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드라마, 그리고 한바탕 봄꿈
세월이 강물이라면 사람은 그 위에 잠시 떠가는 나뭇잎인지도 모른다
.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떠내려가다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물길은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다.
가끔은 중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남녀공학 교실이었다. 창문으로는 먼 산이 보였고 운동장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칠판에는 분필가루가 날렸고 난로 위 도시락에서는 김치 냄새가 피어올랐다
.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다.
나는 어린 여동생들과 자취를 했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이야기다.
버스는 하루에 두 번 다녔다.
놓치면 끝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시골집으로 갔다가 다시
월요일 학교에 가야 했다. 쌀 한 말을 지게처럼 등에 지고 한 손에는 김치단지를 들었다.
어린 몸으로는 벅찬 무게였지만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일요일에 버스가 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러면 마흔 리 길을 걸었다.
산길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읍내까지 걸어 나왔다.
겨울이면 찬바람이 얼굴을 베어 갔고 여름이면
등에 맨 쌀이 땀에 젖었다. 길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그 힘든 길을 걸으며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젊음은 가난보다 강했다.
미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눈부셨다.
아버지는 우마차에 나무를 싣고 오셨다. 우리는
그것을 쪼개어 아궁이에 넣었다.
젖은 나무는 연기를 토해냈고 방 안은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매워서 우는 것인지.
삶이 고달파서 우는 것인지.
어린 마음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시절 기억 속에는
고생보다 설렘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교실 건너편 창가에 앉아 있던 여학생.
체육시간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던 모습.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가슴이 뛰던 순간.
그런 것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바지는 다림질을 해서 날을 세웠다.
무릎은 이미 불룩 튀어나왔고 옷은 남루했지만 마음만은
서울의 영화배우 못지않게 멋을 부렸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온다.
꿈이 현실보다 컸던 시절.
상상이 세상보다 넓었던 시절.
가난한 하숙방에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과학자가 될 수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다.
청운의 꿈이라는 말은 그때를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마술사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모두가 늙어 있었다.
교실을 가득 메우던 소년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토록 아름답던 얼굴들은 주름이 되었고.
검던 머리는 흰 눈처럼 변했다.
운동장을 달리던 다리는 지팡이를 짚고.
사랑을 꿈꾸던 눈빛은 먼 하늘을 바라본다.
동창회에 가보면 더욱 실감난다.
이름표를 보아야 겨우 알아본다.
누구는 손주 자랑을 하고.
누구는 병원 이야기를 한다.
누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몇 년 전까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어느 날 부고장 속 이름이 되어 나타난다.
그 순간 세상은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우리가 함께 뛰놀던 운동장은 아직 남아 있는데.
우리가 함께 웃던 교실도 아직 있는데.
사람만 사라진다.
김삿갓이 살아 있다면 아마 웃으며 말할 것이다.
"인생이란 본래 객지의 주막 같은 것."
잠시 들러 국밥 한 그릇 먹고 가는 길손일 뿐이라고.
봄날 피는 꽃을 보아라.
그토록 화려하게 피지만 며칠 지나면 바람에 흩어진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젊음도.
권력도.
재산도.
명예도.
모두 바람에 날리는 꽃잎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꽃은 떨어지기에 아름답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라면 누구도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소중하다.
언젠가 모두 떠난다는 사실이 오늘을 빛나게 만든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중학교 운동장에 서 있다.
친구들이 공을 차고 있다.
교실 창문에서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운동장 끝에는 젊은 아버지가 서 계신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짓고 계신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거기 있다.
모두가 살아 있다.
모두가 웃고 있다.
저녁노을은 붉게 물들고.
산 너머에서는 종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안개가 피어오른다.
친구들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학교는 구름처럼 흐려지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바람결에 흩어진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그때 문득 깨닫는다.
인생이란 어쩌면 긴 꿈이었다는 것을.
태어나는 순간 꿈속으로 들어왔고.
죽는 순간 다시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
성공과 실패.
사랑과 눈물.
모두 한여름 밤 반딧불처럼 잠시 빛나다 사라진다.
그래서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본다.
흰 구름은 천천히 흘러가고.
저녁 바람은 나뭇잎을 흔든다.
어디선가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듯하다.
쌀 한 말을 등에 지고.
김치를 들고.
먼 길을 걸어가던 그 소년.
그 아이는 늙지 않는다.
세월은 몸을 늙게 할 수는 있어도 추억까지 늙게 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결국 그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사라진 것들은 기억 속에서 다시 꽃이 된다.
그리고 그 꽃들은, 봄날의 벚꽃처럼 잠시 피었다가 흩날리며 말한다.
"잘 살았노라."
"참으로 짧았으나 아름다운 꿈이었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