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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스크랩] 제3장.인생의 의의와 정도(불지(佛智)의 재발견)-4. 마음이나 정신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다카하시 신지-

작성자오로지팔정도|작성시간22.04.10|조회수67 목록 댓글 3

제 3 장 마음의 원점

 

4. 마음이나 정신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이 제목의 질문은,

어떤 종교 단체의, 청년부의 간부한테서 나온 것이었다.

만다라(曼陀羅)앞에서,

아침저녁으로 경문(經文)이나 제목(題目)을 올리는 근행을 하는, 광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석가의 불교는 이미 없으며, 일련상인(日蓮上人)이야말로,

말법의 세상을 구할 분이다.’ 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설법한 법화경(法華經),

전교대사(傳敎大師)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법화경,

그 경문을 올리면서,

‘이것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도자들은, 갖은 말로써, 그들의 주의(主義)를 진실인 양 꾸며대고 있다.

불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세의 가르침이라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철학이니 뭐니 하면서, 지(知)에만 매달려 있을 뿐,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붙이고, 신자들에게는 벌을 받는다고 협박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 족쇄를 채운, 가엾은 사람들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벌(罰) 같은 것을 받을 리 없건만,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종교 따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

그러한 종교를 믿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마음의 평안등은 조금도 없다.

 

‘몇 사람을 입교시켜야 당신의 업(業)이 없어진다.’ 라고 말을 듣게 되면,

욕망이 있는 자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한 신자의 모습이야말로, 슬프다.

조직의 세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것이 도리어, 괴로움과 의문의 와중(渦中)에서,

이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문도, 벌이 두려워서 숨기고 있는 지도자도, 가엾다.

 

질문자는 나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대상물이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있다.”

나는 그에게, 반대로

“당신은 태어날 때, 발가숭이였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발가숭이였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태어날 때, 만다라를 달고 나왔는가하고 생각했다요.”

라고 되묻자, 강연회장은 곧 웃음바다가 되었다.

“남자니까. 달고 나온 것은 불알이었습니다.”

라고 그가 혼자말로 중얼거렸기 때문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었다.

만약 만다라 따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에게 그것도 주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쇄물이나 조각물을, 본존(本尊)이라고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존이 신이라면, 돈으로 살 수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경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마음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누구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잃고, 조직의 세포가 되어 버리면

올바른 말에도 귀가 열리지 않게 된다.

독선은, 이미 무지(無知)라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광신, 맹신에 빠지면,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다.

 

벌(罰)은,  올바른 마음과 행위를 잊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존이, 벌 같은 것을 내릴 리 없다.

 

만약 선인(善人)에게 벌을 내리는 본존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도, 부처도 아니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마왕이나 아수라나 동물령정도이다.

 

하지만 마왕들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범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구름이 없으므로,

신의 자애의 빛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그들 마왕들도,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법칙에 따라. . .

침침한, 태양의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떻게 해도 불결하게 된다.

그러한 곳의 물웅덩이에는, 파리나 모기의 유충인 구더기와 장구벌레가 들끓는다.

그런 곳이, 저 세상의, 이른바 지옥계이다.

음습하고 침침한 세계, 그 곳이 마왕들의 주가(住家)이다.

지옥령들의 마음이, 영위기를 어둡게 하기 때문에,

자비와 사랑의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태양의 열과 빛으로 가득 찬 곳에는,

아름다운 화초가 있고, 싱그러운 푸르름이 있다.

대자연은 이렇게 밝게 꾸며져 있다.

이와 같은 곳에는, 나비와 꿀벌들이 모여들어,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이다.

설령 구더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태양의 열과 빛 때문에,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제목(題目)을 올리면,

죽은 자가 성불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제목을 공양하면, 죽은 자가 성불한다는 등,

어림도 없는 말이다.

 

우리들의 그룹 중에는, 이미 정도를 생활 속에 실천하여, 관자재가 되어,

저 세상의 지옥계에도, 천상계에도 가서,

자유로이 보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죽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도 금방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사자(死者)가 지상계에서 생활하고 있던 때의 일을 상세하게,

질문자에게 답하고, 살고 있던 때의 모양도 보고, 설명해 줄 수 있다.

 

F출판사의 S사장은, 모든 종교를 취재해 온 베테랑이다.

그 분이, 놀랐던 일이 있다.

그 분의 죽은 아버지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서

살아 있을 당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때 강연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트란지스터를 응용한 좋은 수신기는, 여러 나라의 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우리들도,  그러한 기계와 유사하여, 경문이 없어도, 또 불전이나 신전이 없어도,

모든 세계의 일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병사구(並四球)의 수신기는 잡음이 많고, 혼신도 있어서

가까운 발신국의 것밖에 수신하지 못한다.

 

전파를 넣고도 좀체로 선국(選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 調和度)는,

이 수신기처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디오는 어느 나라에 가져가더라도,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들의 그룹은,  고대 인도어를 비롯하여,

아득한 과거의 아틀란티스 제국과, 태평양에 가라앉은 무 대륙시대의 언어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세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생명이 전생윤회하고 있고,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그 과거의 것도 모두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테이프 레코더를, 스스로의 마음의 조화도에 의해,

스위치를 넣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그 차이로, 과거세가 생각나는가. 생각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도 모두, 마음과 행위가, 그 능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마음이란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면 그 마음이란 것은, 정신이란 것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육체주의 선장인 의식의 중심이며,

선장의 두뇌라고 말한다면 좋겠다.

 

우선, 우리가 기쁠때는 감격하고, 또 슬플 때에는 가슴이 벅차온다.

가슴이 벅차 오르면, 눈에는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 마음의 감정의 영역이,

마음의 중심에 있는 상념, 지성, 이성의 영역의 작용에 의해서,

육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노여운 마음이 생기면, 감정이 부풀어 올라

얼굴색이 파래지거나 붉어지고, 더러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몸이 굳어지기도 한다.

즉, 육체주에도, 선장의 마음의 움직임이, 그대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장이 감정적으로 노를 저으면, 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진행 방향을 잘못 잡는 일도 있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감정의 혼란이, 육체적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한,

바르게 말하는 것도,

바르게 듣는 것도,

바르게 보는 것도,

바르게 염(念)(=기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나쁜 말이나, 나쁜 것을 보았을 경우, 폭발하는 것이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다.

자기 보존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 3 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듣거나 보거나 한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상대방의 오해 때문에 생긴 감정의 갈등인 경우에는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중요하고,

몇 사람인가의 사람들을 거쳐 전해져 온 것이든 어쨌든,

올바르게 납득될 때까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노여움을 가지고 오더라도,

냉정한 판단으로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의 감정적 언동에 휘말려, 자기 자신도 감정적 언동을 사용한다면,

상대방의 독을 먹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을 만들어,

자신의 영위기(靈圍氣)를 부조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독은, 심신(心身)에 흘러 다니게 된다.

그래서 노여움이랑, 괴로움으로 되어 나타난다.

 

우리 그룹의 사람은, 과거세에서 친했던 사람들과,

가령 몇 천 년 전의 친구로 있었어도, 당시의 언어로써 서로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눈물의 해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느 강연회 장에서의 일이었다.

Y.S(33세)가,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그의 백모 미세스 부라운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Y.S는 신리의 강연을 몇 차례 듣고, 생활이 조화됨과 동시에,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포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치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

라고, 자기가 고타마 붓다의 제자,

바라나시의 야사라고 하는 아라한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나도 인도 시절에는, 야사와 같이, 사로몬(수행자)으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청중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당시의 일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

즉 위대한 지혜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 는,

‘내재된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

라는 뜻이다.

 

그리움에,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다고 하는 기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끄럽다는 감정도, 자기 보존이다.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에 거짓이 없으면,

부끄럽다고 하는 심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앞에서, 자기를 꾸미려고 하는 마음이,

 부끄럽다고 하는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자기보존인 것이다.

 

그리고 식욕과 정욕은,  본능과 감정이 작용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짝사랑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인간 본래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과 감정이 불타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사랑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한 것만으로도, 바로 육체로 나타나며, 마음은 불타는 것이다.

이때 우리들의 몸은, 핑크색의 빛으로 뒤덮인다.

후광의 색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이 났을 때에는, 피의 색과 같은, 불꽃같은 후광이 사람들의 몸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의 의식(意識)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족함을 알고, 본능과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 브레이크가, 우리들의 이성(理性)의 영역이다.

 

음식물등은, 배의 80%라고, 약간 모자랄 정도로 먹는 것이 좋은데도,

맛있는 것은, 본능적으로 그만 배의 120% 과식하게 된다.

 

그러나 술이든 담배든, 끊으려고 작심만 하면 끊을 수 있다.

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무르고 관대하기 때문에,

자칫 본능, 욕망대로 살고 싶어 한다.

 

어린 아이들은, 좀처럼 이성도 의지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들 마음속의, 각 영역은, 성장함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의 지성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이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모유나 밀크를 자연스럽게 빨 줄 안다.

이것도 전세에서 식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아도 먹을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함에 따라서, 오관(五官)이 작용하도록 되어, 욕망이 나오는 것이다.

자아의 싹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욕망과 본능의 영역이 눈을 뜬다.

 

그러나 아직 이성(理性)이 잘 작용하기 않기 때문에,

무작정 자아를 관철시키려는 응석을 부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 좋은 환경과 부모 밑에서 편협되지 않은,

중도의 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인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성(知性)은 오관(五官)으로부터 받는 것과 교육에 의해 풍부하게 되어 간다.

 

유치원에 갈 무렵에는, 선악(善惡)의 판단이 조금은 가능해진다.

그래서 친구나 가정의 습관등을

보고 듣는 것에 의해, 스스로의 지성을 닦아 가게 된다.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예의 범절을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한 것도 자식의 마음을 닫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이성의 영역이 연마되어,

우리들의 표면으로 나오는 의식이, 점점 상승하여 가는 것이다.

그러나 표면의식은, 10%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치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여지는, 수중의 얼음처럼,

의식의 거의는 잠재되어, 90%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10%의 표면의식도, 오관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현상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데, 좀처럼 올바른 판단이 어렵다.

자아가 표면으로 나와서 자기 본위가 되어,

그 마음속에는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올바른 중도의 길은, 이 10%의 표면의식의 길잡이기도 되는데,

좀처럼 중도의 길을 지키지 못한다.

자신의 결점의 수정은, 용기와 결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과정에 있다.

우리들은, 이 때문에, 마음과 행위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결점을 수정해서,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가면,

마음속은 항상 원만하고, 살아 있는 기쁨으로서도 자연이 알도록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반(反)하여,

지식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괴물에 홀려,

도리어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팔기도 하고, 욕설을 늘어놓거나 속이기도 하고,,,,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잘 생각해보면, 바보같은 것인데,

지(知)나 의(意)만을 좇아, 신의 자식인 자기의 본성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인격자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편협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서(情緖)를 잃고 살벌한 인생을 보내도 한 세상이요,

항상 족함을 잊어, 욕망대로 살아도 한 세상이며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팔정도의 인생을 걸어도 한 세상이다.

 

그러나 같은 한 세상이라도,

 그 마음의 넓이에 따라서는,,,

말하자면,  대우주의 그릇과, 양귀비씨 정도 그릇의 차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모든 결과는, 스스로의 선한 마음이 재판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행위와 상념은,

자기 자신이 재판하고,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 그룹의 마음의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모양을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표현과 같이

그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그림 설명 :

   마음의 모습은 본래 둥글고 크고 풍선처럼 입체적인 것인데,

   마음의 내부의 기능을 설명하면,

   위의 그림처럼 하면 이해하기 쉽다.

 

   평면도는 마음을 위에서 본 그림인데 원의 중심에 상념이 있고,

   좌우 상하에 본능, 감정, 지성, 이성 의지가 있다.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은 상념대(점선 부분)라고 하는 상념이 기록된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표면의식과 상념대가 정화되면 상념대의 벽이 붕괴되어,

   마음 내부의 잠재의식이 표면의식으로 흘러나와,

   이제까지 배운 적이 없는 과거세의 말이랑 지혜가 생긴다.

 

   마음의 입체도를 보면 알지만, 마음의 근원부는 

   상념을 비롯해서 본능, 감정 등의 각 기능이 하나로 집약되어 있다.

   각기능은 표면의식에서는 각각 다른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데,

   마음의 중심부에 가면 모든 것이 조화되어 

   자비, 사랑, 지혜, 건설, 의무, 책임, 사명이라고 말하는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기자신으로 돌아가

   인간과 대자연의 구조가 이해되고, 신의 자비를 마음으로 받는 것이 가능하다.

   

   우주즉아의 대아(大我)는 마음의 근원부에 표면의식이 연결되어 

   발현된 모습이다.)

 

얼굴과 체격이 다른 것처럼

그 마음의 모양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원점-다카하시 신지-

 

(주;

우리들은 잘 알고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은,

천사의 생활....

이 세상에서 천사의 생활을 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천사라고 말하지요.

실제로, 천사의 생활은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건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천사의 생활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천사의 생활을 하여야

천국에 간다.

극락에 간다.

자기의 마음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자기가 갈 곳이지요.

바로 자기 자신의 목표이지요.

마음에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생활이지요.

자기 자신의 현재의 상태...

그렇게 가도록 신께서 배려하셨지요.

 

자기가 현재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 . .

인연있는 이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카하시 신지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나이다.

참고하소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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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顥釋(호석) | 작성시간 22.04.10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2.04.11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 작성자梵心(범심) | 작성시간 22.04.14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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