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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 사랑방

딸의 공연을 보고

작성자샨티|작성시간21.12.06|조회수55 목록 댓글 0

딸아

네 공연으로 엄마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네 덕분에 어제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체코의 음악가들을 만났다.

늘 너를 통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것은 엄마에게 엄청난 행운이자 과분한 복이다.

 

내게는 이렇게 기쁨이다마는

너는 이런 말을 했지?

공연 한 번 할 때면 몸과 마음, 영혼이 몽땅 다 털려 버린다고,

그런데 남는 것은 실수뿐이라고

대중이 좋아하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클래식 연주회

설혹 들으러 오더라도 그들은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끝나버리는 일이라고

그렇다. 다른 미술이나 문학작품은 책으로나 그림으로나마 남아있지만

공연 예술은 피나게 연습, 또 연습하지만 공연이 끝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일이다

엄마의 기쁨이 너에게는 혹독한 수행이었구나

 

어쩌면 공연은 우리네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엄마도 학창시절에 아주 잠깐 연극반을 따라다녀 본 경험이 있다.

연극계에서 꽤 유명했던 한 교수 덕분에 상당한 대작을 후면에서 참여해보았다.

그때 무척이나 고생해가며 올렸던 무대가 마지막 막을 내릴 때 너무나 허망해서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이 서로 붙잡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고생 안 해야지 하다가 그 허망함 때문에 다시 연극을 올리곤 했다.

어쩌면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자꾸 윤회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지 모른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해본다.

 

“왜 이 세상이 창조되었을까?” 하는 물음에

아난다 수트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에서 스스로 자신을 경험해보고 싶어서라고

무언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상, 즉 주체와 경험할 대상이 필요하다.

형상은 또 반드시 다른 것과 분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스스로인 자신이 온갖 딱딱한 물질이라는 형상이 되어 숨어 있게 된다.

형상은 형상을 일으킨 주체자 자신은 알 길이 없고

가짜 형상으로 되어 있는 몸과 마음을 자신이라고 동일시하여, 행위하는 나(에고)라는 가짜 주체성으로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에고는 행위의 결과로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고통과 쾌락의 열매를 맛보며 괴로워하고 자신과 타인을 판단한다.

사실 정신적인 주체자인 에고는 고체화된 물질에 비해

상당히 진화한 역할(호모 사피엔스)을 하는 것이다.

 

다만 경험하는 에고의 문제는 자신을 주체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 경험을 간직해두는 것이다. 아니 경험을 간직하는 것까지는 좋다. 경험을 이용하여 물질을 사용하고 미래를 대처해나가기 때문이다. 다만 경험으로 일어나는 애착과 두려움이 문제이다.

좋아하는 것에 애착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욕망의 에너지가 고통의 주범이다.

 

바바는 이 세상을 신 스스로의 놀이, 즉 Devine Play라 하였다.

모든 대상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것이 있어야한다.(이원성)

어둠은 반드시 밝음과 있고

위는 아래가 있어야 존재하고

태어남(창조)은 죽음(파괴)이 있어야하고

남성은 여성이 있어야 한다.

먹으면 싸야 하고 옮음은 그름이 있어야 한다.

오직 절대 알지 못하는 스스로 있는 자, 신이라 하는 본성(I am who I am)은 어떤 것에도 의지해 있지 않다.(일원성)

개체심(unit mind)과 신이자 본성의 관계를 바바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개체심은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이고

무대 위의 빛의 조명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나 연극이 공연될 수 있는 빛을 비추는 것이고 연극 밖에서의 자신은 본래의 자신이라고

 

딸아

공연은 가장 진화된 최고의 수행인듯하다.

소리라는 가장 정묘하고 가벼운 매개체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부가 아닐까?

바로 얼마 전 죽은, 자존심 강한 멋쟁이, 삶의 연극쟁이였던 연수의 죽음이 그렇듯

소리처럼, 바람처럼 우리 인생은 지나가 버린다.

엄마도 이 무대 공연의 막바지

지나보니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픔이나 엄마 식으로 삶이라는 악보를 대강대강 연주했을 뿐이구나

너는 성실하게 열심히 공연했으니 빠르게 다음 단계의 역할로 옮겨갈 듯

다만 어쨌거나 스스로 본성이 자신을 경험해보기 위해서

우주라는 엄청나게 큰 수레(차크라)를 돌리면서 돌고 있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너희도 하나가 되라.”고 하지 않았느냐?

절대 알 수 없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 모름에 편안하게 안주하면서

모든 공연은 실패거나 성공이거나 바로 그분 자신의 악보에 의한, 그분 자신의 표현임을 망각하지 말자.

그러므로 공연에 실패란 없다

모든 공연에서 배워갈 뿐이고 본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되는 깨어남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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