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직도 아름다운 까닭은
누군가의 손에 들린 큰 권력 때문도 아니고
산처럼 쌓인 재물 때문도 아니다.
아무 조건 없이 자식을 품는 어머니의 품,
늙은 남편의 구부정한 등을 말없이 쓸어주는 아내의 손,
멀어진 줄 알았던 친구가 안부 한마디 건네는 정.
그런 아가페의 사랑이
세상이라는 거친 들판에 피어 있는
들국화 한 송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동화 속 왕자와 공주 같은 자식을 낳고
행복이라는 성에 들어가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은 성이 아니라 길이었다.
걱정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내밀고,
산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욕심을 이루어도 근심이요,
욕심을 내려놓아도 근심이니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장부다.
젊어서는 세상이 내 것인 줄 알았고,
중년에는 가족이 내 어깨에 올라타 있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야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몇 남지 않은 친구.
평생 잔소리하며 곁을 지킨 아내.
잘났든 못났든
내 피를 나눈 자식들.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형제들의 얼굴.
보물은 멀리 있지 않았다.
평생 찾아 헤매던 행복은
늘 내 곁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먼 산만 바라보며 걸어왔던 것이다.
김삿갓이 오늘 세상을 본다면
아마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무얼 그리 움켜쥐려 애쓰느냐.
달빛 좋은 밤이면 한 잔 마시고,
친구 있으면 벗 삼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으냐."
세월은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고
남은 해는 길지 않다.
그러나 석양은 아침보다 짧아도
더 붉고 아름답다.
오늘따라
김치찌개 보글보글 끓는 냄새가 그립고,
투박한 양은그릇에 담긴
동동주 한 사발이 생각난다.
그 한 잔에 지나온 세월을 띄우고,
그 한 잔에 먼저 떠난 사람들을 띄우고,
그 한 잔에 아직 남아 있는 인연들을 띄우며
나는 조용히 웃는다.
한번 왔다가는 인생,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사랑한 사람이
결국 가장 부자로 떠나는 것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