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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 사랑방

예술과 영성

작성자샨티|작성시간21.09.22|조회수54 목록 댓글 0

서울 오면 이른 아침 종종 보문사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가곤 한다.

집에 바로 그 옆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새벽, 탑돌이 겸 그곳에 갔다.

무심히 돌다가 탑을 보니까 탑 가장 아랫부분에 새겨진 부조가 눈에 들어왔다.

무기 같기도 하고 악기 같기도 한 것을 매고 연주 비슷한 것을 하는 사람의 그림이 삥 둘러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윗단에는 바로 여러 자세로 명상하는 부처님이 있고 그 윗단부터는 아무런 부조도 새겨있지 않았다.

나는 문득 괴로움과 즐거움을 연주하는 부조들이 예술가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구나 브라마는 진(참됨), 선(사랑), 미(조화)로 드러난다.

물론 이들을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브라마의 일부인 개체는

진리가 갖는 특성 중의 어떤 요소가 더 도드라질 수가 있다.

예술가란 아름다움이라는 정서적 측면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끝없이 추구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버트란드 럿셀이 그랬다.

비교적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과학자들이고

가장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라고

 

확실하게 분리가 되어있는 물질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단순하고 명확한 데다

삶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창조계라는 물질세상에서는 존중을 받고 물질 세상이 주는 풍요의 혜택을 누리기가 쉽다.

지금도 이과나 공대를 전공한 사람들은 문과나 예술전공자에 비해서 환영을 받는다.

예로부터 예술가들은 특출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물질적인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인간존재는 누구나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몸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가난한 사람은 의식주라는 기초적인 생활을 유지하는데 몰두해 있고

물질이 넉넉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탐욕을 쫓아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러면 마음을 다루는 문화, 예술은 어떠한가?

가장 저급한 단계로 아직 물질적 탐욕을 놓지 못하면서

정신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초적이고 대중적인 연예인쯤?

 

그러나 보다 마음이 정묘해진 예술가 중에는

우리의 무의식 층의 창조와 직관의 층이 열리기도 한다.

그들은 매우 정묘해서 보통 사람들이 접하지 못하는 신묘한 창조의 층에서 끌어낸 이미지들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허나 때로는 언뜻 드러난 보다 정묘한 창조의 층과 조야한 일상의식, 잠재의식 사이의 틈에서

때로 분열된다.

잠재의식이라는 어두운 구름이 정화되지 않은 채 창조와 직관의 층이 열리므로

수행의 정화 없이 그 층이 드러나게 되면

때로 정신 분열에 치닫기도 한다.

그래서 슈만, 고호, 니체 등 많은 예술가가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예술을 통해 인간들의 심미적인 정묘한 층을 접촉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바바는 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물질적인 조야한 힘으로 끌고 가는 아비드야 마야와

정신적인 정묘한 힘으로 끌고 가는 비디야 마야이다.

조야하거나 정묘하거나 하는 마음 자체를 넘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이다.

 

심미적이고 정묘한 힘에 쉽게 접촉하는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어렵지 않게 영성의 빛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빛은 조금도 어둠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둠을 정화하며 통과해가는 외부적, 내부적 마찰과 갈등의 고통을 겪어내야만 한다.

한편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결코 만나지 못하는 환희의 순간을 맛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통상 ‘마음 공부“니 명상수행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나 철학자들인 것은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정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바는 예술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아난다 마르가라는 조직체 내에서 ”르네쌍스 유니버셜“이라는 분과를 따로 두어 문화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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