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내어린 시절

작성자이규철|작성시간26.06.12|조회수24 목록 댓글 0

내어린 시절엔

 

눈이 오기 시작하면 세상은 조금씩 사라졌다.

 

 

처음에는 마을 어귀가 보이지 않고, 다음에는 논두렁이 사라지고, 며칠 더 지나면 산길마저 눈 속에 잠겨 버렸다. 

 

어린 내게 겨울은 계절이 아니라 고립이었다. 세상과 이어지던 길들이 하나둘 끊어지고 나면 우리 집은 마치 흰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았다.

 

밤이면 바람이 산등성이를 넘어와 처마 끝을 흔들었다. 전깃불도 희미하던 시절이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여행이었다. 

 

그 무렵 읽었던 책 속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골드문트라는 사내가 있었다.

 

 지금은 줄거리도 가물가물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이름만은 남아 있다.

 

 

어쩌면 사람은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이불 속, 손끝은 얼어 있었고, 창문 밖에는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고, 골드문트는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것만 남았다.

그 시절 내 친구는 많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도 멀리 살았고 겨울에는 만나기 어려웠다. 대신 바람이 있었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날마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 어떤 날은 휘파람 같았고, 어떤 날은 누군가 우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그때는 새 이름을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고, 도감도 없었다.

 

노랗게 생긴 새가 날아오면 그냥 노란 새였고, 까맣게 생긴 새는 까만 새였다.

그런데도 그 새들은 하나하나 다 달라 보였다.

 

 

특히 소쩍새는 더욱 그랬다.

밤이 깊어질 무렵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울음.

소쩍, 소쩍.

산 너머에서 들리는지, 집 뒤 밤나무에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

어린 나는 늘 궁금했다.

"왜 한 마리뿐일까?"

짝은 없는 걸까. 새끼는 낳지 않는 걸까. 낮에는 어디 숨어 있는 걸까.

지금 생각하면

 

 

 어딘가에 짝도 있었을 것이고 새끼도 키웠을 것이다. 다만 어린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이 많다.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

어린 시절은 원래 그런 나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그 무지가 오히려 세상을 신비롭게 만들었다.

 

 

산은 거대한 비밀이었고, 새 한 마리는 수수께끼였으며, 눈 내리는 밤은 끝없는 상상의 나라였다.

만약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나는 책만 읽지 않을 것이다.

눈밭에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가 볼 것이다.

 

 

토끼가 어디로 갔는지, 고라니는 어느 골짜기에 사는지, 청설모는 무엇을 먹고 겨울을 나는지 살펴볼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걸어가 볼 것이다.

 

물론 끝내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찾지 못하는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젊을 때의 우리는 늘 무언가를 이루려 했다. 성공도 잡아야 했고, 돈도 벌어야 했고, 남보다 앞서가야 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돌아보니 가장 그리운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눈 내린 산길 하나.

바람 소리 하나.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린아이의 마음.

그것이 가장 그립다.

 

 

지금도 겨울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면 문득 그 산골 마을이 떠오른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소쩍새는 어디선가 울고 있으며, 이불 속의 어린 소년은 책장을 넘기고 있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 어느새 칠십을 넘겼지만, 그 소년은 아직 마음속에 살고 있다.

어쩌면 사람의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인지도 모른다.

눈 덮인 산길과 바람, 이름 모를 산새들, 그리고 외롭게 들리던 소쩍새 한 마리.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 오래된 겨울이 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