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역 무득 이무소득 無智 亦 無得 以無所得
지혜도 얻음도 없다 무소득이니라
4성제 설명에
세존의 설법을 듣던 다섯 사문 가운데 꼰단냐 사문이..
"아.. 알았다! 고집이 곧 고멸 이구나[集法卽滅法]"
이건 무슨 소식일까?
집제란 갈애와 집착으로 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고
멸제란 갈애와 집착을 버리니 고가 여기에 없다는 것인데
어찌 고집이 바로 고멸이 될 수 있을까?
<상니. 초전법륜경>은 한글로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 이라 번역하여
시간적 관찰자 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생긴 것은 모두 멸한다'는 사실이 불교만의 독특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우주의 생주이멸이나 사람을 포함한 생명체의 생노병사를 모르는 수행자는 없다.
더 나아가 그 사실을 뼈속 체험으로 깨치지 못하면 성자로 존경받을 수 없다.
예수가 생명을 내려놓은 채 당당하게 유대인 구루인 납비나 로마 지배자에게 맞설 수 있던 근거도
바로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다는 진리를 깨쳐 늘 담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수행자 싣달타가 6년 동안 뼈를 깍는 고행을 한 이유도 언잰가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 분명히 자각하고 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를 따르던 다섯 사문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면..
명상과 6년 고행을 파기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마지막 수행을 한 후..
이제 부처라 외치는 석가세존은..
그 전에 깨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고,
이제 [그것]을 깨쳐 다섯 사문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 인가?..
괄호 속에 있는 한문.. '집법이 곧 멸법[集法卽滅法]'에 주시한다.
[집이 곧 멸]이라 함은 시간 속의 관찰이 아닌
지금 여기서 즉시 관찰하는 것. 집과 멸은 둘이 아니다
무명을 멸하면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고 멸 또한 더 이상 멸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싣달타 수행자가 깨친 바가 보이고 왜 부처님이라 외치는 지 이해가 되며..
다섯 사문 가운데 꼰단냐가 알아 채자..
석가세존께서 꼰단냐 사문이 "이제 완전히 깨달았구나!" 하면서 기뻐한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된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 공부는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여..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다.
듣고 잘 이해했다 하여 증득하는 게 아니다.
꼰단냐 비구는 제일 먼저 바르게 이해했고[깨달음] 수행을 열심히 했지만
사리붓다나 가전연 등 10대 제자들이 먼저 깨쳤다[아라한]
집즉멸이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생을 연해 멸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생이 없고 멸이 없다[불생불멸]
집즉멸은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수행으로 깨치는 것은 어떠랴..
그러기에 재가자에게 그것은 무거운 짐만 될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들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새는 소나 말도
중생이 곧 부처이고 생사 곧 열반이라고 중얼거린다.
집즉멸을 이해하면 그리 말하고 이해하는 게 당연일 수 있겠으나..
중생인 마당에 함부로 쉽게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 정직한 자세는 시간적 순차로 이해하는 생멸4제가 훨씬 정직하다.
따라서 상좌부에서는 정직하게 시간적인 이해 수준에서 가르치고 있다.
다만 <심경>에서는 상좌부의 그런 지혜는 지혜가 아니요[무지]
지혜가 아닌 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역 무득]!
하고 있을 뿐이다.
해서 오히려 묻는다.
반야부 불자 가운데 누가 무소득을 깨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