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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스크랩] 심안을 열다 ; 제1장 반야에의 길 - 마(魔)에게 지지 마라

작성자오로지팔정도|작성시간23.05.23|조회수88 목록 댓글 1

 

악마에 지지말라.

 

 

1969년 3월, 영적인 현상이 내 집에서 일어난 지 벌써 4년이 됩니다.

신리의 법등은 드디어 전국각지에서 햇불을 들어올린 듯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식으로서 이 지상계에 목적과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은

누구의 마음에도 내재되어 있어,

부조화한 현대사회에도 드물지만, 심금을 울린다면, 당연히 그런 자각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대 고다마 싯달타가 설법한 신리는 바르게 전해졌습니다.

그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음을 잃고,

이렇고, 저렇고 라고 지(知)와 의(意)가 앞질러 가서 학문, 철학화된 것입니다.

신사나 불각의 앞에 가서,

열심히 경(經)을 올리면 인간은 구원받는다고 하는 바보같은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특히 중국에 건너간 후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오랜 기간 유교가 융성했고, 그 때문에 불교도 철학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2세기경이고, 그리고 5세기에 되어 퍼졌습니다.

천태종을 만든 천태지의라고 하는 사람은, 법화경을 남악혜사에게서 배웠습니다.

남악혜사는 매일밤 꿈 속에서 미륵보살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법화경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전수된 것을 진소년, 훗날의 천태지의는,

불교는 행위이고 행위가 없는 신리는 신리가 아니라고 해서,

37세 때, 천태산이라는 곳으로 옮겨, 법화경을 설법했습니다.

당시 경문은 성혼(聲魂)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을 조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운성(韻聲)이라고 하는 법을 채용한 것입니다.

 

8세기가 되면 最登이 중국에 유학해서,

천태산에 8개월 동안 공부하고, 히레산연력사에서 천태종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에 空海가 함께 중국에 건너왔으나

支那海에서 태풍을 맞나, 밧줄이 끊어져서 다른 곳으로 표류하여,

운타이샨이라고 하는 五岱山에서 공부합니다.

2년 가까이 밀교를 일본에 갖고 와서 高野山에 그것을 설법했습니다.

그러나 밀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넓고 밝은 것입니다.

밀교의 원류는 요가이고 자기 혼자만의 자각을 구하는 작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을 상법(像法)시대라고 말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지(知)와 의(意)가 첨가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가르침이 불교화(佛敎化)되어 유교 이외의 것도 모두 불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법의 시대는, 실재의 세계(저 세상)으로부터 빛의 천사가,

일찍이 설명해 온 그 신리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먼지를 청소하기 위해 오는 시대입니다.

말하자면 말법이라고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의 10계는 이미 천 년이나 지나,

모세의 정신은 지(知)와 의(意)로 변해서 마음의 규준을 잃고

10계는 나쁜 인습을 가진 것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지상에 온 것이었으나,

반대로 그 저항을 받아, 신리를 설법하지 못하고,

젊어서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모세의 10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계에서 모세의 협력자로서 보여준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실재계로부터 오는 빛의 천사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일찍이 자신이 설법한 것의 먼지를 제거하러 지상에 태어나지만,

오히려 그것에 재앙을 당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인도의 시대의 고다마가 설법한 붓다*수트라(正法)도 또한 똑같습니다.

지금부터 약 4200년 정도 전에,

이집트에서 설법한 그 신리가 인도에 건너가, 바라문의 경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파니샤드, 베다가 그것으로, 역시 철학, 학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고다마 싯달타는 그러한 오래된 악습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명을 갖고 실재계에서 지상에 태어 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빛의 대지도령은,

오랜 인습이 계승되고 있는 환경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습에 질질 끌려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제3자의 입장에 서서,

그 속에서 인생에 대한 의문을 찾아내서,

마침내 파라미타(佛智)에 눈 떠, 중생을 인도해 가야 하기때문입니다.

 

정법이 나올 때는, 문증, 이증, 현증의 3개를 갖고 나옵니다.

그리고 방황하고 있는 중생에게,

인간으로서의 사명과 목적을 깨우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정법이 유포되어 갈 때에는 반드시 악마라고 하는 것이 경쟁합니다.

방해를 합니다.

정법이 유포되면 그들의 지상에서의 이른바 생활의 장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두운 세계에서 지상으로 인간으로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을 통해서, 그 욕망을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 좋으면 옆사람은 어떻게 되도 좋다고 하는,

그들의 그러한 상념은, 현재 이 경제사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자의 독점, 기업본위, 노사간 투쟁, 게으르고 태만함, 공해 등등.

우리들은 마왕이 함부로 날뛰는 것에 져서는 안됩니다.

 

고다마가 자신을 깨닫기 직전에 파피아스 마라가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고다마의 마음을 교란하고 혼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고다마가 깨달아, 인간은 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고다마의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게 되어,

싸움, 불신, 독점, 배신 등 그들은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그 후에도, 고다마의 교단 내부에서 암약을 거듭합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 숨어들어가, 수단을 바꾸고 종목을 바꾸어, 계속 흔들었습니다.

 

예수의 시절도 그렇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유다의 반역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 이전부터, 여러 가지 방해가 예수의 신변에서 일어나,

항상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외부에서의 직접 공격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이번에는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나,

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교란되어 갔습니다.

 

마계에 사는 저 세상의 지옥령은,

일단 그 수렁에 빠지면,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항상 고뇌로 애가 타고, 초조와 배신의 사이에서 신음하고,

빈틈이 있으면 인간의 마음에 침범해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채우려고 약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정법은 큰 적입니다.

정법이 지상에 침투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지상에서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

즉, 그들은 지상에서의 생활의 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물질계는, 빛과 그림자의 양면을 가지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계의 숙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마음도 빛과 그림자가 투영되도록 만들어져,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마음은 어디에라도 통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양쪽을 합쳐서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천사같은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룻밤에 악마의 지배하에 놓이는 일마저 있습니다.

육체인간은 그 의식의 10%밖에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무심코 하는 대화 속에 숨어 듭니다.

『큰일이네요, 그렇게 일해서 몸이라도 병나면 어떻게 합니까. 부인이 불쌍하네요.』

남으로부터 듣고, 그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사람은

『그런가? 지나치게 일하고 있나? 아내가 불만을 품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일을 그만두고 세상사를 보는 자세를 바꾸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솔직한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도 나옵니다.

 

악마는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를 향해서 항상 흔들리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면,

많은 사람들은 방황하는 괴로움에,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이고 맙니다.

 

악마를 이겨내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중도의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도의 마음은 대자연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양의 열, 빛에 강약은 없습니다.

공기에 증감이 없습니다.

하루는 밤낮의 구별이 있고,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상에 생명이 살 수 있고 조화라고 하는 환경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정법의 목적은 중도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육체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먼저 세상사를 보는 자세부터 중도에 맞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의 입장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놓여진 입장을 고집하고, 욕망대로 보는 습관을 갖고 있어서는,

악마의 지배하에 놓여지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연이 가르치는 정법을 척도로 한,

바르게 보는 태도, 판단,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법이란 대자연이 가르치는 중도의 신리이고,

일체의 척도는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명기(銘記)해야만 합니다.

 

(이 원고는 지난 74년 4월 1일 忍岡중학교 강당에서의 강연 요지)

 

 

 

심안을 열다 - 다카하시 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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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3.05.24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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