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도, 사랑했던 사람도 때가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잊고 산다. 배고팠던 날도 잊고, 울었던 날도 잊고, 원망했던 사람도 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혜를 입었던 사람의 얼굴은 늙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마치 오래된 우물 바닥에 가라앉은 달빛처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삶은 지금 생각해도 한 편의 전쟁과 같았다.
아버지는 달구지에 나뭇짐을 싣고 이십키로가 넘는 길을
소달구지를 끌고
오셨다.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가져온 나무는 가족의 밥이 되었고, 겨울을 견디는 불씨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소년은 일주일 먹을 쌀을 등에 지고 김치통을 손에 들고 먼 길을 걸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삶이었다.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미래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배고픔과 외로움 속에서 하는 공부는 아름다운 낭만이 아니다.
졸음을 참아야 했고, 허기를 견뎌야 했고, 내일을 걱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이었다.
인간은 꿈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절망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꿈보다 더 큰 힘이 된다.
어린 시절의 당신은 어쩌면 공부를 사랑했다기보다 희망을 사랑했던 것이다.
반찬은 늘 신김치였다.
그 흔한 달걀 하나 마음껏 먹기 어려웠던 시절, 밥상 위에는 언제나 시큼한 김치가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의 기억이 맛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을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함경도에서 내려왔던 주인집 할머니.
그분이 주셨던 김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음식도 아니었고 가장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굶주린 학생에게 건네진 김치 한 조각에는 음식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관심이었다.
연민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랑만으로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빵과 사랑이 함께 있을 때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 할머니는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소년의 인생을 떠받쳐 주었다. 김치를 준 것은 작은 일이었을지 몰라도 그 김치를 받는 소년에게는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세월은 참 빠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소년은 노인이 되어 있고, 그 할머니는 아득한 기억 속 사람으로 남아 있다
.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고,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후회를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회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 마음도 없었다면 후회도 없다. 미안함도 없고 그리움도 없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분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고마워했다는 뜻이다.
인생은 이상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고도 헤어진 뒤에야 소중함을 깨닫고, 은혜를 입은 사람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감사함의 크기를 알게 된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달린다.
먹고살기 바쁘고 가족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뒤를 돌아본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혼자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을.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음을.
어머니의 밥 한 그릇.
아버지의 땀방울.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친구의 우정.
그리고 이름조차 잊힌 어떤 할머니의 김치 한 접시.
그것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관계의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는 혼자 태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많은 인연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내 삶에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빚진 삶이다.
돈을 빚졌다는 뜻이 아니다.
은혜를 빚졌다는 뜻이다.
그 빚은 갚을 수 없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를 다 갚을 수 없듯이, 오래전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받은 정을 다 갚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받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하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 당신이 받았던 김치 한 조각의 따뜻함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
그것이 은혜를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고마운 사람도 때가 있고 사랑했던 사람도 때가 있다.
만나야 할 때 만나지 못하면 평생 그리움이 된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가 된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당신이 지금도 그 할머니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이미 하늘 어디에선가 전해졌을 것이다.
인간은 죽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시며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때 그 학생은 잘 살고 있을까?"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 노인이 되어 그분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마음이야말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일 것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감사의 기억만은 끝내 가져가지 못한다.
그래서 노년은 늙음의 시간이 아니라,
고마웠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기억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