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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스크랩] 제3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불지(佛智)의 재발견)-2.중도는 어디에 있는가.-다카하시 신지-

작성자오로지팔정도|작성시간23.09.24|조회수71 목록 댓글 1

제 3 장 마음의 원점

 

2.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의 강연회는, 매 토요일과 일요일 각지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질문자도 많아졌다.

그 중에서, 특히 알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올바르다.’

라고 하는 기준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대학생이 물은 것이었다.

 

올바르다는 것은,

그 나라마다의 지도자의 생각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고,

생활환경에 따라서도 그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올바르다는 것은,

권력이나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법칙 속에,,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복잡하게 생각하므로, 도리어 어렵게 만들고 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형편에 이로운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선악의 구별 없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다는 것도

올바른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 특히 자비마)

 

선(善)은 선(善),

악(惡)은 악(惡)으로서, 

매듭을 분명히 짓는 행동이 아니고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자기의 입장을 중심으로, 노여움이나 원한의 상념을 마음에 숨긴 채, 

겉으로만 상대방을 위하는 행동으로, 위장하고 있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듯,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말 것이다.

 

진실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개고, 평화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입장에 집착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보존으로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는 형식만의 위함은, 괴로움을 낳을 뿐으로,

마음의 짐은 배로 무거워질 뿐이다.

 

자기보존도, 자아아욕(自我我慾)도,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상대방이라고 하는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일방적인, 한편으로 치우친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올바르다”

는 것은, 한 쪽으로 기울지 아니한, 중도의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모든 타인을 포함한 조화된 생활이,

 만물의 영장인 인류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이다.

 

편협되지 아니한 중도란, 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의 육체 보존에 없어서 안되는 물은, H2O라고 하는 분자식으로 표기 된다.

H2인 수소도, O2인 산소도,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공기 중에 산소나 수소가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O2인 산소는, 모든 것을 산화시키고 연소시킨다.

H2인 수소도, 애드벌룬이나 기구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바테리의 충전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폭발력이 강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연성, 폭발력이 강한 것이지만, 조화되면,

H2O라고 하는 가장 안정된 물이 된다.

더욱이 불타고 있는 것을, 소화(消火)시킬 수도 있게 된다.

 

물에는 산성분이 강한 것과, 알카리성의 것이 있으며,

증류수는 그것이 중화된 아름다운 물이다.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적응될 수 있는 것은, 

 가장 중화되어, 양극단과는 무관한 물이 좋다.

체질이 산성분이 강한 경우에는, 

알카리성의 물이나, 매실장아찌같은 알카리성 식품을 먹음으로서,

체질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신체를 보면, 물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생물에게, 물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어머니인 대지를,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와 함께, 적당한 온도로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어떤 때는, 얼어붙어 은세계를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유동하여, 대지의 청소자가 되어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대자연에 조화되어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은자(忍者)처럼 기체가 되어 모습을 감추고

하늘 저편에 집을 짓고 있다가, 이따금, 먹이를 사냥하듯 대지로 날아든다.

변화 자재의 힘을 지니고 있다.

 

대지의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모체의 혈액과 같이 수맥을 이루어 내닫고,

어떤 것은 모체의 열에 데워져 지상으로 분출하여, 

 사람들에게 온천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샘이 되어 흘러나와, 아름다운 실개천을 만들고,

스스로 많은 친구와 교제하고, 스스로 진로를 정해간다.

 

친구는 친구를 불러,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내(川)가 되어, 도시와 마을 근처를 아름답게 흘러간다.

먼지와 오물을 삼키면서 대하를 이루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서 대조화에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물이다.

 

하늘과 바다의 조화됨에 따라, 다시 깨끗한 물이 된다.

스스로 길을 찾아, 스스로 조화 속으로 녹아들어,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것이 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대기의 오염 때문에, 

 그 깨끗한 물이 지상을 오염시키는 사태를 맞고 있다.

 

우리도 마음을 잃으면,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행동이 없는 실천은, 가공(架空)의 원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다.

 

자연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로를 정하여,

대조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물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고 생각 한다.

인간은, 물과 같은, 용기도 지혜도 노력도 없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결점에는 눈이 어둡고

타인의 결점에 대해서만은, 유독 눈에 심지를 세우기 쉽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억눌러 이기는 극기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까.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부조화한 모든 현상을 제어하고,

스스로의 귀에 들어오는 잡된 소리를 제어하고,

자기의 편의만을 입에 담는 것을 억누르고, 후각과 미각의 유혹을 제어하고,

 일체의 집착을 끊고, 족함을 안다면,

인생항로의 거친 파도는 잠잠 해 질 것이다.

평안이 깃든 광명에 찬 대해 속으로, 조화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설령 대해(大海)에 대조화되는 물도,

 그 개(個)의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들, 각자(個)의 생명의 존재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의 흐름마저도,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올바른 마음의 가르침을,

강가강의 흐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처럼,

내재된 의식을 열었을 때,

“올바른”마음의 가르침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물에 대해서는 말했는데,

 NaCl(소금)은 또 어떠한가.

이것도, 생물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다.

서로 양 극단에 있는 NaOH(수산화나트륨)의 염기성분과, 

 HCl(염산)의 강산성의 염산이 화합하여,

 중화되어 조화된 소금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단맛과 매운맛도 소금넣기 나름,,, 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단맛과 매운맛의 양극단도, 소금에 의해서 중화되어 버린다.

고기나 야채 따위가 썩지 않도록 이용되며,

우리와 끊으려해도 끊을 수없는 연(緣)의 의하여, 묶여 있는 것이 소금이다.

 

또한 악귀를 쫓고 액을 물리치기 위해서, 소금을 뿌리는 습관도 있다.

이와 같은 습관은, 중화(中和), 조화가 근본이지만

최근에는,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사람한테도 소금을 뿌리곤 한다.

뿌리는 형식보다, 마음가짐 쪽이 더 반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뿌리는 사람은, 좀체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맑게 한다는 것은, 조화한다는 뜻이다.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소금을 뿌리기 전에,

사람끼리 서로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탐지하려 들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자기의 결점도 장점도 드러내 놓고,

 중도의 마음으로, 상대방도 자기 자신도 올바르게 보는 것이,

 조화로 가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쌍방이 편협되지 않는 판단과 행동,

이것이 중도이며,

대조화에로의 길로 통한다.

 

하물며 권력이나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여도,

일시적인 겉만의 조화는 이룰지라도, 결과는 혼란을 낳을 뿐이다.

육체적인 행동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중도의, 조화된 환경은 이루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아무리 제약이 가해지더라도, 

 선장인 그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속에서 납득 된 것이, 외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참된 조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의 의사(意思)인 대조화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열, 빛의 일체,

대자연의 조화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모습이고

사랑의 모습이며

신의 마음의 현현이다.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법화경의 방편에도

진흙의 늪에 피는 연꽃이 인용된 것처럼,

대자연은 항상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승은,

소금의 상태를 통해서도, 

중도의 조화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원점-다카하시 신지-

 

(주;

연꽃의 비유를

‘진흙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의 깨끗함을 배우라,’

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르침의 올바른 해석이 아닌,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막연한 말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배우는 것인가이다.

 

진흙은 육체이며,

연꽃은 혼.

진흙 속에는, (코딱지, 눈꼽처럼 더럽지만)

연꽃의 성장에 필요한 성분과, 필요하지 않은 성분이 있다.

그 속에서 필요한 성분(=올바른 기준)을 흡수하여, 성장하고,

연꽃의 향기를 만들어 내고. (올바른 기준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즉 올바르게 보지 않아서 생기는 번뇌는

올바르게 보는 순간 기쁨으로 바뀐다.(= 팔정도의 정견=번뇌즉 보리)

그리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주는, 진흙에 감사하는,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살수 없지 아니한가.)

육체는 코딱지, 눈꼽처럼 더럽지만,

육체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저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육체에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체의 유지를 도와주는 주변의 만생만물들에게도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감사하라 ,,,라고 해서는

억지로 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

내가 태어났을 때의 지구상의 인구는,

수십억이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은

지구상의 인구중에,

약 70%이상이 저세상으로 돌아갔지요.

앞으로 30~40년이면,

거의 모든,

(내가 태어났을 때, 지구상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저승으로 돌아가 있을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육신에게 감사하며,

열심히 수행하여,

저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돌아가야 할,

그래서 서두를 필요는 없는)

다시 만납시다.

물론 만나려면, 밝은 세계로 가야 하지요,

어두운 세계에서는 생각이 나지도 않거니와,

만날 수 도 없답니다.

어두운 세계에서는 행동의 폭이 좁아서,,,

(자살자가 가는 세계는 완전 암흑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괴로움의 세계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이유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 . . .

어렴풋하게 느낌이 오네요. . . .

인연있는 이여,

^_^

자비와 자비마에 대하여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날 힘이 없어 버둥거리는 사람을 돕는 것은 ; 자비

일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을 돕는 것은 ; 자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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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마을(전법심) | 작성시간 23.09.25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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