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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법화경』, 일본이 엉터리 번역하고, 영역(英譯)하여 방류하고(4) - 오역의 쓰나미

작성자나성거사|작성시간23.09.22|조회수27 목록 댓글 0

『법화경』, 일본이 엉터리 번역하고, 영역(英譯)하여 방류하고(4) - 오역의 쓰나미

 

“舍利弗 若我弟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 此非佛弟子 非阿羅漢 非辟支佛

又舍利弗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阿羅漢 是最後身 究竟涅槃

便不復志求阿褥多羅三藐三菩提 當知此輩 皆是增上慢人

所以者何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不信此法 無有是處

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이 경문 역시 <方便品 第 二>에서 볼 수 있다.

 

첫째,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

필자가 앞에서 뜨거운 이슈라 칭했던 바로 그 문구가 이 부분에 쓰나미가 되어

다시 등장한다.

모름지기 부처가 하는 일은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보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즉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아라한을 성취했다느니, 벽지불이니 하면서 거들먹거리지 말라, 라고 제자들을 향해

호되게 질타하시는 그림이 이 경문의 앞부분이다.

 

<但敎化菩薩事>, 다시 말해, 오로지(但)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펼쳐(敎) 보살이 되게

하는 것(化菩薩)이 부처가 이 세상에 몸을 드러내서 하는 역할(事)이다, 라는 말씀이다.

 

오로지 보살만을 골라 가르치기 위해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라는

일본 불자들의 번역을 만약 구마라즙법사가 보았다면 뭐라고 말할까?

또 석가모니부처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둘째, <是人難得>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혹은 찾기가) 힘들다>

 

이 번역문은 코세이 번역을 비롯한 거의 모든 번역서(아마 전부일 것이다)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런 사람(是人)>이라함은 <법화경과 같은 경을 수지, 독송, 해의하는 사람>임을우리는 다 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자.

수지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가?

독송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가?

해의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가?

 

현재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여기서 글자 <得>은 <~의 의미를 알아챈다> 또는 <이해한다>는 뜻이다.

(가지고 계신 한자사전을 참고하시라.)

다시 말해, 법화경과 같은 경을 수지, 독송, 해의하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그 사람이

법화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다, 는 것이 바로 <是人難得>이라는

네 글자가 뜻하는 바다.

 

왜 그런 사람이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다른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직접 받게 되면, 그때 그 뜻을 바로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이어진다. 앞 경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出現於世>하여 직접 가르침을

펼쳐야만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除佛滅度後 現前無佛>이하의 경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가 멸도한 후, 한 분의 부처님도 면전에 계시지 않으면

경우가 다릅니다. 왜 그런가.

부처가 멸도한 후에는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불승을 깨닫기는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처님들을 만나 뵐 기회가 있다면, 일불승에 대한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방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면전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보면

이천 오백년 전의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는 게 나성거사의 생각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일본 코세이 출판 영문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 영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한글법화경 그대로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Shariputra, if any of my disciples who call themselves arhats

or pratyekabuddhas neither hear nor understand that all of those

whom the buddha-tathagatas teach and transform are bodhisattvas,

then they are not the Buddha's disciples, they are not arhats,

and they are not pratyekabuddhas.

 

"Moreover, Shariputra, if those monks and nuns say that they

have become arhats, that is their last lifetime, and that they have

attained ultimate nirvana and as a result do not further aspire to

Supreme Perfect Awakening, you should know that all such as these

are the prideful and arrogant, for there is no such thing as a monk

who, not believing this teaching, has truly become an arhats.

 

"The only exception might be in the period following one buddha's

extinguishment and before another buddha's appearance. Why is

this? After a buddha's passing, it is difficult to find anyone who will

receive, embrace, read, and recite such a teaching as this and

understand it's meaning. Should they meet another buddha, they could

then, within this teaching, attain decisive under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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