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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단식 수행에 대하여.. *왜 침묵만 하시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지 않습니까?..

작성자수선화바람에|작성시간18.08.14|조회수259 목록 댓글 8

  *단식 수행에 대하여..

 -단식을 통해서 영적으로 진화할 수 있습니까?

 -우선 정신적인 단식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음식만을 절제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것은 오히려 마음만 더 흔들어 놓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한 달의 단식 기간 동안 영적인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그 기간이 지난 뒤 열흘 동안 올바른 식이요법으로 잘 마무리되면 열흘이 지나서도 마음이 순수해지고 안정되며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내가 이곳에 왔던 초기에 나는 눈을 감고 깊이 삼매에 들어서 밤인지 낮인지도 거의 알지 못했다. 나는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잠도 자지 않았다. 육체가 움직이면 음식이 필요해지며 음식을 섭취하면 수면이 필요하다. 따라서 움직임이 없으면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삶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주 소량의 음식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그 상태에서 가끔 눈을 뜰 때면 항상 누군가가 한 컵 가득히 액체로 된 음식을 나에게 먹여 주곤 했다. 그것이 내가 먹은 음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 빠지기 전에는 수면이나 음식을 완전히 중단할 수는 없다. 육체와 마음이 일상적인 생활에 쓰이고 있을 때 음식이나 수면을 중단하면 육체가 동요하게 된다.

 영적인 길을 가는 구도자가 얼마나 먹어야 하고, 얼마나 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열 시에 자서 새벽 두 시에 일어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네 시간의 수면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네 시간은 부족하고 여섯 시간은 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음식과 수면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만약 음식이나 수면을 완전히 끊으려고 하면 그대의 마음은 항상 그것만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구도자는 모든 것을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루에 세 번 먹든, 네 번 먹든 상관이 없으나 <이런 음식은 좋고 저런 음식은 싫다>고 분별해서는 안 된다.

-요가수행자 마하리쉬의 글에서-


  *왜 침묵만 하시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왜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진리를 전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널리 진리를 전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대가 어떻게 아는가? 연단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해야만 널리 진리를 전하는 것인가? 진리의 전달이란 곧 지혜의 전달이며 그것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가능하다.

몇 시간 동안 가르침을 듣고도 전혀 아무런 변화 없이 돌아가는 사람과, 그냥 잠시 앉아 있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어 돌아가는 사람을 비교해 보라. 아무 효과 없이 크게 소리치기만 하는 것과 내면의 힘을 보내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낫겠는가?

또, 어떻게 해서 언어라는 현상이 생기는가? 맨 먼저 추상적인 앎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고(ego,자아)가 생기고 이것이 생각을 일으키며 생각이 다시 언어로 발전한다. 따라서 언어란 실체의 고손자뻘이다. 이런 언어를 통해서도 효과를 나타낼수 있다면 침묵의 힘은 얼마나 더 강력하겠는가?

 -침묵의 힘이 그렇게 강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깨달은 사람으로부터는 강력한 영적 파동이 방출되며 이것이 사람들을 그에게 모이도록 한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도 거의 이를 파악하지 못하지만 깨달은 사람과 접촉하면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굳이 대중들에게로 나갈 필요가 없으며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을 대신 이용할 수도 있다.

 스승은 침묵을 전해주는 사람이며, 스승의 눈이 제자의 눈과 만나기만 하면 언어란 아무 소용이 없다.

침묵은 끊임없는 언어다. 그것은 사실 언어의 영원한 흐름인데 외면적인 언어에 의해서 차단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이 침묵의 언어를 방해하고 있다. 예컨대 전선을 흐르는 전류의 경우, 그 흐름이 방해되면 전등이 켜지거나 프로펠러가 돌아가지만 방해되지 않으면 계속 전류로서 흐른다. 마찬가지로 침묵은 영원한 언어의 흐름이며 외면적인 언어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는 몇 년이 지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침묵을 통해서는 즉각 이해할 수도 있다. 다크쉬나무르티(인도 고대 요가 대가중의 한 사람)와 그의 네 명의 제자들의 경우가 이의 좋은 예이다. 침묵은 가장 높은 차원의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언어다.    -요가 수행자 마하리쉬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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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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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수선화바람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8.14 감사합니다_()_()_()_
  • 작성자장우중 | 작성시간 18.08.14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답댓글 작성자수선화바람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8.14 감사합니다_()_()_()_
  • 작성자梵心(범심) | 작성시간 18.08.15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답댓글 작성자수선화바람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8.15 감사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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