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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스크랩] 반야심경(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다카하시신지

작성자오로지팔정도|작성시간23.08.22|조회수86 목록 댓글 1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 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여래라 불려지는 상단계,

빛의 대지도령들은, ‘우주 즉 아’의 경지에 도달해 있습니다.

따라서, 전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깨닫고 있고,

---------

 (주; 동시대에 태어난 동기생으로..

     영혼의 세계에서 , 이 세상으로 다시 윤회하여 태어날 때는,

     천사들이 이 세상에 다시 올 수 있으며,,

      어두운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은 불가능합니다..)

---------

자비와 사랑의 덩어리입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신의 마음을 중생에게 가르쳐,

중생을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재계(4차원 이상의 세계... 주; 비물질의 변함없는 세계. 공의 세계)와.

현상계(3차원의 지상계... 주; 무상(無常)의, 물질이 변화 변멸하는 색의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지도자군입니다..

 

직역하면,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하다고 조견 하고,모든 고액을 없앤다”.

 

라고 하는 것이 되지만,

이렇게 해서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붓타가 인도에서 법을 설파하던 시기에.

 바라몬 교의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경전에 나오는 말로써,

 ‘아포로키디슈바라’라고 표현되었고, 간결하게는 ‘슈바라’(깨달은 이)라고만 부르기도 합니다.

 

보살이란.

 ‘보삿타’라고 하는 말이며, 깨달음의 단계를 말합니다.

보삿타의 단계에서는,

 완전히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는 자애가 충만하여, 중생구제를 위해서는,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구제하는 분들로서,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경지에 있는 분들입니다.

 

조금 부족한 부분을 말하자면,

 자신의 몸에 걸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꾸미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은 없고,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정도라 할 수 있겠지요.

 

불상을 보면,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보살. 기타 다른 제 보살들은

 목걸이나, 왕관 등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여래’ 라 불려지고 있는 상단계 빛의 대지도령들은,

 ‘ 우주 즉 아’

   의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몸에 걸치는 의복 등에 집착은 없고,

  ‘전 인류는 모두 형제이다’.

   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자비와 사랑의 덩어리인 분들입니다.

 

그들은 , 모든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신(神)의 마음을 중생에게 가르치고,

 중생을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할 사명을 가지고 ,

 활약하고 있는 상단계 빛의 대지도령들입니다.

 

말하자면,

 실재계(주; 영혼의 세계. 공의 세계)와

 현상계(주; 육신의 세계. 색의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지도자군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타마 싯달타. 예수 그리스도. 모세 가

 아가샤계의 가장 우수한 지도자군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지도령에게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이.

 윤회의 실상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생(生)과 사(死)의 방황으로부터, 해탈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육체를 가지고 현상계에 나와 있는 대 지도령은,

 스스로의 생활 속에서부터, 인생에의 의문을 가지고,

 마침내 깨달음을 열고,

 관자재력을 얻어,

 실재계에 있는 대지도령이랑, 빛의 천사들의 협력을 얻어,

 마음을 잃은 지상계의 중생에게 신리(神理=신의 이치)의 씨앗을 뿌리고,

 유토피아에의 길을 열어 가는 것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에, 빠지지 않는 분들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몸을 일으켜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고타마. 예수.

두 분이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 할 때’. 

 라는 것은.

 

“ 내재된 위대한 지혜에 도달하기 위한 생활 행위를,

    깊이 실천했을 때....”

 

라고 말하는 것이 되지요.

관자재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현상을, 자유자재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깨달은 분으로서,

 자비와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활약하고 있는, 넓고 풍부한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처럼 위대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도, 범인의 마음속도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본 모양, 형태.

 귀로 들은 이야기나 소문.

 그런 범위에서  바로 사람도 사물도,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차원에서 평면 사고로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차원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X 축 Y 축 Z 축을 연결한

 3차원의 세계입니다.

즉 우주공간을 포함한 입체의 세계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요.

1차원의 세계는 저차원이기 때문에, 3차원의 세계로부터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의지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3차원 이후의 4차원의 세계도,

3차원의 오관(五官)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마음의 양식으로 해서, 매일의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에는,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세계에 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4차원을 통해서, 3차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차원 이후는 의식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1차원에서 2차원,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연속되어 있는 것처럼,

 4차원 이후의 의식계도 연속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들의 육체와 공존하고 있는 의식은 ,

 고차원과 연속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고차원이 되면, 저차원의 모든 실상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타인의 마음속도, 저차원에 있으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3차원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의식의 발달이 조화되어, 고차원이 되면,

 육체주(肉體舟)에서 하선한 죽은 사람들과 통신이 가능하고,

 그 활동 상태도, 아는 것입니다.

 

죽음은, 육체주와의 영원한 이별이고,

 그 혼 의식(魂意識)은 3차원 이후 다차원의 세계에 적응한 육체(광자체)를 가지고,

 인생체험의 일체를 기억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

(주;

    보통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들 하는데,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입니다.

    육체에 관계된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소용없는 것들로서,

   ‘끝’입니다.

   하지만, 정신에 관계된 모든 것들은 하나도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물건 버리듯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육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영혼의 세계로 돌아갈 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기억(생각과 행동)을

   일점일획도 버리지 못하고, 가져갑니다.

   또 흔히들..

   마음을 비운다고 쉽게 말을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비우는 것이 아니고, 바꾼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절망을 하지 마라.=> 희망을 생각하라.

    많이 생각해 볼일이라고 생각하나이다..

    인연 있는 이여,

    ^_^ )

 

---------

생명 불멸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3 태에 대해서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3 태는 기체, 액체, 고체입니다.

 

내가 말하는 대우주의 순환설은 ,

 혼은 광자체를 가지고,

 실재계(주; 영혼의 세계. 공의 세계, 사념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며,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육체가 멸하여도 , 그것은 형태의 소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혼(魂)은 불멸입니다.

다만, 실재계에서는,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서, 빛의 양이 다르고,

 그 양에 비례한 세계가 각각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주;

    영혼의 세계의 구조는

    수면의 깊이에 따라서 빛의 양이 차이가 나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워집니다.

    스스로에게 맞는 밝기의 세계로

    스스로의 걸음으로 찾아가는 법칙

    예외라곤 없는 정확 무비한 법칙

    바로 신의 심판!

 

    예를 들자면,

    자기 눈에 너무 밝은 빛은 눈이 부셔서 괴롭지 않습니까.

    자기 눈에 편안한 밝기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신(神)의 심판=법칙

    가벼운 것은 떠오르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는 법칙

    끼리끼리 만나는 유유상종의 법칙,

    마음이 서로 같아서 딱 들어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법칙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옥으로 가는 것은 누가 억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오히려 신의 따뜻한 배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제가 꿈에서 가는 곳은 까만 곳입니다.

      빛이 희미한 곳... 내가 돌아가는 곳일 겁니다.

     꿈에 보는 분위기가 밝은가, 어두운가는, 내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

지옥과 천상계의 존재.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주; 수면 위의 밝은 세계는 천상계... 수면 아래의 심연은 어두운 지옥...)

-------

사리사욕, 자아아욕이 강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 상념에 흐림을 만들고,

 그 (흐림)때문에 육체주와 동체가 되어 있는 광자체는,

 신의 빛이 가리어져서, 어두운 영위기로 뒤덮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지옥계에 떨어져 갑니다.

거기에서, 죄업을 속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

    눈이 감당하지 못하는,

    빛이 밝은 곳에서는 눈이 부셔서 괴로움을 느끼듯이,

    마음의 상념의 흐림의 정도에 따라.

    눈을 뜬 정도에 따라서,

    자기에게 알맞은 곳으로 찾아가게 되어있는 것이 영혼의 세계의 법칙...

    마치 물고기가 자기에게 알맞은 수심을 찾아가듯이..=신의 심판.)

--------

죄업을 속죄하는 방법은,

 신의 자식으로서 행해야만 하는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마음으로,

 반성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과 행위의 잘못을 수정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으로

 “행(行)”이라고 하면,

 곧 엄격한 육체 고행을 상상하나.

 그래서는 마음을 잃고 말아서,

 깨달음에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붓타도, 양극단의 수행을 버리고,

 팔정도를 마음의 기준으로 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아포로 키디 슈바라’ 가 되었던 것입니다.

 

‘ 도피안’이라고 하지요.

‘지혜의 보고를 열게 한다.’

그 길이야말로 ,

  반야심경의 근본인 것입니다.

 

(원설 반야심경-다카하시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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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3.08.22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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