채가 더욱 밝고 빛났습니다.

이윽고 4년이 지난 을유년乙酉年 봄 2월에 페이쓰는 딸과 사위에게 말하기를, “내가 반드시 옛집에 돌아가서 곧 서방정토극락에 왕생하려 한다.”하였습니다. 그녀는 옛집에 도착하여 청소를 하고 불상에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경전을 지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3일후 아침 일찍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염불하였는데 오시午時가 되니 홀연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이미 극락가는 연꽃배에 올라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이다.”
그리고는 곧 식구들과 이별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73세였습니다.

 

  13,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차다

 

쩌우팅쨩(周廷璋)은 호를 추펑(楚峰)이라고 하였는데 명나라 정덕正德과 가정嘉靖 때에 윈난(雲南)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솔직하며 충직하고 인정이 두터웠습니다. 평소에 부처님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 매우 정성스러웠습니다. 그는 매일 맑은 새벽에 일어나서 금강경과 아미타경과 관음경 그리고 여려 경전을 반드시 지송하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보시하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궁핍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어떨 땐 비록 남들이 항상 그를 놀리더라도 그는 터럭만큼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여전히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의 뜻에 잘 계합함을 스스로 만족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87세 되던 그 해에 아내와 자식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장차 죽게 되면 아미타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실 것이다. 또한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도 모두 함께 오실 것이다.”
잠시 후에 또 말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5일 동안은 비릿내 나는 음식을 멀리하면 서방극락세계에 곧 왕생하리라고 하셨다.”

그날로부터 그는 매일 죽 한 그릇에 나물 한 그릇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면서 재계를 깨끗이 지니었습니다. 드디어 5일이 지나자, 그는 목욕을 하고 단정히 앉아서 자제들에게 칠보여래七寶如來의 명호를 외우게 하며 스스로는 경전을 외우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곧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뿜어져 날리었으며 용모는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으니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극락왕생성취를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14, 연꽃이 피다

 

쭈쓰(朱氏)는 송나라 때 쨔추안(霅川)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30년 동안 부처님명호를 외우고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경전을 펼 때면 매번 많은 성인들께서 왕림하시어 살펴보시는 듯 하였기에 감히 높이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홀연히 하루 종일 음식을 끊다가 그 이후론 매일 물 몇 잔만 마시면서 40일이 지났습니다. 꿈을 꾸는데 손에 연꽃을 든 스님이 세 분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대를 위하여 연꽃을 심었었는데 오늘에야 활짝 피었도다. 그래서 그대를 맞이하러 가겠노라.”
잠에서 깨어난 추쓰는 염불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단정히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 관불삼매를 이루다

 

탕쓰(唐時)는 명나라 때 후쩌우(湖州) 사람입니다. 럔츠따쓰(蓮池大師)의 가르침을 따라 염불과 법문을 받아 지녔습니다. 그의 권속들도 또한 모두 다 능히 금강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줄줄 외울 정도였습니다. 낮부터 각자 염불하고 경을 외우다가 밤이 되면 전 가족이 모두 모여 부처님 전에서 예불하고 경을 외웠습니다. 탕쓰는 거기에다 더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닦았는데 부처님께서 상서로운 모습을 나투심을 자주 친견하였습니다. 임종할 때엔 바르게 삼매에 든 채로 생을 마쳤습니다.

 

    16, 염불 속에서 앉은 채로 입적하다

 

후이안(慧安) 비구니스님께서는 송나라 때 밍쩌우(明州)에 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작은 냇가에 세워진 양쓰楊氏의 암자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오로지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할 인연을 닦으면서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정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자주 촛불 속에서 부처님형상이 출현함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몸이 좀 불편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단정히 앉고는 모두들에게 시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부처님께서 오셨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크게 염불하니 오래지 않아 후이안스님은 앉은 채로 입적하셨으니 세속나이로 96세 였습니다.


    17, 결가부좌한 채로 세상을 떠나다

 

쎤삥(沈炳)의 자字는 찡푸(敬孚)이고 청나라 때 챵쩌우(長州) 사람입니다. 그가 20세 때에 천식병을 얻어 30세엔 병의 증세가 더 심해지고 50세가 되자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이에 심병은 염불을 시작하고 아울러 재계를 지키면서 생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친한 벗인 양꾸앙먼(楊廣文)이 그에게 금강경을 독송할 것을 권하니 이에 매일 3편씩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자 병의 증세가 점점 호전되는 것이었습니다.

 

건융乾隆 46년 한 해가 저물어 갈 때에 몸이 점점 불편해짐에 따라 그믐이 다가오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목욕한 후에 서쪽 극락정토를 향하여 결가부좌하고 염불하였습니다. 당시에 부인과 자식들이 그의 곁에 있었는데 손을 내저으면서 밖으로 나가라고 외쳤습니다. 조금 있다가 곧 적연히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부처님께서 큰 몸을 나투시다

 

왕양취앤(王仰泉)은 청나라 때 항쩌우(杭州)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양을 도살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병들어 누워 있는데 꿈에서 수많은 양들이 그를 향해 다가와서 목숨을 애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꿈을 깨고나서 그는 도살업을 던져 버리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아울러서 오래오래 재계를 지키면서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이렇게 금강경  천 편을 독송하고 나서 법화경에 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81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명부의 사자가 와서 그를 데려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저항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이 오셔야만 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과연 5일이 지나자 부처님께서 크신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리고는 왕양취앤을 인도하려 하시니 그는 흔연히 따라 갔습니다.


    19, 도심에서 물러나지 않다

 

명나라 때의 일입니다. 쨩위앤(張元)은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고 고기를 잡는 가문 사람으로서 그의 아우인 쨩쩐(張貞)과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를 저어 돌아오다가 긴장을 풀고 푸른 소나무가 서 있는 둑에 배를 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수면위로 기이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한 개의 돌상자를 건져 올렸습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금으로 새긴 금강경 한 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쨩위앤의 꿈에 금으로 된 갑옷을 입은 신장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전생에 챵수이(長水)법사였다. 불법 강의에 힘을 쏟았으나 도심(道心)이 견고하지 못하여서 이곳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옛 경전을 강의한 인연이 남아 있었기에 특별히 그대에게 큰 법을 내려줄 것이니 응당 부지런히 정진하고 지송할지어다.”


쨩위앤이 말하기를, “전 글자를 읽지 못합니다.”하니 금갑신장이 그에게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환약 1알을 그의 입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쨩위앤이 잠에서 깨어나 금강경을 펴들었는데 읽기가 매우 쉬운 것이 마치 오래오래 읽어서 잘 익힌 것만 같았습니다.

 

 쨩위앤은 한달음에 근처 소경사로 달려가서 추안루(傳如)스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추안루스님은 이를 들으시고 나서 그에게 서방정토에 회향할 수 있도록 힘쓰라고 쨩위앤을 독려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쨩위앤은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연화대가 이미 나타났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만력萬曆 정축년 7월의 일입니다.

 

      20, 복력을 타고서야 왕생할 수 있다

 

팡쭈(房翥)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불법을 숭상하고 믿으며 살았는데 매일 염불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팡쭈가 돌연 갑자기 죽었습니다.  저승에 도착하니 염라왕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금강경을 지송하고 아울러 또한 일찍이 한 노인에게 염불하기를 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케 하였으니 그대는 이러한 복력을 타고서 당연히 극락왕생할 수 있음이로다.”


팡쭈가 말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금강경 1만독을 발원하였었는데 아직까지 다 읽지 못하였습니다.”
염라왕이 말하였습니다.


“경전을 독송하려는 발원을 완성하려는 의지가 가상하구나. 지금 정토에 왕생하기는 좀 이른 감도 있으니 잠시 미루어도 좋겠지.”
염라왕이 팡쭈를 위해 특별히 결정을 내리어 명부의 관리를 파견하여 그를 세상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21, 경전독송으로 삼보정재를 함부로 쓴 죄를 녹이다

 

  파창(法藏)은 당나라 때 푸쩌우(鄜州)에 위치하고 있는 보실사(寶室寺)의 스님입니다. 계행을 잘 지니고 성품이 고상하며 심원했으며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습니다. 그리고 널리 자비를 베푸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그가 일찍이 수나라  개황開皇 13년에 루어쨔오썐(洛交縣)의 웨이추안(葦川)강변의 성조사城造寺에 줄곧 머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법당과 강당을 여러 채 지었고 스님들이 머무는 승방도 20여칸이나 지었습니다. 그가 조성하여 법당에 모신 불상은 높이가 무려 1장6척이나 되었고 다른 불상에 비한다면 몇 배나 훌륭하게 장엄되었으며 관세음보살님의 성상도 특별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창스님은 여기서 불경을 800여권이나 사경하였습니다.

 

당나라 무덕武德 2년에 파창스님은 그만 중병에 걸려서 정신이 혼미해져 업무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손에 부처님경전을 든 금강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일생동안 절을 짓고 경전을 사경한 공덕이 비록 크다하나 삼보의 재물을 넘나들며 써버린 죄가 한량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그대에게 금강경 1권을 줄 터이니 만일 능히 실컷 사경하고 독송하며 널리 유통시킨다면 그대의 죄가 소멸될 것이며 몸의 질병도 낫게 될 것이다.”

 

파창스님은 이에 발원하여 금강경을 사경하여 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병이 위중함을 알게 되자 제자들에게 교대하게하고 그의 옷과 발우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금강경 일백 권을 찍어내어 널리 일체의 세상 사람들이 독송할 수 있게 유통시키라고 말하고나서 곧 입적하였습니다. 

명부에 도착하니 염라대왕이 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대는 일생동안 무슨 공덕을 지었습니까?”
파창스님이 회답하였습니다.
“일찌기 탑과 절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금강경 100권을 서사하여 세상에 유통시켜 독송케하였으며 아울러 다른 경전도 800여권을 사경하였습니다.”

 

염라왕이 그 말을 듣고 합장하고 칭찬하여 말하였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의 공덕이 지극히 크며 불가사의합니다.”
염라왕은 곧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덕장부를 가져오게 명한 후, 친히 상세히 살펴보더니 과연 파창스님이 말한 것과 딱 들어 맞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의 공덕이 완벽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세상으로 도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당신께서 대중들에게 금강경독송을 많이많이 권하여 널리 일체공덕을 닦게 하소서.”

파창스님이 99세 되던 해 정월 15일에 대중들을 청해다가 묘법연화경과 금강경을 각 7편을 함께 독송하고 법상에 올라서 단정히 앉아 게송을 읊었습니다.

 

“금년에 99라(今年九十九)
  보고 또 보아도 가진 것 없도다(看看無所有)
  어떠한가라고 다신 묻지 말아라(更莫問如何)
  허공에 의지하여 곤두박질친다네(憑空打筋斗)”

 

게송을 읊고 나서 대중들에게 잘들 있어라 하고는 홀연히 입적하였습니다. 이 때 절 안에 있던 승속의 모든 이들이 아미타부처님께서 파창스님을 서방극락세계로 영접하여 인도하심을 함께 보았습니다.


    22, 가부좌하고 고요히 참구하다

 

명나라 때에 루싼(廬山)에 한 스님이 계셨는데 법명을 푸찡(普靜)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뜻하는 바가 범상치 않았는데 10살에 벌써 출가하려는 지극한 생각을 내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금강신이 나타나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이후에 장차 선지식을 이루어서 바른 과보를 이루리라.”

스님께서 꿈을 꾸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스승을 찾아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습니다. 내전內典(부처님 경전)을 점점 배우고 익히며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지극정성으로 독송하기를 10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스님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경전을 독송하는 방법이 결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신인은 스님을 향하여 게송을 설하였습니다.

“모양있는 모양은 참이 아니요(有相相非眞)
  법없는 법도 또한 떨어지고야만다(無法法亦墜)
  옛 보금자릴랑 냅다 던져버리면(撇卻舊窠臼)
  즉각 큰 뜻을 요달하리라(卽已了大意)”

 

푸찡스님은 게송을 듣자마자 활연히 깨달았습니다. 이로부터 매일 금강경을 1편씩만 낭랑하게 독송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참구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40년이나 방석에서 내려오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신인이 다시 꿈 속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이미 닦음을 벗어나 중도를 얻음에 이르렀다.”
90세에 이르러 스님께서는 원적圓寂에 들어가시려고 할 즈음 밤새도록 아름다운 향기가 흩어지지 아니했으며 절 안의 승속 대중이 모두 당번幢幡이 스님을 인도해 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푸찡스님의 몸에는 보랏빛 가사가 저절로 입혀졌고 손에는 목환자(木槵子)를 쥐고 하늘 높이 올라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23, 붉은 노을이 지붕 위를 덮다

 

후앙포(黃婆)는 송나라 차오싼(潮山)사람으로서 늘 부처님 명호를 외우며 법화경과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설사병을 얻었는데 스스로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문득 음식을 끊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단지 물 몇 잔만 마실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상린암上鄰庵에 계시는 싼씨우(善修)스님의 꿈에 후앙포가 와서 하는 말이 장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나서 이틀 후에 과연 후앙포는 서방을 향하여 염불하면서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붉은 노을이 찬란하게 빛나면서 지붕 위를 덮는 것을 이웃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24, 왕쓰의 딸이 천지를 감동시키다

 

왕쓰(王氏)는 송나라 때 찌안(吉安)사람입니다. 그녀의 딸은 매일 아미타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과 금강경 등을 독송하였습니다.
왕쓰가 죽기 며칠 전부터 몸 전체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이를 마음 아파하던 딸이 발원하였습니다.
“만일 저의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진실이라면 원컨대 어머니의 신체에 더럽고 냄새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딸은 발원을 마치고나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서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쓰가 병든 채 침대에 있는 누워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상서로왔습니다. 이윽고 손에 관세음보살님의 보배 깃발을 쥐고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을 한 연후에 뼈를 수습 하였는데 식솔들이 재를 체로 칠 적에 연꽃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5, 길상스럽게 누운 채 가다

 

천쓰(陳氏)는 송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계를 잘 지키면서 평소에 매일 참선하고 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습니다. 30년을 부처님 명호를 염불하였으며 아울러 법화경을 5000편 독송하고 금강경과 아미타경을 각각 5048편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끊었습니다. 식구들이 놀라서, “왜 음식을 드시지 않습니까?”하니, 그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을 뵐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길상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6, 염불하여 왕생하다

 

리우따오롱(劉道隆)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리쓰(李氏)는 40살에 발심하여 계를 지키고 부처님을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글자를 읽지 못하였으므로 경을 독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방을 한 칸 마련하여 거기에다 관세음보살님과 금강경을 모셔놓고 공양올리며 받들어 모셨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고 예배를 올렸는데 1000번씩 염불하는 것으로 과업을 삼았습니다.

 

 그녀의 정성은 겨울에 매서운 한파가 닥치거나 한여름에 폭염이 내려쬐어도 그칠 줄 몰랐습니다.

동짓달 매서운 혹한이 찾아오면 식구들이 그녀가 동상이라도 걸릴까 염려되어 탄불을 탁자아래 놓아두고 가면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리쓰가 비록 그렇게 글자를 몰라서 능히 경전을 독송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액을 내어 금강경을 새기고 인쇄하여 부처님께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주 수지독송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와서 아들과 딸들이 그녀를 위하여 생일잔치를 벌리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딸과 며느리들에게 술자리를 벌여서 손님에게 대접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가족이 채식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더욱 하루 혹은 사흘 동안을 예참禮懺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양식이 2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1년전 쯤 보관하고 있던 돈을 내어서 대중스님들을 청하여 모시어 금강경을 염송케 하여 공덕을 널리 닦았습니다. 그녀의 꿈속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한 꾸러미의 염주를 그녀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이 염주의 숫자를 셈하여 보아라. 이것이 그대가 서방정토에 왕생할 날을 기약하리라.”
그녀가 꿈속에서 한 번 세어보니 153과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해 경자년 5월 3일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가솔들을 불러놓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큰소리로 염불하여서 나의 극락행을 도와다오.”
말을 마치고 단정히 걸상위에 앉으니 아들과 딸과 며느리 등이 모두 그녀의 주위에 모여 앉아 열심히 염불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염불소리를 듣는 가운데 행복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7,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하다

 

쑤쌰오크(徐孝克)는 수나라 대에 국자감國子監의 박사博士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불법佛法을 돈독하게 믿었는데 경론經論을 풀어 해석하여 널리 펴는데 진력하였으며 다른 일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남북조시대 진나라 천가天嘉 때에 이안(剡)의 관리직을 받았습니다. 태건太建 4년에 조정에서 그에게 비서직을 맡기려고 불렀으나 그는 그 직에 부임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쌰오크는 아내를 팔아 모친을 봉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재계를 지키고 채식을 하였으며 아울러 보살계도 받아 지녔습니다. 이때 모든 관청에 자주 도깨비가 출현하였습니다. 쌰오크는 이미 살다 떠난 후라 요괴들을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후에 쌰오크는 창안(長安)으로 갔습니다. 수나라 황제인 문제文帝는 그의 덕높은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들었던 터라 특별히 칙령을 내려 그를 청해다가 상서성尙書省에서 금강경을 강설하게 하였습니다. 개황開皇 12년에 쑤쌰오크가 이미 73세가 되니 죽음을 맞이하는 염불을 하였는데 실내에 기이한 향기가 났습니다. 이에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이롭게 여기면서 아울러 불법의 위대함을 찬탄하였습니다.

 

  28, 비구스님이 경을 독송케하다

 

  쑨따깐(孫大玕)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습니다. 12세에 아버지 찡우(鏡吾)거사를 따라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받들었습니다. 운서사雲棲寺에 가서 오계를 받아 지니고 집으로 돌아온 후 모든 비릿내 나는 생선과 누린내 나는 육고기를 끊고 사람들과 서로 교유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로부터 말을 적게하거나 침묵하면서 일심으로 염불하였습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정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극락세계에 들어가 상품에 왕생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오래 되지 않아 2명의 비구스님이 손에 연꽃을 들고 나타나더니 그에게 금강경을 하루낮 하룻밤을 독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쑨따깐이 그대로 열심히 하였더니 과연 얼마 후 홀연히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서 함께 나를 영접하러 오신다.” 
쑨따깐은 손으로 금강권인金剛拳印을 맺고 큰 소리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여러 번 외친 후 단정히 앉아 원적圓寂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만력 신해년(서기1611년) 11월 11일의 일입니다. 쑨따깐은 「정토십이시가淨土十二時歌」라는 노래를 남겼습니다. 상세한 것은 우타이쓰(吳太史)의 「서생전西生傳」을 보시면 됩니다.

 

    29, 금강경을 독송하고 서방에 회향하다

 

  우(吳)모某는 청나라 쯔쨩(浙江)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상생庠生이 되었습니다. 순치順治 원년에 수많은 군대가 성을 포위하게 되자 그는 부모와 이별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붙잡혀서 짱(張) 장군의 휘하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겨우 13살이었을 때입니다.


그는 스스로 슬프게 탄식하기를, “내가 본래 이 선비 집안의 아들인데 어쩌다가 이러한 지경에 떨어졌을까? 필시 이것을 과거 숙세의 죄업이 불러온 것일 것이다.”하고는 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곧 재계를 지키고 염불을 하면서 매일 금강경 1편을 독송하면서 서방극락정토에 회향함을 발원하였습니다.

 

이윽고 삼년이 지나 우모는 양식과 은銀을 내어 향을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아울러 장궤합장하고 아미타부처님의 성스러운 명호를 외우는 정진을 끝없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10년이 지나 정유년 10월 2일에 우모는 갑자기 짱 장군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방극락세계로 가게 되었습니다.”


짱 장군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요사스런 말로 미혹하고 어지럽히려 하느냐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다음 날, 우모는 상관에게 찾아가서 휴가를 청했는데 상관은 크게 화를 내고 짱 장군에게 보내었더니 장군이 매를 15대 때리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우모는 터럭만큼도 원망하지 않고 군영으로 돌아와서 모든 장교와 사병들에게 앞으로 11월 1일에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이다라고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그날이 다가오자 우모는 오전에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한 후, 향을 사르고 부처님전에 예배를 한 후, 평소처럼 여전한 몸가짐으로 배위로 올라가서 짱 장군에게 절을 올리고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짱 장군은 크게 노하여 우모가 막 몸을 태우려는 곳으로 부하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며 우모는 서방극락세계를 향하여 3번 절하고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습니다.

 

“몸은 철갑을 입었고
  발밑은 금연꽃
  모든 장교와 사병들이여,
  각자 채찍 하나씩 들어라.”
  身披鐵甲,足步金蓮,
  願諸將士,各着一鞭

 

게송을 마치고나자 모두들 보는 가운데 우모의 입에서 삼매의 불이 솟구쳐 나와 스스로의 몸을 활활 태웠습니다. 군영에 있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둘러싸고서 예배를 올렸습니다. 이로부터 짱 장군의 전 가족들도 재계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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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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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국사랑 | 작성시간 10.10.05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 작성자지금바로 | 작성시간 10.10.21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산들강 | 작성시간 11.05.19 귀한 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작성자이선생 | 작성시간 14.02.04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 작성자金武璡 居士 | 작성시간 16.04.06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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