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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불교의 장

[경전]무량의경 덕행품 해설2

작성자處染常淨(처염상정)|작성시간05.03.11|조회수158 목록 댓글 2
다음은 대장엄보살(大葬嚴菩薩)께서 참석자 일동의 마음이 가라앉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가짐이 확실히 이루어진 것을 보고 많은 보살들과 함께 조용히 일어나, 석가모니 세존을 경배하고 여러 가지로 공양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게송을 읊으며 세존을 찬탄합니다.

요컨대 대장엄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하신 이 대목은 지금까지 지혜의 면에서만 파악하던 <반야심경>의 ‘수냐타’ 즉 공의 성질을 생성, 유지, 붕괴 등 세 가지 면에서 종교적으로 파악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이 ‘공’을 연기(緣起)의 측면에서 철학적. 과학적.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집착을 여의도록 시도 했다면, 이 <무량의경>의 이 대목은 철학과 과학을 지양한 종교적 차원에서 파악한 것으로서, 우주의 실상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바를 다른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함이 옳을 것입니다. 즉 법신, 다시 말해 우리를 살려 주고 있는, 이른바 우리를 존재케 하는(유지시켜 주는) 대생명(大生命)을 찬미한 것입니다.

우주에 실재하는 것이 오직 법신이라면 ‘법신’은 생명력이며 그 생명력은 ‘자비(慈悲)’입니다. 우리는 ‘법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며 만일 ‘법신’을 떠나면 현상계에서 사라져가고 말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법신’을 ‘대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는데 필요한 것은 생명의 유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력, 아니 살게 해주는 생명력, 우리들을 살려주고 있는 생명력, 다음의 생을 받도록 파괴시키는 그 자체도 또한 후생(後生)을 위한 생명력이므로, 그 생명력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렇듯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역사적 실재 인물로서의 석가모니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절대진리 다시 말해 우리들을 살려주고 있는 대생명을 인격화하여 말한 것입니다.
즉, 진리를 인격화한 것이 바로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의 법신인 것입니다.

대장엄보살은 계속하여 부처님의 보신(報身)과 응신(應身 또는 化身)에 대해 찬미의 시(게송)를 읊고 있습니다. 즉 현신(現身, 나타내신 몸)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완전한 덕을 찬탄하고,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은 훌륭한 덕을 완성하셨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동안의 갖가지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며(戒定解知見生 三昧六通道品發) 그로 말미암아 얻어진 자비와 지혜로써 거리낌 없이 가르침을 펴시는 위대한 힘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중생의 한 사람으로서 선업을 쌓은 인연에 의한 것입니다.(慈悲十力無畏起 衆生善業因緣出)’

여기서 새삼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정의(定義)가 요구됩니다. 부처님이 부처님으로 추앙되고 존경받으며 섬겨지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보신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우리들은 다 같이 우주의 실상이 나타났음에 있어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합니다. 즉, 인간 싯다르타(悉達多)도 법신에 의해 나타났고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법신에 의해 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타남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오직 싯다르타만이 깨달은 분, 즉 지혜를 완성한 분이시고 우리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미혹한 중생입니다. 그 위에 싯다르타는 이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의 원리와 법칙(理法)에 따라 선업을 쌓았기 때문’에 비로소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되는 요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주의 이법에 따라 선업을 쌓는 것’이니, 이를 가리켜 ‘보신’이라 합니다. 즉 선업을 쌓은 ‘보답(報)으로 받은 몸(身)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적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때, 이는 ‘부처님도 원래는 중생이었다.’라고 하는 것으로, 그 배후에 ‘부처님과 중생은 다 같이 평등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중생도 수행함에 따라 덕과 행이 갖추어지면(報身)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불교, 특히 <법화경>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커다란 사상이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가진 최고의 목적은 부처님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도달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무엇이 부처가 되는 길인가를 똑똑히 설파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니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나타내신 몸, 즉 응신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얼굴(容顔)과 신체에 대한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의 모습(三十二相)"의 거룩함을 찬탄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결국 수행에 의해서 얻어진 내적인 완전한 인격, 즉 덕이 외적인 색신(色身)에 나타난 것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으로, 보신의 거룩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찬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훌륭한 모습(妙相)을 갖추신 분이시나(앞서 말했듯이) 실재에 있어서는 모습(相)을 나타냄과 나타내지 않음을 초월한 존재이시므로 차별의 세계, 즉 현상계만 보도록 되어 있는 우리 인간의 눈을 가지고는 도저히 그 본질을 볼 수가 없습니다.(而實無相非相色 一切有相眼對絶)

‘상(相)이 없는 상(相)으로서 상(相)이 있는 몸이요(無相之相有相身)
중생들의 신상(身相)의 상(相)도 또한 그러함이라.(衆生身相相亦然)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환희(歡喜)로 예배(禮拜)케 하고(能令衆生歡喜禮)
마음을 다하여 공경함을 나타내어 정중함을 이룩함이라.(投心表敬成慇勳)
이는 스스로 높다 하는 아만을 없이하신 인연으로(因是自高我慢除)
이 같은 묘한 색(色)의 몸을 성취하심이라.’(成就如 是妙色軀)

‘중생의 본질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나, 중생과 부처님은 모습을 가진 몸으로 나타날 적에는 완전히 모습을 달리합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무한한 덕을 갖추시고 출현하시며 겸하여 그 덕을 자태에다 나타내 주시니, 많은 사람들이 환희하고 예배드리며 귀의하고 존경하여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러 받들며 섬기게 됩니다. 더욱이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셨지만 이로써 만족하다는 마음을 일으키시지 아니하시며 묵묵히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셨기 때문에,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를 성취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실제에 있어서는 모습(相)이 없으신 몸이시건만 모습을 가진 몸으로 출현하여 주셨음을 우리들에게는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 놓쳐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두 군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중생의 모습도 본질적으로 부처님과 꼭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님과 동체이지만, 수행이 부족하고 미혹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많은 부처님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추하고 빈약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애당초 본질적으로 부처님과 중생이 동체라면 현상으로 나타남에 있어서도 역시 부처님과 동일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희망, 즉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자기가 덕과 수행을 쌓았는지에 대해 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법화삼부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러한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본질 평등상(平等相)’과 현상 위의 차별상(差別相)‘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모습을 가진 몸으로 출현하여 주셨음은 우리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이 세상에 나오셔서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신 결과 그처럼 완성된 인격(德)을 갖추셔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신 생생한 실례(實例)가 있음으로, 우리들은 오로지 그분이 하신 그대로, 또는 그분이 가르치시는 그대로 좇아가면 될 뿐입니다. 석가세존께서 그렇게도 힘들게 도달하신 과정보다는 훨씬 쉽게 부처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에, 바로 이 점에서 석가세존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데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존께서 긴세월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수행하시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어떤 고통도 견디고, 모든 것을 버리며 오직 중생을 구하기 위해 진력하셨던, 그래서 결국에는 큰 지혜를 성취하여 그 지혜의 힘으로 중생을 깨닫게 하여 주신 ‘하기 어려운 일에 힘써 주신’ 그 노력에 귀의합니다. 라고 맺고 있습니다.
대오대성주(大悟大聖主)가 되신 세존의 ‘결과’를 칭송한 마지막 부분에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즉 그 ‘노력’을 칭송한 것이야말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환희를 품고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대해 예배드리며, 그분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지켜나감으로써(受持)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본체, 즉 대생명 속으로 서서히 용해되어 들어가 우주의 실상인 대생명과 한 몸(一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당시 부처님이신 석가세존께서 때와 장소에 따라 미숙한 근기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인용하셨던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아미타불 등도 사실은 이 품에서 말하려는 올바른 부처님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 즉 비유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비로나자란, 태양을 말한 것이고, 아미타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를 말한 것인데 이는 이름만이 비로자나이며 아미타이지 실재로 어떤 존재(相)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무량의경>은 지금까지 설하셨던 모든 가르침, 즉 <화엄>,<아함>, <방등>, <반야> 등의 모든 가르침을 한곳으로 모아 통일케 하려는 뜻에서 설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해설은 ‘법화경이야기’의 저자 혜경스님의 해설을 인용한 것이며, 앞으로도 여기에서 많은 인용을 따올 예정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범우사에서 발행한 ‘법화경이야기’ 책을 권해드립니다.
많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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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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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후의일념 | 작성시간 05.03.05 네, 감사합니다.
  • 작성자수화 | 작성시간 05.06.26 아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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