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스까라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삼스까라(업장)과 윤회사상이다.
나도 아난다 수트람을 통해 근본적 이해를 하지 않았으면
여전히 업과 윤회라는 인과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불교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 사람은 집단 무의식적으로 그런 막연한, 어쩌면 벌 받는 것 같은 관념에서 놓여나기 힘들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보다는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했던 아버지마저 종종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은 그 자식이라도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 예전에는 다시 태어나서 벌 받았으나 지금은 빨라져서 바로 자식 대에 받는다.”
통상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나쁜 짓하면 벌 받게 되기 때문에 내게도 업보의 개념은 깊이 뿌리박혀있었다.
나는 어릴 때 간혹 부모님께 벌을 받지l 않으려고 거짓말하고, 성장해서도 마음 약해 진실을 말하지 못했던 일이 종종 있던 터라 업보니 인과니 하는 관념은 찜찜하게 남아있었다.
더군다나 기독교인이었던 내게 지옥의 개념은 익숙하고 바바도 삼스까라는 절대로 탕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개념은 늘 불편한 채로 있었다.
그렇지만 바바의 전체적 조망인 수트람을 통해 이제는 그런 관념에 보다 합리적 생각을 지닐 수가 있었다.
그런 개념은 일종의 진화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완전한 물질성에서 단일한 생명체가 발현하고 동식물의 단계에서 본능(식욕, 성욕, 수면욕, 생존의 두려움), 그리고 인간의 단계에서 본능과 더불어 ‘행동하는 나’라는 주체성(에고)이 나타나고 그 주체성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노력을 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 단계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가 발생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행위하고 있다.’는 주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를 짊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동물적 본능(자연적 다르마,nature)에서 원래 자기 자신인 무한의식(본래의 다르마,Nature)으로 돌아가는 진화를 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애초 AM기본철학을 번역하면서 왜 다르마,법을 영어로 Nature라 하는지 의아했다. 통상 nature라는 언어는 본능, 자연을 뜻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물질적 구조체인 창조계에서 자연의 삼라만상으로 나누어져 개체 구조를 유지하고자 싸우고 분투하는 것도(상짜라) nature이고 본래의 자기 자신인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도 본성인 (쁘라띠 상짜라) nature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진화라는 것도 상대적 세상의 개념일 뿐
분리된 물질성의 모습을 갖는 것(잠든 의식)도 본성(다르마)이고 한 생명이자 사랑이라는 빛(깨어 있는 의식)도 동일한 의식,conciousness의 표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부처이다.
물질성에 잠들어 있는 부처,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빠져 있는 꿈꾸는 부처
양심,conciouness으로 행위하는 깨어있는 부처도
모두 동일한 의식, 부처이다.
인간이 윤회하며 인과를 짊어지는 것은 잠들어 있고 꿈꾸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일 따름이다.
예수님이 “늘 깨어 있으라”라고 하는 것이나
불교에서 자신의 행동을 “위빠사나, 바라보라”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바바는 모든 행위를 할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브라마가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언제나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이야기”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있지만
그래도 간혹 거울을 보며 중얼거린다.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것이 무엇이지?
울었다 웃었다 변덕스러운 이 마음은 무엇이지?”
어쩔 때는 ‘나라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눈물이 난다.
또 그러면서도 너무 친숙하다.
이런 말을 국문학하는 친구에게 했더니 놀린다.
“야! 네가 시인 이 상이냐? 그의 시 ‘거울을 보며’에 그런 말 나오잖아!”
그래에?
우리는 사실 깊은 내면에서 내가 있기도 하고(진짜 나) 내가 없기도 하는(가짜 나) 이 이상한 괴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