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호(평택 법장사 신도회장)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을 가면 대개는 사찰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보시금을 아끼지 않았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 종단에 몸을 담는 일 없이 가는 곳에 사찰이 있으면 부처님께 삼배 드리는 것으로 저 자신이 불교인임을 자처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천태종의 지회가 평택에 생기면서부터 천태종에 귀의하여 천태종 신도가 됐지만, 처음에는 찬 물에 기름 돌듯 항상 언저리에서 돌기만 했을 뿐입니다. 물론 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분위기가 어색하고 의식도 생소하며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서나마 지식을 얻으려 해도 단편적이고 난해하기만 했습니다.
불교가 저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같아 마음에 갈등도 심했지만,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던 불심이 오늘의 제가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평택지회가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동삭동의 현 위치로 이사오면서부터 조금씩 제 마음 속에도 불심이 자리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저도 일익을 담당하여 우리의 절을 마련하였다는 긍지가 조금은 더 애착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부터는 법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모든 행사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면 ‘부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만약 잘 안되는 일이 있어도 ‘부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정도라도 되었지’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께 감사하며 생활하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릴 때마다 발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담배 좀 끊게 해주세요. 제 능력으로는 못끊습니다. 부처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부처님, 제 안식구 병이 깊습니다. 제 안식구 병 좀 낫게 해주세요.’
저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채 항상 이렇게 발원을 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웠는데, 식전에 벌써 세 가치나 피웠고 잠을 자다가 몸만 뒤척여 일어나게 되면 담배 한 모금이라도 피워야 다시 잠이 드는 못된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저의 안사람의 병은 안면경련으로, 1972년에 처음 발병하였습니다. 1976년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 인한 심한 두통으로 진통제를 한번에 두 알씩 하루에 몇번이나 상시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이 1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재수술까지 생각해보았지만, 한번 수술한 자리는 주위가 서로 유착되어 재수술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뇌는 목숨과 직결되어 있고 장애인이 될 확률이 크기 때문에 모든 의사가 재수술을 기피하여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1989년 새해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원력과 가피력이 제게로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본산에서 열리는 간부교육이 1월 17일부터 있으니 많은 사람이 함께 가자는 당시 신도회장님의 권유에 크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따라나섰습니다.
저는 본산에 갈 때는 언제나 이틀치 담배를 준비하곤 했습니다. 첫날부터 일주문 밖을 출입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본산에 도착하여 회장단 기도실에 여장을 풀고 5층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담배 끊게 해달라는 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적멸보궁에 다녀와 평소 본산에서 하던 생활을 하면서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공양을 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시계를 보니 9시였습니다. 평소같으면 본산에서도 이 시간이면 두번은 피웠을텐데 깜박 잊었던 것같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안피웠으니까 피워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첫 한 모금을 빠니까 ‘핑’ 하고 어지러웠습니다. 조금 늦게 피웠다고 어지러운가 생각하며 한 대를 다 피웠습니다.
그런 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점심공양을 하고 나서 또 생각해보니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거 참 이상하다’ 하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서 또 담배 한 대를 다 피웠습니다.
그런데 저녁 공양을 하고 나서 방에 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본산에서는 담배를 피울 곳이 화장실밖에 없고 인간의 생리현상으로 화장실에 가면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어 담배를 피우기 마련인데, 잊었다는 것은 말이 안됐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제가 찾아가서 담배 피울 때 억지로 소변을 봤을 뿐 저녁 공양을 마친 그 시간까지 생리현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그날 하루의 생리현상이 완전히 멈춰진 것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화장실에 가면 안되기 때문에 생리현상도 멈추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서야 ‘아, 부처님께서 내 원을 들어주셔서 담배를 끊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언가 아쉬운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스쳤습니다.
‘내 나이 50이 넘었는데, 30년이나 피운 담배를 이제 끊어서 무얼 하겠는가. 그냥 피우자. 에라, 나가서 한 대 피우고 들어오자.’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처님께서 내 원을 들어주셔서 담배를 끊게 해주시는데 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배우기는 쉬워도 끊기는 어려우니 이 참에 끊었다가 나중에 마음 변하면 다시 피우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도 잠시뿐 나중에는 그러한 마음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튿날 아침에는 전날의 갈등과 번민조차 모두 잊어버리고 내 평생 단 한번도 담배를 피워본 일이 없는 그러한 몸과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기분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결코 어떠한 말이나 글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여름에 소나기가 한 줄기 쏟아진 후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과 대지가 빗물을 머금은듯 생동감 넘치는 그런 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아직도 주머니 속에는 반 갑의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지만, 마음 속에 전혀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담배와 라이터를 기념으로 책상 위에 놓아두었지만 마음에 아무런 미동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원력으로 하루 아침에 제 평생 단 한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의 두번째 기적은 1991년 7월에 일어났습니다.
제 안사람의 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수술이 불가능했으며 만약 재수술을 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 승부를 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음과 승부를 해야 하는 수술을 택했겠는가 하는 데서 환자의 아픔과 마음고생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서울 순천향병원 신경외과 교수님께서 이 모든 내용을 알고 ‘한번 재수술을 시도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번 수술한 자리는 유착이 되어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가능합니까’ 반문하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열어봐서 가능성이 있으면 수술을 하고 가능성이 없으면 그냥 덮겠습니다.”
“이런 수술을 해보셨습니까?”
제가 다시 묻자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환자는 장래의 두려움을 초월한듯 우선 고통에서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고, 반신불수나 안면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좋아질 수 있는 확률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포기하셔도 됩니다.”
담당 보조의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수술을 허락하는 보호자 도장을 찍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공상을 하였던지, 얼마나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던지, 오직 저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를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수술실로 들여보내놓고 장장 5시간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제 마음은 안정이 안돼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고 제 눈은 모든 것이 굴절된 상태로 보였으며 제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흐느끼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아내가 받는 수술은 현재의 의술로는 불가능하지만, 부처님 원력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정신없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수술을 끝내고 교수님이 수술실에서 나오셨지만,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이 먼저 말을 건네왔습니다.
“아직 여기에 계셨군요. 수술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성공입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요.”
그렇지만 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오로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만이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마음만이 뇌리를 사로잡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내의 재수술은 의사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대성공이었고, 그 덕분에 아내는 10여 년의 병상생활을 마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힘이라고 자만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느끼는 우리 내외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오늘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열심히 정근하며 변치 않는 부처님의 제자 되기를 간절히 서원합니다.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을 가면 대개는 사찰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보시금을 아끼지 않았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 종단에 몸을 담는 일 없이 가는 곳에 사찰이 있으면 부처님께 삼배 드리는 것으로 저 자신이 불교인임을 자처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천태종의 지회가 평택에 생기면서부터 천태종에 귀의하여 천태종 신도가 됐지만, 처음에는 찬 물에 기름 돌듯 항상 언저리에서 돌기만 했을 뿐입니다. 물론 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분위기가 어색하고 의식도 생소하며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서나마 지식을 얻으려 해도 단편적이고 난해하기만 했습니다.
불교가 저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같아 마음에 갈등도 심했지만,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던 불심이 오늘의 제가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평택지회가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동삭동의 현 위치로 이사오면서부터 조금씩 제 마음 속에도 불심이 자리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저도 일익을 담당하여 우리의 절을 마련하였다는 긍지가 조금은 더 애착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부터는 법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모든 행사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면 ‘부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만약 잘 안되는 일이 있어도 ‘부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정도라도 되었지’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께 감사하며 생활하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릴 때마다 발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담배 좀 끊게 해주세요. 제 능력으로는 못끊습니다. 부처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부처님, 제 안식구 병이 깊습니다. 제 안식구 병 좀 낫게 해주세요.’
저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채 항상 이렇게 발원을 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웠는데, 식전에 벌써 세 가치나 피웠고 잠을 자다가 몸만 뒤척여 일어나게 되면 담배 한 모금이라도 피워야 다시 잠이 드는 못된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저의 안사람의 병은 안면경련으로, 1972년에 처음 발병하였습니다. 1976년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 인한 심한 두통으로 진통제를 한번에 두 알씩 하루에 몇번이나 상시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이 1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재수술까지 생각해보았지만, 한번 수술한 자리는 주위가 서로 유착되어 재수술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뇌는 목숨과 직결되어 있고 장애인이 될 확률이 크기 때문에 모든 의사가 재수술을 기피하여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1989년 새해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원력과 가피력이 제게로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본산에서 열리는 간부교육이 1월 17일부터 있으니 많은 사람이 함께 가자는 당시 신도회장님의 권유에 크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따라나섰습니다.
저는 본산에 갈 때는 언제나 이틀치 담배를 준비하곤 했습니다. 첫날부터 일주문 밖을 출입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본산에 도착하여 회장단 기도실에 여장을 풀고 5층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담배 끊게 해달라는 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적멸보궁에 다녀와 평소 본산에서 하던 생활을 하면서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공양을 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시계를 보니 9시였습니다. 평소같으면 본산에서도 이 시간이면 두번은 피웠을텐데 깜박 잊었던 것같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안피웠으니까 피워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첫 한 모금을 빠니까 ‘핑’ 하고 어지러웠습니다. 조금 늦게 피웠다고 어지러운가 생각하며 한 대를 다 피웠습니다.
그런 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점심공양을 하고 나서 또 생각해보니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거 참 이상하다’ 하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서 또 담배 한 대를 다 피웠습니다.
그런데 저녁 공양을 하고 나서 방에 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담배를 안피웠습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본산에서는 담배를 피울 곳이 화장실밖에 없고 인간의 생리현상으로 화장실에 가면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어 담배를 피우기 마련인데, 잊었다는 것은 말이 안됐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제가 찾아가서 담배 피울 때 억지로 소변을 봤을 뿐 저녁 공양을 마친 그 시간까지 생리현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그날 하루의 생리현상이 완전히 멈춰진 것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화장실에 가면 안되기 때문에 생리현상도 멈추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서야 ‘아, 부처님께서 내 원을 들어주셔서 담배를 끊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언가 아쉬운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스쳤습니다.
‘내 나이 50이 넘었는데, 30년이나 피운 담배를 이제 끊어서 무얼 하겠는가. 그냥 피우자. 에라, 나가서 한 대 피우고 들어오자.’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처님께서 내 원을 들어주셔서 담배를 끊게 해주시는데 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배우기는 쉬워도 끊기는 어려우니 이 참에 끊었다가 나중에 마음 변하면 다시 피우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도 잠시뿐 나중에는 그러한 마음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튿날 아침에는 전날의 갈등과 번민조차 모두 잊어버리고 내 평생 단 한번도 담배를 피워본 일이 없는 그러한 몸과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기분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결코 어떠한 말이나 글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여름에 소나기가 한 줄기 쏟아진 후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과 대지가 빗물을 머금은듯 생동감 넘치는 그런 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아직도 주머니 속에는 반 갑의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지만, 마음 속에 전혀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담배와 라이터를 기념으로 책상 위에 놓아두었지만 마음에 아무런 미동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원력으로 하루 아침에 제 평생 단 한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의 두번째 기적은 1991년 7월에 일어났습니다.
제 안사람의 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수술이 불가능했으며 만약 재수술을 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 승부를 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음과 승부를 해야 하는 수술을 택했겠는가 하는 데서 환자의 아픔과 마음고생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서울 순천향병원 신경외과 교수님께서 이 모든 내용을 알고 ‘한번 재수술을 시도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번 수술한 자리는 유착이 되어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가능합니까’ 반문하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열어봐서 가능성이 있으면 수술을 하고 가능성이 없으면 그냥 덮겠습니다.”
“이런 수술을 해보셨습니까?”
제가 다시 묻자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환자는 장래의 두려움을 초월한듯 우선 고통에서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고, 반신불수나 안면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좋아질 수 있는 확률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포기하셔도 됩니다.”
담당 보조의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수술을 허락하는 보호자 도장을 찍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공상을 하였던지, 얼마나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던지, 오직 저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를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수술실로 들여보내놓고 장장 5시간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제 마음은 안정이 안돼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고 제 눈은 모든 것이 굴절된 상태로 보였으며 제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흐느끼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아내가 받는 수술은 현재의 의술로는 불가능하지만, 부처님 원력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정신없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수술을 끝내고 교수님이 수술실에서 나오셨지만,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이 먼저 말을 건네왔습니다.
“아직 여기에 계셨군요. 수술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성공입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요.”
그렇지만 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오로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만이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마음만이 뇌리를 사로잡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내의 재수술은 의사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대성공이었고, 그 덕분에 아내는 10여 년의 병상생활을 마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힘이라고 자만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느끼는 우리 내외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오늘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열심히 정근하며 변치 않는 부처님의 제자 되기를 간절히 서원합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