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SUKHAMANANTAMA`NANDAM
지복은 무한한 기쁨이다.
sukham = 기쁨
anantam = 끝없는
anandam = 지복
인간은 무한한 즐거움을 갈망하나 외부 세상에서 오는 즐거움은 제한되어 있다. 첫째, 쾌락의 원천인 물질세계는 유한하므로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둘째, 한 대상물의 진동이 삼스카라를 만족시키면 그 대상에게서 즐거움을 취한다. 그러나 그 삼스카라가 끝나면 또 다른 삼스카라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대상을 쫓아다닌다. 그러므로 외부 대상이나 환경으로부터 얻은 즐거움은 일단 그 삼스카라가 태워지면 끝나버린다. 셋째, 외부 대상을 즐기는 기능장치인 감각기관이 제한적이다. 감각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세포가 연소하려면 일정한 전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경계치”로 돌아와야만 한다. 감각에 똑같은 자극이 되풀이되려면, 신경은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연소해야 한다. 그리고 신경은 연소할 때마다 경계치가 점점 더 높아진다. 그러면 연소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외부 대상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경계치가 너무 높아지게 되고 신경은 더 이상 연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아무 느낌도 없게 된다. 그래서 계속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자극을 구하게 된다. 즉 새롭고,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늦거나 빠르거나간에 이 세상은 결코 무한한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까마귀가 빵 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물고 멀리 날아갔다. 빵에 굶주린 한 무리의 까마귀들도 그것을 쫓기 시작했다. 그 까마귀는 지쳐서 죽을 만큼 빨리 날다가 빵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 위에 앉아서 완전한 휴식과 고요함을 맛보았다. 세상 것들은 부서지기 쉽다. 부서지기 쉬운 것들에 대한 욕망을 포기할 때만이 평화를 얻을 것이다.
무한한 원천만이 무한한 행복을 줄 수가 있다. 무한한 행복, 아난담, 지복은 5원소와 제한된 마음을 초월해 있다. 아난담을 경험하는 과정은 쾌락을 경험하는 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함은 자신의 삼스카라와 잘 맞는 진동을 즐긴다. 즉 외부세상으로부터 온, 치타에 반영된 진동을 즐긴다. 그러나 아난담에서는 지복의 원천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아트만이다. 순수의식의 원천에서 온 영적 파동은 마음을 충만하게 하고 마하트를 통해 아함으로 흘러 지복이 경험된다. 아트만이 무한하므로 아난담의 파동도 무한하다. 마음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이 지복의 경험으로 충만할 것이다. 지복은 삼스카라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즐기는 자인 아함은 이런 상태에서 삼스카라를 초월하게 된다. 마음이 대우주적 마하트,Cosmic Mahat나 아트만,Atman에 용해되느니만큼 지복의 느낌은 사마디가 된다.
비관론-낙관론-아난다 마르가
인도 철학은 전통적으로 염세적이다. 인도 철학은 종종 인간 생활의 주요한 특징을 고통과 아픔인 두캄,duhkham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쁨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왜냐면 기쁨을 느끼는 동안에도 계속 잃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성 바쉬타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모든 불꽃이 재로 되듯이 행복하려는 갈망은 고통과 번뇌로 끝난다. 존재는 어차피 비존재가 되고 아름다움은 추함이 되고 즐거움은 고통이 된다. 내가 의지할 데는 어디인가? 모든 성공은 참담하고 행복은 고통을 수반하고 생명은 죽음일 뿐이다. 우리의 망상은 얼마나 깊은가? 현명한 자들은 이 세상이 고통과 번뇌가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이런 접근은 영성만이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묵티와 모크샤만이 모든 고통을 끝장내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이나교나 불교뿐 아니라 정통적인 인도 철학의 6개 학파들은 모두 이 견해를 채택해왔다. 부처는 병든 사람, 늙은 사람, 죽은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고통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온다는 것을 알고서 쾌락의 생활을 떠났다. 4가지의 진리 중의 첫째가 ‘인생은 고통이다’이다. 그리고 부처의 길은 고통을 끝내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우리에게 세상을 거부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번영하지 못하고 비참한 세상에 무관심하게 되어 인도의 사회 환경이 나빠졌다. 지금은 기술 발전의 시대, 이제 인도인은 이런 비관론이 물질 번영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끼고, 광적으로 물질주의로 돌아서고 있다.
아난다 마가의 철학에서는 둔캄의 개념이나 비관론이 없다. 삶의 임무는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즐거움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난다 마르가 철학은 인생의 최고 목적이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서양 철학의 쾌락주의와 가깝지만, 사실은 쾌락주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쾌락주의자들은 즐거움의 성취가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난다 마르가에 따르면, 즐거움은 단지 인생에 필요한 환경일 뿐이고 영원한 지복이 생의 목표라고 한다.
인생의 어두운 면인 고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인간성의 발전을 후퇴시킬 것이고 낙관론이 인간성의 발달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